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훔치는 연기자-51화 (51/250)

< 19장 - 연출 주동한 (1) (유료 시작화) >

한국영화사에서 2000년도는 특별한 해였다.

멀티플렉스 시대를 맞아 와 <미스 스캔들>이 동시기에 400만 관객을 달성하며, ‘분단 블록버스터’와 ‘아역 가족영화’라는 굵직한 두 카테고리를 완성해낸 시기.

드라마 업계에서도 <가을하늘>이 오랜만에 시청률 50%를 돌파해, 청춘드라마로도 충분히 전 세대를 아우를 수 있다는 확신이 관계자들 사이에 전파되었다.

이후 2001년과 2002년을 거치며 한국 영화계는 양적으로 팽창하기 시작했다.

많은 스크린을 갖춘 멀티플렉스 상영관들이 전국적으로 뻗어나가자, 그 수익성을 높게 본 거대자본이 너나할 것 없이 국산영화 제작에 대규모 투자를 단행했다. 이를 통해 무수한 영화들이 산발적으로 제작됐던 것이다.

그 작품들 중 가장 빛났던 것은 2001년 3월 개봉한 진정 감독의 <네 친구>. 청소년 관람불가 판정에도 불구하고 역대 최고 성적인 800만 관객을 동원해냈다.

조혁수라는 최고의 흥행카드에 더해 이소연을 비롯한 조연들의 연기까지 빛을 발하며 작품성에서도 찬사를 받아, 그 작품 이후로 충무로에 조폭영화 붐이 일기도 했다.

그해 여름엔 오덕환 감독의 <칠월칠석>이 500만 관객을 돌파하며 이슈를 일으키기도 했다.

신인이던 소년을 제2의 강정후로 만들며 슬리퍼히트(예상치 못한 흥행)를 기록한 전작에 이어, 신작의 주인공은 다름 아닌 강정후 본인.

‘오덕환 사단’이 된 신수영과 코믹하고 애절한 연인 연기를 펼친 그는, 연기 스펙트럼을 한층 넓혔다는 평을 들었다. 이후 로맨틱코미디라는 장르가 정형화되기에 이르렀다.

2002년에는 <집에서>가 가족영화로는 두 번째로 400만 관객 동원에 성공했으며, 조혁수 주연의 형사 영화인 <공적>은 500만을, 강정후 주연의 <라이터>는 실험적인 줄거리에도 불구하고 200만 흥행을 달성했다.

그에 더해 안정록이 오랜만에 메가폰을 잡았다.

<소리의 빛>에 이은 고전극 <장승업>이라는 작품으로, 비록 국내 흥행에는 실패했지만, 칸 영화제 경쟁부문에 진출해 감독상을 수상하는 쾌거를 이뤄냈다.

그렇게 충무로가 성장하는 동안, 여의도로 대표되는 현대극 드라마 업계는 주춤한 모양새였다.

2001년과 2002년 모두 대히트를 기록한 건 오직 역사극.

그나마 2002년에 심성윤의 <겨울바다>와 정한식의 <소녀 성공기>가 30%대 시청률로 선방했을 뿐이었다.

그런 상황에서, MSB의 현대극 전문 제작PD 주동한은 새로운 아이디어를 떠올리게 된다.

먹히는 건 사극. 그러나 그리고 싶은 이야기는 현대극.

그렇다면 사극의 배경에 현대극의 이야기를 가져와보면 어떨까? 50화 이상의 장편으로만 나오기에 젊은 층에 먹히지 않는 사극을 비틀어, 현대극처럼 20화 미만의 타이트한 시나리오를 그려보면 어떨까?

후대에 이른바 ‘퓨전 사극’이라 불리게 될 새로운 트렌드의 효시가, 2002년 연말에 태동하기 시작했다.

검정고시를 통해 고졸 학력을 취득한 이찬이 막 다음 작품을 모색하던 시기였다.

*

오디션장에 소년이 들어섰을 때, 주동한은 꽤 당황했다.

“······이찬 군? 맞지?”

“네, PD님. 나라엔터 배우 이찬입니다.”

“그래. 그렇지. 지금 몇 살이지?”

“열다섯입니다.”

“어, 열다섯. 그렇지. 그런데 지금 키가 몇이야?”

“183cm입니다. 프로필에 적힌 대로예요.”

주변에서 절로 탄식이 흘러나왔다. 주동한의 시선이 흩어져 있던 프로필 쪽으로 향했다.

“······음, 그렇게 적혀 있구만. 내가 자꾸 <가을하늘>이나 <미스 스캔들> 때 이미지가 떠올라서, 이걸 놓쳤어.”

“그러실 거라고 생각했어요. 저도 가끔 놀라곤 하니까요.”

