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3장 - 배우 신수영 (3.) >
“꼭 대답을 드려야 하나요?”
“뭐 말 못 할 이유라도 있는 게 아니면, 얘기를 해줘야지. 내 딸을 네 숙소로 초청하는 입장 아니니? 그런 거면 당연히 회사 사람이나 보호자가 함께 올 거라 생각했는데, 달랑 혼자 와서, 부모님 직업도 말을 못 하겠단 얘기냐?”
검사의 입장에서는 그게 정론이었다. 하지만 이찬은 그가 ‘내 딸’이라 말한 부분이 조금 우스웠다.
‘후······ 예상했던 것과 다를 바 없는 인물이라 다행이야. 종종 폭행은 하지만 여전히 내 딸이라는 거니까. 이 사람의 이런 체면의식을 파고든다면, 성공률은 결코 낮지 않아.’
차에서 신수영에게 부친이 검사이며 남동생이 있다는 말을 들은 직후부터, 소년은 계략을 짜고 있었다. 그리고 다행히도 검사는 예상을 크게 벗어나지 않았다.
꾸며낸 체면이라는 가식으로 자신을 구성하는 인물.
일반적으로는 진심을 드러내지 않기에 대하기 어려운 인물이겠지만, 이찬에게는 쉬운 먹잇감일 뿐이었다.
‘그런 대사가 있었지. 내 앞길을 막는 사람에게는, 고개를 조아리거나, 또는 그 무릎을 꿇리거나······. 임팩트 있는 대사이긴 하지만 진리는 아냐. 더 좋은 방법이 있지.’
<가을하늘> 성인 씬의 대사였다. 안지성의 친구인 재벌2세 임현수가 그런 말로 친구에 대한 경쟁의식을 드러낸다.
이찬은 과거 그 대사를 읽으며 생각했다- 왜 굳이?
위기는 곧 기회다. 앞을 막는 사람을 내 편으로 만들 수 있다면 그건 두 배의 이익. 보통은 불가능한 일이겠지만, 소년은 늘 그런 일을 성공시켜왔다.
“검사님. 제 양친이 뭘 하시는지는 잘 모르겠습니다.”
“뭐? 허. 말은 어른스럽게 하는 녀석이 그것도 몰라?”
“사실은 살아 계신지 어떤지도 잘 모르겠습니다.”
“······네가 고아······ 아니, 입양되기라도 했다는 말이냐?”
검사라는 직종이 오직 법전만을 파는 이들처럼 오인되기도 하지만, 그건 사실이 아니다. 굳이 기획수사가 아니라고 하더라도 서울의 검사들은 연예계와 접점이 많았다.
신수영의 부친인 신성운은 특히 그런 축에 속했다. 그렇기에 딸의 신인시절에 약간의 힘을 써주기도 했다.
그래서 그는 입양도 되지 않은 고아는 영화의 주연을 따기 힘들다는 것을 알고 있다. 투자자부터가 꺼릴 게 분명하니까.
그러나 그의 질문을 듣고 있는 소년은, 사실 입양도 되지 않은 고아. 그리고 순간적으로 흐릿해진 그의 표정에서 모든 감정을 읽어낼 수 있는 인물이었다.
이찬은 신중한 관찰로 신성운을 읽었다. 그리고 편안하게 답변했다.
“제게는 세 종류의 부모가 있습니다. 첫째 부모는 저를 낳은 사람들. 둘째 부모는 제가 거리를 떠돌지 않게 관리한 사람. 셋째 부모는 제게 삶을 가르쳐주신 분입니다.”
“흠······ 무슨 말인지 알겠구나. 미안하게 됐다.”
“아닙니다. 첫째는 얼굴조차 모르지만, 둘째는 잘 아니까요. 바로 고아원장이라고 답했으면 좋았을 걸 그랬네요.”
다시금 침음을 삼킨 신성운이 턱을 아주 조금 당겼다. 죄의식과 체면의식 등이 뒤엉킨 미세표현.
옆에서 듣고 있는 신수영은 놀란 와중에도 애써 머리를 굴리는 눈치였다. 아마도 소년이 더 곤경에 처하지 않도록 개입하려는 듯 보였다.
