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훔치는 연기자-46화 (46/250)

< 16장 - 로드 염수진 (3.) >

드라마 출연진이 예능, 프리허그, 시청률공약, SNS 등의 방법으로 작품을 홍보하게 될 미래와 달리, 2000년의 방송가 이슈는 스포츠지와 연예정보프로에 의존하는 경향이 컸다.

당연히 공영방송의 <연예가보도> 시청률은 높디높다. 20%를 넘기지 못하면 자체적으로 대책회의를 열 정도로.

특히 8월 19일의 방송분은 열대야의 토요일 밤인 까닭에 30%를 껑충 넘는 지표를 보였다.

이찬이 브라운관에 소개된 게 바로 그런 방송에서였다.

“반응이 아주 뜨겁습니다. 시청평 중에서 지분율이 30% 이상이에요. 내용도 호의적입니다. 조혁수를 완전히 카피한 소년이 꾸려가는 아역 씬이 기대된다는 의견이 쏟아졌습니다. 이대로만 가면 첫 드라마로 스타가 될 수 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홍보팀장 허성윤이 보여주는 자료들을 살펴본 뒤, 이군영은 고개를 주억거렸다.

“흠. 평들이 상당히 좋구만. 드라마 기대감도 큰 것 같고.”

“안 그래도 가을 최대 기대작이었으니까요.”

“그래 그래. 홍보자료 반응은 좀 어때?”

“고려 빼면, 앓는 소리를 하는 축이 많습니다. 아무래도 아역이니까 성장배경을 알려주는 이야기들을 원하던데요.”

“그건 안 돼. 찬이는 그저 배우로만 알려져야 된단 말이야.”

허성윤은 그게 참 별난 이야기라고 생각했다. 지금껏 무수한 배우들의 가정사를 들먹이며 홍보해왔던 이군영이 하는 말이라서.

그러나 굳이 따지지는 않고 말을 이어갔다.

“물 들어올 때 노 저어야 하는 법인데, 왜 인터뷰는 안 하냐고도 따지고 있고요.”

“참나. 누가 그걸 모르나. 본인이 캐릭터에 빠진 탓에 회복기가 필요하다는데 그럼 어쩌라는 거야.”

대표의 말에 허성윤은 또 황당해졌다. 다른 배우들이 심적인 문제로 인터뷰를 사양할 때마다 계약서 들이밀며 강요했던 게 바로 이군영이었기에.

물론 이유를 알기 어려운 일은 아니었다.

‘자신의 수제자로 알려질 이찬이니까 지극정성인 거겠지. 혹시라도 관계가 틀어지면 안 되니 말이야.’

그런 관점에서 보면 이찬은 일개 아역배우 주제에 대표의 약점을 잡고 있는 셈이다. 그 높은 기대치가 낮아지지 않는 이상에야 소년의 미래에 장애는 없을 터.

현재의 간판배우 강정후의 심기를 거스르고 이찬을 돕기로 결심한 허성윤에게는 호재라고 할 수 있었다.

‘물론 꼬마가 그런 것까지 눈치 채고 인터뷰를 피하는 건 아닐 거야. 그저 정말 배역에서 빠져나오기가 힘든 거겠지. 인터뷰를 안 한대도 화제성 덕분에 기사가 줄줄이 나갈 테니, 손해가 될 일도 아니고. 모두 잘 돌아가고 있는 셈이다.’

그렇게 생각하는 홍보팀장에게 대표가 다른 걸 물었다.

“영화 쪽은 어때? 잘돼가고 있는 거 맞지?”

“예. 크랭크업도 무사히 마치고 찬이 드라마 덕분에 이슈도 될 전망이라, 홍보에 좀 더 공을 들일 모양입니다. 오덕환 감독이 사재를 털어서라도 밀고 싶은 영화라고 강변을 한 모양이에요. 편집본 확인한 왕대영 대표가 투자 규모를 늘렸습니다. 홍보에만 3억 정도 쓸 예정이라고 하더군요.”

“오, 꽤나 공을 들이는데? 그거 참 고마운 일이야.”

장기적으로 시청자를 끌어올 수 있는 드라마와 달리 영화는 단판승부. 초반에 충분한 스크린을 확보하지 못하면 입소문조차 내보지 못할 수 있는 매체다.

그래서 개봉 전의 홍보에 많은 예산이 투입된다.

이벤트시사회 등의 가시적 일정만이 아니라, 각종 관련지의 기자들에게 보낼 보도자료와 CD, EPK(편집용 테이프) 제작, 각종 매체 광고 등, 돈 들어갈 일은 차고 넘치는 것이다.

자연히 투자자는 마케팅의 손익을 따지게 마련이었다.

