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4장 - 기자 이차원 (1) >
“사차원, 니가 얘 좀 취재해라. 이찬이라고 하는데, 알지?”
연예부 부장 오정민의 말에, 취재기자 이차원은 고개를 갸웃거렸다. 소년을 모르기 때문은 아니었다.
“<미스 스캔들> 주연 맡은 애잖아요? 얘를 왜요? 아역 남자애를 왜······ 설마?! 부장님, 출생의 비밀 같은 거라면-”
“이 새끼는, 그냥 알겠습니다 하는 법이 없어. 아니야!”
“아, 아닙니까? 죄송합니다. 근데, 그래도 왜 취재하는지는 알아야 방향성이라든가 그런 게 나오지 않겠습니까?”
“어휴. 사차원 주제에 생각도 많다. 신수영이가 내 친한 선배님 딸이라고 했잖아. 걔랑 붙는 역이니까, 영화 개봉되기 전에 이런저런 일로 이름이 알려지면 좀 좋겠냐는 거야.”
학연과 혈연과 영화 인연으로 인한 기획취재라는 얘기였다.
‘신수영 아빠가 중앙지검 부장검사랬나. 그래서 그 핫한 바디에도 불구하고 몸매 드러낸 사진들은 다 커트된다는 불문율이 있었지. 오 부장님 얼굴 불콰한 걸 보면, 어제 그 검사님이랑 술 한 잔 하신 모양이야. 그렇다면 열심히 해야지.’
긍정적인 방향성을 확인한 이차원이 방긋 웃는다. 오정민은 그 웃는 낯에 혀를 차며 말을 이었다.
“더 정확하게 말하면, 걔랑 신수영이랑 합숙을 하고 있어.”
“오? 그건 또 무슨 상황입니까?”
“영화를 위해서 신수영이가 개인교습을 해주고 있다나봐. 근데 그게 자칫 잘못하면 이상하게 와전될 수 있는 문제잖냐? 그래서 메이저인 우리 쪽에서 다른 포커스를 잡고 픽스를 한다는 거지. 딴 데서 헛소리 못 나오게 말이야.”
스포츠지는 스캔들에 살고 죽는다. 1면에 연예인 가십이 들어가면 판매량이 수십 퍼센트나 오를 정도. 그렇다보니 90년대엔 멀쩡한 남자 가수를 임신설에 휩싸이게도 만들었다.
그런 연예부 데스크의 비양심은 보편적인 것이라, 누군가 영화를 위한 합숙을 해괴한 소문으로 둔갑시키려 들지도 몰랐다. 출생의 비밀이니 하는 식으로.
‘뭐······ 아빠 파워가 있으니 그렇게까지 할 돌아이들은 없겠지만, 혹시 모를 일이지. 파파라치 찍새들 중에는 겁 없는 어린애들도 있으니까. 그렇지만 참 재밌네. 우리 대 찌라시고려가, 오히려 스캔들을 막기 위해서 움직인다니 말이야.’
‘스포츠고려’ 연예부 역시 스캔들의 온상이라고 할 만했다. 상기한 멀쩡한 남자를 앞장서서 물고 뜯었던 기자 중에 당시 취재기자였던 오정민도 포함되어 있었고.
그러나 지금만큼은 가드로서 나설 차례인 모양이다.
이차원은 그 사실에 만족하며 더욱 환하게 웃었다. 그에 오정민이 또 쯧 하고 혀를 찼고.
“자, 봐라. <가을하늘> 아역 주인공으로도 촬영 중이라고 했으니까 애가 실력이 꽤 좋긴 할 거야. 나라엔터 허락 받고 촬영장 따라다니면서 좀 긍정적인 스토리들을 담아보라고. 조혁수와 신수영이 인정하는 천재, 그런 식으로 느껴지게 짜보란 말이야. 차량 부족하니까 니 차로 가고. 됐지?”
“잠시만요. 근데 그런 거면 프로액터스랑 연락해서 말 맞추는 게 낫지 않겠습니까? 신수영 사진을 써야 일면에 내죠.”
“이 자식은 멍청한 거야, 반항적인 거야? 합숙이긴 해도 남자애랑 동거한다는 얘긴데, 그걸 일면에 쓰면 어떡해? 얼핏 본 놈들이 이상한 소리를 지껄일지도 모르잖아? 그리고 이 새끼야, 그 꼬마가 나라엔터 아니냐? 거기서 강정후 이래로 또 대형 아역을 발굴해낸 거야. 그런 식으로 살을 붙이면, 좀 설레발이긴 하지만, 어쨌든 화제는 될 거 아니겠어?”