그렇지만 필요치 않은 일이었다. 이미 분석이 다 끝났기에.
세상을 누구보다 분명하게 분간하는 소년은, 계획의 성공률이 100%에 근접했음을 확신하며, 설득에 착수했다.
“그렇긴 하지만, 부모님이 뭘 하시냐는 질문을 듣는 순간에는 문득 혼란이 들고 만단 말이에요. 저는 어떤 부모님을 말해야 옳은 걸까요? 낳아준 사람들? 그게 아니면 키워준 사람? 그것도 아니면, 제가 부모님이라고 인정하는 단 한 분?”
“크흠. 내가 미안하다고 했지 않니. 그 얘긴 그만해라.”
“아뇨, 따지는 게 아니에요. 검사님께 진심으로 여쭙고 싶습니다. 저는 정말 혼란스럽거든요. 제 부모님은 누구일까요? 우선 낳기만 하고 버린 사람들을 부모라고 부를 수는 없는 거니까, 첫째는 제외겠죠?”
신성운은 눈살을 찌푸린 채 가타부타 답하지 않았다. 그렇다고 해서 소년의 말을 더 막지도 못했다.
대답하지 않으려는 아이에게 억지로 강요한 게 그 자신이었다. 그래놓고 말을 끊기에는 스스로도 찔리는 면이 있었다.
그 마음을 들여다보며, 이찬은 차분히 말을 이었다.
“저는 눈치가 빠른 아이예요. 그래서 고아원에서도 매 한 번 맞아본 적이 없었죠. 하지만 애정결핍에 빠져 있는 다른 아이들은 매일같이 사고를 치기 일쑤였고, 그 고아원은 원장의 뒷주머니를 불리기 위해 보육사의 수에 비해 지나치게 많은 아이들을 돌보고 있었어요. 어떻게 됐을 것 같으세요? 혹시 폭력이라는 답을 생각하셨다면, 맞습니다. 굉장한 일들이 있었죠. 형과 누나들이 무자비하게 맞는 모습을 자주 봐왔어요.”
“······그 건을 수사해달라고 부탁하는 거라면, 내가 신경은 좀 써보마. 이런 것도 인연은 인연이니까 말이야.”
“그래주시면 감사한 일이죠. 그런데 전 검사님한테 정답을 듣고 싶어요. 먹여주고 키워줬으니 그 고아원장이야말로 제 부모라고 할 수 있겠지만, 정말 그런 걸까요? 형제자매의 몸을 주먹과 발로 때리던 그 사람한테, 제가 가족의 정을 느끼는 게 맞는 걸까요?”
소년이 오래 고민했던 건, 신수영의 남동생을 실제로 만나보지 못한 탓이었다. 이 대사는 원래 그 ‘진짜 아들’의 행동양식을 훔쳐서 말할 때 효과가 극대화되었을 테니까.
그러나 신성운이 답을 강요하는 동안 주변에 잔뜩 걸린 가족사진들을 관찰할 수 있었다. 다수의 사진에서 다양한 표정을 확보해, 그로써 그의 아들을 재현할 수 있었다.
그 순간 성공률은 수직으로 상승했다.
“저는 이렇게 생각합니다. 첫째도 둘째도 제 부모는 아니에요. 무가치하던 제 삶을 배우의 길로 이끌어주신 세 번째 남자야말로, 제게 세상 유일한 아버지입니다. 아마 세상 모든 아이들이 그렇게 느낄 거예요. 피가 섞였다고, 먹이고 키워줬다고, 그런 것으로 부모가 되는 게 아니에요. 인간을 인간이게 만드는 본보기를 보여주기 때문에 아버지인 거예요. 제 생각이 맞죠? 제가 잘못 생각하고 있는 거 아니죠, 검사님?”
보자마자 대뜸 말했다면 의심을 살 수도 있었을 이야기.
그도 그럴 게, 너무도 절묘하게 상황과 맞아떨어지는 비유였다. 신수영에게 가정폭력의 정황을 듣고 나서 치기 어린 비난을 하는 거라고 생각하더라도 이상할 게 없을 정도로.
그렇지만 이 상황은 어디까지나 신성운이 강요한 것이다.
