소설리스트

훔치는 연기자-30화 (30/250)

< 11장 - 미남 남태형 (2) >

“프로액터스 대표의 독단이다, 그 말이군요.”

흥미롭다는 표정으로 곱씹어 말하는 이찬에게, 이군영은 헤죽헤죽 웃어 보였다.

“아이고, 독단이란 말도 아는 거니? 정말 똑똑하구나. 그래, 독단이라고 말하면 맞겠지. 이번 영화 최대투자자다. 자기가 원하는 배우들을 꽂는 데에는 파워가 넘치고도 남지.”

고개를 끄덕인 뒤, 소년은 조용히 한숨을 내쉬었다.

그런 상황이었다고 하면 이찬이 <미스 스캔들> 주연에 캐스팅된 건 정말 요행수였을 것이다. 들리는 바에 따르면 프로액터스 대표와 이군영 사이는 썩 좋지 않은 모양이니까.

그나마 불구대천의 원수처럼 군다는 금양기획 조금양 대표가 아니라서 다행이었다. 그쪽이 투자하는 영화였다면, 아예 오디션조차 보지 못했을지도 모를 일이었다.

“아무튼 그런 건데, 그래도, 남······ 누구였지?”

“남태형 선배님이요.”

“그래, 남태형이. 걔는 좀 의외이긴 했어. 단역 말고는 필모도 없는 녀석을, 그래도 주조연이라고 할 만한 배역에 대뜸 집어넣다니 말이야. 그랬는데 얼굴을 보니 딱 알겠더구나. 뭐 그렇게 잘생긴 녀석이 있을까 싶어서. 분위기만 놓고 보면 아주 강정후 뺨을 칠 것 같더라. 그렇지 않니? 아, 네게는 좀 이상하게 들릴 수도 있겠구나. 아직 어리니까 말이야. 이 외모지상주의라는 게 요즘 세상에서는 어쩔 수가 없단 말이지. 막말로 영화 트레일러에 그 남태형이 얼굴이 5초만 나온다고 생각해보렴. 그러면 소자본 영화의 흥행을 책임지는 여성 관객들의 입소문이 얼마나 뜨겁겠냐는 말이야.”

논리적으로는 이해할 수 있는 이야기였다. 그렇기에 소년은 재차 고개를 끄덕였다.

다만 그가 외모지상주의를 감정적으로 받아들이지 못하는 것은, 그저 어리기 때문만은 아니었다.

이찬에게 있어서 인간의 얼굴이란 정보의 바다였다. 무수한 신경과 미세한 근육이 뒤엉켜 있는 그곳을 이찬은 미추(美醜)의 관점에서 바라본 적이 없었다.

그런 그에게 ‘잘생겼다’라는 말은 마치 ‘모던하다’나 ‘트렌디하다’ 같은 표현처럼 모호하게 들렸다.

‘조혁수 아저씨나 강정후 아저씨야 워낙 떠받들어지는 사람들이니 그러려니 했는데, 남태형 아저씨처럼 무명인 사람들은 잘 분간이 안 된단 말이야. 이목구비가 뚜렷하고 피부가 새하얗다는 건 알겠지만, 사실 조혁수 아저씨처럼 확 느껴지게 생긴 인상은 아니니까. 시대의 변화라는 걸까?’

‘마초’라는 말로 대변되는 강인한 인상의 배우들만이 명성을 떨치던 20세기에 남태형 같은 배우는 주목받지 못했다. 그러나 갓 21세기에 접어든 지금, 영화계는 유약해 보이는 ‘미소년’들에게도 큰 관심을 기울이고 있다.

변화의 원인은 여러 가지가 있을 것이다. 그러나 대표적인 한 가지는 아이돌 문화의 대두라고 말할 수 있었다.

남성다움을 베이스로 하면서도 미형의 소년들을 전면에 내세워 인기를 끈 H.O.T나 젝스키스 등의 성공이, 대중으로 하여금 남성성이란 가치를 재평가하게 만든 것이다.

결과적으로 이전까지 단역만 맡다가 일약 주조연을 맡게 된 남태형은 시대의 수혜자라고 할 수 있었다.

그리고 그쪽 성향의 니즈가 늘어날수록 과거의 미남 배우들은 점차 자리를 잃을 터였다.

