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2장 - 감독 오덕환 (3.) >
“이 전에 따른 물은 찻주전자를 예열하기 위한 용도였단다. 그 뒤에 새 물을 적절한 양으로 맞춰 넣고, 잎을 넣어 우려낸 거야. 흠, 잘 우러났구나. 이제 이 찻물을 이렇게, 마지막 한 방울까지 찻잔에 따르는 거란다. 한번 마셔보겠니? 어린잎이라 온도를 낮게 했으니, 아주 뜨겁진 않을 거다.”
안정록의 쓸데없이 상세한 설명에 어색하게 웃어 보이고, 이찬은 찻잔을 성급하게 입으로 가져갔다.
그리고 곧 내려놨다.
“으, 맛없어요.”
“하하하. 그렇게 들이켜면 맛이 없을 수밖에. 눈으로 빛깔을 보고, 코로 향을 마시며, 그와 함께 음미해보렴. 이렇게······.”
“······으. 그래도 맛없는데요?”
“그러니? 이런. 차는 목으로 넘어가 마음에 담긴다고 했다. 이 좋은 차가 맛있게 담기지 않는다니, 아무래도 네 마음에 여유가 없는 모양이로구나.”
궤변이야- 소년은 속으로 투덜댔다. 맛이 없는 차를 맛있게 마셔야 여유가 있는 거라니, 이해되지 않는 논리였다.
하지만 동시에 이찬은 찻잔을 입에 대는 안정록으로부터 선명한 만족감을 봤다. 정말로 마음의 여유를 즐기는 듯했다.
“다도는······ 참 이해가 안 되는 사치인 것 같아요.”
“후후. 우선은 다도(茶道)보다 다례(茶禮)가 합당한 표현일 것 같구나. 오래전부터 이 땅에선 그렇게 불러왔다고 하거든. 어떤 진리를 이루고자 허례허식을 좇는 것이 아니라, 자연이 준 차라는 선물에 예의를 갖춘다는 의미란다.”
“아, 그래요.”
“그리고 그 다례를 통해서, 우리는 육체라는 작은 울타리에 갇힌 인간이 아닌 거대한 자연 속의 흐름이 될 수 있단다. 그게 사람이 차를 마시는 진정한 이유지.”
“무슨 스님처럼 말씀하시네요.”
“하하하. 그래, 나 휴일마다 절에 다닌단다.”
옷은 마치 카톨릭 사제들처럼 입는 사람이, 알고보니 불교 신자였다. 이찬은 그 흥미로운 모순에 잠깐 관심을 줬다.
‘심리학자 안정록. 배우들 사이에서 불리는 그 별명은 그저 오래 단련한 관찰력만 가지고 만들어진 게 아닌 모양이야. 이렇게 푸근하게 웃으면서 늘어놓는 절간 같은 선문답이, 상담사들보다도 더 마음을 편안하게 해주는 까닭이겠지.’
관조는 거기까지였다. 곧 소년은 고개를 저으며 책대본으로 눈을 돌렸다. 연필을 잡은 손도 금세 그 위를 수놓았다.
눈을 가늘게 뜬 안정록이 그 하는 양을 내려다본다.
“······<미스 스캔들> 대본이구나.”
“네. 아, 혹시 연기 한번 봐주실래요?”
“네가 어련히 잘할까. 그보다 지금은 좀 쉬지 그러니?”
“쉴 시간 없어요. 내일부터 촬영이거든요.”
“이번 배역이 시간에 쫓겨 조급해하는 역할이니?”
“······그렇진 않은데요?”
“그렇다면 좀 마음을 놓을 필요가 있을 것 같구나. 말했듯이 잘할 거라고 믿긴 한다만, 지금 찬이 넌 너무 마음이 급해 보여. 마치 호랑이에게 쫓기는 사람 같다.”
그때에야 이찬은 교수가 차를 가져온 이유를 알 수 있었다.
“제가 여유를 잃은 것 같아서 걱정하신 거예요?”
“하하. 그렇지. 따뜻한 차는 오히려 마음을 식혀주니까.”
“근데 필요 없는데요. 그냥 연기나 봐주시지.”
“찬아.”
안정록이 연신 웃던 얼굴을 굳혔다. 엄숙하고 진지한 무게감이 그 위에 얹히고, 얼핏 연민의 정이 담겼다.
“대본, 어제 읽어봤다. 그제야 이해가 되더구나. 늘 노인처럼 느긋하던 네가 왜 그렇게 바빠 보였던 건지.”
“······안 바쁜데요? 이렇게 아저씨하고 차나 마시고 있는데.”