“하하. 어떤 때 놀라곤 하는 거야?”

“옷 입을 때요. 성장통 몇 번 겪고 나니까 긴팔 긴바지는 하나도 맞는 게 없어져서, 한동안 반팔 반바지만 입고 다녔죠. 하지만 최근 3개월 동안엔 1cm 정도밖에 안 자랐습니다. 아마도 나중에 클 거 몰아서 다 큰 거겠죠.”

유쾌하게 말하는 너스레에 옆자리 중년 여성이 킥 웃었다. 주동한과 오랫동안 손발을 맞춰온 윤진선 작가였다.

“말을 참 잘하네. 오디션도 오디션이지만, 사적인 것부터 좀 물어봐도 될까? 그동안 어떻게 지냈어? 2년쯤 지났나?”

“작품 쉰 건 2년 좀 넘었어요. 그간 자유롭게 살았죠. 검정고시 때문에 주로 공부가 위주였지만, 운동도 많이 했어요.”

“아, 검정고시. 중학교 졸업한 거야?”

“초졸, 중졸, 고졸 다 땄어요. 홈스쿨링을 열심히 했죠.”

“와, 대단한데? 지금 열다섯이면, 고등학교 들어가기도 어린 나인데. 우리 아들은 중학교 내용 복습하고 있는데.”

“하하. 윤 작가 아들이 고1이었나?”

“네. 정말 부럽네요. 연기도 잘하는데 공부까지······.”

진심을 담아 천재소년의 부모를 부러워하던 윤진선은, 곧 고개를 갸웃거리며 주동한을 돌아봤다.

“그런데 그새 이미지가 많이 바뀌었네요.”

“그러니까 말이야. 키가 훌쩍 커서 못 알아볼 뻔했어.”

“키도 키지만, 얼굴에서 앳된 느낌이 없어졌어요. 2000년에는 그래도 아이구나 싶었는데, 지금은······ 성인 배역도 가능하겠는데요? 바로 알아보는 사람이 더 적을 것 같아요.”

“그래도 그렇게야 되나. 이미지가 달라졌다곤 해도, 지금 대중이 기억하는 이찬이라고 하면 어디까지나 ‘리틀 조혁수’란 말이야. 갑자기 현대극에 주연으로 들어가기는 어렵지.”

“맞습니다. 감독님, 그리고 작가님, 그래서 이 작품에 지원하게 됐습니다. 제작 예정 드라마 중에서, 유일하게 어린 배우가 지원할 수 있는 주연이었으니까요.”

주동한 연출 윤진선 각본의 <어사>는, 조선시대의 천재소년이 암행어사가 되어 역적의 음모를 파헤치는 이야기.

조선은 현대보다는 훨씬 일찍 상투를 틀 수 있는 시대였다. 그렇기에 수염 없는 소년이 주연이 돼도 이상하지 않다.

또한 그 전략이 먹힌다면, 사극 시청자인 4,50대와 청춘스타를 좋아하는 1,20대를 모두 만족시킬 수 있을 터였다.

물론 현실과 연기는 늘 다른 법.

작중에서 약관(弱冠)도 안 되는 나이로 등장한다 하나 월화극의 주연 배역이다. 가능하면 동안의 20대 스타를 캐스팅해서 완성도를 높여야 한다고 주동한은 생각했다.

무엇보다 드라마국 고위 인사들이 퓨전 사극이라는 새로운 형식을 받아들이지 못하고 있다. 시놉부터 의심스레 바라보던 그들에게 어필하기 위해서는, 주연의 네임밸류가 필수였다.

그런 까닭에 연말까지만 해도 유명 청춘스타들 사이에서 주연을 물색하고 있었다.

나라엔터의 이찬이 뜬금없이 그 배역에 지원한 게, 구태여 공개 오디션을 열게 된 계기였다.

이찬. 2000년도 드라마와 영화 양쪽에서 빛났던 아역.

고작 12세에 ‘리틀 조혁수’와 ‘제2의 강정후’라는 찬사를 받으며 <가을하늘>의 초회 30% 시청률과 <미스 스캔들>의 400만 관객몰이를 견인했던 인물이다.

그 결과, KBC 연기대상에서 명진아와 함께 나란히 청소년상을 수상했으며, 각종 영화 시상식에서 아역상을 석권하며 화려한 데뷔를 알렸다.

그렇지만 그 뒤로 수십 편의 CF 외에는 얼굴을 보이지 않았다. 2년이 넘는 시간을 쉬었으니, 지금은 대체 어떤 모습일지, 그때의 연기력이 온전할지에 의심이 있을 터였다.

