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6장 - 로드 염수진 (1) >
이찬의 스케줄이 줄어든 기간을 염수진은 열렬히 만끽했다. 한동안 접었던 로맨스소설을 쓰면서.
대단한 목적성을 가진 일은 아니었다. 2000년도는 아직 로맨스 계통의 ‘인소(인터넷 소설)’가 주목받기 이전. 그걸로 돈을 벌겠다거나 책을 내겠다는 생각은 전혀 없었다. 그저 순수한 마음으로 창작에 몰두했다.
주로 꽃미남 스타와 신입 매니저가 서로를 탐하는 19금 스토리였는데, 현직 매니저인 만큼 묘사가 사실적이라 며칠 만에 수십의 독자층을 확보하기도 했다.
그렇지만 그런 시간도 끝나가고 있다. 마침내 비가 개고 한여름의 뜨거운 햇살이 내리쬐기 시작했기에.
이제 다섯 씬이 남은 <가을하늘> 아역 분량과 아홉 씬이 남은 <미스 스캔들>의 결말 분량을 촬영해야 할 때였다.
차에 오르며, 염수진은 이찬에게 그런 전망을 전달했다.
“앞으로 되게 바빠지겠어. 촬영도 그렇지. 속초 가면 오늘도 정신없을 거야, 찬아. 씬은 몇 개 안 되지만 다들 중요한 포인트니까, 테이크를 많이 가져가겠다고 하시더라구.”
“네, 괜찮아요. 근데 정 실장님은요?”
“실장님 오늘 계속 회의하실 것 같아. 어제 인터뷰 촬영한 게 반응이 좋을 것 같아서, 그거 방영될 때까지 이미지메이킹 회의 엄청 할 것 같다던데?”
많은 것이 바뀌고 있었다. 이찬은 이제 더 이상 입소문으로만 알려진 유망주가 아니게 되었고, 당장 6일 뒤인 토요일에는 브라운관에 얼굴을 선보이게 될 터. 홍보팀장인 허성윤은 물론 정창영 실장 역시 바빠지지 않을 수 없었다.
덕분에 이찬의 스케줄은 한동안 염수진이 전담할 예정.
그리고 열두 살 소년의 인상은 그 염수진에게도 퍽 달라져 있었다. 특히 그가 연기하는 안지성을 볼 때는 저도 모르게 사랑스런 눈빛으로 보게 되곤 했다.
‘어린아이라고만 생각했는데······ 신기하지? 애가 키 크면서 점점 더 잘생겨지는 것 같아. 초반부 씬에서도 꽤 괜찮다고 느꼈는데, 날이 갈수록 학교 아이돌 안지성에 찰떡이란 말이야? 아역들한테 대시를 받고 있는 것도 당연한 일이지.’
염수진은 모르는 게 많았다. 이찬이 남태형이라는 미남의 습관을 훔쳐 우아한 분위기를 꾸며내고 있다는 것도, 정신혜가 실제로 이찬에게 기습키스를 감행했었다는 것도.
그렇지만 로맨스 쪽으로 특화된 그녀의 동물적인 감각은, 진실에 가까운 추론을 만들어내고 있었다.
물론 그 판단에 반드시 대단한 감각이 요구되는 건 아니다.
‘저것들 진짜 삼각관계 같은데. 이찬이 간 보고 있나?’
언제나 촬영장 한복판에서 소년소녀를 관찰해온 심성윤 감독 역시, 세 아역 사이에서 미묘한 기류를 읽었다.
사실 느끼지 못했다면 오히려 이상했을 일이었다.
그가 늘 바라보는 모니터 속에서, 명진아와 정신혜는 이찬과 붙을 때마다 과하게 현실감 넘치는 연기를 선보였다.
“아니야! 우리 오빠야! 우리 오빠란 말이야!”
“헛소리 하지 마. 네가 뭔데? 너랑 피 한 방울도 안 섞인 내 오빠한테, 왜 네가 오빠라고 부르는 건데?”
“그만해, 안시라!”
“왜 나한테 그만하라 그래! 쟤가 가짠데, 왜 날 말리는데!”
후끈한 열기가 양호실 안을 채운다. 신지혜가 된 명진아의 눈물과 안시라가 된 정신혜의 절규가 부딪치는 모습은, 창밖의 진행팀조차 눈을 떼지 못하게 만드는 마력이 있었다.
그 사이에서 고통스러운 듯 눈을 감는 안지성 또한 명확했다. 이어지는 대사 없이도 얼굴만으로 고뇌를 발출하고 있다.
그런 소년소녀의 진심 어린 감정들은, 작품의 전개에 대체로 맞아떨어지는 것이었다. 출생의 비밀이란 설정이 다를 뿐 실제로 한 남자를 사이에 둔 경쟁인 셈이었으니까.