무진장 홍보를 한다고 해도 작품이 좋지 않으면 밑 빠진 독에 물 붓기. 제대로 결과를 얻기 위해서는 작품의 완성도와 함께 배우나 스토리의 화제성이 담보되어야 했다.

그런 면에서 <미스 스캔들>은 연이어 호재를 얻고 있었다.

신수영이야 이미 톱스타급 인지도였고, 그녀와 합숙한다는 뉴스로 이름을 알린 이찬까지 스포츠지 1면을 따는가 하면 <연예가보도>로 상당한 화제를 끄는 상황.

간판스타 신수영을 밀어줘야 하는 기획사 대표의 입장을 떠나, 투자자로서도 혹하지 않을 수 없었을 터였다.

“그래서 <가을하늘> 2화가 방영되는 9월 5일부터 본격적으로 움직일 예정이라고 합니다. 그때쯤엔 찬이도 인터뷰를 열심히 해줘야 할 텐데······.”

허성윤은 말하면서 정창영 쪽을 돌아봤다.

<가을하늘>에서야 3화 분량의 아역이니 홍보에 맡겨진 역할이 없다시피 하지만, <미스 스캔들>에선 핵심 주연이다. 그때까지도 인터뷰를 거절한다면 곤란해질 터였다.

“음, 괜찮습니다. 찬이는 금방 괜찮아질 거예요.”

“확실해? 말 나온 김에 그 얘기 좀 하자. 정확히 상태가 어떻길래 그러는 건데? 휴가를 2주나 내고 말이야.”

이군영의 재촉에 정창영은 이마 위의 땀을 닦았다.

더위 때문은 아니었다. 대표실 내부의 최신형 에어컨이 이상 없이 작동하는 중이니.

“말씀드린 대로예요. 안지성도 그렇고 심지호도 그렇고, 상당히 무거운 인물상들 아니겠습니까? 그것도 동시에 두 역할을 연기했다보니까, 많이 힘들었던 모양입니다.”

“흥. 야, 넌 실장이라는 놈이 배우 관리를 그렇게 못 했어?”

“죄송합니다, 대표님. 제 불찰입니다.”

“당연히 네 불찰이지. 확실하게 케어해. 휴가 딱 2주다. 그 안에 정신 차리게 만들어.”

“예, 예. 물론 그렇게 해야죠.”

진땀 빼며 대답하고 대표실을 빠져나오면서, 정창영은 속으로 투덜거렸다.

‘멀쩡한 애를 아프다고 속이는 게 이렇게 민망한 일이군. 학교 땡땡이 칠 때 대신 거짓말해주셨던 어머니 심정이 이해가 돼······. 그렇지만 대체 왜 그래야 하는 건지 모르겠네.’

그가 볼 때, 이찬은 과몰입과 거리가 먼 배우였다.

배역에 몰입하는 데에 건성이었다는 얘기는 아니다. 짧은 시기에 두 개의 배역을 촬영하면서도 베테랑 배우들 못지않은 연기력을 선보였으니, 거기서 빠져나오지 못해 힘들어한다는 말을 의심할 사람이 있을 리 없었다.

그렇지만 계속 곁에서 지켜본 정창영은 입장이 달랐다.

‘촬영 마치고 몇 초 지나지도 않아서 평소 상태로 돌아오던 애가, 크랭크업까지 한 뒤에 힘들어할 리는 없지. 그런 게 아니야. 그 맹랑한 녀석이 또 뭔가를 생각하고 있는 거야. 순진한 염수진이야 완전히 속아 넘어간 것 같더라만.’

로드매니저 염수진은 이찬이 이상징후를 보이며 방 안에 틀어박혔다고 말하며 눈물까지 글썽였다. 매일같이 소년을 데리고 다녔던 주제에 여전히 그 천재성을 모르고 있다.

‘그거야 차라리 잘된 일인가. 그 말 많은 녀석은 진상을 모르는 편이 나아. 아파트 가서도 염수진은 빼고 따로 얘기를 해봐야겠어. 내 팀의 핵심이 될 배우니, 내가 직접 관리한다.’

그렇게 생각했던 정창영은, 아파트에 도착한 뒤 꽤 놀랐다.

이찬이 그의 방문에도 방문을 열지 않았기에.

“찬아? 찬아. 나야, 정 실장. 잠깐만 얘기 좀 안 할래?”

“죄송해요. 몸이 좀 안 좋아서요.”

“그······ 많이 안 좋은 거야? 병원에 가볼까?”

“아니에요. 가주세요.”

방문에 붙어서 더 말을 붙여보려는 정창영을, 염수진이 다가와 말렸다.

“실장님, 놔두세요. 찬이가 마음이 아파서 그래요.”