이차원은 입술을 동그랗게 만들며 고개를 끄덕였다.
“오, 정말 그러네요. 역시 부장님. 현명하십니다.”
“알았으면 빨리 움직여. <미스 스캔들> 제작발표 뜨고 나서 걔한테 눈길 주는 찍새들 생겼다더라.”
자신의 명령대로 빠르게 움직이기 시작하는 이차원의 뒷모습을 보며, 오정민은 속으로만 생각했다.
‘사차원 같은 생각만 하는 녀석이지만, 마음씨가 꽤 곱단 말이지. 이 사파리 같은 연예부 안에 어떻게 적응했나 싶을 정도로. 그렇게 보기 드문 순둥이 녀석이니까······ 그 꼬마 마음에도 쏙 들겠지?’
*
그 무렵, 이찬의 식탁에는 세 사람이 둘러앉아 있었다.
“수영아, 어때? 입에 좀 맞아?”
“네! 너무 맛있어요, 언니. 진짜 못하는 요리가 없으시네요.”
“후후후. 이 언니가 솜씨가 좀 있지.”
톱스타와 합숙하기 위해 내보낼 예정이었던 염수진이지만, 가정부 딸린 집에서만 살아온 신수영이 난색을 표했다. 요리에 자신이 없어서 이찬의 영양실조가 염려된다는 게 요지.
결국 그녀가 염수진과 같은 방에서 지내는 데 합의해, 3인 살림으로 발전했던 것이다.
물론 나라엔터 대표 이군영은 그 군식구를 불편하게 여겼다. 프로액터스에 뺏긴 이후 밉상처럼만 보이는 신수영의 더부살이를, 그는 처음부터 썩 반기지 않았다.
그렇지만 결국 소년의 의견을 받아들였다.
윤대흥의 죽음 이후 이찬을 함부로 굴리고 있다는 죄책감도 작용했지만, 제법 구미 당기는 플랜이 더해졌기 때문.
“찬아, 넌 어때? 맛있어? 누나 손맛이 아주 감동적이지?”
“언니, 찬이 집중하고 있는 것 같아요. 머릿속으로 오늘 할 연기를 시뮬레이션 하고 있는 걸 거예요.”
“앗. 그러면 방해할 수 없지.”
이찬은 연기 시뮬레이션을 하는 중은 아니었다. 식사도 하는 둥 마는 둥 하며 상기한 플랜을 검토하는 중이었다.
‘신수영 누나와의 합숙은 좋은 아이템이야. 내 이름값은 보잘것없지만, 이 누나는 톱스타란 말이지. 또 어린 나이에 작품을 위해 합숙까지 하는 열정은 기사로 뽑기 좋은 요소. 이 정도면 대중에게 내 이름을 각인시키기 좋은 소재야.’
확신에 찬 플랜은 아니었다. 소년이 속속들이 알아볼 수 있는 건 어디까지나 개인에 한정되니까.
대중 속성에 대한 이해는 그저 연예면 기사들과 현대 배경 드라마에 기초해 쌓아왔다.
그럼에도 자신감을 갖고 일을 추진할 수 있게 된 건, 모사꾼 이군영 대표가 가능성을 인정해준 까닭.
‘그 사람이야 수영 누나 부친이 내 연줄이 될 거라고는 생각지도 못하고, 그저 내 이름값을 키울 기회라고 기뻐한 거겠지만. 후후, 그 결정이 자기 족쇄가 된 걸 알고 나면 어떤 표정을 지을지 궁금한데? 아······ 이건 좀 못된 생각인가?’
악의와 선의의 충돌 속에서, 이찬은 수저를 내려놨다.
“수진 누나, 슬슬 출발하죠.”
“어? 밥도 다 안 먹고?”
“일정 밀리면 안 되잖아요. 속초 갔다가 제시간에 <미스 스캔들> 촬영장 떨어지려면 느긋하게 굴 수 없어요. 수영 누나도 이따 저녁에 늦지 않게 오세요. 또 핑계 대면서 스케줄 밀리게 하시면 곤란해요. 전 두 작품 병행하는 중이라고요.”
“하핫. 마이 큐트 찬, 누나가 꼭 안 늦게 갈게.”
신수영의 웃음 가득한 대답을 들으며 소년은 생각했다.