덕분에 심성윤은 테이크를 많이 가져가겠다는 자신의 선포를 지킬 수 없게 되었다.
세 번째 씬마저 4테이크를 넘기지 못하고 OK를 외친 감독은, 조용히 이찬을 불러냈다.
“찬아. 내가 생각할 때 그······ 네가 만약에, 아주 혹시라도, 소문 때문에 뭔가를 참고 있다면, 굳이 안 그래도 된다고 말해주고 싶다. 아역들 열애 정도야 큰 화제가 안 된단다.”
“아, 그거요? 그래서 재고 있었던 건 아닌데요?”
“그래? 그럼, 왜 마음을 받아주지 않니? 한쪽으로 정리를 해도 될 텐데. 왜, 둘 다 참 매력적인 아이들이잖아?”
“연기하는 데 불편하게 될까봐요. 이젠 정리해야죠.”
“그, 그래? 그랬구나. 하하, 그거 참. 훌륭하구나······.”
심성윤은 그 어른스러움을 도저히 이해할 수 없어서 헛웃었지만, 스스로 말한 것처럼 소년은 결심하고 있었다. 작품의 촬영이 끝나가니 이제는 관계를 정리할 때가 됐다고.
다만 그 방식에 있어서는 고민하는 중이었다. 어떻게 하면 관계를 유지하면서 정신혜의 어필을 밀어낼 수 있을지.
그렇기에 네 번째 씬 촬영을 앞두고 염수진의 의견을 물어보기도 했다.
“누나. 혹시 남자한테 고백해보신 적 있어요?”
“어? 그, 그런 건 나한텐······ 있을 수 없어.”
“아, 네.”
“하지만, 조언이 필요하다면 해줄 수 있지. 누나가 꽤 유명한 로맨스소설 작가거든. 고백하는 방법이야 많이 알지!”
“고백하는 거 말고, 거절하는 방법이 궁금한데요.”
소년이 읽어온 대본과 시청한 드라마들 중에도 아역 사이의 연애가 조명된 게 없진 않았다.
다만 여자아이가 고백하고 남자아이가 거절하는 전개는 단 하나도 없었다. 그 시기에는 보편적인 일이라고 할 수 없었으니까.
그러나 최신 유행인 인터넷소설을 쓰는 염수진이라면 조금 다를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이찬은 작은 기대를 걸었다.
그리고 염수진은 과연 그에 상응하는 능력을 갖고 있었다.
좀 질척거리긴 했지만.
“거절? 거절을 한다니······ 어느 쪽을 거절할 건데? 하렘은?”
“하렘? 어느 쪽이냐니, 무슨 소리예요?”
“그러니까······ 아, 아냐. 아무튼 상냥하게 거절하는 방법 중에 가장 좋은 건, 다른 좋아하는 사람이 있다고 하는 거지. 누나도 정말 좋아하지만 이미 마음이 정해졌다고. 누나랑은 그냥 좋은 친구로 지내고 싶다고.”
“흠. 다른 방법은 없어요?”
“다른 방법? 아직 못 잊은 사람이 있다거나 연애 할 상황이 아니다 그런 변명도 있긴 한데, 너한테 어울리는 건 아니지. 그럼 어쩔 수 없네. 일에 집중하고 싶다고 하는 게 낫겠어. 앞으로 거짓말인 거 들키지 않기 위해서 노력해야 된다?”
“······제 얘긴 아니긴 한데, 아무튼 고마워요.”
명진아와 정신혜를 두고 저울질하고 있는 거라고 확신하는 염수진의 마음을 알아챘지만, 이찬은 구태여 변명하지 않았다. 어차피 그녀는 그의 매니저니까.
소년이 잘돼야 염수진의 커리어도 잘 풀린다. 쓸데없이 여기저기 추측을 떠벌리고 다니진 않을 터였다.
네 번째 씬은, 친동생 안시라가 수돗가에서 오열하는 모습에 연민을 느낀 안지성이, 그녀를 위해 이제는 지혜를 멀리하기로 결심하는 장면이었다.
이찬은 그 연기를 위해 홍보팀장 허성윤의 얼굴을 훔쳤다.
내면 깊숙한 곳에서 끓어오르는 무의식의 요구- 허성윤에게 있어서는 ‘유일’에 대한 갈망이었던 그 미세표현들이, 안지성이 내면에 품은 옛 동생에 대한 사랑으로 치환된다.
“안지혜. 지혜야······ 미안해. 미안하다. 보고 싶은데, 너무 보고 싶은데, 다시는 너 못 볼 것 같아. 미안해, 내 동생······.”
