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7장 - 배우 강정후 (2) >
양해를 구하고 상영관 바깥으로 나가 수신한 전화는, 이찬이 모르는 번호였다. 하지만 목소리로 그 발신자를 인지할 수 있었다.
[이찬?]
“······강정후 선배님?”
[그래. 시사 끝났지? 나와라. 정문에 차 대놨어.]
“아, 네. 그러죠.”
갑작스런 제안이었지만, 소년은 자연스레 승낙했다.
어느 정도 예상하고 있던 일이었다. <가을하늘> 방영 이후엔 그 역시 허성윤이 돌아섰음을 느꼈을 것이기에.
다만 이렇게 빠르게 접촉해올 거라곤 예상치 못하고 있었다. 그렇기에 황급히 다음 통화를 진행했다.
[어, 이찬이냐?]
“예, 검사님. 잘 지내셨죠? 저 혹시, 전에 부탁드렸던 건은 어떻게 됐을까요?”
[이 녀석이, 아주 맡겨놓은 물건 찾듯이 말하는구나. 내가 네 비서도 아니고, 너무한 거 아니냐?]
내용은 핀잔이었지만, 말하는 투는 포근하다. 그렇기에 소년은 신성운에게 조금도 미안해하지 않았다.
“제가 사정이 좀 급하게 돼서 그래요. 뭐가 좀 있었나요?”
[음······ 아주 없다고 말하긴 어렵겠다만, 너한테 말해줘도 괜찮을지 모르겠다. 민감한 부분이야.]
“어떤 종류인지 힌트라도 주실 수 없을까요?”
[본인 문제는 아냐. 알려진 것처럼 모난 데 하나 없이 살아온 녀석이더라. 뒤져봐도 나오는 게 없었어. 하지만 그 집안 쪽은 얘기가 달라. 상당히 세력이 있는 집안인데······ 그쪽에서 힘을 써서 잘 감추고 있으니, 업계에서도 아는 사람은 별로 많지 않을 거다. 그런 기밀정보인 거야.]
세력이 있는 집안- 소년은 그 말을 곱씹었다.
강정후의 적개심을 확인한 직후부터, 이찬은 그의 공세에 대비한 작업들을 수행해왔다. 허성윤을 포섭하는 한편으로 신수영의 부친인 신성운 검사에게도 뒷조사를 부탁했던 것이다.
양쪽 모두 호의를 바탕으로 한 거래. 상대가 가진 감정을 알아보는 이찬이 아니라면 낙관할 수 없었을 일이었다.
신성운은 이찬이 왜 강정후의 뒷조사를 부탁했는지 알지 못한다. 다만 소년과 만난 것을 계기로 자신이 다시 태어났다고 믿고 있으며, 그렇기에 편의를 베풀고자 하는 입장.
그 감정을 알기에 느긋하게 맡겨둘 수 있었다.
그리고 부장검사의 입에서 나온 ‘세력’이란 말에서도 소년은 특별한 무언가를 느꼈다.
“검사님, 혹시 조폭 같은 거예요?”
[음······ 거의 같지만, 다르다. 요즘 건달들은 쌍팔년도 조폭들이랑 달라. 세력을 만들고 사업을 진행하지. 겉으로는 멀쩡한 사업체를 운영하면서 뒤로 일을 벌이곤 하는 거야. 그러다보니 이쪽에 걸린 건도 몇 개가 있긴 한데, 확실하게 증거를 잡아냈다고 말할 수는 없다. 그런 이유도 있고, 네가 이런 걸 알아야 할 이유가 없지 않겠니? 나이도 어린 녀석이 쓸데없이 남의 약점을 잡으면······ 위험해질 수가 있다.]
신성운은 음침한 배경을 가진 톱스타와 불행한 소년이 맞서는 걸 원치 않았다.
물이 많이 빠졌다고 해도 연예계는 여전히 조폭들과 깊이 연관되어 있고, 직접적으로 영향을 받을 루트가 많다. 자칫하면 긁어 부스럼을 만드는 꼴이 될지도 몰랐다.
물론 사정을 모르기에 하는 말일 뿐이었다.
“써먹으려고 하는 건 아니에요. 그 아저씨가 절 싫어하거든요. 최악의 상황에 내밀 패 하나 감춰두려고 하는 거예요.”
애늙은이 같은 그 말에 한참 침음한 뒤에, 신성운은 나지막이 설명을 시작했다.
[소강그룹 회장 유일형. 소싯적에 한강파 두목이었던 사람이야. 지금도 물밑에서 못된 짓들을 하고 있다고 알려져 있는데······ 그 사람이 강정후의 외할아버지다. 그런 집안이야.]
