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훔치는 연기자-35화 (35/250)

< 13장 - 배우 신수영 (1) >

잘 웃지 않는 사람이 연신 웃음을 띠고 있으면, 그 모습은 인상적일 수밖에 없다. 웃음의 주인공이 총책임자일 경우엔 집단 전체의 분위기가 밝아지기 마련이고.

그런 까닭이었다. 오덕환의 얼굴에서 웃음이 떠나지 않게 된 <미스 스캔들> 촬영장은 이례적으로 화기애애해졌다.

스탭과 배우들은 그 분위기를 왠지 포근하다 정도로 받아들였다. 아역 주인공 한 명만이, 그들에게서 기대감과 유대감 등의 감정이 무의식적으로 표출되는 것을 분간해냈다.

이찬은 마침내 안도할 수 있었다.

‘다행이다. 각본에서 벗어난 연기가 잘 먹힌 모양이야. 사실은 디테일을 넘어서 골조까지 바꾼 캐릭터인지라, 각본을 소중하게 생각하는 오덕환 아저씨한테 한소리 듣지 않을까 싶었는데······ 오히려 신뢰감을 더 키운 것 같아. 역시 대단한 사람이야, 안정록 아저씨는.’

스스로 연출한 영화까지 걸작으로 만들어낸 이후, 안정록은 대작이라 할 만한 영화만을 선택해왔다. 이제야 중견 감독이라 불리는 오덕환과 가까워질 기회는 없었을 터였다.

그런 사람이 이찬에게 조언했다. 오덕환의 각본에 집착하지 말고 내면에서 캐릭터를 찾아내라고.

마치 앉아서 천리를 내다보는 듯한 통찰력이었다.

‘······아니, 그게 아닌가. 단지 그 아저씨는 나를 봤던 거야. 내 안에 잠재된 심지호가, 보는 눈이 있는 사람이라면 누구든 인정하지 않을 수가 없는 캐릭터임을 알아봤던 것 같아. 마음이 망가지지 않았다는 건 무슨 소린지 잘 모르겠지만······.’

어느 쪽이 됐든 좋은 일이었다. 오덕환은 이찬의 심지호가 각본 속의 심지호보다 더 선명하다는 걸 알아봤고, 그렇기에 만족과 희열 속에서 웃음을 지우지 못하는 중이다.

연구의 시간이 헛된 일이었다는 뜻은 아니었다. 그토록 신중하게 분석했던 캐릭터이기에 금세 자기 안의 심지호를 발견할 수 있었던 것.

그를 깨달았기에, 이찬의 마음도 편안해졌다. 무수한 시간과 노력을 들여 붙이고 또 붙였던 포스트잇을 잊고 자신에게 집중했다.

그렇게 7씬과 8씬의 무수한 쇼트(shot. 촬영에서 씬을 세분화하는 카메라 프레임의 단위. 롱샷, 풀샷, 바스트샷, 클로즈업샷, 숄더샷 등이 이에 해당한다.)들이 다섯 번 이상의 테이크를 들이지 않고 완성되었다.

그렇게나마 테이크가 반복된 것도 오직 남태형 때문이었다.

‘내가 알려준 프레임 단위 연기를 잘 숙달하긴 했지만, 장면 전체를 읽는 눈이 부족해. 약속된 연기에서 환경음이나 애드립 등으로 오차가 생기면 이내 타이밍을 놓쳐버린단 말이지. 그게 저 아저씨의 한계야.’

이찬 덕분에 배우로서 다시 태어났다고 믿는 남태형에겐 안된 일이지만, 그는 대성할 수 있는 연기자가 아니었다.

연기보다는 그 잘생긴 얼굴을 활용해 다른 쪽에 집중하는 것이 스스로에게도 좋을 터였다.

‘······뭐 내가 알 바는 아니지. 프로액터스 왕대영 대표도 생각이 없는 사람은 아닐 테니까, 이번 영화로 저 아저씨가 이름값을 얻고 나면 다른 쪽 활로를 열어줄 거야. 그래서······ 남태형 아저씨보다는 저쪽이 더 신경 쓰이는데.’

기존에 고민하던 여러 문제가 해결되고 나자, 소년의 관심이 마침내 여주인공에게로 향했다.

신수영. 이지적인 미모에 서구적인 몸매를 겸비했고, 안정록의 제자로서 제법 뛰어난 연기력까지 획득한 배우.

그런 그녀에겐 작은 문제가 있었다.

신수영은, 그래야 할 이유가 없는데도, 이찬을 지나치게 좋아했다. 8씬 촬영이 끝나자 화장이 지워질 걸 걱정하지도 않고 달려들어 볼을 비볐을 정도로.