‘조혁수 아저씨야 양쪽의 매력을 겸비했다고 할 수 있으니, 크게 손해를 입진 않을 거야. <가을하늘>의 성공을 염려할 필요는 없어. 하지만 그렇게 생각하면 강정후 아저씨는 정말 대단한 사람이란 말이지. 남들 다 카리스마 표정을 연습할 때 그 가느다란 얼굴로 대인기를 누렸다는 거니까.’

하이틴스타라는 캐릭터성 덕분에 좀 더 수월하긴 했겠지만, 연기력이 뒷받침되지 않았다면 불가능했을 일이었다. 과연 조혁수를 방송가 섭외 2순위로 밀려나게 만든 천재다웠다.

선배 배우들의 평가를 피상적인 수준에서 그친 뒤, 이찬은 이군영에게 통보했다.

“저 내일 그 형 데리고 갈 거예요.”

“응? 그 형? 남태형이? 데리고 간다니, 어디에?”

“촬영장이요. 한동안 작품활동 안 했다고 하니까, 감 좀 잡으라는 의미로 <가을하늘> 촬영 구경시켜주려고요.”

“어······ 그거······ 감독님한테는 말씀을 드렸어?”

“제 말이라면 팥으로 메주를 쑤라고 해도 들어주실 분인데요. 괜한 소리 마시고, 그냥 알고만 계시라고요.”

“어, 어. 그래. 뭐 네가 그러고 싶다면야.”

윤대흥의 죽음 이후로 이군영의 태도는 확실히 누그러들어 있었다. 아주 버르장머리 없는 소리인데도, 나무라는 한마디 없이 헤죽거리며 웃기만 한다.

테스트 삼아 뻐겨봤던 이찬은 그 반응에 만족했다.

‘죄책감이 제법 잘 자리를 잡았네. 한동안은 거치적거리는 일이 없겠어. 하지만 그게 다는 아니고 기대감까지 어우러져 있는데······ 아마 내가 편안하고 자유롭게 하고 싶은 걸 다 해야 최상의 연기력을 발휘할 거라고 생각하는 모양이지? 그게 이 아저씨가 강정후를 케어했던 방법인 걸까.’

정창영 실장의 수다로 종종 입수한 정보들을 생각해보면, 대부분의 경우에 결코 너그럽지 않은 대표였다. 다만 강정후라는 희대의 천재에게만은 늘 방임주의를 표방했던 모양.

‘내겐 고마운 일이지. 까다롭게 굴면서 이 레슨 들어라 저 인터뷰 해라 간섭했다면 작품에 집중하기 힘들었을 테니까. 이 아저씨의 목에 목줄을 거는 건, 드라마와 영화의 촬영을 모두 끝내고 난 뒤에 해야 해. 우선은 작품이야.’

그렇게 생각하며 대표실을 나선 이찬은, 곁을 따르는 정창영의 표정이 묘하다는 것을 금세 알 수 있었다.

“실장님. 의외라고 생각하시는 거예요?”

“어, 어? 의외라고?”

“예. 하실 말씀이 있으면 담아두지 말고 하세요.”

“아이고······ 이 애늙은이 같으니. 그래, 의외라고 생각했다. 우리 대표님이 저렇게 부드러운 사람이 아닌데, 너한테는 아주 친자식 보듯이 대하시니까 말이야.”

“앞으로도 그러실 거예요. 일일이 쫄고 그러지 마세요.”

“하하하. 이 자식, 내가 언제 쫄았다고 그러는 거야?”

잔뜩 겁먹고 어떻게 중재해야 하나 고민하고 있었던 게 사실이지만, 억지로 호탕한 목소리를 내보는 정창영이었다.

“어험. 그나저나 남태형이 걔한테는 왜 관심이 생긴 거야? 수진이한테 들으니까 실물이 사진보다도 더 잘생겼다고 하던데, 그래서 형동생 하면서 지내고 싶어진 거니?”

“실장님. 그런 거 할 생각 없어요.”

“그런 거?”

“형동생이요. 나한테 형은 한 명뿐이에요.”

걸음까지 멈추고 말하는 소년을 보며, 정창영의 심장은 졸아들었다. 이군영의 분노를 예상했을 때보다 더.

“어, 어. 그래. 미안하다. 내가 말도 안 되는 소리를 했어.”

“······이해해주셔서 고마워요.”

다행히도, 이찬은 순순히 사과를 받았다. 서른줄 실장의 얼굴에 진심이 가득함을 알아본 까닭이었다.