“마음을 말하는 거다. 찬이 넌 심유리라는 인물에게서 윤대흥 형사를 그리고 있는 거지? 그래서 조금도 허점이 없는 연기를 만들고자 애쓰고 있는 거지?”
“무슨 말도 안 되는 소리예요?”
“이미 알고 있다. 넌 윤대흥 형사와 친형제 사이가 아니었어. 사실은, 원래 고아였던 게 아니니?”
그건 안정록이 알고 있어선 안 되는 일이었다. 과거와 단절되기 위해서, 소년은 극단에 도착한 순간부터 자신의 출생성분을 철저히 감춰왔다.
이군영이 뒷조사를 통해 알아낸 정보도 그와 정창영, 정보원 몇 명 선에서 끊어졌다.
하지만 교수는 관조하는 눈을 갖고 있었다.
이찬과 윤대흥 사이의 모호한 감정들을 눈여겨봤던 그가, 소년이 형의 장례식장에 단 10분도 머물지 않았음을 들어 알게 되자, 해답은 금세 도출되었다.
“······아저씨는 참 눈치가 빠르시네요.”
“그 말을 네게 들으니 기분이 묘하구나.”
세상 그 누구보다도 빠른 눈치를 갖고 있는 소년은, 어른처럼 한숨을 내쉬었다.
“그래요, 맞아요. 이 작품은 저한테 특별해요. 그래서 조혁수 아저씨 습관을 훔쳐보기로 했어요. 그때 말씀하셨잖아요, 노력하는 천재라고. 그래서 그분 대본을 빌려서 좀 살펴봤어요. 진짜 그렇더라고요. 제일 오래된 필기만 봐도 극을 제대로 꿰뚫는 분석이었는데, 그 위로 또 디테일만 바꾼 포스트잇이 겹겹이 붙어 있더라고요. 저도 그러고 있는 거예요. 가장 완벽한 심지호를 만들어내기 위해서요.”
“가장 완벽한 심지호라. 그래, 그래서 결과가 좀 나왔니?”
“모르겠네요. 포스트잇 세 장까지 겹치면서 디테일 생각해내긴 했는데, 그 중에 어떤 게 최고일지 모르겠어요.”
“최고의 디테일이라······.”
안정록은 미묘한 표정으로 그 말을 곱씹었다. 그리고 10초쯤이 지나 무겁게 말했다.
“네게 이 말을 해줘도 될지 고민을 좀 했다만, 아무래도 말해야 할 것 같구나. 찬아. 혁수가 그토록 노력하는 데에는 다른 이유가 있단다.”
“······연기를 늦게 시작한 자격지심 때문이라면서요?”
“단적으로는, 그렇지. 하지만 찬아. 어떻게 생각하니? 너에 비하면 조금 손색은 있겠지만, 혁수 역시 특별한 관찰력을 가지고 있다. 그 녀석의 성장과정이 과연 범상했을까?”
소년은 그 얘기에 눈을 크게 떴다.
과거, 이찬은 자신이 특별한 재능 때문에 행복해질 수 없을 거라고 생각했다. 설혹 고아원에 버려지지 않았다고 하더라도 분명히 파국을 맞았을 거라 확신했다.
주변을 파탄내거나, 자기 자신을 무너뜨리거나.
지금 안정록은 그 저주를 이야기하고 있었다.
“나도 정확하게 알진 못한단다. 그저 짐작할 뿐이지. 그래서 함부로 말하고 다녀선 안 된다고 생각했어. 하지만 아무래도 네게는 말해줘야 할 것 같구나. 혁수는······ 아마도 공감하는 마음이 억제되어 있는 것 같다. 똑똑한 머리로 잘 이해는 하더라만, 타인의 감정을 가슴 깊이 받아들이질 못했어. 사람에게도 그런데 배역인들 순조로웠겠니. 스스로도 자신이 피상적으로밖에 이해를 못 한다고 생각해, 그를 만회하기 위해 무수한 연구와 숙달로 자신에게 배역을 덧씌우는 것 같더구나.”
타인을 말하길 주저하는 교수의 성격상, 가장 총애하는 제자였던 강정후에게도 해준 적 없는 이야기였다. 그렇지만 데뷔작에서부터 천재와 엮인 이찬에게는 말해줄 필요가 있었다.
그 불행한 청년들보다도 더 끔찍한 유년기를 보냈을 텐데도, 누구보다 따뜻한 마음을 갖고 있는 아이니까.
“찬아. 너는 다르단다. 너는 혁수를 따라가선 안 돼. 그 아이의 노력을 폄하하는 것은 아니다만, 그 방향은 너를 제약할지도 몰라. 너 자신을 바라보렴. 네 안에 이미 심지호가 담겨 있다. 너는 정후나 혁수와는 달라. 아직 망가지지 않았다. 그렇지 않니? 그렇기에 윤대흥 형사가 널 사랑했던 거야.”