그렇기에 비공개 선별이던 캐스팅이 메이킹 촬영을 겸한 공개오디션으로 변경되었다. 덕분에 그간 물밑에서 접촉했던 스타들 역시 카메라 오디션을 치르고 간 상황.

개중 가장 어린 이찬이 오디션의 마지막 순번이었다.

“그래······ 아, 대기실에서 경쟁자들 좀 만나봤어?”

“예. 최정하 선배님이랑 오랜만에 인사했어요.”

“아, 최정하. 그 친구랑은 <가을하늘>에서 만났었나? 아니 잠깐만. 촬영 현장이 다르지 않았어?”

“제가 성인 씬 촬영장 견학을 가기도 했고, 선배님들이 아역 촬영장에 응원차 방문하시기도 했어요.”

“아, 그랬군. 맞아. 기사로 봤던 기억이 나. 오랜만에 경쟁자로 만나니 어떻든? 너 큰 거 보고 많이 놀랐겠다.”

“예. 두서없이 놀라시다가, 웃으면서 가셨어요. 힘내라고 하시더라고요.”

힘내라고 했다라- 주동한은 고개를 갸웃거렸다.

‘정말 힘을 내라는 말인지 견제하면서 한 말인지 모르겠군. 그 녀석도 이번 배역에 꽤나 심혈을 기울였던데 말이지.’

이제 스물넷이 된 청춘스타 최정하는, 이찬이 지원하기 전까지만 해도 가장 유력한 주연감이었다. 상황이 복잡한 이찬을 제외하면 개중에서 가장 인지도가 높은 축이고.

“그렇담······ 힘내서 한번 우릴 설득해봐. 시놉시스랑 2화 대본까지 받았지? 일단 작품 배경부터 들어보자고.”

“예. 우선 암행어사란 임금이 직접 간택하는 겸직이죠. 지방의 민감한 사정을 살피는 게 임무이기에 노련한 문관들 위주로 임명됩니다. 하지만 이번 작품 <어사>에서는 특수한 케이스를 다루고 있죠. 비대해진 외척이 병력을 키우고 있다는 첩보로 인해 비밀리에 수사관을 파견해야 할 상황이 된 겁니다. 이때 유망한 관리가 정식으로 암행어사로 임명되면, 적들에게 정보가 샐 수밖에 없습니다. 그렇기에 나이 어린 장원(壯元) 유생인 ‘유관’이 선택됩니다. 작중의 주 무대인 충청도 출신이기도 하고, 숙련된 수사관들을 붙여주면 조사에는 문제가 없으리라 판단한 것도 있었습니다.”

“흠, 좋아. 배경을 정확하게 꿰고 있네. 아, 갑자기 궁금해서 물어보는 건데, 검정고시 성적은 어떻게 나왔어?”

“······백점이요.”

“오, 백점도 있어? 어떤 과목?”

“전 과목이요. 열심히 공부했어요.”

잠깐 말을 잃은 주동한에게, 윤진선이 귓속말을 건넸다.

“정말 부럽네요. 아역스타인데, 거기다 천재라니.”

“그러게. 캐릭터랑도 잘 맞는 것 같아. 들어보니 <가을하늘> 때 대본도 안 들고 다녔다고 하더라고.”

“전부 달달 외운 거예요? 정말 천재 아닌가요? 와······.”

“으흠, 으흠. 좋아. 이어서, 주요 수사관들은 누구야?”

“예. 종6품 종사관인 황보준은 조선의 최고수 반열인 실력을 감추고 있습니다. 정의로운 성격에 인망도 있지만, 모종의 사건으로 인해 중앙에서 밀려났고, 이후 유관을 따르게 되죠. 아마 그 사건이 핵심 얼개와 얽히게 될 것 같은데요.”

“오호. 그리고?”

“여주인공인 다모(茶母) 채화는 황보준의 심복입니다. 그에게서 비밀리에 검술을 배우고 있어 실력은 출중하지만, 이쪽은 신분과 성별 때문에 솜씨를 감추고 있죠. 그런 데다 성격도 말괄량이라서 자주 문제를 일으키고, 그걸 해소하는 과정에서 유관과 인간적으로 교류하게 됩니다.”

“그래, 그렇지. 그러면 그 채화랑 유관이랑 잘될 것 같아?”

“채화가 짝사랑하는 대상은 연상의 스승인 황보준이죠. 2화까지는 그 마음이 흔들릴 일이 없어 보였고요. 그렇지만······”

이찬이 말꼬리를 늘이자, 주동한은 구연동화 듣는 어린이처럼 귀를 기울였다.

“아마 유관과 이뤄질 것 같습니다.”

“흠. 왜 그렇게 생각해? 그게 전통적인 극작법이니까?”

