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6장 - 로드 염수진 (2) >
일반적으로 영상작품의 모든 촬영을 마친 날은 ‘쫑파티’라고 해서 회식이 열리게 마련이다. 그러나 열린 전작제로 성인 씬이 계속 촬영될 예정인 <가을하늘>의 경우에는, 향후 마지막회가 방영되는 날 종방연만 치를 예정.
덕분에 이찬은 촬영을 마치자마자 바로 길을 떠날 수 있었다.
물론 편안한 퇴근길은 아니었다. 밤에는 <미스 스캔들>의 촬영도 예정되어 있었기에.
그리고 운전석에 앉은 염수진이 넘치는 호기심을 가졌기에.
“찬아, 어떻게 됐어? 잘 거절했어? 누구였는데? 진아? 신혜? 어느 쪽을 거절하고 어느 쪽을 받아준 거야?”
“······누나, 운전에 집중하시면 안 될까요?”
“그것만 얘기해주면 안 될까? 누나 너무 궁금한데.”
“생각하시는 그런 거 아니에요.”
“내가 생각하는 게 아니야? 그러니까 진아랑 신혜가 너한테 푹 빠져서 서로 경쟁하고 있었던 그런 게 아닌 거야?”
소년은 잠시 고민하다가 어깨만 으쓱였다. 대답하고 싶지 않다는 뜻.
이제는 제법 서로 친해져서 대화도 편안하게 나눌 수 있게 되었지만, 그렇다 하더라도 염수진은 일개 로드매니저였다. 나라엔터에서 전폭적으로 지원하는 아역에게 대답을 강요할 수 있는 입지는 갖고 있지 않았다.
그렇기에 그녀는 속으로만 생각했다.
‘누굴 남겼을까? 아무래도 진아겠지? 진아 걔는 강아지처럼 귀엽게 생긴 게, 누가 봐도 인기 많을 스타일이잖아? 여우처럼 생긴 신혜도 제법 예쁘긴 하지만 뭔가 잘 안 어울려. 그래, 우리 찬이한텐 진아가 나아. 더군다나 몰래연애를 하기에도 상황이 좋지. 찬이 쪽이 생긴 것만 멋있지 연하로 두 살 차이니까, 진지하게 의심하는 사람이 없을 거야.’
그렇게 딴 생각 가득한 로드매니저가 운전하는 차량이 <미스 스캔들> 촬영이 예정된 로케이션에 도착했을 때, 이찬은 그곳의 위용에 조금 당황했다.
드라마와 영화에서 많이 본 곳이었다. 용인의 유명한 놀이공원. 세계 7위 규모의 테마파크라는 이름값이 있는 만큼 각종 작품에서 그 전경이 조명된 바 있었다.
지금처럼 촬영 조명 가득한 야간 씬은 없었지만, 그렇다고 해서 소년의 눈썰미가 그 실체를 오인하는 일은 없었다.
다만 평생 어떤 놀이기구도 본 적 없는 소년에겐 지나치게 별세계였던 것이다.
작아 보였던 회전목마는 거대한 백마들의 벌판이었으며, 조잡하다 생각했던 제트열차는 용이 날아가는 길처럼 보였다.
“찬아, 너 놀이기구 잘 타니? 혹시 겁먹고 있는 거 아니지?”
“누가요.”
그렇지만 참견쟁이 매니저에게 해줄 얘기는 아니다. 이찬은 벌렁거리는 심장을 내리누르며 밴에서 내렸다.
이미 촬영장에 나와 있던 오덕환이 그를 반겼다.
“우리 1등 배우, 왔어?”
“1등 배우요?”
“어. 항상 1등으로 오잖니. 아직 보조출연자들밖에 안 왔는데 말이야. 신수영은 언제쯤 도착하려나.”
허성윤이 듣는다면 기뻐할 만한 표현이라 생각하며 소년은 웃었다. 언제나 1등으로 촬영장에 도착한다는 감독의 찬사를 그라면 다방면으로 포장해낼 수 있을 터였다.
‘지금이야 웃으면서 하는 생각이지만, 정말 다행이지. 혹시라도 그 사람을 얻지 못했다면 강정후가 뭔가 손을 썼을 때 찍소리도 못하고 당했을지도 몰라. 역시 형 말이 옳았어. 좋은 사람들을 주변에 둬야 행복해질 수 있어. 그렇다고 그 홍보팀장이 좋은 사람이냐 하면 좀 애매하긴 한데······ 일단 나한테 잘하려고 애쓰고 있으니, 좀 더 지켜봐야지.’
