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3장 - 배우 신수영 (2) >
신수영은 환하게 웃으며 소년을 대기실로 데려갔다. 그리고 매니저와 스타일리스트들을 내보낸 뒤에 문을 잠갔다.
“어휴, 정말. 너 때문에 못살겠다, 마이 찬. 그런 거 전혀 아니니까 오해하지 마. 집에서 찬장에 찧은 거란 말이야. 하하, 좀 바보 같지? 부끄럽기도 하고 혹시라도 누가 오해할까봐 숨기는 거지, 절대로 누구한테 맞거나 그런 거 아니야.”
깔끔한 설명이었다. 의심은 하더라도 부정은 할 수 없을.
그러나 사람의 감정을 보는 소년은 언어가 아닌 표정에서 대답을 듣고 있었다.
“일단 맞은 건 맞는 것 같고. 누구예요? 아버지예요?”
“뭐, 뭐라고 하는 거야, 얘가.”
“맞네. 왜 때린 건데요? 딴따라 하지 말라고?”
“아······ 찬아. 제발 그러지 마. 누나 화낸다?”
“이건 아닌가보네. 그럼 가정사예요?”
“······하지 마.”
“맞구나. 가정사라······ 뭘까요? 외도, 그런 건가?”
“야, 이찬! 그만하라니까!”
“맞네요. 어머니가 외도하셨구나. 그러면 남의 자식이라-”
“너, 진짜 왜 그래! 왜, 너까지 그래!”
남의 자식이라서 학대받는 거예요? 막힌 입속으로 하려던 말을 삼키며, 이찬은 가슴이 답답해짐을 느꼈다.
물리적인 원인은 신수영 때문이었다. 육감적인 몸매의 그녀가 곧장 다가와서 거칠게 끌어안았기에.
그렇지만 그 압박감만이 전부는 아니었다.
‘······내가 실수했구나. 방금 전 누나 감정을 보면, 때리지 않은 게 신기할 정도였어. 그렇게 아프게 만들려던 게 아니었는데. 그냥 뭔가 도움이 돼줄 방법이 없을까 했던 건데······. 이렇게까지 민감하게 받아들일 줄은 몰랐단 말이야.’
고아인 소년에게는 너무 어려운 문제. 길거리를 떠돌던 시절에도 친자확인 같은 문제로 괴로워하는 사람은 만나본 적이 없었다.
<가을하늘>에 출연하며 출생의 비밀 같은 게 심각한 문제가 될 수 있다고 느끼고, 그랬기에 가정사를 질문했던 것이지만, 다정다감하던 신수영이 그토록 화를 낼 줄은 몰랐다.
그리고 이찬이 몰랐던 건 그것만이 아니었다.
신수영이 표출한 슬픔과 분노에 자신의 마음이 무거워질 거라는 짐작 역시, 그는 해본 적이 없었다.
‘그저 작품을 위해서 나라도 나서야 하는 상황이라고 생각했는데······ 이번엔 내가 나를 몰랐던 걸까. 그저 영화 때문만은 아니었던 모양이야. 사실 난······ 이 누나가 다치는 게 싫었던 걸지도.’
몸은 근육 하나하나를 마음대로 쓰면서 자기 마음은 다 알지 못했다니. 우스운 일이라고 생각하며 소년은 자조했다.
물론 마음이 어쨌건 문제를 확인하는 절차는 반드시 필요했다. 하지만 이제는 발생한 사건의 원인을 파악했으니, 해결책을 도출하면 그뿐.
소년은 신수영의 품에서 고개를 빼냈다.
“읍······ 후. 미안해요, 누나.”
“어험, 흠. 괜찮아. 근데 참, 진짜 상상력도 풍부하셔? 무슨 말도 안 되는 소리를 한 거야? 누나 마음 상할 뻔했어.”
“미안하고, 누나, 부탁 하나만 할게요. 나랑 합숙해요.”
“······그건 또 무슨 소리야?”
“나 방 두 개 아파트에 혼자 살아요. 정확하겐 매니저 누나랑 같이 사는 거지만, 내보낼 수 있어요. 거기서 지내요.”
“야, 이찬.”