“마이 찬, 이 예쁜 것! 너 어쩜 그렇게 실수를 안 하니?”

“천재라서 그런 거니까, 스킨십 자제 부탁드립니다.”

“아하하, 말도 이렇게 귀엽게 하고. 내가 너 때문에 못살아 진짜. 너 같은 동생 있으면 얼마나 좋을까? 이번 영화 나가고 나면 그런 별명 생길지도 몰라. 국민남동생!”

국민 어쩌고 하는 건 오래된 조어법이었다. 이미자와 조용필이 국민가수라 불린다는 건 상식이고, 금메달리스트나 수출역군을 국민영웅이라 부르기도 했으며, 미디어 쪽에서는 시청률 50% 이상의 드라마에 국민드라마라는 칭호를 붙여준다.

‘그렇다지만, 국민남동생이라니, 그건 별명 치고 너무 이상하잖아? 도저히 이해가 안 되는 누나라니까.’

이해가 안 되는 점은 그뿐만이 아니었다. 공식적인 첫 미팅에서 내내 선글라스를 끼고 있었던 것 역시, 사실은 누구도 이해할 수 없을 해괴한 행동이었다.

‘총책임자인 감독이 낯가리는 성격이라서 지적을 안 했고, 작품의 흥행을 책임질 톱스타라 뒷말이 안 나온 거겠지. 그게 아니었다면 예의 없다고 된통 혼나고 나쁜 소문 돌 수도 있는 일이었단 말이야. 이렇게 보면 절대로 성격이 나쁜 사람은 아닌데, 그땐 왜 그랬던 걸까?’

심유리는 이찬의 심지호와 무수히 붙어야 하는 배역. 정확하게는 이용해먹기 위해 접근한 타겟이지만, 어찌됐건 이후 남매로서 지속적으로 투샷을 촬영해야 한다.

소년은 그 배역의 주인인 신수영에 대해 좀 더 알아내야 되겠다는 의무감을 느꼈다.

“누나. 볼은 그만 비비시고, 혹시 전에 첫 미팅 때요.”

“어, 찬아. 그때 왜? 거기서 먹었던 거 맛있었어? 누나랑 다음에 같이 또 먹으러 갈까?”

“그게 아니라요. 그날 선글라스 왜 쓰셨던 거예요?”

“어? 어······ 그냥 그날따라 쓰고 싶어서? 후후, 되게 잘 어울리지 않았어? 누나 저번 드라마에서 선글라스여신이라는 별명도 생겼는데.”

담담하게 서술하는 대답. 그러나 집중력을 유지한 채 관찰하고 있던 이찬은, 신수영의 얼굴에 떠오른 갖가지 감정들을 알아챌 수 있었다.

부끄러움. 불편함. 연민. 그리고 분노.

그 감정들에서 도출되는 해답은 단 하나였다.

‘이 누나······ 설마 학대받고 있는 건가?’

눈가의 멍은 쉽게 지워지지 않는다. 또한 마음의 창이라 불리는 눈과 가까이 있는 만큼 무척 두드러진다.

그런 폭력의 흔적이 남아 있었던 거라면, 감독과 배우들에게 들키지 않고자 무례한 선글라스를 고수했다고 해도 이상하지 않았다.

‘하지만 그럴 이유가 없는데? 강정후에 비할 바는 아니라지만 충분히 성공한 배우잖아? 그 한 명을 제외하면 또래에서 경쟁자를 찾기 힘든 스타고. 그런 딸을, 대체 왜······?’

호기심은 이내 우려로 자라났다.

이유는 도저히 알 수 없으나, 만약 소년의 추측이 사실이라면, 그건 작품의 완성을 저해할 수 있는 요인이었다.

‘휴가가 끝나면 난 <가을하늘> 촬영을 병행해야 해. 그런 상황에서 신수영 누나가 일신상의 사정으로 일정을 취소하는 일이 반복되면, 절대로 제 시간 안에 영화를 완성하지 못할 거야. 그러면 가을하늘 아역 씬 방영으로 내 연기가 주목받는 타이밍에 영화를 개봉해 원투펀치를 가한다는 계획은 무너지고 말아. 이건, 그냥 놔둬선 안 될 문제일지도 몰라. 하지만 정말 그거라면 내가 해결해줄 수 없는 일인데······.’

이찬이 거기까지 생각했을 때 소품팀이 세팅을 끝마쳤다. 이제는 거짓 남매가 그간의 사정을 공유하는 10씬의 촬영을 준비해야 할 시간.

이찬은 신수영의 새하얀 얼굴에서 눈을 떼지 않은 채 밴으로 이동했다. 작중에선 매니저조차 쫓겨날 그 밴 뒷좌석에 심유리와 마주앉았다.