자신의 약점까지 드러내 보이며 정중히 답하는 소년에게 그는 작은 의심조차 가질 수 없었다. 아이 개인의 경험담이기에 심리적인 저항감 없이 제3자로서 받아들일 수 있었다.
그 뒤에야 원관념과 보조관념의 연결이 이뤄졌다.
‘피가 섞였다고, 키워줬다고 해서 부모가 아니다······? 그래, 그렇더군. 빌어먹을 내 하나뿐인 아들놈도, 내게 쌍심지를 세우고 제 누나를 폭행한 죄를 논했어. 그 상황을 견딜 수 없어서 말실수를 해버렸고, 그래서 아들놈마저 저 남의 딸을 멀리하게 되었지만······ 그보다도 나를 더 멀리하고 있지. 젠장.’
간단히 말해 이런 얘기였다.
사랑으로 키운 딸은 자신의 핏줄이 아니었다. 유일하게 남은 아들 앞에서는 도저히 존중할 수 없을 모습을 보여줬다.
그에게 남은 건 소년이 말한 고아원장과도 같은 지위뿐.
이찬의 부모 분간법에 따르면, 이젠 둘 중 누구에게도 아버지라고 불릴 수 없게 된 셈이었다.
‘하지만······ 대체 왜 이렇게 됐지? 난 그런 인간이 아니었어. 인간이 인간일 수 있게 하는, 본보기가 되는 아버지였어. 그랬던 내가 어쩌다 여기까지 떨어지게 된 거지······?’
언제나 누구에게나, 어려운 건 시작뿐이다.
20년간 애지중지 키워온 딸이 남의 아이임을 알았을 때 신성운은 이성을 유지하지 못했다. 술을 마시고 쿵쿵거리며 거실을 휘젓다가, 그 광증을 말리는 부인에게 손찌검을 했다.
선량하고 싶었던 검사는 그 직후 고개를 조아려 사죄했다.
죄는 미워도 사람을 미워해선 안 될 일이니, 다시는 때리지 않겠다고 약속했다.
그러나 공수표였다.
부인이 외출할 때마다 남자를 만나러 가는 게 아닌가 의심되었다. 딸 역시 그 못된 피를 물려받아 아무 남자나 만나고 다닐까 의심됐다.
그렇게 가족을 혐오하는 자신을 잊기 위해 술을 마셨다. 그런 날이면 저도 모르게 또 주먹이 올라갔다.
반복되면 될수록 폭행은 점점 쉬워졌다. 허들은 낮아지고, 이유는 많아졌으며, 주기는 짧아졌다. 마치 담배가 느는 것처럼 그 행위에 의존하게 되었다.
이제는 술을 마셨기 때문이 아니라 술을 마시지 않기 위해 때리는 일까지 생겼다.
폭행을 하고 난 직후의 잠시간은, 멍청한 숙주새처럼 탁란(托卵)을 당했다는 자괴감에서 벗어날 수 있었으니까.
‘······나는, 이제 끝난 거구나. 하하, 꼴좋군. 내 아들을 닮은 저 소년이 경멸하는 첫째와 둘째 부모처럼, 나 역시 이제는 누구에게도 진심 어린 아버지 소리를 들을 수 없게 된 거야. 평생을 멍청하게 살아온 놈의 끝에 어울려. 부인을 잃고, 딸도 잃고, 이젠 멍청한 대응으로 아들마저 잃은 셈이구나. 돌이킬 수도 없는 머저리 같은 화풀이 때문에······!’
거기까지 생각하는 데에는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애증의 딸이 몇 달간 집을 나간다는 사실에 감상에 젖은 날이었기 때문만은 아니었다. 깨닫지 못했을 뿐, 사실 무의식적으로는 그 스스로도 몰락을 알고 있었던 것이다.
이제는 누군가를 폭행하겠다는 의욕조차도 가지지 못할 만큼 자신을 내려놓고, 삽시간에 몇 년은 늙은 듯한 남자.
감정을 읽는 이찬이 그 남자의 심리를 바라봤다.
