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5장 - 팀장 허성윤 (1) >
「 강정후가 주목하는 ‘천재배우’ 이찬
소년배우의 연극에 안정록, 조혁수, 강정후 등 스타 몰려 」
7월 16일자 헤드라인을 보고, 이군영은 퍽 당황했다.
“정후? 정후 이름이 여기 왜 나와?”
“그게, 안정록 교수가 연극 관람하러 간다는 얘길 듣고서 급히 따라갔던 모양입니다. 인터뷰엔 응하지 않았다고 합니다.”
홍보팀장 허성윤은 그렇게 대답하며 염두를 굴렸다.
‘좋아하는 건지 불쾌해하는 건지 모르겠군. 정후한테도 이찬한테도 도움 되는 일이라고 생각해 받아들였던 건데. 아무래도 안정록이 눈엣가시인 탓이겠지?’
나라엔터 대표이사는 늘 안정록이라는 이름에 과민반응을 보이곤 했다. 교수가 강정후와 얽혔을 때에는 특히.
그렇지만 잠깐의 시간 뒤에, 이군영은 씩 웃었다.
“하, 재밌네. 재밌게 됐어. 그런데 인터뷰에 응하지도 않았는데 왜 이름이 나온 거야?”
“어······ 일단 연극을 관람한 건 사실이니까요. 촬영도 허락하지 않았지만 딱히 얼굴을 가린 것도 아니었던지라, 이미 관람평에 목격담이 섞여서 올라오고 있었던 모양입니다.”
“흠, 그래? 이것들이 1면에 올리려고 머리를 썼구만. 확실히 안정록이랑 조혁수만 가지고는 야구 밀어내기가 힘들지. 우리 정후 정도는 들어가 줘야 안정적으로 1면이 되는 거야.”
강정후 이름을 빼더라도 충분히 1면에 오를 소재임을 모르고 하는 말은 아닐 터. 허성윤은 웃으면서 동의했다.
“맞습니다, 대표님. 정후도 차기작 개봉이 임박했으니 1면에 이름 올리는 건 좋은 일 같아서, 제가 사의를 표했습니다.”
“그래 그래. 스포츠고려가 지금이야 라인 쪽이랑 치고받고 하고 있다지만, 진정한 메이저 스포츠지라고 하면 다들 그쪽을 쳐주지. 우호적인 관계를 유지할 필요가 있어.”
“예, 대표님.”
“그런데······ 별일은 없었나? 안정록이 그놈이 또 사달을 일으켰을 것 같은데.”
허성윤이 생각할 때 문제를 만든다면 그건 안정록보다 강정후일 확률이 높았지만, 이번에도 그는 언행을 삼갔다. 가볍게 웃으며 고개를 젓는 정도로.
“그렇지 않았습니다. 뭔가 일이 있었다면 기사에 안 썼을 리가 없는데, 정후는 그저 인터뷰를 거절하고 빨리 나온 모양이더군요. 그래서 본문엔 정후 얘기가 아예 없습니다.”
“그래? 흠, 뭐 상관없는 일이긴 한데.”
그 반응은 좀 뜻밖이었다. 허성윤은 입술을 오므리며 그 속내를 짐작해봤다.
‘정후가 안정록을 쫓아다닐 때마다 분통을 터뜨렸던 이 대표가 이렇게 평온해 보이는 건······ 아하. 이찬 때문이로군. 그 소년을, 포스트 강정후를 넘어 제1의 이찬으로 만들 셈인 거야. 자신이 그 이찬의 스승으로 자리매김할 거라고 생각하고 있으니, 이제 사소한 일에는 신경이 안 쓰이는 거지.’
이군영의 다음 질문이 바로 그런 맥락이었다.
“안정록이가 말실수한 건 없지? 이찬을 제가 가르쳤다는 식으로 말이야.”
“그러지 않았습니다. 이미 대표님께서 단단히 일러두신 일 아니겠습니까?”
“그렇지. 그 녀석, 하여튼 멍청하게 극단에 발목 잡혀서는. 문광부 우수작품 선정에 힘 좀 실어줬다고 아주 납작 엎드린 거 봐라. 이래서 쓸데없이 정을 가지면 안 돼요. 사람이 철두철미하게 내 것만 챙기고 살아야지.”