이찬의 생각에, 좋은 사람이란 표현은 굉장히 모호했다.
단지 선한 사람이라 해서 좋은 사람이라 할 수 있을까.
대체로는 그렇게 말해도 좋으리라. 그러나 그 선인이 자신의 정의를 위해 소년의 정의와 맞부딪친다면, 그는 주관적으로 좋은 사람이 되지 못할 터였다.
반면 허성윤은 사실 악인이라 불려도 좋을 인물이다.
정확히 어떤 일을 해왔는지 알 수는 없지만, 이찬은 그가 목적을 위해서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 성미임을 첫인상에서부터 알 수 있었다.
그렇지만 지금은 이찬의 유일성에 반해 그를 도우려 애쓰고 있다. 그렇기에 천군만마였던 것이다.
하지만 선악의 관념은 나중에 생각할 문제고, 지금 중요한 건 영화 촬영을 완벽하게 수행하는 일이었다.
소년이 맡은 심지호 배역은 사실 이찬 그 자신.
자연히 까다로운 감독으로부터 매번 극찬을 받았다. 작품에 한정하면 강정후와의 맞대결도 가능할 정도라고.
그러나 신수영의 심유리 연기는 얘기가 좀 달랐다.
20대 후반의 김은희는 이미 청춘스타를 넘어 최고의 연기자 반열에도 꼽히곤 하는 인물이다. 아역 때부터 활약했기에 보편적인 대중의 평가로는 강정후 이상이었다.
다만 기대할 수 있는 점은 작품에서의 비중 차이였다.
신수영은 <미스 스캔들>의 핵심이되, 김은희는 에서 관찰자에 지나지 않으니까.
물론 핵심 배역도 소화하지 못하면 돼지 목의 진주목걸이.
그렇기에 소년은 몇 달의 합숙 동안 신수영을 개조해왔다. 신수영이 좀 더 나은 심유리가 될 수 있도록.
신수영 본인 역시 톱급이라 할 수 있지만, 아무래도 시트콤을 통해 뜬 벼락스타인 데다가, 성격 자체가 소탈했다. 충동적이고 이기적인 심유리라는 배역과는 달랐다.
그렇기에 그녀 역시 나름대로 캐릭터를 분석해서 심유리를 만들어내고 있었지만, 이찬이 보기엔 좀 부족했다.
그런 까닭이었다. 소년은 충동과 이기의 상징인 이소연의 디테일을 신수영에게 전달해왔다.
남태형 때처럼 대놓고 할 상황은 아니었다. 신수영은 자부심을 가질 만한 숙련 배우고, 이찬에 대한 경외심도 연기력보다는 천재성 쪽에 집중되어 있었다.
그렇기에 은근슬쩍 조언하며 조금씩 디테일을 입혀왔다. 스스로도 느끼지 못할 정도로 천천히, 조심스레.
그리고 오늘이 그 결실을 맺을 날이었다.
“마이 찬! 찬아, 누나가 늦었지? 감독님, 안녕하세요. 찬아, 혼자 앉아서 뭐 하고 있었어? 심심하지 않았어? 누나가-”
“누나가 빨리 의상 입고 와서 리허설 해주시면 좋겠네요.”
“앗, 역시 그렇겠지? 알겠어. 누나 갔다 올게! 감독님, 저 의상 체크하고 올게요. 대기실 어디로 가면 돼요?”
늘 그랬듯 폭풍처럼 움직이는 톱스타였다.
*
“지금까지 좋았어. 이번 두 씬, 실질적으로 우리 마지막 씬이야. 나머지는 재촬영이니까. 씬 내용 기억하고 있지? 제트열차를 타면서 심유리는 무서워하고, 심지호는 마침내 마음을 굳히는 거야. 그래서 내려온 뒤에 고백하는 거지. 내가 사실은 친동생이 아니라고. 그때 심유리의 심정은?”
조명만이 비춰지는 야간의 놀이공원에서, 신수영은 팔에 붙은 모기를 때려 잡으며 대답했다.
“아주 깜짝 놀라고, 배신감을 느끼고, 힘들어해요.”
“맞아. 얼마나 중요한 씬인지 잘 알고 있지?”
“물론이죠. 이 씬 연습을 얼마나 많이 했는데요. 근데, 정말 모기 많네요. 감독님은 괜찮으세요?”
“모기 따위가 문제가 아냐. 여기서 임팩트를 제대로 줘야 해. 그러려고 일정 조정하면서 고속카메라까지 빌린 거니까.”
