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2장 - 감독 오덕환 (2) >
톱스타 심유리 역의 신수영이 도착했을 때엔, 이미 이찬과 남태형이 의상 체크까지 마치고 메이크업을 받던 중이었다.
그렇지만 실제로도 톱스타인 신수영이 그 상황에 곧바로 사과의 말을 꺼낸 건 조금 어색한 일이었다. 그 대상이 이찬이라는 점에서 특히.
“찬아, 미안해. 누나가 기다리게 했지? 빨리 마치려고 했는데 기자님이 좀 집요해야지. 그래서 나중에는 내가 소리까지 지르고 화를 냈단 말이야.”
“네, 선배님. 가서 의상 체크하세요.”
“얘는. 선배님은 무슨 선배님이야? 누나라고 하라니까?”
“선배님 정도로 연차 먼 분한테 누나라고 하면 욕먹어요.”
“에이, 내가 괜찮다고 한 거니까 괜찮다니까. 여기 다들 듣고 계시잖아? 언니, 괜찮지 않아요? 그렇죠 오빠?”
이찬이 볼 때, 한국예대 연극원 3학년으로 만났던 신수영과 영화판에서 만난 신수영 사이에는 큰 차이가 있었다.
그쪽에서야 수많은 학생 중 하나였지만 이 안에선 유일한 톱스타. 모든 스케줄이 그녀를 중심으로 돌아가고, 무수한 전속 스탭이 일거수일투족을 보조한다.
소년은 그 신수영에게 대놓고 부루퉁한 소리를 했다.
“선배님, 빨리 가서 의상이나 체크하시라고요. 나 촬영 빨리 끝내고 저녁에 공연 가야 된단 말이에요.”
“아이 참. 선배님이라고 부르면서 그렇게 투덜거리기야? 호칭이랑 말하는 내용이 너무 다르잖아.”
“알았어요 알았어. 누나, 가서 촬영 준비 좀 하세요. 됐죠?”
“후후. 아주 좋아. 누나 금방 갔다 올게? 감독님, 저 바로 의상 체크할게요! 언니, 저쪽 방이에요?”
그렇게 신수영이 폭풍처럼 메이크업실을 떠난 뒤, 남태형은 얼떨떨한 표정으로 이찬에게 귓속말을 건넸다.
“찬아, 너 그렇게 해도 괜찮은 거야? 아무리 친하다고 해도 신수영인데······ 혹시라도 미움 사면 어쩌려고 그래?”
“그럴 일 없어요. 저 누난 날 너무 좋아하니까.”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어? 아, 혹시! 너 사실은 신수영한테도 연기 가르쳐주고 그랬던 거야? 그래서 네 말에 감히 토를 달 수 없는 거라거나?”
“그럴 리 없잖아요? 저 누나는 아저씨하곤 달라요.”
“아, 그, 그렇지. 그렇겠지. 미안해, 찬아.”
사실을 말하자면 그 신수영에게도 몇 가지 연기지도를 해줄 수 있는 것이 이찬의 눈썰미였지만, 톱스타를 함부로 대할 수 있는 이유가 그것 때문은 아니었다.
단지 신수영이 이찬을 격렬히 좋아하는 까닭일 뿐.
신수영은 대단한 미남인 남태형보다도 이찬을 바라볼 때 더욱 큰 행복을 느꼈다. 표정을 읽는 소년은 그 사실을 분명히 알아볼 수 있었다.
오늘은 그녀가 선글라스를 끼고 오지 않았기에.
‘덕분에 막 대할 수 있어서 편하긴 한데······ 왜 좋아하는 건지 모르겠네. 희재 누나처럼 내 일거수일투족을 관찰하며 실력에 경외를 느껴서도 아니고, 진아 누나처럼 나를 이성으로 보는 것도 아닌데 말이야. 정말 알 수 없는 스타란 말이지.’
그렇지만 작중에서 남매를 연기해야 할 사람이다. 신수영이 큰 호감을 가졌다는 사실 자체는 만족스러운 일이었다.
그러지 않더라도 훌륭한 연기를 보여줄 배우이긴 하나, 진짜 감정까지 섞을 수 있다면 결과물이 더욱 좋을 테니.
그렇게 속으로 염두를 굴리며 잠시 기다리고 있자, 이내 메이크업이 마무리됐다. 소년은 남태형의 헤어스타일링이 끝나길 기다리지 않고 먼저 촬영장으로 나섰다.
세트를 살펴보던 오덕환 감독이 발소리에 힐끔 돌아봤다.
“어, 이찬 배우. 메이크업 잘됐네.”
“네, 감독님. 첫 촬영은 이 세트예요?”
“어. 여기서 찍고 반대편 넘어가서 찍고, 그 다음에 로케이션(야외 촬영) 나가야지.”