“아니, 그거야 그냥······ 음. 일단 알겠다.”

그렇게 정창영이 떠난 뒤에 염수진이 문을 향해 말했다.

“찬아. 수영이 한번 오라고 할까?”

“그 누나는 왜요?”

“그게, 수영이 돌아가고 나서 네가 아파진 것 같아서. 잠깐이라도 와서 같이 있으면 도움 되지 않을까?”

“그거랑 상관없어요. 그 누난 열심히 홍보를 해야죠.”

“······그런 거야? 찬아. 누나가 힘이 못 돼줘서 미안해.”

소년은 대답하지 않았다.

닫힌 방문에서 멀어져 베란다로 간 뒤, 염수진은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찬이가 저렇게 힘들어할 줄은 몰랐는데. 역시 수영이를 붙잡았어야 했던 걸까? 같이 있을 땐 참 즐거웠는데.’

착각이었다. 그저 시기가 얼추 맞아떨어진 것일 뿐, 이찬은 용기를 내어 복잡한 가족의 품으로 돌아간 신수영에게 별다른 아쉬움을 갖고 있지 않았다.

‘그게 아니면, 진아나 신혜랑 무슨 일이 있었던 걸까? 그때 내가 잘못된 조언을 해준 걸까? 그때 나쁜 얘기를 들었던 탓에 마음이 무거워진 건 아닐까?’

역시 착각이다. 명진아도 정신혜도 소년을 괴롭게 할 만한 이야기를 한 적은 없었다.

굳이 말하자면 명진아 쪽은 마지막 촬영을 마치고 집으로 돌아가 많이 울었지만, 배역 자체가 아픔으로 가득 찬 캐릭터였다. 천부적인 관찰력을 가진 이찬으로서도 그녀의 애수를 알아볼 수는 없었던 것이다.

그러니 소년이 방에 틀어박혀 식사조차 그 안에서 해결하게 된 건 다른 복잡한 이유 때문이 아니었다.

그는 그저 복기하고 또 복기하는 중이었다.

<미스 스캔들>에서 스스로 선보인 연기-혹은 진심-을 돌이켜보며, 그런 솔직함을 윤대흥이 봤다면 어땠을까 상상하고 있었다. 그러면서 종종 울고 종종 웃었다.

‘나쁜 이찬. 왜 그러지 못했던 거야. 어려운 일이 아니었는데. 촬영 두 탕에 연극까지 하느라 시간이 모자랐다곤 하지만, 일주일에 한 번 정도 수원 내려가서 자고 오는 정도는 할 수 있었는데. 고작 그런 행동만으로도, 그 거무죽죽한 얼굴에 환한 웃음을 만들어줄 수 있었을 텐데. 진짜 가족이 돼서 서로를 치유해준 심지호와 심유리가 될 수 있었을 텐데······.’

촬영하는 와중에는 참기만 했던 후회. 빈소조차 지키지 못하고 돌아와서 하루 만에 벗어버렸던 깊은 비애.

가장 완벽한 레퀴엠을 만들기 위해 누르고 또 눌렀던 슬픔이, 뒤늦게 천재소년의 마음을 잠식했다.

이찬은 그 괴로움으로부터 빨리 벗어나고픈 생각이 없었다. 그 안에 침전해 자신을 괴롭히는 거야말로 유일하게 할 수 있는 속죄라고 믿었다.

그 일에 스스로 할당한 기간이 2주였던 것이다.

‘2주 뒤엔, 제대로 움직일 거야. <미스 스캔들>이 최고의 화제작이 될 수 있도록, 조차 누르는 흥행작이 될 수 있도록, 최선을 다해서 홍보에 나설 거야. 하지만 당장은 해야 할 일이 없으니까······ 조금만 더 있자. 조금만 더 이렇게, 형이랑 같이 있자.’

*

9월이 되자, 기승을 부리던 무더위가 몇 차례의 호우와 함께 풀이 죽었다.

그러는 동안 이찬은 또 제법 많은 기사와 방송에서 모습을 드러냈다. 드라마 홍보를 위해 움직이는 조혁수와 이소연, 그리고 <미스 스캔들>의 후반작업과 홍보성 인터뷰를 병행하고 있는 오덕환 감독이 소년을 거론했다.

그렇기에, 스스로는 아무것도 하지 않고 있음에도, 그 인지도는 점점 더 커져가기만 했다.

그렇게 9월 4일이 됐을 때, 마침내 방문이 열렸다.

운동과 명상의 기간 속에 조금 핼쑥해졌지만 여전히 올곧은 모습. 그런 이찬을 보며 염수진이 눈물을 터뜨렸다.

“찬아! 찬이 나왔구나. 이제, 괜찮아진 거야?”