“세 번째 아버지는, 정말 아무 사이도 아니었어요. 핏줄도 아니고, 제 성장을 지켜보지도 못했죠. 저 때문에 칼까지 맞으셨으니 손해도 이만저만이 아니었을 테고요. 그런데, 그 사람은 저를 있는 그대로 봐줬어요. 세상에서 유일하게 그 사람만이 저를 축복받은 아이라고 해줬어요. 핏줄도 아니고 인연도 없는 저를 말이죠. 그래서······ 그분은 한 번도 그러라고 한 적이 없었지만, 저 혼자 불러보곤 했어요. 아버지라고요.”
“······네 생각이 맞는 것 같다. 내가 괜한 질문을 해서 안 좋은 생각을 떠올리게 했는데, 음······ 이걸로 용돈이라도 해라.”
수표 몇 장을 쭉 밀어서 준 신성운이 침음하며 고개를 돌린다. 이찬은 그 답례를 거절하지 않고 냉큼 챙겼다.
그건 결코 불공정한 거래가 아니었다.
귀찮다는 듯 잔뜩 찡그린 척하는 검사지만, 그 내면에는, 수표 몇 장으론 사기 힘들 깨달음이 자라나고 있었다.
*
10분 만에 걸어 나온 신수영의 짐은 간소했다.
청춘스타로서 사복도 많은 그녀지만, 영화를 촬영하는 기간에는 입을 일이 많지 않을 터. 촬영에 필요한 복장은 전부 프로액터스에서 준비할 터였다.
그런 신수영과 소년은 나란히 걸었다. 아무 대화도 없이 저택을 나와, 뒤도 돌아보지 않고 신수영의 차에 올라탔다.
거긴 둘만의 공간이었다. 매니저는 일찌감치 돌려보냈기에.
그때에야 이찬이 입을 열어 질문했다.
“화났어요?”
“······응.”
“많이 화났어요?”
“응, 응!”
애교 같은 귀여운 대답은 많이 화난 사람이 보통 보일 법한 태도는 아니었다. 그렇지만 그녀는 진심이었다.
그 분노가 소년을 향한 게 아니었을 뿐.
“미안해. 나 때문에 그런 얘기까지 하게 만들어서. 정말 나쁜 사람이야. 너한테 도움만 받는 것도 미안한데, 이렇게 기분 나쁜 상황까지 겪게 해버려서, 정말로 미안해.”
“뭘요. 결과적으로 상부상조가 됐는데요.”
“어? 상부상조?”
“네. 검사잖아요? 무슨 검사예요? 차장검사? 부장검사?”
드라마로 본 검찰 직급을 떠들며, 이찬은 환하게 웃고 있었다. 신수영에게는 충격적인 일이었다.
“검사가, 그게 왜 상부상조가 되는 건데?”
“왜는 왜예요? 앞으로 내 빽이 돼주실 테니까 그런 거죠.”
“저 사람이? 왜 네 빽이 돼주시는데?”
“······뭐야? 이 누나 전혀 감을 못 잡고 있네? 같은 방에서 대화한 사람 맞아요? 내 기분 걱정하느라 내용에는 전혀 집중을 못 한 거예요?”
정답이었다. 신수영은 고아라는 말이 나온 직후부터 대화의 맥락을 제대로 읽지 못하고 있었다.
“어휴. 누나, 단적으로 말해서 이젠 합숙 안 해도 괜찮아요. 저 아저씨가 누나 때리는 일은 다시는 안 생길 테니까.”
“······그게 무슨 소리야?”
“그렇게 됐어요. 정말 바닥끝까지 떨어져서 반성한 건 아니라서 어정쩡하긴 한데······ 간단하게는 이런 느낌이에요. 하나뿐인 아들한텐 좋은 아버지가 되고 싶다. 그러려면 핏줄이 아니라고 해서 가족들을 학대해서는 안 된다. 이런 사고구조가 확립이 된 거죠. 믿어도 돼요. 내가 사람 심리 잘 읽는다는 건 ‘심리학자’ 안정록 교수님도 인정한 사실이니까.”
지도교수의 이름이 아니더라도, 신수영으로선 의심할 수 없는 이야기였다. 이찬은 이미 그녀의 표정만 보고서 폭행의 주체와 원인까지 짚어낸 바 있었다.
“네가, 그렇게 설득을 했다는 거야?”