현실로 인한 무의식의 좌절을 보이며, 소년은 울지 않았다.
대본상으로는 슬픔을 강조하기 위해 눈물을 보인다고 기술되어 있는 부분. 그렇지만 이찬은 당돌하게 씬을 고쳤다.
일반적으로는 용납될 수 있는 일이 아니지만, 심성윤은 화를 내는 대신 이찬을 모니터로 불렀다.
“찬아. 일부러 그런 거야? 방금 눈물 안 흘린 거.”
“죄송합니다. 안지성 입장에서 문득 생각한 건데요, 느티나무 아래에서 울 때 그런 생각을 했을 것 같아서요. 이게 마지막이다, 다시는 울지 않겠다······. 제가 오버한 걸까요?”
“음······ 잘 모르겠다. 이건 내가 생각을 좀 해봐야 될 것 같아. 굉장히 진한 뭔가가 느껴지긴 했어. 눈물을 흘리는 것보다도 더 찡한 느낌을 받긴 했는데, 근데 그게 시청자들한테도 잘 전달이 될지 모르겠네. 우선 이거 살려두고, 다음 테이크에선 원래대로 눈물도 흘려보자. 해줄 수 있지?”
“물론이죠. 바로 준비할게요.”
사실 표출하는 감정이야말로 이찬에겐 쉬운 일이다. 다음 테이크 뒤에는 감독이 의자를 박차고 일어섰다.
“캇! 오케이! 아주 좋았어. 하하하. 우리 이찬, 진짜 자유자재구나? 그리고 신혜도 그간 고생 많았다. 아주 끝까지 깔끔하게 잘해줬어. 너 이번에 방송 나가고 나면 캐스팅 꽤나 늘 거다. 앞으로 기대해보마, 리틀 악녀.”
“감사합니다, 감독님!”
골라 쓸 수 있는 최상의 촬영분 두 개가 생겼다는 생각 때문인지 심성윤은 휘파람까지 불면서 다음 촬영지로 이동했다.
그리고 남겨진 소년이 창밖의 정신혜를 내려다봤다.
첫키스의 대상. 좋은 사람인 건 알지만, 연인이 되기엔 애매한 여자아이. 이번 OK로 붙는 장면이 모두 끝난 동료 아역.
그런 소녀가 묘한 표정을 지으며 묻는다.
“아까······ 애드립이었어? 일부러 안 운 거야?”
“네. 별로였어요?”
“난 그게 훨씬 좋았는데. 뭔지 모르겠는데, 굉장히 찡했어. 되게 안쓰럽나보다······ 그런 생각이 들었어. 근데 너, 뭐 안 좋은 일 있는 건 아니지? 지금도 표정이 별론데?”
안 좋은 일은 아닌데- 생각하며 고개를 젓고, 소년은 손가락으로 양호실을 가리켰다.
학교를 배경으로 한 드라마에서 양호실은 자주 밀회의 장소로 활용되곤 한다. 실제로는 폐교지만, 촬영을 위해 인테리어를 갖춘 그곳 역시 사람들의 눈을 피해 대화하기 좋았다.
흰 천으로 시야가 가려진 양호실에서, 이찬은 깊은 죄책감을 가장한 채 선고했다.
“누나가 해줬던 얘기 오래 고민해봤는데, 안 되겠어요. 저는 연기가 너무 좋아요. 그래서 연애에는 관심 없어요.”
“어······ 정말? 너 이래놓고 진아 선배랑 사귀는 거 아냐?”
“전혀요. 그 누나도 좋은 사람이라고 생각하지만, 관심 없어요. 전 스무 살 되기 전까진 연기만 할 거예요.”
“그래? 그럼, 스무 살 되면 그때 누나한테 와. 그때도 너만 한 연하남 찾기는 힘들 것 같거든. 그리고 그때쯤엔 내가 너보다 더 유명해져 있을 테니까, 아주 공손하게 와야 해?”
정신혜는 조금도 상처받지 않은 듯했다. 자기애로 똘똘 뭉친 꿋꿋한 얼굴로, 그녀는 8년 뒤를 이야기했다.
‘······정말이지 대단한 정신력이야. 아무리 진심 없는 고백이었다고 해도, 딱 자른 거절 듣고 나면 좀 힘들어하지 않을까 생각했는데. 드라마에 나온 묘사들이 너무 과장된 거였나?’
그렇다기보단 정신혜의 정신세계가 독특한 탓이었으나, 이찬은 남녀 사이의 관계에 착각을 품으며 양호실을 나섰다.
여름날 활짝 열린 창문 밖에서 명진아가 그 대화를 모두 엿들었다는 사실은, 그의 관찰력으로도 알 수 없는 일이었다.
그 뒤에 마지막 씬의 촬영이 진행됐다.