‘어리다는 게 편리하긴 하단 말이지. 이렇게 막말을 하는데도 전혀 불쾌한 기색이 없는 건, 그저 도움을 받았다는 인식 때문만은 아니야. 그런 의미에서 많은 관계자들과 친해져놓으면 좋을 것 같아. 나중에는 경쟁하는 관계가 될 수도 있겠지만, 소년기의 나를 만나본 인연이 추억이 돼서 이후에도 적대하기 어렵게 될 거야. 어쩌면 그러면서 내 곁을 지켜줄 좋은 사람들을 더 찾을 수 있을지도 모르고. 일단 오늘은 주연 4인방이 전부 올 거라고 했고, 또 연예부 기자도 한 명······.’
그들에게 강한 인상을 남겨주기 위해, 이찬은 고민을 지워내고 머릿속에 미소년 안지성을 덧씌우기 시작했다.
*
속초에 도착했을 때, 이차원은 한창 촬영에 집중하고 있는 아역들을 발견할 수 있었다. 이찬, 명진아, 정신혜 등등.
그렇지만 그들이 전부는 아니었다. 모니터 뒤쪽으로 조혁수, 이소연, 최정하, 김미림의 모습까지 눈에 들어왔다.
‘이게 무슨 일이지? 분명히 아역 씬 촬영이라고 들었는데? 저 사람들 멘트까지 따게 됐으니 잘된 일이긴 한데······.’
궁금증을 마음속에 묻어둔 채, 이차원은 비굴한 태도로 스탭들 사이로 기어들어가 심성윤 감독에게 접근했다. 운 좋게도 그가 도착할 때쯤 OK 사인이 났다.
스탭들이야 다음 쇼트 준비한다고 정신없게 되었지만, 세팅을 기다리는 감독과는 편하게 대화할 수 있었다.
“안녕하십니까, 이 시대의 거장 심 감독님! 작품 쉬시는 동안에도 뵙고 싶어서 혼났습니다.”
“어, 이 기자. 생각보다 좀 늦었네?”
“헤헤, 제 차가 좀 고물이 되어놔서요.”
“거참. 그런데 찬이는 왜 찍겠대? 뭔 소릴 듣고 왔어?”
“뭔 소리는요. 좋은 소리 듣고 왔지요, 헤헤.”
그렇게 답하면서도 이차원은 속으로 의구했다.
‘CP도 이런 식이었는데. 이찬을 찍겠다는 말에 별로 당황하질 않았단 말이야. 당연히 취재가 올 만하다고 생각했던 것처럼. 그야 꽤 입소문이 돌고 있다고는 들었는데, 그래봤자 데뷔할 때까지 시간이 한참 남은 아역일 뿐인데······?’
물론 생각과 달리 얼굴은 방긋방긋 웃고 있다. 그는 공손하고 조심스런 태도로 심성윤에게 귓속말을 건넸다.
“그런데 성인역 배우들이 다들 모였네요? 웬일입니까?”
“그야 견학이지. 우리 찬이 연기에 푹 빠져보는 시간.”
“견학이요? 아역 연기하는 걸요? 왜요?”
“그거야 당연히······ 야, 이따 얘기하자. 자리들 잡아보자!”
곧 리허설이 진행되어 심성윤과는 대화를 이어갈 수 없게 됐다. 이차원은 슬금슬금 조혁수에게 접근했다.
“안녕하십니까, 조혁수 배우님. 오랜만이에요.”
“이차원 기자님? 반갑습니다.”
“오늘 촬영을 견학하러 오셨다고 하던데요? 진짜예요?”
“예, 뭐. 그러는 이 기자님은 어쩐 일이십니까?”
“아역을······ 이찬 배우를 좀 취재하러 왔습니다.”
“저 녀석을? 속초까지 찾아올 정도로 소문이 돌았습니까?”
소문이 돌긴 했지만 속초까지 찾아올 정도는 아니었다. 이차원은 고개를 갸웃거리며 목소리를 낮췄다.
“혹시 제2의 강정후다, 그런 소문을 말씀하시는 겁니까?”
“음, 그런 식으로 말이 도는 건가. 제가 뭘 설명해드릴 건 없을 것 같습니다. 촬영현장 직접 살펴보시죠.”
딱딱한 목소리로 답한 뒤에 모니터에 집중해버린다.
촬영현장보다는 스타들의 목소리를 담는 게 더 중요한 입장이지만, 일개 취재기자가 스타 중의 스타인 조혁수의 심기를 거스를 수는 없는 노릇. 이차원도 곧 그의 행동을 뒤따랐다.
이찬은 명진아와 함께 초여름의 들판을 걷는 중이었다.
“너······ 정말 괜찮겠어? 며칠 쉬는 게 좋을 텐데.”
“아아니, 괜찮아. 나 오빠 닮아서 강한 지혜인 거 몰라?”