소년이 딱 필요로 했던 정보였다.
*
강정후의 차량에 탑승하는 인원에 정창영과 염수진은 포함되지 않았다. 외산 2인승 차량인 까닭이었다.
“잠깐 드라이브만 하고 돌려보낼게요. 점심엔 일정 없죠?”
“그렇긴 한데······ 좀 뜬금이 없어서 그래. 평소에 교류도 없다가 이렇게 갑자기 드라이브라니······.”
“하하. 제1의 강정후가 제2의 강정후를 만나는 게 왜 뜬금이 없습니까? 걱정 마시고 돌아가 계세요.”
정창영을 상대하며 강정후는 계속 온화하게 웃었다. 그건 차량의 문이 닫히고 운행을 시작한 후에도 마찬가지였다.
이찬 입장에서는, 그 가면이 새삼 경이로웠다.
‘대단히 정교해. 작은 거짓의 징후도 느껴지지 않아. 이러니 사람들이 이 아저씨 속을 모를 수밖에. 대외적으로 착하기만 한 사람으로 소문이 나 있는 것도 당연한 일이야.’
말로 하면 간단하지만, 굉장히 특수한 일이었다.
이찬 본인도 할 수 없는 일은 아니다. 육체를 거의 완전히 통제하는 소년 역시 누구도 느낄 수 없을 정도로 정교하게 감정을 꾸며내는 것이 가능했다.
그렇지만 강정후와 이찬의 재능은 동등하지 않다. 안정록이 그 사실을 몇 차례고 지적한 바 있었다.
‘즐기는 천재라고 했지? 그 점에서 나와는 다른 거야. 그게 느껴져. 나처럼 미세표현 하나하나를 컨트롤하고 있다기보단······ 전혀 다른 방향인 것 같아. 자아와 표현 사이에 괴리가 있는 느낌······ 정상이 아니야.’
그 비정상이 오늘날의 강정후를 이룩한 요소일 터였다.
어떤 배역을 맡든 그 인물 본인이 된 것처럼 완전하게 연기해내는 배우였기에 모든 작품에서 격찬을 받았다.
하지만 그 방식은 조혁수와도 이찬과도 많이 다를 터. 소년은 그 차이에 대해서 머릿속으로 궁리했다.
“뭘 그렇게 빤히 봐?”
“······잘생기셔서요. 친탁이에요, 외탁이에요?”
“어려운 단어도 아네. 외탁이야. 어머니가 미인이시지. 넌?”
“글쎄요. 잘 모르겠네요.”
“하하, 그럴 만도 하지. 어떻게 알겠어.”
정말 즐거워 보이는 웃음과 함께 답한 말.
이찬은 그를 통해서 강정후가 자신의 출신성분을 알아냈음을 확신할 수 있었다.
‘그야 뭐, 꽁꽁 감출 수 있는 일은 아니었지. 당장 이군영만 해도 뒷조사 좀 해서 내 신상을 파악했는데. 그 뒤로 기자들한테 과거가 들키지 않게끔 손을 쓴 것 같긴 했지만, 조폭 기업이 들이대는 것까지는 어쩔 수 없었다는 거겠지.’
그렇게 생각하자, 강정후가 외제차를 몰아 달려가고 있는 목적지를 알 것도 같았다.
“이쪽 외곽으로 빠지면, 제가 아는 데가 하나 있긴 한데.”
“그렇겠지. 아홉 살까지 살았던 곳이니까, 길이 익숙하지?”
“네. 거길 데려가시려는 거예요? 왜요?”
“놀라지도 않네? 조용히 대화 나누기에 좋을 것 같아서.”
강정후는 여전히 웃고 있었다. 무수한 여성팬들이 열광하는 포근하고 여유 있는 미소.
미소의 톱스타가 모는 차량은 곧 보은보육원 앞에 이르렀다. 그는 정문 앞에 차를 대고 창밖의 정경을 내다봤다.
“좋은 곳이네. 운동장도 시설도 관리가 잘돼있어.”
“네. 아마 곧 구청 사람들 나오는 모양이네요.”
“보여주기 식이다? 흥미롭네. 세상이 다 그렇지 뭐.”
강정후는 차에서 내려 좁은 운동장을 걸었다. 이찬도 그 뒤를 따르며 속으로 투덜거렸다.
‘뭘 어쩌자는 건지 모르겠네. 가면이 너무 두꺼워. 속을 모르니 먼저 말 꺼낼 수도 없고, 답답해 죽겠는데.’
소년의 천재성은 자신의 미세표현을 감추지 못하는 범인들 사이에서 두드러진다. 그렇기에 신성운 검사나 허성윤 홍보팀장 같은 거물들을 이용할 수 있었다.