“학대받고 있다고 오해하는 거 아니에요. 안 그럴게요. 그게 아니라, 우리 앞으로 진짜 많은 씬들을 찍어야 되잖아요? 우리 둘 투샷만 해도 러닝타임 50분은 나올 것 같던데. 근데 나 <가을하늘> 때문에 많이 바빠질 거예요. 누나랑 충분히 리허설을 하지 못할 수도 있어요. 그러다가 작품이 미진해지거나 하면 어떡해요? 그거 굉장히 싫을 것 같아요. 그래서 누나랑 같이 지내면서, 밤마다 연습하고 싶어요. 도와주실 수 있죠? 저 진짜 누나한테 연기 배우고 싶단 말이에요.”
“아······.”
신수영은 혼란 속에서 탄식만을 내뱉었다.
소년의 말은 일견 합리적인 제안이었다. 그리고 상당히 매력적이었다. 거절할 이유가 단 하나도 떠오르지 않을 정도로.
이찬이 느끼는 것만큼은 아니지만, 신수영에게도 <미스 스캔들>은 소중했다. 반드시 성공시키고 싶은 작품이었다.
시트콤과 드라마만 찍다가 처음으로 나선 충무로다. 징크스를 중요시하는 이쪽 업계에서 첫 작품의 중요성이란 두말하면 입만 아픈 것. 설혹 오덕환 감독이 정말 변태였다고 해도 견뎌냈을 터였다.
그렇기에 신수영 역시 본격적인 촬영에 돌입하기 전에 독립하겠다는 계획을 진지하게 고려하고 있었다. 혹시라도 자신의 상처 때문에 촬영에 지장이 생기면 안 되므로.
다만 그걸 설득하는 과정에서 생길 폭력이 두려웠다.
이유도 없이 집을 나가려 한다면, 그는 분명 분노할 것이다.
그런데 그런 게 아니라 기본기가 부족한 아역배우가 가르침을 청한다? 그래서 그를 가르치기 위해 촬영 기간 동안만 합숙한다?
너무나 완벽한 명분이었다. 그거라면 그 역시 막아서지 못할 터였다. 그는 사실은 대부분의 사람에게 선량하니까.
단 두 명만을 제외하면, 그는 모두에게 성인군자였다.
“음······ 노력이, 가상하긴 한데.”
“그쵸? 제발 부탁해요, 누나. 가르쳐주세요.”
“······그렇지만, 네가 나한테 뭘, 배울 게 있을까?”
“제가 재능이 좀 있다고 해봤자 아이잖아요. 누나의 경험을 하나하나 흡수하고 싶단 말이에요. 도와주실 수 있죠?”
어떤 아이도 스스로를 두고 ‘그래봤자 아이잖아요’ 따위의 말은 하지 않는다. 그건 표면적인 이야기에 불과했다.
그것을 깨닫고, 신수영은 다른 부분을 지적했다.
“네가······ 날 도와주려는 게 아니고?”
“그럴 리가요. 전 아무것도 모르고, 궁금하지도 않아요.”
너무도 명료한 대답. 그렇기에 사실을 시인하는 말이었다.
소년은 신수영의 비밀을 이미 알아차렸고, 그것을 확신하고 있으며, 심지어 감춰주려고 하고 있다.
도움을 청하는 아동이라는 그림을 만들어냄을 통해서.
그뿐만이 아니었다. 정신없는 발표회 속에서 잠깐 묻어뒀지만, 이찬은 이미 발표회 직전에 기이한 능력을 선보였다.
들을 수 없는 이야기를 들은 것처럼 다가와 제시한 해결책. 거기에는 말수 없는 오덕환 감독조차 탄성을 냈다.
그 모든 상황을 돌이켜본 뒤에, 신수영은 마침내 이해했다.
‘이 아이는······ 정말 천재구나. 찬이한테서 동생을 비춰 봤던 건 완전한 착각이었어. 이 아인 달라. 열두 살 꼬마로 바라보는 채로는 이해할 수 없는 아이야. 연기력만이 아니라 그 삶 자체가 이미 원숙한, 어른아이······.’
불행한 배우는 그 괴이한 현실을 받아들이기로 했다. 소년이 능력을 드러낸 건, 분명히 그녀를 돕기 위해서였으니까.
“내가, 너랑 합숙하면서 연기를 지도해줘도 될까?”
“물론이죠. 제가 감독님께 말씀드릴게요. 그러면 누나 집으로 연락해주실 거예요. 주소는 문자로 보내드릴게요.”
“응······ 그렇게 해줘. 고맙단 말은, 나중에 할게.”
“안 해도 돼요. 그럼 다음에 봐요.”
터무니없이 깔끔한 인사였다.