“네, 감독님. 그런데 저한테 뭐 하실 말씀 있으신가요?”
골치 썩지 않고 촬영에 집중하고자 대뜸 물어본 질문에, 오덕환이 잔뜩 당황한 표정을 지었다. 이찬은 속으로 웃으며 느긋하게 말을 이었다.
“아까부터 자꾸 저 쳐다보시는 것 같아서······. 그리고 남태형 선배님이 그러던데요? 갑자기 연기력이 는 걸, 감독님이 제 공로라 생각하시는 것 같다고요. 어제는 회사 대표님하고도 통화를 하셨다던데. 저랑 같이 견학을 했는지 캐물으셨다면서요? 정말 제가 남태형 선배님한테 연기지도를 했다고 생각하시는 거예요? 에이, 아니시죠?”
“오······ 그 친구가, 그렇게 눈치가 빠를 줄은.”
“감독님도 참. 이상한 상상력이 있으신가봐요. 전 그냥 선배님 자신감 좀 가지시라고 응원만 해드렸을 뿐인데.”
“아하······.”
“하긴, 직접 각본도 쓰시는 분이니까 상상력이 많이 필요하겠네요. 역시 멋있어요. 감독님, 촬영 잘 부탁드려요.”
그 말에 오덕환의 표정이 곧장 수긍하는 빛깔로 바뀌지는 않았다. 그렇지만 어느 정도 혼란에 빠진 건 분명해 보였다.
‘당연한 일이지. 깊은 의심을 품은 사람에겐 노골적인 변명으로만 들리겠지만, 어차피 이 아저씨의 호기심이 진지했을 리 없는걸. 열두 살 소년이 스물셋 선배를 가르쳤다니, 어떤 사람이 그런 걸 정말로 믿겠어? 이 정도만 얘기해도 알아서 착각을 수정하게 될 거야.’
소년은 그렇게 확신했다.
그러나 잠시 뒤에 눈을 크게 뜬 오덕환은, 수줍은 목소리로 그의 기대를 배반했다.
“아니야. 내가 볼 땐 네가 남태형을 가르친 게 맞아. 그리고 방금은 날 속이려고 미리 변명을 한 거야.”
“······네?”
“강정후 데리고 영화 찍은 적이 있는데······ 우연히 유태식 배우가 정후에게 표정연기를 배우는 모습을 발견했어. 그때 알았어. 세상에는 이해할 수 없는 천재도 있다는 걸.”
“아······ 그분이야, 소문이 자자하신 분이고요. 저는-”
“이찬, 너도 소문이 자자해. 심성윤이 동네방네 떠들고 다녀서 내 귀에까지 얘기가 들어왔어. 그리고 남태형은 분명히 초심자였어. 혼자서 노력해본들 절대로 나아질 수 없는 상태였다는 거야. 내가 이 판에서 구른 게 몇 년인데 그걸 모를까? 네가 한 게 맞아. 어떻게 한 거야? 왜 나한테 그 사실을 숨기려고 하는 거야?”
오히려 확신으로 바뀌어버린 의심. 미세표현을 통해서 그 완강함을 알아본 이찬은, 스스로를 나무랐다.
‘아, 제길. 너무 서둘렀어. 저 사람이 어떤 인물인지 더 자세히 알아본 다음에, 저쪽에서 먼저 질문을 하길 기다렸어야 했는데. 신수영 누나 말이 맞았어. 저 아저씨는 변태야. 나쁜 의미가 아니라, 괴상한 사람이라는 뜻에서.’
상식적인 사고방식을 가진 사람이라면 이렇듯 개방적으로 상황을 해석하지 못했을 것이다. 강정후의 비상식을 본 기억이 있다고 하더라도, 이찬과의 나이차를 먼저 생각했을 테니.
그렇지만 오덕환은 달랐다.
그는 보편적인 대화와 소통보다 자기 내면에 천착해 상상의 나래를 펴는 것을 즐기는 괴짜. 그렇기에 있을 수 없는 일을 확신하는 데에 주저함이 없었다.
그가 눈을 크게 뜨고 호들갑 떠는 모습을 보는 이찬의 미간에는 골이 파였다.
‘이렇게까지 확고한 마음으로 물어보는 것을 얼버무린다면, 이후 불편한 관계가 조성될지도 몰라. 이렇게 외골수 성향이 큰 사람은 그 불편함의 강도도 보통이 아닐 거야. 이대로는 안 되겠어.’
필요치 않으리라 여겼던 플랜B조차 고안해둔 게 생각 많은 소년의 장점이었다. 8할의 사실에 2할의 거짓을 섞는 방식으로 그가 재차 변명했다.
“죄송해요. 전 그냥, 다른 방법을 좀 제시해봤어요.”
“다른 방법? 어떤 방법인데?”