오덕환 감독이 차문 앞에 서서 각본의 내용을 상기시켰다.

“잘 기억하고 있겠지만, 심지호가 찬 목걸이는 원래 심유리 거였고. 그래서 빨리 알아볼 수 있었던 거지만, 젖먹이 때 봤던 게 마지막이었으니, 동생이 어떤 아이인지에 대해서는 알지 못하고. 핏줄이니 내심 반갑기야 하겠지만, 그보다는 부모의 위치가 궁금한 거고. 심지호 입장에선 불안 속에서 심유리의 확신을 끌어내고자······ 이건 찬이가 알아서 하고. 됐지?”

중간에 뚝 끊긴 디렉팅. 알아서 하라는 말은 오덕환 감독에게 있어서 절대적인 신뢰의 표시나 다름없었다.

그 사실을 눈치 챈 신수영이 즐거워했다.

“후후. 감독님도 찬이 연기가 정말 좋으신가봐요?”

“그런 셈이지.”

“저도 그래요, 감독님. 마이 찬, 너무 잘해요.”

“그······ 마이 찬은 뭐지?”

“제 찬이요! 발표회 때도 그렇게 부를 거예요. 찬이 첫 번째 별명을 바로 제가 지어주는 거예요. 그렇지, 마이 찬?”

“피요 어꼬요, 재 분장 지어지이까, 좀! 볼 꼬집지 마세요.”

“어머, 화내는 얼굴도 못 견디게 귀여워.”

사이가 좋은 건지 안 좋은 건지 애매한 주인공들에게서 오덕환이 멋쩍게 물러난 뒤.

7씬과 8씬이 그랬던 것처럼, 10씬 촬영 역시 안정적으로 진행되었다.

“너, 뭐야. 대체 뭐야.”

“뭐······긴요. 심지호인데요······?”

“그러니까, 대체 이게 무슨 상황이냐고. 이제 와서 왜 여기 나타나? 넌······ 후우. 이건 됐고, 말해. 엄마 아빠 어디 있어.”

“엄마 아빠요? 죽었는데.”

“······뭐?”

“오래전에 죽었어요. 그래서 난 거리를 떠돌게 됐고요. 근데, 죽기 전에 엄마가 그런 얘길 했어요. 나한테 누나가 있고요, 이름이 심유리라고요. 이 목걸이를 보면 알아볼 수도 있다고 했던 것 같아요. 그래서 혹시나 했던 거예요.”

“아······ 흐읍······ 어딨어. 지금 어딨냐고! 무덤은 있을 거 아냐! 나 버리고 간 그 인간들, 지금 어디 있어!”

“모, 몰라요. 어렸을 때라 기억 안 나요.”

“흐윽······. 왜, 왜 너뿐이야! 왜 너만 나타난 거야!”

울부짖는 심유리는 오랫동안 부모의 행방을 알지 못할 것이다. 비록 심지호가 마지막 양심으로 그들의 납골당 위치를 확인해두긴 했지만, 그 사실을 계속 숨길 예정인 까닭.

부평에 위치한 무연고자 납골당을 알려준다면 심유리는 친동생 역시 이미 죽었음을 알게 된다. 그렇기에 가짜 심지호는 기억 안 난다는 말로 그 위치를 감추는 것이다.

그런 각본상의 설정을 떠올리며, 이찬은 부모에 대해 고찰했다.

‘생활고 속에 아들만이라도 잘 키우고자 딸을 버린 부모. 그리고 뛰어난 배우로 성공한 딸을 학대하는 부모. 그 둘 중 어느 쪽이 좀 더 나은 부모일까? 신수영 누나는······ 심유리의 부모와 자신의 부모 중, 어느 쪽을 더 싫어할까?’

가족 없는 소년으로선 답을 알 수 없는 질문이었다.

*

제작발표회는 보통 모든 촬영을 마친 뒤의 포스트프로덕션 과정. 그러나 <미스 스캔들>은 최대한 그 일정을 앞당겼다.

주인공인 신수영이 출연한 드라마 <아담의 모든 것>의 종영과 시기를 맞춘 것.

톱스타급 배우들이 총출동한 그 드라마가 마지막 화를 방영한 직후에, 그 시청자들의 관심을 흡수하기 위함이었다. 투자자인 프로액터스 왕대영 대표의 전략이었다.

<청춘 클래식>의 깜찍한 하이틴스타이자, <아담의 모든 것>으로 출중한 연기력을 입증한 신수영의 차기작 제작발표. 소식을 들은 연예부 기자들이 일제히 발표회장으로 몰려왔다.