“알지. 강하고, 착하고, 그렇다는 거 알지.”
“헤헷. 정말? 귀엽지는 않구?”
“귀엽기도 하지.”
“그러면, 그러면 예쁘지는 않아?”
“예쁘기도 해. 엄마 닮아서, 정말 예쁘지.”
연예부 기자로 2년을 구르며 많은 아역들을 본 이차원의 생각에, 그건 꽤 자연스러운 연기였다. 어딘지 음울하고 무거운 분위기가 느껴지긴 하지만, 금양기획의 유망주인 명진아와 붙어 있음에도 빠진다는 생각이 들지 않았다.
‘흠. 천재소년이라고 소문이 날 만은 한데. 저 교복 입은 멋쟁이가 사실은 키만 큰 열두 살이라는 거니까 말이야. 하지만 그것만으로 강정후의 후계자라고 부르기는 좀······.’
그런 생각을 하며 어깨를 으쓱거리고 있는데, 이찬과 명진아가 디렉팅을 받기 위해 모니터 쪽으로 다가왔다. 뭐라도 건질 게 있을까 생각한 이차원도 그쪽에 찰싹 달라붙었다.
“자, 일단 찬이는 오케이. 그대로만 해주고. 우리 진아. 방금은 전체적으로 나쁘지는 않았는데, 좀 더, 막연한 불안감 위에 결연한 의지 같은 게 느껴지면 더 좋을 것 같아.”
“죄송합니다! 열심히 한다고 했는데······.”
“그래, 알아. 정말 잘해주고 있어. 지금도 나쁘다고 하는 말이 아니라, 내가 욕심이 나서 그러는 거야. 무슨 말인지 알지? 이렇게 약간만 좀 더······ 자, 모니터 같이 한 번 볼까? 지금 여기, 이 타이밍에 말이야. 오빠가 네 걱정 때문에 우수를 드러내는 순간이잖아? 그 상황에서 동생은 자기 불안감보다도 오빠한테 확신을 심어주기 위해 과장된 표정을······”
이찬은 내버려둔 채 명진아를 향한 디렉팅이 길어진다. 이차원은 그 틈을 놓치지 않고 소년을 향해 접근했다.
“이찬 배우, 안녕? 나 스포츠고려 이차원이야. 이름이 너랑 비슷하지? 이차원이라서, 별명이 사차원이야.”
“안녕하세요. 그런데 사차원이요?”
“어. 상대성이론인가 뭔가 그런 데서 나오는 말이라던데? 잘은 모르겠지만, 우리 부장님이 날 그렇게 부르시거든.”
“아, 네. 오정민 부장님이요?”
“어? 어, 맞아. 네가 우리 부장을 어떻게 아니?”
“어제 같이 한 잔 했거든요. 물론 저야 사이다였지만.”
“으, 응? 그······ 부장검사님이랑 같이?”
“예. 그래서 취재 나오신 거잖아요? 제가 겁이 많아서 마음씨 고운 분으로 보내달라고 했는데, 그러신 것 같네요.”
충격적인 이야기에 이차원의 표정이 굳어졌다.
‘신수영 아빠 부탁 덕분에 아역 주제에 기획기사를 낼 수 있게 된 거라고 생각했는데······ 그게 아니라 아예 같이 술자리를 했다고? 아니, 물론 얘한테는 사이다자리였겠지만, 그게 문제가 아닌데? 자기가 신수영 아빠지 이찬 아빠야?’
중앙지검 부장검사란 기업의 부장과는 비교도 할 수 없는 파워의 직위. 그런 사람이 분위기도 못 맞출 꼬마를 술자리까지 데리고 나올 이유가 없었다.
그저 딸과 붙는 역이기에 키워주려 한다기엔 그 입지와 노력의 상관관계가 과하게 느껴지는 것이다.
자기 별명만큼이나 머릿속이 복잡해진 기자는, 몇 초가 지난 뒤에야 본론을 꺼낼 수 있었다.
“저기, 찬아. 그럼, 이따가 인터뷰를 좀 진행해도 될까?”
“네, 그러셔야죠. 하지만 시간을 따로 내긴 힘든 처지예요. 이따 서울 가는 길에 차에서 인터뷰하면 좋을 것 같아요.”
“오, 그래. 그래도 되지. 사진이야 촬영장 걸로 쓰면 되고.”
“고맙습니다. 앞으로 잘 부탁드려요, 이차원 기자님.”
그 평이한 인사에, 이차원은 저도 모르게 침을 꿀꺽 삼켰다.
< 14장 - 기자 이차원 (1) > 끝
ⓒ 비벗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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