“제가 먼저 양지환 캐릭터를 분석해서 영상을 찍었어요. 그걸 반복해서 똑같이 따라하시게끔 했어요.”
“어? 야······ 신기한 얘기네. 감정이입을 못 하니까 아예 겉보기를 흉내 내게끔 만들었다? 흥미로워. 뭐가 흥미롭냐면, 너는 그러니까 양지환 역의 체화도 다 끝냈다는 말이구나. 자기 배역도 아닌데.”
보통의 배우들은 자신에게 맡겨진 배역에 몰입하는 일만으로도 힘겨워한다. 남의 배역까지 몸에 익히는 건 가장 노련한 베테랑들도 쉽사리 취할 수 없는 사치.
그런데 남태형이 선보인 양지환 연기는, 소년이 기존에 완성했던 심지호만큼이나 자연스러웠다. 한순간이었지만, 미남 남태형이 사라지고 스타를 흠모하는 조연출 양지환이 그 자리에 서 있었다.
‘그게 그렇게 멋대로 체화했다 빼냈다 할 수 있는 게 아닐 텐데. 무척이나 힘이 들었을 텐데. 고작 가망 없는 배우 한 명을 위해 그걸 감수했다는 거야. 왜지? 정말 궁금한데?’
다만, 이찬 입장에서는 대수로운 일이 아니었다. 마침 실제로 남몰래 이소연을 흠모하고 있는 <가을하늘> 조연출이 있기도 해서, 그 감정을 훔쳐 쉽사리 양지환을 이룰 수 있었다.
그렇기에 대답은 담담했다.
“그렇게 복잡한 배역은 아니니까요.”
“······흠. 그리고 그걸 남태형이 연습할 수 있게 영상을 찍어줬다는 거구나. 하지만 좀 이상한걸? 단지 잘 나온 연기를 반복해 본다고 해서, 그걸 똑같이 따라할 수가 있을까?”
“그야 보통 노력으로 될 일은 아니죠. 남태형 선배님은 정말 열심히 연습했을 거예요. 감독님 앞에서도 실수를 하지 않을 정도로 익숙해지기 위해서요.”
“오, 그렇구나. 그래서 죽어라 했다고 말한 거야. 유레카.”
오덕환은 자연의 신비를 깨우친 사람처럼 중얼거렸다. 그러다가 고개를 갸웃거리며 또 물었다.
“그런데 그걸 왜 나한테 감추려고 했어? 자랑거리인데?”
“그거야, 남태형 선배님한테 미안하잖아요. 어린애한테 교습을 받았다는 얘기 돌면 굉장히 민망해지실 테니까요. 이 건은 감독님께서만 알고 계셨으면 좋겠어요. 부탁드릴게요.”
“아하. 참 생각도 깊구나. 참······ 정후를 많이 닮았어.”
외모로는 빈말로라도 닮았다고 하기 힘든 두 사람이다. 나이차 때문인 것도 있지만, 생김새의 결부터가 전혀 달랐다.
실력이나 천재성 면에서도 아직 이찬은 그 천재에 비견될 만한 결과물을 보여주지 못한 상황.
그렇지만 오덕환의 괴짜 같은 머릿속에서, 이미 두 사람은 동급으로 취급되고 있었다.
‘정말로 제2의 강정후가 나온 거구나. 정후 데뷔 때보다도 훨씬 어린 나이에, 그와 비견될 만한 배우가 나타났어. 나이를 먹고 역할이 풍부해지면 금세 대단한 파란을 일으킬 거야. 지금의 열정이······ 식지만 않는다면 말이지.’
오덕환은 소년의 기이한 노력에 대해서도 생각했다.
‘해질 대로 해진 지정연기 대본을 봤을 때도 느꼈지만, 열정이 보통이 아니야. 천재들은 보통 이러지 않잖아? 강정후가 유태식 배우를 도우려 했던 건 그가 안정록의 극단 후배인 까닭이었는데. 아. 조혁수는 다르겠구나. 그 천재는 마치 초심자인 것처럼 대본을 분석한다고 했어. 그리고 이찬은 그의 아역이지······ 아, 이건 좀 아니야. 분석법이야 배웠다고 쳐도 그 열정까지 세뇌됐겠어? 작품의 완성도를 위해서 선배 배우를 가르치는 월권을 시도할 정도로? 아니지. 그런 건 말이 되지 않아. 그렇다면······ 이 어린 천재가 내 작품에 이토록 열성을 기울이는 건 대체 어째서일까? 그저 데뷔작이라서? 아니면 신수영한테 잘 보이고 싶어서? 다 아닌 것 같은데.’
답 없는 생각에 또 한 번 고개를 갸웃거린 오덕환은, 불현듯 떠오른 생각에 눈을 크게 떴다. 그거라면 말이 될 법했다.
수줍은 감독이 소년의 어깨에 조심스레 손을 얹었다.