“그 아저씨는, 중요한 배역이에요. 분량은 적지만 그게 다 임팩트 가득한 씬들이란 말이죠. 제대로 연기하지 못한다면 심유리 캐릭터가 죽고, 그러면 내 캐릭터까지 죽어요. 이 영화에서 가장 연기력이 출중해야 하는 배역이란 말이에요.”

“음······ 무슨 말인지는 알 것 같구나.”

“그래서 데려가려는 거예요. 각성 좀 하시라고.”

그건 마치, 잘생긴 모델들을 데려다 연기를 가르치자고 말하던 이군영의 태도와 닮아 있었다. 그리고 그 목소리는, 한심한 후배를 직접 가르치겠다 나서는 노배우의 것이었다.

정창영은 혼란스러운 심정으로 어색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

[후후후. 그러시면, 5분 뒤에 현관 앞으로 나오세요.]

“아, 예, 예. 감사합니다.”

염수진이란 이름의 로드매니저로부터 걸려온 전화를 끊고, 남태형은 침을 꿀꺽 삼켰다.

이제 5분 뒤면 이찬의 차에 오른다. 그리고 그 소년과 함께 KBC2의 총력 드라마인 <가을하늘> 촬영장으로 갈 터.

꿈만 같은 상황에 도무지 마음이 진정되지 않았다.

‘잘했어, 잘했어 태형아. 이번에 아주 확실하게 인상을 심어주는 거야. 이 끈은 절대로 놓쳐서는 안 되는 동아줄이야.’

남태형에게 있어서 이찬이란 스타였다.

대중에겐 아직 얼굴조차 채 알려지지 않은, 대학로 출신의 필모 없는 소년. 그렇지만 관계자들에게 있어서 그 소년의 이름은 이미 핫이슈와도 같았다. 이찬이 스스로 느끼고 있는 것보다도 훨씬 더 그 이름이 널리 퍼져 있었다.

시작은 이군영이었다. 제2의 강정후라는 캐치프레이즈를 입에 달고 다니면서 관계자들을 만날 때마다 떠벌린 그 마당발로 인해, 이찬은 시대를 대표할 아역의 이미지를 갖게 됐다.

그 인식의 확산에 불을 붙인 건 심성윤. <가을하늘>의 PD이자 술 좋아하기로 유명한 그 유망 감독이, 주변에서 필모가 없는 아역에 대해 걱정하는 말을 할 때마다 외치고 다녔던 것이다.

이찬이야말로 21세기 최고의 아역이 될 거라고. <가을하늘>이 방영되는 그 즉시 스타로서 이름을 떨칠 거라고.

입소문이 중요한 영화계에 그런 물밑의 이야기들은 천리마보다 빠르게 전파되었다. 자연히 이찬의 연기를 본 적 없는 이들조차 새로운 소년 스타의 탄생을 떠들었다.

사실은 그쪽이야말로 이찬이 <미스 스캔들>에 주연으로 캐스팅된 주된 이유였다. 신수영의 적극적인 추천은 그저 부수적인 포인트에 불과했다.

그리고 일전의 첫 미팅에서 남태형 등의 배우들이 소년에게 감히 접근하지 못했던 것 역시, 바로 그런 까닭이었다.

강정후의 뒤를 이을 초대형 신인. 부족한 거라곤 오직 나이 하나뿐인 희대의 천재. 그런 이미지 탓에, 무명의 배우들로서는 감히 먼저 말을 붙이는 것조차 어려웠다.

충무로의 실력파 배우들을 총망라했다 할 수 있는 기획사 프로액터스의 남태형 역시 그러했다. 자신이 얼굴 외에는 뭐 하나 괜찮은 게 없는 가짜 연기자임을 알고 있었기에.

‘그런데 그 아이가 먼저 내게 다가와서 같이 촬영장 구경하자고 말을 붙여주다니. 정말 행운이야. 결코 놓쳐선 안 돼.’

그런 생각에 깊이 빠져 있었던 탓일 것이다. 남태형은 문앞에 도달한 나라엔터의 차량이 크랙션을 연신 울린 뒤에야 허겁지겁 문을 열고 뛰쳐나갈 수 있었다.

“헉, 죄, 죄송합니다. 제가 잠깐 대본을 보느라······.”

“후후후. 괜찮아요, 어서 타세요. 이쪽, 조수석으로?”

“누나. 남 선배님은 제 옆에 타실 거예요.”

“앗. 그으래. 이쪽으로 타세요.”

무척이나 친절하게 구는 젊은 여자 매니저는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남태형은 열심히 소년 배우의 눈치를 살폈다.