“······형이 절 사랑했다고요.”
“그래. 너도 잘 알고 있잖니. 나조차, 한눈에 알겠던데?”
이찬은 입술만 삐죽이며 오래 답하지 못했다.
그렇지만 이내 작은 손으로 책대본을 덮고, 맛없는 차를 들어 입으로 가져갔다. 그 뒤에 아주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으, 맛없어.”
투정 속에 감춘 눈물을, 포근한 눈의 안정록이 외면해줬다.
*
마침내 크랭크인에 들어간 <미스 스캔들>의 첫 촬영은, 영화의 첫 씬은 아니었다.
특수한 경우는 아니다. 쪽대본 드라마와 달리 영화의 촬영은 구태여 서사의 순서를 따라갈 이유가 없으니까.
배우 일정상의 문제 때문에, 또는 날씨나 로케이션 섭외 때문에, 또는 기념비적인 첫 촬영에 모든 배우들을 불러 모으기 위해, 그런 여러 이유들로 인해 1씬이 아닌 다른 씬으로 첫 삽을 푸는 경우가 흔했다.
하지만 이번엔 그런 케이스가 아니다. 마치 불길처럼 이글거리는 눈이 된 감독이 미진하다 여겼던 씬들을 갈아엎겠다고 선언했는데, 그 중에 초반의 여러 씬이 포함되어 있던 까닭이었다.
그렇기에 심지호와 심유리가 초원 위에서 처음 조우하는 7씬이 최초의 촬영으로 낙점되었다.
그건 마침 주요 배우들이 총출동하는 씬이기도 했다.
작중에서도 초원 위는 크랭크인 로케이션. 드라마의 주인공인 심유리, 조연출인 양지환, 소속사 사장인 이광진, 로드매니저 송소미 등이 그곳의 구성원에 속해 있었다. 심지호라고 불리게 될 이름 없는 고아 역시 그곳에 있었고.
그 모든 배우들을 모아놓고, 오덕환은 퉁명스럽게 설명했다.
“아시겠지만, 다시 한 번 잘 들으세요. 심유리는 각종 염문에 시달렸던 톱스타입니다. 그렇지만 다시 한 번 최고의 자리에 올라서서 대작 드라마 촬영을 진행 중입니다. 그녀 본인은 성격상의 여러 문제들을······ 기억하시죠? 가지고 있고. 그래서 소속사에서는 이번에는 정말 잘 관리를 해서 계약기간 동안 잘 써먹겠다고 다짐을 하고 있고. 매니저는 그런 사명감에 더해 연민까지 품고 있어야 하고. 한편으로 촬영팀 사이에서는 여전히 소문이 안 좋은데, 단 한 명 조연출 양지환은 그녀를 오랫동안 좋아했고. 이런 상황에서 소년이······ 심지호가 등장합니다. 헉헉거리며 뛰어와서 초원 위쪽에서 심유리를 향해 다가오는 거예요. 이 국면을 다들 잘 이해를 해주세요.”
“알겠습니다!”
“힘내서 잘해봅시다!”
“<미스 스캔들>, 파이팅!”
낯가리는 성격 때문에 딱딱해진 말투로도 작품을 위한 열정은 잘 전달됐다. 배우들은 결연한 외침으로 감독의 의지에 응답해줬다.
그들이 흩어진 뒤에 이찬이 오덕환에게 접근했다.
“감독님.”
“어, 이찬. 의견 있니?”
“의견이라기보단······ 남태형 선배님은 어떤 것 같으세요?”
카메라 롤 없이 리허설은 한 차례 돌려본 상태. 오덕환의 입가에는 부드러운 웃음이 걸렸다.
“아주 좋아. 적어도 표정에서 몰입이 깨지는 일은 없겠어. 대신 몇몇 씬들은······ 나중에 추가촬영을 해야겠지만.”
꽃미남 남태형은 여전히 불완전했다. 같은 로케이션에서 이어지는 11씬까지 몇 차례 대사가 들어갈 예정인데, 그쪽은 프레임 단위의 연습이 안 되어 꽤나 미진했다.
그렇기에 감독은 내용상 수정할 게 없는 9씬과 11씬까지 일정에서 뺐다. 추후에 연출가 배역의 조연과 신수영, 남태형만 따로 소집할 예정이었다.
다만 7씬과 8씬의 표정연기만큼은 잘 정제되어, 의지의 화신이 된 오덕환도 감동할 만큼 완벽했다. 과거의 남태형을 겪어봤던 일부 스탭들이 리허설만으로 혀를 내두를 정도였다.