물론 오덕환 감독의 답변까지 깔끔했던 건 아니었다.
“네가 신수영이랑? 어라. 뭘 배울 게 있긴 해?”
“감독님도 똑같이 물어보시네요. 배울 게 있죠. 아주 많아요. 지금부터 세 달 동안 제 누나가 될 사람이잖아요?”
“······두 주연이 합숙을 해서 충실히 리허설을 해준다면, 촬영을 두 달 만에 끝낼 수도 있긴 하겠지.”
“바로 그거예요. 이 작품, 걸작으로 완성해야 하잖아요?”
“으음. 그렇지. 여러 의미에서 좋은 일이 되긴 하겠는데. 그렇지만 회사 숙소 아니야? 허락을 벌써 받은 거야?”
“제 집이에요. 명의는 대표님이지만, 우리 계약서에 명시가 돼 있죠. 전화 한 통화로 끝날 일이에요, 이쪽도 그쪽도.”
그날 저녁, 신수영의 부친은 오덕환으로부터 전화를 받았다. 간곡한 어조로 아역배우와 스타의 합숙을 요청하는 건이었다.
그는 10초 정도 고민했고, 일단 아이를 봐야겠다고 답했다.
*
소녀의 가정은 화목했다. 그리고 소녀는 부친을 사랑했다.
그는 검사였다. 사회적으로 존경받는 위인이었으며, 가정에 충실했고, 늘 인자하게 웃었다. 그런 사람을 사랑하지 않을 딸은 세상에 존재하지 않을 터였다.
검사는 또한 아들딸 구별 없이 사랑하는 인물이었다.
비록 대를 이을 손자를 원하는 부모를 위해서 늦둥이를 봤지만, 그 동생으로 인해 소녀에게 소외감을 안겨주는 일은 없었다.
소녀가 배우가 되겠다고 나섰을 때에 작은 위기가 발생하긴 했다. 검사가 법무연수원 시절 뚜쟁이를 통해 소개받아 결국 결혼에까지 골인한 부인의 처가는, 무척 부유했고, 배우를 딴따라라고 부를 정도로 고지식했다.
그런 처가를 설득한 것 역시 검사였다. 그는 길고 차분한 설명을 통해서 딸의 꿈을 대신 설득해줬다.
그렇게 따뜻하기만 한 사람이었다. 완벽한 아버지였다.
부인의 외도가 들통 나기 전까지는.
1999년, 유명 여성 아나운서가 친자 논란에 휩싸인 일이 있다. 재혼하여 낳은 아이가 사실은 전남편의 씨라는 찌라시가 퍼지고, 이내 9시 뉴스를 통해 그 미확인 사실이 전파됐다.
대부분의 논란이 그렇듯 진실과는 다른 얘기였다. 여성 아나운서는 친자확인 유전자검사를 통해서 간신히 가정의 화목함을 되찾을 수 있었다.
그 명예훼손 건을 담당하고 기소한 것이 검사였다.
그로부터 얼마 지나지 않은 2000년의 봄. 검사는 부인의 금고에 숨겨져 있던 편지들을 발견하게 된다. 그는 그 안에서 아이의 안부를 묻는 남자의 글씨를 찾아냈다.
그게 배우가 된 소녀의 머리카락이 비밀리에 친자확인 유전자검사를 받게 된 이유였다.
그 검사가 끝난 뒤, 검사는 딸을 남으로 규정했다. 그를 넘어서 거대한 배신과 기만의 상징이라고 판단했다.
그때부터 학대가 발생했다.
처음에는 어쩌다 한 번씩. 다음에는 왕왕 한 번씩. 그리고 곧 매일매일. 불타는 연심에 함락됐던 부인과 딸이 아니게 된 딸은, 검사의 주먹질과 발길질을 받아야 했다.
두 피해자 중 누구도 그를 고소하지 못했다. 폭력의 고소는 곧 부정의 고발로 이어질 터였으니까.
부인은 자신의 사교계 인망이 끝장나지 않도록, 딸은 논란 속에서 작품활동이 끊기는 일이 없도록, 그저 인내했다.
딸 입장에서는 인기리에 방영 중인 드라마 <아담의 모든 것>이 사전제작으로 완성되어 있었다는 점이 천만다행이었다. 그게 아니었다면 파행을 피할 수 없었을 테니까.
이후에 검사가 민감한 사건을 담당해 집에 거의 돌아오지 않게 되었을 무렵, 딸은 새로운 소속사와 계약했다. 그리고 <미스 스캔들> 주연에 발탁됐다.