이 클라이막스 씬을 위해 초당 360프레임을 촬영하는 초고속카메라 포토소닉이 미국에서 공수됐다.
그걸로 고백하는 심지호와 당황하는 심유리의 표정을 세밀하게 촬영해, 슬로모션으로 관객의 공감을 불러일으킬 예정.
“물론 그 전에 제트열차 씬도 중요한데······ 수영인 놀이기구 잘 탄다고 했고. 찬이는 어때? 제트열차 타본 적 있어?”
“타본 적은 없는데, 괜찮을 거예요. 멀미도 안 하거든요.”
“멀미가 문제가 아닌데. 여기선 정말 무심한 표정을 연기해줘야 해. 심지호 배역이 겁 없는 꼬마니까 말이야. 그리고 심유리를 보면서······ 감정이야 네가 잘 알겠지만.”
촬영이 시작된 뒤로는 처음으로, 오덕환이 소년을 염려했다. 그렇지만 그 염려가 실현되는 일은 없었다.
처음 제트열차가 급강하하던 때 순간적으로 과도하게 전달되는 정보량 때문에 아찔해졌던 이찬이지만, 바로 다음 순간에는 눈의 초점을 흐려 어지러움을 막을 수 있었다.
소년은 아주 무심한 표정을 연기하며 심지호를 생각했다.
정확하게는 이찬을.
‘감독님 허락 속에서, 심지호는 이찬이 됐어. 그렇지만 이찬은 누굴까? 나한테 내 모습이란 게 존재하는지 모르겠어. 언제나 남을 따라하기만 했으니까. 하지만 형과 함께 있을 때는······ 조금 달랐지. 어째선지 그 사람이랑 있을 땐 마음먹은 대로 표정이 나오지 않았어. 마치 강정후 아저씨가 그날 순간적으로 자기 가면을 유지하지 못했던 것처럼······.’
아마도 가족이기 때문이겠지- 소년은 그렇게 생각했다. 이찬이 윤대흥 한 사람만을 바라보는 것처럼, 그 역시 안정록을 자신의 진짜 부모라 느끼는 걸지도 모르겠다고.
그런 의미에서 본다면 강정후는 이찬과 무척 닮아 있었다.
하지만 그 역시 당장 고민할 문제는 아니다. 소년은 다시 심지호의 마음을 떠올렸다.
‘심지호는 심유리로부터 멀어지려고 하고 있어. 그녀가 가족으로부터 버림받았던 이 놀이공원에서, 진실을 고백함으로써 자신을 버리게끔 할 셈이야. 그 모습은 아마······ 내가 형으로부터 멀어지기 위해 아파트로 떠나던 때와 비슷하겠지.’
차이는 있을 터였다. 심지호에겐 이찬과 같은 천부적인 연기력이 없으니 결코 감정을 완전히 숨기지 못할 것이다.
그러니 심지호의 이별을 연기한다는 건, 소년에게 있어서 자기 자신의 본모습을 들여다보는 일과도 같았다. 그는 결연한 입가와 붉어진 눈가로 내면의 갈등을 드러냈다.
윤대흥을 떠나던 날 이찬이 지었을지도 모를 표정이었다. 저주 같고 축복 같은 재능이 없었다면, 아마도.
제트열차가 마침내 짧았던 여정을 마친 뒤에도 카메라는 멈추지 않았다. 하차지에 늘어서 있던 촬영팀이 곧바로 다음 쇼트 촬영에 돌입했고, 두 주연은 감정을 이어갔다.
“아, 재밌다. 완전 재밌었어. 너도 재밌었지?”
“재미가 있긴 했어요? 무서워서 눈도 못 뜨던데?”
“아······ 바보니? 그거야 놀이기구를 즐기는 방식인 거지.”
“놀이기구를 즐기는 방식은, 사람 많을 때 와서 부대끼는 거 아니에요? 이렇게 한밤중에 단둘이 타는 건 아닌 것 같은데.”
“그건, 싫어. 엄청 싫어. 사람 많은 게 제일 싫어.”
신수영의 연기는 훌륭했다. 파르르 떨리는 속눈썹이 제트열차보다 심한 공포를 표현한다. 그간의 합숙이 무의미하지 않았던 모양이라 생각하며, 이찬은 어깨를 으쓱였다.
“왜 싫은데요? 연예인이 사람 많은 거 싫어하면 어떡해.”
“넌 몰라. 모를 거야. 나, 여기서 버림받았거든.”