그렇지만 전지(全知)가 베이스인 이상, 인지가 이뤄지지 않는 상대는 그야말로 천적. 선글라스를 끼고 있던 신수영이 껄끄러웠던 게 바로 그런 까닭이었다.
지금 눈앞에서 걷는 강정후 역시 마찬가지였다.
그가 완전히 자신의 감정을 감추고 있는 까닭에 추론이 막혀버리고, 그로 인해 행동에 불필요한 제약이 자라났다.
그렇게 쩔쩔매는 소년을 강정후가 벤치로 안내했다.
“지나다니는 애들이 없네. 다들 뭐 하고 있는 걸까?”
“점심시간이잖아요. 다 식당 가 있겠죠.”
“흠. 아쉽겠네. 아는 애들 보고 가면 좋을 텐데.”
“3년이나 지났는데요. 원장도 나 기억 못 할 텐데.”
“그런가. 그래서 이름도 바꾼 거구나? 하지만 성은 바꾸지 말지 그랬어? 나랑 같던데. 강동일이라고 하면, 제2의 강정후라는 수식어도 더 입에 붙었을 텐데 말이야.”
“이찬이 더 좋은 이름이에요.”
“예명으로 외자가 나쁘진 않지. 기억에 잘 남으니까.”
건성 같은 말을 들으며, 소년은 윤대흥을 떠올렸다.
그는 이찬이란 이름이 예쁘다고 말했다. 그리고 세상에 지지 말고 좋은 사람들과 함께 행복해지라고 말했다.
그 말을 이행하기 위해서 강정후는 넘어야 할 벽이었다.
‘······나 뭘 하고 있는 거지? 지금 이 인간이랑 농담 따먹기를 할 때가 아냐. 행복한 사람이 되기 위해서 영화홍보에 매진해도 모자랄 시간이라고. 감정이 보이지 않는다고 해도 상관없어. 난 이찬이다. 형이 인정한, 신의 축복을 받은 사람이야. 논리적으로 생각하면 답은 간단해. 이 사람은 내가 고아라는 사실을 약점으로 잡고 협박하려는 거야.’
큰 타격이 될 일처럼 보이지는 않을 수도 있다. 단기적으로는 오히려 이슈를 통해 노이즈마케팅이 될 터.
그러나 이찬에게는 그게 약점일 수밖에 없었다.
유명한 배우들 중 고아는 한 명도 없다. 환경 때문에 연기를 배우기 어렵다는 이유도 있지만, 실질적으로는 그런 배경이 이미지에 큰 타격을 주는 까닭이었다.
배우는 우상이 되어야 한다. 동경 대신 동정을 받는 탤런트는 CF도 주연도 따내기 힘든 것이다.
‘그렇지만······ 그래도 날이 무딘 칼이야. 그걸 멍하니 기다려줄 필요가 뭐가 있어? 내가 가진 칼이 훨씬 더 예리한데.’
그렇게 확신한 순간, 소년의 기세가 바뀌었다.
“선배님. 편하게 말씀해주세요. 저한테 바라는 게 뭡니까?”
“흠. 내가 너한테 바라는 게 있을 거라고 생각하니?”
“네. 선배님이나 저나 영화 홍보로 바쁜 입장 아닙니까. 편하게 애기하세요. 안정록 교수님이랑 멀어지면 되겠어요?”
안정록이라는 이름에 강정후가 움찔했다.
아주 짧은 순간이었지만, 그 변화가 소년에게 힘을 실어줬다. 찰나의 빈틈을 통해 감정의 흐름을 캐치한 덕분이었다.
그는 두려워하고 있었다. 자신과 다르게 안정록의 인정을 받은 소년이 그 이름을 거론하는 상황에 괴로워하고 있었다.
그렇기에 주도권은 이찬 쪽으로 넘어왔다.
“안 교수님은 절 완벽에 가까운 천재라고 부르셨어요. 선배님보다 더 뛰어난 재능을 갖고 있다고요. 그분께 많은 것들을 배웠습니다. 앞으로도 많은 것들을 배우고 싶어요. 하지만 선배님이 그러지 말라고 하신다면, 거리를 둘게요. 톱스타 선배님하고 척을 지고 싶지는 않거든요.”
“하하. 생각보다 훨씬 더 영리한 꼬맹이였네. 재밌어. 그런데 어떡하지? 고작 그 정도로 되겠어? 아예 이 바닥에서 은퇴해주는 건 어떨까? 그러면 마음이 좀 풀릴 것도 같은데.”