“맞습니다, 대표님. 그런 의미에서 찬이도 아주 잘해주고 있습니다. 대극장은 처음이라 꽤 당황했을 법도 한데, 관객들도 그렇고 배우들도 그렇고 극찬을 한 모양이에요. 임팩트 최고라서 분량 적은 게 아쉬웠다는 식으로요.”
“그래 그래. 그 녀석은 늘 최고지. 당연한 일이야.”
이군영이 걱정한 적도 없다는 듯 고개를 끄덕인다. 그러나 다음 순간에는 조금 신중한 얼굴이 됐다.
“하지만 정후도 대기실에는 들렀다 갔겠지? 늘 별관으로만 다니게 했으니, 어제가 걔랑 찬이 첫 만남이었을 테고.”
“그렇습니다, 대표님.”
“둘 속내가 좀 궁금하긴 하군. 이찬이야 연기만 생각하고 있겠지만······ 혹시 모르지. 허 팀장 자네가 체크를 좀 해봐. 둘이 무슨 얘기를 나눴는지, 어떤 생각을 하고 있는지.”
“알겠습니다, 대표님. 바로 정후한테 가보겠습니다.”
“지금? 촬영 벌써 쫑났어?”
“크랭크업은 아직인데, 정후는 내일 비행기 씬만 남았습니다. 그거 찍고 나서 제작발표랑 시사회로 바빠질 것 같습니다. 지금은 찬이가 정신없죠. 밤에나 볼 수 있을 듯합니다.”
“그래 그래. 그럼 난 투자자 미팅 좀 준비해야겠어.”
독대를 마치고 대표실을 나서며, 허성윤은 강정후에 대해서 생각했다.
‘답도 없는 안정록바라기······ 아주 그 교수를 친아버지 따르듯 한단 말이지. 가정도 아주 원만했고 교우관계도 좋았던 녀석이 대체 왜 그러는 건지 모르겠어. 그 점만 제외하면 모든 면에서 모범적인 아이고, 스타성으로는 그 안정록조차 능가할 만한 재목이니, 내 입장에서야 고마운 소재지만.’
그런 생각을 하며 찾아간 강정후의 자택은 그러나 그 원만한 가정의 저택은 아니었다. 수십 개의 CF로 집을 몇 채는 사고도 남을 돈을 번 주제에, 강정후는 벌써 몇 년째 호텔 스위트룸에서 숙식을 해결하고 있었다.
“정후야. 나야, 허 팀장.”
문이 열리고 드러난 아주 잘생긴 얼굴. 제3자가 본다면 그저 미모에 감탄할 수밖에 없는 자태였지만, 그의 홍보를 총괄하고 있는 허성윤은 그 모습에서 초췌함을 읽어냈다.
“녀석. 상태가 안 좋아 보이는걸?”
“그냥 좀······. 오늘 인터뷰 스케줄은 없는 걸로 아는데요?”
“왜 이래? 형이 아끼는 동생 보러 온 건데 말이야. 정후 너 어제 술 마셨지? 그럴 것 같아서 해장국 사왔는데.”
안정록을 만난 날이면 강정후는 늘 소주를 마셨다. 세련됨으로 가득한 스위트룸 테이블에 얼큰한 해장국이 세팅되고, 고개를 꾸벅인 강정후가 그 빨간 국물 위로 얼굴을 파묻는다.
“잘도 먹네. 그런데 정후야, 어제는 어쩌자고 공연장까지 갔어? 안정록 교수가 보고 싶으면 따로 보면 되잖아? 별관하고 본관이 그리 먼 것도 아닌데 말이야.”
“대표님이 그걸 알아보라고 시키신 겁니까?”
“아니, 아냐. 그냥 내가 궁금해서 물어본 거야.”
“······안 선생님이 회사에 나오시는 게 그저 수다 떨려는 목적은 아니잖습니까. 방해할 생각은 없습니다.”
“음. 그렇지만 연극을 보러 가서 우연히 만나는 건 방해하는 게 될 수 없지. 역시, 넌 참 배려심이 넘친단 말이지.”
정확한 사실을 말하자면 안정록이 직접 강정후를 밀어낸 탓이었다. 96년도의 연기대상 시상식에서, 교수는 다시는 사적으로 만나지 말자는 말로 옛 제자와의 인연을 끊었다.
그러나 허성윤 팀장은 알지 못하는 진실. 강정후는 씁쓸한 웃음으로 그 화제를 밀어냈다.