“······여기였어요? 누나가 가족들이랑······ 헤어진 데가?”
“그래. 사람이 정말 많았어. 여기 혼자 남겨져서 사람들한테 치이다가, 미아 센터에 갔다가, 경찰서에 드나들다가, 결국은 고아원으로 가게 됐어. 운 좋게도 좋은 집에 입양돼서 연예인이 될 수 있었지만, 찾으려던 사람들은 나타나지 않았고.”
심유리라는 캐릭터가 품고 있던 복잡한 내면이 풀려나온다. 마치 몇 차례 회전을 마친 롤러코스터가 하차지로 들어오는 모습처럼, 그 읊조림은 조용하고 후련했다.
“그래서 사람 많은 게 싫어졌어. 그때가 생각나거든. 내가 사랑받아야 할 사람들한테서 버림받았던 날이 생각난단 말이야. 그래서 사람 없을 때 대관하는 거야. 어때? 좋지 않아? 넌 정말 누나 잘 둔 거다? 이렇게 타고 싶은 거 마음대로 다 탈 수 있게 해주는 누나 잘 없단 말이야.”
“······미안하다고 전해달랬어요.”
“뭐?”
“미안하다고 했어요. 누나 TV에 나오는 거 보고 바로 알아봤대요. 그렇지만, 너무 미안하고 면목이 없어서 연락을 못 했대요. 그렇게 전해달라고 했어요. 돌아가시는 순간에요. 사정이 여의치 않았댔어요. 심지호는 태어나서부터 몸이 많이 안 좋았고, 그 병원비도 감당하기가 힘들었대요. 그래서 누나 버린 거였대요. 누나는, 혼자서도 잘할 수 있을 테니까.”
말하면서, 소년은 자신의 부모를 생각했다.
대본 따위 줄 하나 긋지 않더라도 전부 외울 수 있는 기억력으로도 떠올릴 수 없는, 너무 어린 날 이별했던 존재들을.
‘그 사람들도 그랬을까? 혹시, 정말 어쩔 수 없는 사정이 있었기 때문에, 날 버려야만 했던 걸까? 윤대흥 아저씨처럼······ 좋은 사람들이었을까?’
알 수 없는 일이었다.
혼자가 된 소년이 알 수 있는 유일한 사실은, 마주서 있는 신수영이 이미 상처받은 심유리가 되어 있다는 것뿐. 그녀 역시 스스로 겪은 슬픔을 되새기고 있는지도 모를 일이었다.
초고속카메라로 촬영된 두 사람의 표정연기는 이전의 그 어느 때보다도 큰 호평을 받았다. 감독 오덕환이 수줍음도 잊고 껄껄 웃는 가운데, 소년은 제트열차를 돌아봤다.
비틀리고 꼬여서 늘여진 트랙. 하지만 그 모습과 다르게, 마음을 후련하게 만들어주는 기구였다.
*
<미스 스캔들>의 의 모든 촬영이 마무리된 8월 19일. 마침내 <연예가보도>가 방영됐다.
어디까지나 취재의 주인공은 조혁수. 그렇기에 이찬의 분량은 길지 않았다. 다만 애초에 촬영 분량 자체가 짧았던 만큼 의도했던 내용은 전부 들어가 있었다.
[늘 뜨겁게 사는 이찬! 조혁수 선배님께 폐가 되지 않고자 정말 열심히 준비했습니다. 헤헷, 사랑해요 연예가보도!]
그 뒤에 조혁수의 인터뷰가 좀 더 이어지고, 연극 장면이 공개됐다. 재공연의 마지막 날이었던 만큼 촬영팀이 이찬 씬을 녹화하는 걸 허용해줬던 것.
거지 철수 역으로 분해 깔끔하게 관중들을 웃기는 이찬의 모습이 10초 정도 화면을 수놓고, 마무리 인터뷰가 이어졌다.
[저는 저렇게 날 잘 따라해주는 아역이 있다면 되게 좋을 것 같아요. 혁수 씨에게 아역 이찬이란 어떤 존재입니까?]
[음······ 사실은 좀 귀찮은 녀석입니다.]
[그래요? 존경하는 선배 배우님한테 애교가 많은가보죠?]
[그런 의미가 아니라······ 경쟁자거든요. 앞으로 제 배역들을 잔뜩 훔쳐갈 게 뻔하니까, 볼 때마다 미워 죽겠어요.]
농담의 징후를 조금도 담고 있지 않은, 진지한 발언이었다.
< 16장 - 로드 염수진 (2) > 끝
ⓒ 비벗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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