“너, 혹시, 내 각본이 마음에 드니?”
“예? 아, 예. 그러니까 오디션을 봤죠, 감독님.”
“아니. 그런 피상적인 애기 말고, 진심으로. 내 각본이 너무도 마음에 들어서, 이게 잘못되면 안 된다고 생각한 거야? 이걸 누군가가 망친다면 큰일이 난다고 생각한 거야?”
일생일대의 중대사라도 되는 듯 묻는 감독을 다른 누군가가 봤다면, 분명 픽 웃었을 것이다. 이런 식으로 엎드려 절 받듯 칭찬을 요구하는 거냐고 하면서.
그러나 이찬은 감독의 얼굴에서 장난기 따위를 발견하지 못했다. 오직 이글거리는 열망만이 그 위에 자리해 있다.
그리고 실은, 소년의 안에도 비슷한 마음이 들끓고 있었다.
“······예. 제가 평생 딱 하나만 작품을 할 수 있다고 한다면, 이 각본을 고를 거예요. 아직 많은 배역을 해보지도 않은 제가 하는 말이라 가볍게 들리실지도 모르겠지만, 제겐 <미스 스캔들>이 정말 특별합니다. 그래서 애쓰고 있죠. 누군가가 이 영화를 망가뜨리지 못하게 말이에요.”
“하하. 아하하하. 그랬구나. 네가······ 배우 이찬이, 내 각본 때문에 이렇게 열의가 넘치는 거구나. 그랬어······.”
보통은 그 뒤에 대화가 더 이어졌을 것이다. 그렇지만 오덕환은 거기서 대화를 끝마쳤다. 그대로 돌아서서 세트장 안으로 걸어가, 고개를 푹 숙이고 작은 소파만 노려봤다.
뜬금없는 종결에 이찬조차 웃고 말았다.
‘아, 참나. 왜 물어봤는지 정도는 말을 해줘야 하는 거잖아? 정말이지 대화하는 방법을 모르는 아저씨야.’
그렇지만 하루가 지난 뒤의 고사(告祀)에서, 오덕환은 100만 원짜리 수표의 축원으로서 이유를 공표했다.
“천지신명이시여. 나 오덕환, 이번 영화에 내 일생을 걸겠습니다. 좀 도와주십쇼. 이번에 진짜 걸작을 완성할 수만 있다면, 다시는 영화 못 만들어도 좋습니다. 천재 배우······ 크흠. 우리 배우 이찬이가, 이번 작품 끝낸 뒤에 작은 후회도 느끼지 않게 해주십시오. 저 아이가 평생 이 작품을 제일 열심히 할 거라고 말을 해줬는데, 그런 걸 내 능력이 부족해서 망치면 되겠습니까. 진짜 큰맘 먹고 수표 뽑았는데, 부탁 좀 드립시다. 비나이다, 비나이다.”
어떻게 들어도 장난기 넘치는 말. 좌중에 둘러선 스탭들은 괴짜 감독이 또 이상한 농담을 한다고 생각해 깔깔 웃었다.
그렇지만 이찬만은 분명히 알아봤다.
그가 말한 축원에는, 토씨 하나하나에까지 넘실대는 진심만이 담겨 있었다는 것을.
그건 비틀리고 짓눌렸던 장인정신이었다. 상업의 논리와 무거운 책임감 속에서 자신의 고고한 날개를 찢어발길 수밖에 없었던 어느 예술가가, 자기 작품의 가치를 인정해준 어린 천재를 위하여 불태우는 숭고한 아집이었다.
무수한 사람들을 관찰하며 자란 이찬조차 처음 보는 감정.
깊은 사랑에 빠진 사람과 사이비 광신도를 반쯤 덜어내어 섞으면 저런 표정이 되지 않을까 싶을 따름이었다.
‘어쩌면, 감독님도 남태형 아저씨랑 비슷했던 걸까? 상업적으로 성공한 영화를 여러 편 써내면서 몇몇에게는 거장이라는 말까지 들었는데도, 사실은 자기 작품을 알아봐 주는 단 한 사람의 명인(名人)을 갈구하고 있었던 걸까. 명인이라기엔 너무 어리고 작은 내 결의가, 저 사람의 꺼져가던 열망에 불쏘시개가 된 걸까······.’
이찬은 만약 그렇다면 그건 참 민망한 일이라고 생각했다. 그가 바란 건 어디까지나 사적인 진혼곡이었으니까.
‘하지만 그게 괴짜 감독의 오랜 갈망에 단비를 내려줄 수 있다고 한다면······ 오해로 놔둬도 좋지 않을까.’
그렇게 생각하며, 소년은 오덕환의 꿈이 이뤄지길 축원했다.
< 12장 - 감독 오덕환 (2) > 끝
ⓒ 비벗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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