“네. 누나도 참 극성이네요. 기껏 휴가 생긴 건데, 집에라도 다녀오시지는.”

“내가 어떻게 그래······ 내 배우가 힘들어하고 있는데, 내가 어떻게 혼자 편하게 지내니?”

“······고마워요. 덕분에 인스턴트 안 먹고 집밥 매일 먹었네요. <가을하늘> 팀은 모여서 첫방 본댔죠?”

“응! 맞아, 찬아. 지금 가볼래? 좀 늦었지만, 열심히 밟으면 시간에 맞출 수도 있을 텐데.”

작감과 배우들이 집결해 드라마의 1화를 함께 시청하는 건 흔한 이벤트였다. <가을하늘>의 경우엔 특히 촬영장 분위기가 좋았기에 단 한 사람도 빠지지 않았다고 했다.

그렇지만 촬영장에서 성인역과 아역들 사이의 교두보 역할을 수행했던 이찬은, 단호하게 고개를 저었다.

“됐어요. 그 사람들은 종방연 때 보죠. 오늘은 혼자 볼래요.”

“호, 혼자? 누나는······ 같이 보면 안 될까?”

“죄송해요. 잠깐 쇼핑 같은 거 하고 와주세요.”

염수진은 손으로 눈물을 닦고 고개를 끄덕였다. 기껏 방에서 나온 배우에게 불편을 주고 싶지는 않았기에.

그렇게 매니저를 내보낸 뒤, 소년은 TV를 켰다. 조혁수가 출연한 맥주 CF가 화면을 채웠다.

잠깐 고민하던 이찬은, 냉장고를 열어 반찬통 안쪽에 숨겨져 있던 맥주캔을 꺼냈다.

차가운 음료가 목을 타고 넘어가길 몇 차례. 마침내 <가을하늘> 1화가 방영을 시작했다.

이찬은 소파에 앉은 채로 자신의 연기를 바라봤다.

그러면서 윤대흥과 처음 만났던 날을 떠올렸다.

-너 혹시 조혁수는 아니?

-알죠. TV에서 본 적 있는데.

-혹시 그 사람도 따라할 수 있겠니?

소년이 심드렁하게 청춘스타를 모사했을 때, 수원서 형사는 아이처럼 환하게 웃으며 박수를 쳤다. 그러다 창밖으로 지나가는 수상한 인물을 발견하곤 뛰쳐나가버렸지만.

‘······지금은 훨씬 더 좋아졌는데. 저 봐. 얼마나 잘해? 누가 보면 정말 조혁수가 어렸을 때 촬영해놓은 씬을 쓴다고 생각할 거 아니겠어? 그러니까, 이 방송을 같이 봤어야 했는데. 물론 형이랑 같이 있었다면 이렇게 맥주를 들이켜지는 못했겠지만, 그 대신 그 까끌까끌한 턱수염 만지작거리면서 기분 좋게 웃을 수 있었을 텐데. 나쁜 아저씨 같으니. 죽어버리면 어떡해. 세상에 나만 남겨두고, 그렇게 가버리면 어떡해.’

맥주를 오물거리는 입가로 눈물이 두 줄기 흘렀다.

손을 들어 볼을 닦아내고, 이찬은 이를 악물었다.

‘그만. 이제 그만 울자. 이제 시작이란 말이야. 봐, 편집이 정말 잘됐잖아? 이 드라마는 흥행할 거야. 그리고 내게는 리틀 조혁수란 수식어가 붙겠지. 그런데 한 달이 지나면, 기대와 염려 속에 개봉된 내 레퀴엠에서, 조혁수와는 어디 하나 닮은 구석이 없는 심지호가 선보여지는 거야. 그걸로 모든 사람들의 머리에 배우 이찬을 각인시킬 거야. 그리고······ 형이 바랐던 것처럼 최고의 배우가 돼서, 세상에서 가장 행복해질 거야. 검사든 홍보팀장이든 다 꼬셔서, 강정후도 이군영도 감히 날 막을 수 없게 만들 거야. 내 좋은 사람들을 지켜낼 거야······.’

쇼핑 대신 회사로 가서 <가을하늘> 1화를 모니터하고 돌아온 염수진은, 소파에 기댄 채 잠든 이찬을 발견했다.

소년은 잠든 채 울고 있었다. 무슨 꿈을 꾸는 건지, 부드럽게 웃는 입가로 눈물이 흐르고 멈추길 반복했다.

언제나 감추기만 했던 소년의 슬픔 앞에서, 염수진은 한참 동안 움직이지 못하고 서 있었다.

< 16장 - 로드 염수진 (3.) > 끝

ⓒ 비벗

=======================================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