검사는 그 뒤에야 다시 여유를 냈다. 여유를 내서 자신의 여가활동을 실천했다.
부인과 딸을 향한 폭력이라는, 정신을 위한 여가를.
신수영은 몇 주 동안 잠조차 설칠 정도로 괴로워했다.
폭력의 통증 때문이 아니었다. 자신으로 인해 영화 제작에 문제가 생길지도 모른다는 두려움 때문이었다.
‘언제까지나 숨길 수 있는 일이라곤 생각하지 않았어. 잘 막으려고 노력했지만, 종종 팔이나 정강이, 얼굴을 맞는 일도 생기곤 했으니까. 그럴 때 촬영일정을 조정하기 위해서 감독님께는 말하지 않을 수 없는 일이었지. 그렇지만······ 찬이한테는 들키지 않았으면 했는데.’
소년이 어딘가 발설할까 걱정한 까닭은 아니었다. 다만, 그 아이가 열다섯 살 친동생을 떠올리게 만들었던 탓이다.
신수영의 동생은 오랫동안 가정의 문제를 모르고 지냈다. 검사의 아들로서 밤늦게까지 각종 학원 수업을 받았기에.
그러나 영원한 비밀은 없는 법.
이내 누나의 몸에 자리한 수많은 멍을 발견한 남자아이는, 그 일을 계기로 부친에게 거칠게 반항했고, 그 보상으로서 진실을 알게 되었다.
그때 신수영은 남동생을 잃었다.
호적상으로는 여전히 가족으로 기능하고 있지만, 그뿐이었다. 딸 아닌 딸에게 있어서, 그 집안의 유일한 진짜 아들은, 더 이상 동생일 수 없었다.
‘그래서 찬이를 보고 있을 때면 참 좋았어. 아무것도 모르고 동생 귀여워하며 웃던 시절이 떠올라서. 그 아이도 딱 그랬단 말이야. 사춘기에 접어들고부터는, 내가 만지기라도 할라치면 귀찮다고 싫다고 건드리지 말라고 외쳤지. 그러면서도 잠시 뒤에는 나한테 와서 장난을 걸곤 했었는데······.’
그리운 행복의 계절이었다. 다시는 돌아오지 못할.
믿고 따랐던 누나가 반쪽짜리 가족임을 알게 된 사춘기 소년은, 다시는 그녀에게 말을 걸지 않았다.
적이 된 아버지와 남이 된 동생, 그들 앞에서 평온한 가정을 가장하려다 매번 실패하는 어머니가 있는 그 집에서, 신수영은 가뭄 속의 들풀처럼 죽어가고 있었다.
그렇지만, 마침내 비가 내렸다.
“경험이 없는 아역배우 숙소에서 네가 연기지도를 해줬으면 좋겠다······ 감독이 전화해서 그런 소릴 하던데. 그게 얘냐?”
“네. 재능 있는 아이지만 아직 어려서요. 게다가 드라마 촬영까지 병행해야 해서, 리허설 시간을 많이 못 낼 것 같아요. 제가 같이 살면서 하나하나 가르쳐준다면 큰 도움이 될 것 같아요. 저야 상관없지만, 이 아이한테는 이번 영화가 정말 일생일대의 기회니까요······.”
“흥. 참 형편없는 업계란 말이야. 열두 살밖에 안 된 애를, 숙소에서조차 제대로 휴식하지 못하게 만들다니.”
검사는 당장 침이라도 뱉을 듯이 말했다. 딸을 향한 적대감이 이미 그녀가 속한 업계에까지 전이되어 있다. 신수영은 부디 이찬에게는 불똥이 튀지 않기를 바랐다.
그렇지만 검사는 곧 소년을 향해 시선을 보냈다. 금테 안경 아래에서 긴 눈이 이찬의 위아래를 훑었다.
“이름.”
“이찬입니다.”
“부모님은 뭘 하시냐.”
“예?”
“네 부모님의 직업이 뭐냐고 물어본 거다.”
이찬은 검사의 얼굴을 살피며 잠시 고민했다. 대답을 건네주고 수월하게 신수영을 데려갈지, 아니면 다른 수를 쓸지.
고민은 의외로 길어졌다.
그의 입은 3초쯤이 지난 뒤에야 간신히 소리를 내놓았다.
< 13장 - 배우 신수영 (2) > 끝
ⓒ 비벗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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