가족 전체의 이민을 앞둔 안지성의 마지막 하굣길. 하지만 촬영의 핵심은 느티나무 아래서 그를 지켜보는 지혜다.
이찬의 합류 뒤 많은 씬들이 안지성 위주로 바뀌었음에도 변하지 않은 주요 장면. 여기서 카메라가 눈물짓는 명진아를 둘러 달리트랙킹(트랙 위를 바퀴로 이동하는 카메라 무빙)으로 느티나무 반대편에 도달했을 때, 그게 멀리서 다가오는 조혁수 씬으로 이어지게 된다.
다만 조혁수의 회상까지 이어지는 성인 씬은 이미 따로 촬영되어 있었다. 조혁수 본인도 서울에서 세트장 촬영 중이고.
롱테이크(커트하지 않고 촬영을 지속하는 기법)로 바로 붙이기엔 모습을 감출 곳이 마땅치 않아, 아예 따로 촬영하고 CG 기법으로 연결한다는 얘기였다.
몇 차례 롱샷과 풀샷 등이 촬영되는 동안 이찬은 그런 작품 전반에 대해서만 생각하고 있었다. 등을 보인 채 자전거를 타고 멀어져야 해서, 명진아 쪽을 돌아볼 수는 없었다.
그렇기에 클로즈업샷 1테이크 촬영 후 듣게 된 스탭들의 환호가 좀 의외였다.
‘왜 저러지? 그야 마지막 씬까지 마치고 나면 환호할 때도 있긴 했지만, 이 중요한 쇼트를 1테이크로 끝낸다고?’
자전거를 타고 모니터 앞까지 돌아온 뒤에야 소년은 상황을 파악할 수 있었다. 설명이 아니라 모니터 속 화면을 통해.
멀어지는 오빠를 바라보는 소녀의 얼굴은, 완벽했다.
어떤 성인 연기자가 대신한다고 하더라도 그보다 더 잘하기 어려울 정도로, 보는 사람의 눈물까지 끌어낼 것처럼 명징한 애수가 눈물에 녹아 흘러내리고 있었다.
‘······진아 누나가, 또 진화했네. 이 정도면 명진화라고 불러야 되는 거 아닌지 몰라. 이건 좀 박빙이겠는걸? 3화에서만큼은 내가 중심이 될 거라고 생각했는데, 이 누나가 이렇게까지 해버렸으니······ 어쩌면 좀 밀릴지도 모르겠어.’
그 지레짐작은 심성윤 감독의 최종평으로 입증되었다.
“방금, 최고였다. 내가 정말, 아역 씬에서 이렇게 감동적인 장면을 볼 수 있을 거라곤 생각도 하지 못했어. 그리고 막씬을 1테이크로 OK하게 될 줄도 몰랐고 말이야. 진아야. 정말 많이 발전했다. 드라마 찍는 내내 하루가 다르게 늘더니, 이젠 진짜 흠을 잡을 수가 없겠어. 둘 다, 최고의 아역이었다.”
소년은 그 말에 동의했다. 그 자신도 명진아도, 각본이 요구하는 바를 100% 이상으로 발휘한 촬영이었다.
그렇지만 소녀의 생각은 달랐다.
‘이게 어떻게 좋은 연기야. 난 그냥, 찬이 등 보니까 눈물이 나는 걸 참을 수 없었던 것뿐인데. 한심해. 정말 한심해. 왜 이렇게······ 왜 지금도 눈물이 날 것 같은 거람······.’
그럼에도 불구하고 소녀는 마지막 힘을 냈다. 모든 씬이 끝난 지금, 소년 앞에서 사적인 눈물을 보이고 싶지는 않았다.
“찬아, 고생 많았어. 이제부터······ 바빠지겠네?”
“그럴 거야. 근데 누나, 너무 몰입한 거 아냐? 아직도 얼굴이 안 좋은데. 빨리 벗어나야지, 안 그럼 위험해.”
“아, 그런가. 히히. 그러네. 빨리 벗어나야지.”
“그래. 내가 한예대 심리상담 교수님 아는데, 그분 소개해줄까? 만나보면 좀 나을지도 모르는데.”
명진아는 고개를 저었다. 그리고 애써 환하게 미소 지었다.
“찬아. 우리 찬이, 앞으로도 연기 잘하고 있어. 누나가 언젠가······ 당당하게 네 옆에 설 테니까. 기다려줄 수 있지?”
“이적하겠다는 거야? 좋아. 그럼 최강 아역 콤비 되겠네.”
간명한 대답과 염려하는 웃음. 명진아는 거기에 만족했다.
< 16장 - 로드 염수진 (1) > 끝
ⓒ 비벗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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