“······왜 그렇게 보세요?”

“어? 어. 아냐. 아침부터 참 잘생겼구나 싶어서.”

“황당하네요. 전 그렇게 잘생긴 얼굴은 아닌데요.”

“아, 그게, 진심인데······. 내가 볼 땐 참 잘생겼단다.”

어깨를 한 차례 으쓱인 이찬은, 지그시 그의 얼굴을 바라봤다. 머릿속으로는 수많은 정보들을 조합하는 중이었다.

‘이미 결정되어 있는 얼굴형과 이목구비까지 따라할 수는 없겠지만······ 계속 보니 알겠어. 저런 비 맞은 강아지 같은 행동들이 여자들의 모성본능을 자극하는 포인트인 모양이야.’

인터넷상의 우스갯소리로 이런 말이 있다. 미남을 이루는 건 2할의 본판과 8할의 분위기라고.

아무리 잘생긴 사람이라도 표정을 되는 대로 짓고 함부로 얼굴을 쓰면 그리 멋져 보이지 않는다. 특히 여성들을 타겟으로 하는 아이돌의 경우에는, 사소한 디테일 하나하나에 무수한 섬세함이 요구되었다.

남태형은 바로 그 섬세함을 타고난 인물이었다.

‘연기 면에서는 배울 게 없겠지만, 저 타고난 우아함은 배워둬서 나쁠 게 없을 거야. 안지성도 교내의 아이돌 같은 배역이니 말이지. 이군영이 자기 입으로 강정후의 분위기와도 비견한 사람이니, 일단은 최대한 훔쳐두자.’

소년의 관찰력은 순식간에 남태형의 모든 행동양식을 분석했다. 비록 겉보기만이지만, 소년의 분위기가 일변했다.

물론 미남을 뒤에 태운 염수진이나 예정된 스타의 곁에 탄 남태형이나, 그 순간적인 변화를 눈치 채진 못했다.

*

“안녕하십니까! 배우 남태형이라고 합니다!”

최선을 다해서 내지른 인사. 그 목소리에 스탭들의 시선이 집중됐다.

보통의 경우라면 잠깐 머무르다가 떠나갔을 테지만, 한동안 작은 탄성들이 시선 위에 뒤엉켰다.

“와우······ 뭐 저런 미남이 다 있어?”

“배우라고 하는데 무슨 아이돌 같네요. 화장한 건가?”

“화장이 아닌 것 같은데? 햐, CG를 보는 것 같네. 왜 그거 있잖아? 사이버 가수. 그, 뭐였지?”

“아담이요? 아, 진짜 그 느낌 좀 있네요. 완전 꽃미남이야.”

꽃미남의 마음속에 행복이 살짝 차올랐다가, 금세 사라졌다.

‘지금까지도 어떤 촬영장에서든 첫인상은 늘 좋았지. 하지만 연기를 보여주고 나면 금세 다들 고개를 젓곤 했어. 여기서는 그저 견학일 뿐이니 그럴 일은 없겠지만······ 이런 호응에 들뜰 수는 없지. 난 정말 한심한 연기자니까.’

복잡한 표정으로 어색하게 웃는 남태형을 바라보다가, 심성윤과 조혁수가 서로 눈을 마주쳤다.

“거참······ 잘생긴 친구네.”

“예. 잘생겼네요. 초면이고요.”

“그러게. 찬아, 이 친구는 왜 데려온 거야?”

“저랑 같이 영화 출연하시게 됐거든요. 첫 미팅 때 친해져서 같이 견학 왔어요. 괜찮죠? 저도 어차피 출연진 아닌데.”

“그야, 방해만 안 하면 상관없지만······. 아, 혁수 너도 들었지? 찬이가 이번에 <미스 스캔들> 주연으로 캐스팅됐다고 한다. 그래서 B팀 촬영장 견학 오는 건 오늘까지야. 괜찮지?”

조혁수는 감정 없는 얼굴로 끄덕였다. 그렇지만 그 무뚝뚝한 얼굴에서 이찬은 많은 감정들을 느끼고 있었다.

‘결연한 의지, 그리고 뜻 모를 아련한 감정······. 저게 어떤 마음인지 궁금하긴 하지만, 우선은 이쪽부터 정리를 해야지.’

남태형을 돌아보는 까만 눈에, 진중한 의지가 섞였다.

< 11장 - 미남 남태형 (2) > 끝

ⓒ 비벗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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