“음······ 그러면 찬이랑은 어땠니? 너 걔랑 처음 본 거잖아? 대표님이 제2의 강정후가 될 거라면서 데려온 녀석인데, 네가 볼 땐 어떤 것 같았어? 가능성이 좀 있어 보였니?”
“없습니다.”
칼로 자르듯 날카로운 즉답이었다.
“안 됩니다. 그런 허접한 녀석이 성공할 수 있는 세계가 아니에요. 망할 겁니다. 이찬은 버리시는 게 이득입니다. 안타까운 일이지만, 저는 그렇게밖에 생각이 안 되더군요.”
혼란 속에서, 허성윤은 황망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
<미스 스캔들> 촬영장에 도착했을 때, 이찬은 스탭진의 뜨거운 환성을 들어야 했다. 뭔가 큰일이 있는 건가 당황해서 주변을 살핀 뒤에야 그들의 박수갈채가 자신을 향하고 있음을 알 수 있었다.
특히 오덕환 감독의 박수가 가장 우렁찼다. 수줍은 성격 탓에 목소리는 좀 작았지만.
“이찬, 축하해.”
“안녕하세요, 감독님. 이게 무슨 소란이에요?”
“스포츠고려 1면, 축하하는 거야.”
“뭘 그런 걸 가지고. 제가 뭔가 한 것도 아니고 그저 유명한 사람들이 많이 와서 화제가 된 건데요?”
“그런 사람들이 모이도록 만들었다는 점이 대단한 거야. 이찬, 고맙다. 네 덕분에 이번 작품이 더 이목을 끌 것 같아.”
이차원이 쓴 기사의 하단에는 이찬이 현재 촬영 중인 작품들에 대해서도 간략하게 기재되어 있었다. 원래 주목도가 높았던 <가을하늘>에야 큰 영향이 없겠지만, 저예산 영화인 <미스 스캔들> 쪽에는 큰 호재였다.
“그렇다곤 해도······ 그 전에 나올 가 어떻게 되느냐가 관건이긴 하겠지만.”
“아, 강정후 아저씨 나오는 영화요?”
“그렇지. 하하, 강정후가 아저씨라니······ 새삼 신기한걸.”
강정후의 하이틴 시절 초기작 중 하나를 맡았던 오덕환 입장에서는, 그보다도 열한 살이나 어린 이찬의 표현이 영 어색했다. 그 머릿속에선 두 사람이 동급인 까닭.
이찬은 고개를 저으며 화제를 돌이켰다.
“감독님 생각엔 어떠세요? 그 영화, 잘될 것 같나요?”
“잘될 거야. 원래대로라면······ 어려웠겠지. 냉전기류 속에서 잘될 시놉은 아니었으니. 강정후가 합류하기 전까지만 해도 제작진이 국보법 걱정까지 하고 있었다고 해. 그렇지만 6.15 공동선언 뒤로 화해 무드 만들어지고, 영화에도 기대감이 커졌지. 강정후에 김은희까지 참전한 대작이 망할 일은 없어.”
소년은 참전이라는 표현이 참 적절하다고 생각했다. 실제로 전쟁 씬을 촬영할 건 아니겠지만, 분단국가의 헌병과 UN 조사관 역할로 캐스팅된 두 사람이니.
“그렇지만 개봉 시기는 좀 떨어져 있잖아요? 크게 영향을 받진 않지 않을까요?”
“돈 때려박아 홍보하고 있는 영화야. 손익분기는 200만 언저리라고 하고. 아무리 짧아도 6주는 상영할 텐데, 그쪽이 무진장 잘되고 있다면 초기 개봉관 수에서 많이 밀릴 수가 있어. 그러면 입소문에도 딜레이가 생기고, 자칫하면 그쪽이 내려간 뒤에도 반등이 쉽지 않을지 몰라.”
부정적인 미래를 예견하면서도 오덕환 감독의 표정은 어둡지 않았다. 그보다는 오히려 그 대결을 기대하는 듯했다.
“이길 거라고 생각하시는 것 같은데.”
“이길 수는 없어. 거기까지는 기대 안 해. 정상회담만 아니었어도 혹 몰랐겠지만, 이젠 절대로 이길 수 없게 된 작품이야. 그렇지만 질 생각도 없어.”
“이길 수는 없는데 질 생각도 없는 거예요?”
“그래. 관중동원에선 지더라도, 평가에선 이길 거다. 넌 할 수 있어. 그리고 난······ 해낼 거고.”
소년에 대한 믿음과 스스로의 결의를 표출한 말. 이찬은 그 의지에 웃음으로 보답해줬다.