그 변화가 전부 소년의 공로임을 알고 있는 감독은, 이찬을 보며 따스하게 미소 짓지 않을 수 없었다.
“이찬. 잘해보자. 나도 최선을 다할 테니까, 너도 최고의 연기를 보여줘라. 함께 이 작품을 최고로 만들자.”
감독에게서 기대에 찬 말을 듣는 건 톱스타들의 전유물. 아직 인지도조차 없는 소년으로선 감격해야 마땅했을 터였다.
그렇지만 이찬은, 머쓱한 표정으로 뒤통수를 긁었다.
“그래서 말인데요, 감독님.”
“그래. 편하게 말해라.”
“저, 첫 테이크에선 좀 자유롭게 가볼까 싶습니다. 리허설 때 보여드린 것처럼 갈 수도 있긴 한데······ 첫 촬영 첫 테이크니까······ 살짝 신선하게 해보는 것도 좋을 것 같은-”
“그렇게 해라.”
대뜸 승낙이 나왔다. 조심스레 의견을 말하던 이찬이 민망해질 지경이었다.
“정말요? 그래도 돼요?”
“당연하지. 몇 테이크든 좋으니 마음껏 해봐.”
황당하게 쳐다보는 이찬의 시선 속에서, 7씬 롱샷(카메라 프레임의 단계 중, 배경의 조망까지 담기는 거리감)의 1테이크가 촬영 준비를 마쳤다.
*
톱스타 심유리의 집 앞에서 며칠을 노숙했지만, 소년은 늘 경호원들에게 둘러싸여 있는 그녀와 마주할 수 없었다.
그랬기에 심유리가 드라마 촬영을 위해 이동할 때 그 차 뒤를 쫓았다. 얼마 남지 않은 돈을 택시비로 다 써야 했지만, 덕분에 그녀가 향한 로케이션 근처까지 도달할 수 있었다.
초원의 동산을 뛰어넘어 바라본 촬영장. 그곳에서 심유리는 마치 여왕과도 같았다. 압도적인 실력과 카리스마로 수많은 스탭들을 휘어잡고 있었다. 소년은 자신이 제대로 된 타겟을 찾아왔음을 확신했다. 동시에, 그 행운을 돈 몇 푼으로 환산하는 것이 아깝다고 느꼈다.
숨을 고르며 조심히 접근하는 소년. 톱스타가 그에게 시선을 준다. 소년은 떨리는 손으로 싸구려 목걸이를 셔츠 위에 끄집어냈다. 심유리가 그걸 알아봐주길 기대하며.
기대는 보상받았다. 톱스타는 모든 촬영을 중지시켰다. 허겁지겁 다가와 묻는 매니저를 제치고, 깊은 눈으로 염려하는 조연출마저 지나쳐, 소년의 코앞까지 다가갔다.
“너······ 그거, 너 설마······?”
“······누나. 오랜······만이에요. 어, 아닌가? 혹시 처음이에요?”
“지호야······? 너, 지호야!?”
긴 호흡의 대사 속에서 엉키는 두 사람의 시선. 그리고 소년의 떨리는 손길이 미인의 머리카락에 가서 닿았다. 바람과 손길로, 비단 같은 흑발이 미끄러졌다.
그 순간 소년은 이찬이 되었다. 그리고 그 눈에는, 붕대에 칭칭 감긴 채 환하게 웃던 더벅머리 형사가 비쳤다.
“······아, 왜 이러나. 감독님. 이거 찬이가 좀 오버했는데요? 지시문이랑 꽤나 다르게 들어갔습니다. 뭐 롱샷이니까 확 눈에 들어오진 않겠지만, 그래도 연결이 어색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아무래도 바로 다음 테이크 들어가야겠죠?”
오랫동안 손발을 맞춰온 조연출의 말에 답하지 않은 채, 오덕환은 생각했다.
오버다. 심지호가 아니었다. 그 표정과 눈빛과 손길은 각본 속 심지호와 전혀 달랐다. 그는 저런 아이를 만들어낸 적이 없었다. <미스 스캔들>에는 저런 심지호가 존재하지 않는다.
그렇지만, 그 전날에도 밤을 새워 각본을 지우고 고치고 들어내고 뒤바꾸며 고민했던 감독은, 그 순간 느꼈다.
심지호였다. 심지호가 아닌 심지호가, 자신의 세계를 부수고 뒤흔들어, 상상조차 못 했던 <미스 스캔들>을 완성했다.
오덕환의 목소리에 웃음기가 담겼다.
“컷. 오케이. 다음 쇼트 간다.”
< 12장 - 감독 오덕환 (3.) > 끝
ⓒ 비벗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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