“척지고 싶지 않다니까요. 좀 봐주세요. 저라고 안정록 교수님 괴로워하실 만한 소리를 하고 싶지는 않으니까.”
그 말에 강정후의 온 몸이 경직됐다. 가면을 깨뜨리고 나타난 내면의 청년이 두 눈을 부라린다.
“너, 하하하. 그게, 무슨 헛소리야?”
“신기한 일이죠? 그렇게 선생님 선생님 하시면서도, 외가 쪽 얘기는 철저히 감추셨던 모양이에요? 그 집안이 정말 더러운 일들을 많이 하셨던데. 절에 다니시는 교수님 입장에선 그 얘기를 들으면 굉장히 불쾌해지실 거예요.”
“하하. 거참. 무슨 황당한 소린지.”
“맞아요. 선배님 생각대로 증거는 하나도 없어요. 다 심증일 뿐이죠. 그렇지만 심증이란 것도 출처 나름인지라······ 검찰에서 그런 얘기들이 나오고 있다는 말만 건네도, 안정록 교수님은 선배님을 더욱 멀리하실 거예요.”
이야기를 듣는 동안에 강정후의 가면이 돌아왔다. 그는 또다시 온화하게 웃으면서 말했다.
“맹랑하네······ 검찰에 끈이 있다라. 언제부터 준비한 거야?”
“준비랄 게 있나요? 교토삼굴이라고, 항상 대비하는 거죠.”
“그렇지만 좀 우습지 않니? 아무 증거도 없이 중상(中傷)을 한다는 말에 내가 겁을 먹을 줄 알았어? 안 선생님께서 그런 헛소리를 믿어주실 리가 없잖아?”
“그렇죠. 제가 헛소리를 했네요. 그럼 이제부터 본론으로 들어가 볼까요?”
서로의 칼은 이미 드러났다. 그리고 그 날붙이들은 실제로 휘두르기 위해서 꺼내진 것이 아니다.
처음부터 서로가 협박을 위해 마련한 패. 타격 여하에 무관하게, 휘두르고 나면 더는 선택을 강요할 수 없게 되고 만다.
그렇기에 소년은 강정후에게 더 무난한 선택지를 권했다.
“헛소리로 선배님한테 무리한 요구를 할 생각은 없어요. 제가 나이는 어려도 세상 무서운 줄 알거든요. 그냥 공정한 게임을 할 수만 있으면 족해요. 서로 이상한 수 쓰지 말고, 랑 <미스 스캔들>로 내기를 하죠.”
“······하하. 내기? 객수로? 가망이 있다고 생각해?”
“물론이죠. 아, 결과가 어떻든 앞으로 안정록 교수님과는 거리를 둘 생각이에요. 같은 회사 간판스타 선배님께 폐를 끼치고 싶진 않거든요. 그 대신, 제가 이기면 인터뷰 하나만 해주세요. 이찬은 제2의 강정후가 아니다, 몇 년 뒤에는 제1의 이찬 시대가 열릴지도 모른다, 그런 식으로요.”
무리한 요구는 아니었다. 열두 살 소년을 두고 하는 말이니, 그저 립서비스라고 생각할 대중이 많을 터.
무엇보다 는 하반기 최대의 블록버스터다. 추석 대목도 지나서 개봉할 <미스 스캔들>에 밀릴 이유가 없었다.
그렇게 생각했기에, 강정후의 미소가 짙어졌다.
“흠. 그런 걸 원한다는 거지? 그래, 모든 배우는 나르시스트니까. 남의 그늘 밑에 있는 건 네게도 기분 나쁜 일이겠지. 그렇다면 반대급부는 뭐야? 내가 이기면, 어떡할 거냐?”
“그럼 뭐, 전 3년 동안 연기 쉴게요. 부족함을 인정하고 자숙하면서 공부나 할게요. 어때요? 공정하죠?”
말하면서, 소년은 그 어느 때보다도 집중해서 오만한 나르시스트를 연기했다. 100%의 승산을 자부하기에 타격이 큰 조건을 감수하는 것처럼 자신의 모든 표현을 꾸며냈다.
온화한 가면과 오연한 가면이 맞부딪친다.
강정후는 가면 아래의 이찬을 분별해내지 못했다.
“······그래. 3년, 좋지. 그런데, 혹시 이상한 수작질을 하면-”
“선배님도 저도, 그 정도 알아볼 라인은 있잖아요?”
“그때는 파국이란 거지······? 좋아. 내기, 해보자.”
패배의 가능성을 상정하지 않는 두 천재가, 손을 맞잡았다.
< 17장 - 배우 강정후 (2) > 끝
ⓒ 비벗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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