“맞는 말씀이네요. 평가만큼은, 그 어떤 영화에도 지지 않게 할게요. 같이 잘해봐요, 감독님.”
“그래. 그건 좋은데······ 너 매번 너무 일찍 나오는 거 아니야? 성장기에 잠이 부족할 텐데?”
이찬은 고개를 저었다. 실상은 그 반대였기에.
“너무 빨리 자라서 걱정인데요. 크랭크인 하고 나서 4cm가 더 컸어요. 벌써 163인데, 너무 빨리 커서 아역 맡기 힘들어지는 거 아닌지 모르겠네요.”
“······그건 또 그렇게 문제가 될 수도 있겠군. 신수영이 키가 커서 정말 다행이야. 그렇지 않았다면 그림이 이상해졌을 테니까. 아, 마침 저기 오는구나. 173짜리 슈퍼모델이 말이야.”
슈퍼모델이라는 건 물론 비유였다. 처음부터 연기자 지망이었던 신수영은 모델 업계로는 눈길도 준 적이 없었다.
그리고 지금은, 감독과 스탭들에게 아주 잠깐 인사한 걸 제외하고는 이찬에게서 눈길을 떼지 않는 중.
“찬, 찬, 마이 찬!”
“아 쫌, 놔요. 같이 출발했는데 왜 이렇게 늦었어요?”
“그야 이 누나는 톱스타 역할이라서 스타일링이 오래 걸리니까 그런 거지. 우리 1면 스타보다 늦어서 미안해요오.”
“아 제발, 진짜 스킨십 좀 그만해요. 안 그래도 촬영할 게 다 그런 내용인데.”
“그러니까 미리 리허설을 해야 되지 않겠어? 오늘 지나면 앞으로 냉전 씬만 오래 찍을 텐데, 지금이라도 좀 안아보자. 큐트 찬, 참아줄 수 있지?”
냉전 씬이라는 말 또한 비유였다. 정확하게 말하자면, 친남매가 아니라는 진실을 밝혀야 된다고 생각한 심지호가 조금씩 심유리로부터 거리를 두기 시작하는 플롯.
음흉한 변태처럼 혀를 날름거리는 신수영에게 붙잡힌 채, 이찬은 머릿속으로 또 다른 냉전을 생각했다.
‘ 쪽은 거의 막씬만 남겨두고 있다고 했었지. 우리 쪽도 이제 주요 씬은 클라이막스야. 그렇기에 개봉 시기는 4주 차이. 정말 그쪽이 200만 이상의 관객을 동원한다면, 그조차 긴 시간이라고 말할 수 없어. <가을하늘> 임팩트를 통해서 얻어낼 내 이름값으로는 강정후라는 최고의 흥행카드를 이겨낼 수 없고. 그렇다면, 내 레퀴엠을 최고의 작품으로 만들기 위해 필요한 건 입소문. 압도적인 입소문을 통해서 젊은 관객들을 끌어들여야 돼. 그러려면 우리 쪽 냉전 씬을 그들의 냉전 이상으로 완벽하게 묘사해야지. 형을 위해서, 반드시 그걸 해내야 해.’
굳은 결의 속에서, 이찬은 경쟁작의 주인공인 강정후와의 첫 만남을 떠올렸다. 그건 굉장히 괴상한 만남이었다.
‘······안정록 아저씨가 그랬지. 특별한 관찰력을 가진 사람의 성장과정이 어떻게 범상할 수 있겠느냐고.’
1분. 강정후와 마주한 그 시간 동안, 소년은 그 말을 되새기며 최고의 흥행카드를 분석하기 위해 애썼다.
그렇지만 실패했다.
강정후는, 대기실의 주인인 소년에게 말 한마디 안 붙여서 배우들을 당황하게 만들면서도, 이찬조차 분간할 수 없을 정도로 두터운 가면을 몸에서 떨어뜨리지 않았다.
‘믿을 수 없을 정도로 완벽한 연기······ 하지만 아주 잠깐은 볼 수 있었어. 그 천재적인 연기자의 얼음 같은 분노를.’
극히 짧은 시간 동안, 이찬은 강정후의 진심을 엿봤다.
안정록이 이찬의 두 손을 맞잡고 그날의 연기에 대해 칭찬하던 단 한 순간이었다.
< 15장 - 팀장 허성윤 (1) > 끝
ⓒ 비벗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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