“그런 셈이긴 한데, 본인 생각은 다를 거예요. 그저 날 객관적상관물로 삼아서 스스로 깨달았다고 믿겠죠. 그래서 제게는 호의를 가질 수밖에 없는 거예요. 자기 잘못을 직접 지적한 것도 아니면서 더 나은 사람이 되게 해줬으니까. 심지어 불쌍한 꼬마기도 하니까, 도와주지 않을 도리가 없을 거예요.”
“맙소사. 넌, 처음부터 거기까지 생각했던 거야? 나랑 합숙한다는 것만이 목적이 아니라, 그 이후를 본 거야?”
“······겸사겸사라고 대답해드릴게요. 데뷔작의 완성도도 물론 중요하죠. 그렇지만 장기적으로 빽은 더 중요하거든요. 검사 빽이라니, 최고잖아요? 앞으로 세상에 두려울 게 없겠어요.”
그건 거짓말이었다. 이찬은 이제 진심을 알고 있었다.
‘사실 핑계라고 하는 게 더 맞겠지. 그저 이 누나를 구해주고 싶었어. 그러기 위해 가장 성공률이 높은 감화 전략을 사용한 거고. 그렇지만 그렇게 말하기는 너무 부끄러운걸······.’
날카로운 헛기침으로 부드러운 감정을 감추며, 소년은 논리적인 이야기로 돌아왔다.
“그렇지만 그걸로 끝날 일은 아니죠. 이제부터 안 할 거라는 예상만 가지고 범죄를 용서할 필요는 없어요. 공은 이제 누나한테 갔어요. 앞으로 지켜보고 어떻게 할지 결정하세요. 저 같으면 아무리 반성했다고 해도 다시는 받아주지 않겠지만······ 뭐 시간은 많이 있으니까요.”
“그렇지······. 법정공방 스캔들이 돼버리면, 여배우한테는 좋지 않을 테니까.”
“그런 뜻은 아니었는데.”
이찬의 부정에 신수영의 얼굴이 다시 복잡해졌다.
“그러면?”
“마지막 기회일지도 모르니까요. 말했잖아요? 핏줄이 아니라고 해서 가족이 될 수 없는 건 아니에요. 제 말에 이성을 되찾은 검사님은, 좀 더 나은 사람이 될 수 있을지도 몰라요. 한때 단란한 가족이었던 사람들이 도와준다면 그게 더 빨라질 수도 있겠죠. 되게 행복해 보이던데요? 가족사진 보니까.”
신수영은 왈칵 눈물이 솟는 것을 느꼈다.
이찬의 말대로였다. 비극의 2000년이 오기 전까진 늘 그랬다. 네 가족은 단란했으며 포근했다. 평온 속에서는 그만큼 좋은 아버지도 없었다.
어머니의 외도가 드러나지 않았다면, 지금도 그랬을 터였다.
그렇기에 그녀는 부친보다도 모친 쪽을 더 원망해왔다. 언젠가는 아버지가 예전으로 돌아올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불안과 공포 속에서도 집을 등지지 못했던 데에는, 어쩌면 그런 까닭도 작용했을지 모를 일이었다.
이찬은 눈물의 여배우를 보며 그 감정의 파편을 확인했다.
‘······참나. 속 좋은 누나야. 아직까지도 기대를 걸고 있다니.’
소년은 다시 가질 수 없을 기대였다. 친부모는 생사도 모르고, 키워준 부모는 가망 없는 악인이었으며, 마음으로 따랐던 아버지조차 소명의식 속에서 떠나갔기에.
그렇게 다시는 부모를 가질 수 없게 된 이찬은, 신수영이 적어도 용서할 기회는 누릴 수 있기를 바랐다.
“스캔들 따위 생각하지 말고, 신수영으로서 선택하셨으면 좋겠어요. 그래야 나중에 후회가 남지 않을 테니까.”
“······흑, 끅······ 넌 진짜······ 마이 찬!”
대뜸 끌어안는 신수영의 스킨십을 소년은 거절하지 않았다.
그 따뜻함이 사실 놓치고 싶지 않은 위안이었음을, 이제는 알고 있기에.
< 13장 - 배우 신수영 (3.) >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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