“대본 보면서 느낀 건데, 작가님께서 지문에 상당히 많은 정보를 담으시더라고요. 황보준이 채화를 보는 시선에 특히나 많은 지문을 할애하시던데······ 그게 죄책감이 아닐까 짐작했습니다. 아마 그 모종의 사건 때, 채화의 돌아가신 부모님도 연루되신 게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어요.”

“······윤 작가?”

“네, 네, 감독님.”

“그런 거야?”

“에이. 결말은 아직 안 정했다니까요.”

어깨를 으쓱인 윤진선이 이찬을 향해 질문을 건넸다.

“이찬 군? 이제 인물분석을 들어보고 싶어. 장원급제한 유생으로서 낙방한 척 충청도로 돌아가게 됐을 때, 유관은 채화한테서 어떤 감정을 느끼게 될까?”

“유관은 몰락한 가문의 마지막 희망이었죠. 장원을 하고서도 낙방한 척 돌아가며, 반드시 적들을 소탕해서 관직을 제수받고 금의환향하리라고 다짐했을 겁니다. 그런 유관에게 채화는 불편한 존재죠. 실력도 별로고, 나이는 어리고, 하는 짓은 장난기 가득해서 신뢰가 안 되고. 2화 마지막 씬에서 그 채화에게 구조됐을 때엔 아마 상당히 충격이 컸을 것 같아요.”

“그래? 그게 어떤 충격이었을까?”

이찬은 마음속으로 강정후를 떠올렸다.

서로가 서로에게 패배를 인정한 2000년의 겨울. 강정후는 허탈한 듯 보였다. 그 의식은 아마 다음에는 반드시 완전한 승리를 거두고 말겠다고 다짐하고 있었으리라.

그렇지만 그런 한편으로, 그는 아주 후련하게 웃고 있었다.

“늘 자신을 드러내기 위해 필사적이었던 유관에게 있어서, 스스로를 감추고 암약해야 하는 채화의 삶은, 무척 특별해 보였을 겁니다. 아마 부러웠을 거예요. 그렇지만 이후로 조금씩 그녀의 현실을 느낄 겁니다. 부모를 잃고 칼 한 자루에 의지해 세상과 싸워나가야 하는 관비(官婢)의 삶. 그걸 보면서 처음으로 생각하는 거죠. 내가 지켜주고 싶다. 나 자신을 지키는 것만으로도 벅찼던 삶이지만, 저 사람은 지켜내고 싶다.”

윤진선은 복잡한 표정으로 주동한 쪽에 소곤거렸다.

“아니 쟤······ 작가 해도 되겠는데요? 통찰력이······.”

“으흠, 으흠. 이찬 군, 대본을 아주 열심히 본 모양이야?”

“예. 제가 연기를 조혁수 선배님한테 배워서요.”

그러면서 슬쩍 펼쳐 보인 1화 대본은, 무수한 필기와 포스트잇 속에 묻혀 인쇄된 활자가 잘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거참······ 흥미롭네. 해석은 잘 들었고, 이제 연기만 보면 될 것 같은데. 그런데 그 전에 하나 물어보고 싶은 게 있어. 이찬 군. 이거랑 동시기에 심성윤이도 <여름들판>으로 편성이 예정돼 있단 말이야? 네가 출연한 <가을하늘>로 스타감독이 된 그 친구가, 그것도 너희 회사 간판배우 강정후를 주연으로 삼아서 신작을 낸다는 건데. 동시간대 타 방송사에서 그 친구하고 경쟁하는 거, 정말 괜찮겠어?”

이찬은 웃었다. 유관을 바라보는 채화의 마음으로.

그리고 채화를 바라보는 유관의 목소리로 말했다.

“내 그 사실 때문에 이 작품이 더 마음에 들었소. 이번에야말로 그 선배를 꺾어 제2의 강정후라는 수식어를 떼고 싶은 마음이오. 그 일념으로 본 사극의 수효가 열 편이 넘소. 반드시, 내 반드시 <어사>로 <여름들판>을 누르고 말 것이오!”

“오, 오······ 야, 이 녀석. 느낌 나오는데?”

“그러게요! 발성이 제대론데요? 쩌렁쩌렁한 게, 정통 사극 보시던 어르신들도 어색해하지 않으실 것 같고요.”

그 뒤에 이어진 즉석연기에서 이찬은 대본을 보지 않았다. 그저 지정되는 씬을 듣고, 연기하고, 씬을 듣고, 연기했다.

그 두 씬 뒤에, 주동한과 윤진선이 넋을 잃었다.

< 19장 - 연출 주동한 (1) (유료 시작화) > 끝

ⓒ 비벗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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