그렇게 호재를 품에 안은 제작발표회였지만, 모든 게 계획대로인 건 아니었다. 오덕환은 일찌감치 회장에 나온 신수영을 보면서 오히려 무겁게 신음해야 했다.

“제작발표회에, 선글라스라니.”

“······죄송합니다, 감독님. 제가 이걸 말씀드리려고······.”

막 선글라스를 벗으려다가 흠칫하며 감독의 뒤를 본다. 마찬가지로 주인공이라는 입지에 맞지 않게 일찍 나와 있던 이찬이 그녀의 시선을 끌었다.

“저, 안쪽에서 말씀드려도 될까요.”

“됐어. 선글라스 못 벗겠단 얘기 아냐?”

“······맞아요, 감독님. 이걸 좀 어떻게 안 될까요? 톱스타 역할이니까, 일종의 컨셉을 잡고 나온 걸로······ 캄프라치를······.”

캄프라치란 프랑스어 카모플라주(camouflage)의 일본식 표현. 업계에서는 부정적인 일을 잘 포장해서 꾸며낸다는 의미로 쓰이는 용어다.

오덕환은 다시 한 번 침음을 흘렸다.

“크흠. 어려울 것 같은데. 분명히 논란이 될 거야.”

“논란은, 화제성이 되지 않을까요? <미스 스캔들>이니······.”

“되겠어? 톱스타 S양 인성 논란이 돼버릴 것 같은데.”

“그런 거라면, 감수하겠습니다.”

“뭘 감수해? 당신, 내 주연이야. 감수하는 건 나야.”

주인공에게 좋지 않은 이미지가 붙는다면, 그 결과를 감당해야 할 건 감독인 오덕환과 투자자인 프로액터스. 신수영 개인의 결의가 문제가 아니었다.

무엇보다 오덕환은 고작 스물두 살짜리 배우에게 문제를 떠안길 생각이 없었다. 그렇기에 그는 고민했다.

‘대충 보면, 가정폭력이나 사랑싸움. 전화로 발표회 미룰 수 없냐고 물어본 게 이런 이유였군. 진하게 멍이 들어 있다거나 하면 차라리 벗지 않는 게 낫긴 해. 그렇지만 그 이유를 뭐라고 설명한담. 일반적으로는 열심히 촬영하다가 부상을 당했다는 식으로 둘러대면 될 일인데, 가족영화에 액션 씬이 있는 것도 아니고, 스탭들부터가 이상하게 생각할 텐데.’

바로 그 순간이었다. 단상 위에서 엉덩이를 뗀 이찬이 두 사람에게 다가왔다.

“제가 한 걸로 해요.”

“어? 마이 찬······ 무슨 말이야?”

“누나 눈에 멍, 제가 만든 걸로 하자고요. 어제 촬영 끝나고 누나랑 장난치고 놀았는데, 제가 나이에 비해 힘이 세니까 조절을 못하고 멍들게 만든 거예요. 우리 둘이 스킨십 많이 한다는 거야 스탭들도 다 아니까, 의심하는 사람 없을 거예요. 중간에 제가 누나 무릎에 앉아서 재롱도 떨고 할게요. 그러면 오히려 작품에는 좋은 이미지가 붙을 거예요.”

딱 붙여 쓴 선글라스 안쪽의 눈이 커진다. 대화가 절대로 들릴 수 없는 거리였는데, 이미 모든 걸 짐작한 듯한 태도. 신수영은 믿을 수 없다는 듯 중얼거렸다.

“너······ 그걸······ 어······ 어떻게 알았어?”

“딱 보면 알죠. 뭐 대단한 일이라고. 감독님, 어때요? 괜찮은 캄프라치 아닌가요?”

“흠. 나쁘지 않아. 잘 먹힌다면, 중간에 멍든 걸 살짝 보여주는 것도 좋겠군. 두 사람 친밀함을 과시할 수 있을 거야.”

그런 이찬과 오덕환의 판단대로, 신수영의 선글라스는 부정적인 시선에 휩싸이지 않았다. 그 대신 촬영 초기부터 대단한 친교를 과시하는 두 주인공에게 포커스가 집중됐다.

톱스타와 ‘마이 찬’이 조명 받은 발표회가 끝난 뒤.

퇴장하는 기자들을 살피며, 이찬은 나지막이 물었다.

“누가 때린 거예요? 아침부터, 무슨 이유로?”

마이 찬이니 귀엽다느니 하는 입버릇은 나오지 않았다. 선글라스를 낀 미스 스캔들은, 오랫동안 대답하지 못했다.

< 13장 - 배우 신수영 (1) > 끝

ⓒ 비벗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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