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훔치는 연기자-52화 (52/250)

< 19장 - 연출 주동한 (2) >

마지막 참가자였던 이찬을 내보낸 뒤, 주동한은 윤진선과 함께 긴급 토론에 들어갔다.

배역의 주인을 결정하기 위함은 아니었다. 몇 씬의 연기를 본 것만으로도 ‘유관’은 이찬으로 낙점됐다.

그 정도의 실력이었다. 2000년도의 충격만큼 강렬한 감동이 카메라에 담겨, 메이킹이 공개되면 대중들 역시 이찬의 새 주연극에 기대를 가지리란 확신이 생겼던 것이다.

문제는 그로 인해 탈락하게 된 다른 배우였다.

“최정하 친구는 정말 너무 아까워요. 이번 배역 거의 확정됐다고 생각해서 사극 연기 열심히 준비했던데.”

“그랬지. 그건 확실히 미안한 일이야. 기왕이면 살릴 수 있다면 좋겠는데, 마땅한 배역이 좀 없겠어?”

“서브 남주 황보준 역할로는 너무 어려요.”

“아니면 왜, 악역들 중에 임팩트 있는 인물을 만들까?”

“악역이요? 임팩트 있는 악역이 극을 재밌게 만들어주는 감초긴 하지만······ 정하 친구 이미지가 워낙 좋잖아요? 갑자기 악역으로 제안을 넣으면, 회사에서 받아들일까요?”

“그 녀석이 금양기획이었지? 흠. 이런 건 어때? 거기 명진아가 있잖아? 걔를 여주인공 채화 역으로 캐스팅하는 거야.”

“예? 어? 어어?”

윤진선은 입을 열었다 닫았다 하며 혼란스러워했다.

“그거, 좀······ 이상할 것 같은데요?”

“이상하겠지?”

“그럼요! 어리기도 하고, 동시간대 붙을 심성윤 PD님 <가을하늘>에서 남매 역할로 나왔던 두 아역인데.”

“그러니까. 재밌을 것 같지 않아?”

“재미······요?”

“마케팅이 딱 되잖아! 이제는 열일곱 열다섯이 돼서, 아역 딱지 떼고 하이틴스타 얼굴로 거듭난 친구들이야. 그런 애들이 심성윤 작품이랑 맞붙는 드라마에 쌍두마차로 출격한다? 거기다 <가을하늘> 서브 남주였던 최정하가 악역? 이거 얼마나 흥미로워? 당장 화제성이 몇 배로 뛸 거란 말이야.”

“그야, 화제성은 있겠지만······ 이미지가 괜찮을까요?”

쉽게 낙관하기 어려운 문제였다.

배우들의 이미지는 상대역과의 호흡으로 고정되곤 한다. 명진아 쪽이야 <가을하늘> 이후로 여러 드라마와 영화에서 활약했고, 개중에 사극도 있었다지만, 이찬 쪽은 2년의 휴식 뒤에 선택한 첫 차기작인 것이다.

그런 작품에서 또다시 명진아와 붙는다는 소식에 시청자들이 어떻게 반응할지 알 수 없는 노릇이었다.

일반적으로 방송가에서 ‘알 수 없다’라는 표현은 ‘안 된다’라는 말과 거의 동의어.

그렇지만 주동한 PD는 현대극에 사극을 접목하는 퓨전 아이디어까지 떠올릴 정도로 생각이 유연한 사람이다. 그는 오히려 장점 쪽에 집중했다.

“만약에. 만약에 말이야. <가을하늘>을 떠올릴 수도 없을 정도로 완벽한 작품을 만들어낸다면 어떨까? 그 드라마를 안 본 사람들은 그 사람들대로 끌어오고, 심성윤 팬들도 <가을하늘> 추억 때문에 이쪽 기웃거리다가 결국은 우리 드라마에 푹 빠지게 될지 몰라. 무엇보다 따로 홍보가 필요 없잖아? 방영 전부터 인터넷 매체들이 <여름들판>과 우리 드라마를 조명할 테니까. 아! 그러면 <야인> 쪽 시청자들까지 움직일 수 있겠다. 생각해봐. 그 일대기 보던 어르신들이 <여름들판>을 보겠어, 퓨전이라곤 해도 사극을 보겠어?”

<야인>은 지난 가을부터 일대 센세이션을 일으키며 방영 중인 SBC 드라마. 일제강점기부터 근현대까지 다룰 대하극인 까닭에, 극 후반부에는 <어사>와도 맞붙게 될 터였다.

“그거 50% 넘길 거다 아니다 말이 많잖아? 내가 볼 땐 무조건 넘겨. 2부 넘어가고 나서도 상당히 인기가 있을 거란 말이야. 하지만 시청자층은 변하겠지. 액션 때문에 보고 있는 청년층은 빠져나가고 어른들 위주가 될 거야. 그리고 1년째 방영 중인 드라마가 화제성이 높진 않겠지? 그러면 <여름들판>하고 대결구도를 잡아서, 화제성만으로 거기 시청층을 끌어올 수 있을지도 몰라.”

“아이고······ 우리 주 PD님, 또 시나리오 쓰시네요?”

“PD의 중요한 자질 중 하나지. 야, 이거 되겠는데? 잠깐 있어봐. 부장하고 쇼부를 쳐봐야겠어. 그 형님이 금양 사장하고 술도 마시고 하는 사이니까······.”

이찬과 명진아가 모르는 곳에서, 두 사람을 상대역으로 붙이기 위한 시도가 시작됐다.

*

“찬아! 어땠어? 붙었어?”

오디션을 마친 이찬을 향해 로드매니저 염수진이 달려온다. 말투는 궁금해 미치겠다는 투였다.

“어떨 것 같아요?”

“어······ 모르겠어. 너 연기 너무 오래 쉬었잖아? 맨날 공부만 하고 운동만 하고, 어디 나다니지도 않고. 그동안 내가 얼마나 심심했는지 알아? 우리 팀 핵심 배우라고 정 팀장님은 나 어디 보내주지도 않고 말이야. 맨날 집에서 밥하고 청소하고, 아주 가정주부가 된 줄 알았다구. 저번에 영화 오디션 붙고 난 뒤로 우리 외식 한 번도 안 한 거 알아?”

“누나. 전에 통화하시는 거 들으니까, 소설 출판하신다고?”

“엇? 들었어? 아이······ 부끄러워라.”

“계약 위반 아닌가? 업무시간에 소설을 연재했다니.”

“앗? 그건······ 차, 찬아? 누나가 너 아끼는 거 알지?”

“이번 소설은 빨리 완결 내세요. 조만간 바빠질 테니까.”

“응? 어, 와! 너, 붙었구나! 붙은 거야! 아싸! 신난다!”

염수진은 드디어 방구석 생활을 접고 촬영장에서 미남 배우들을 구경할 수 있다는 생각에 들떴다. 운전석에 앉은 뒤에도 싱글벙글 웃음이 지워지질 않았다.

“히힛. 이제 어디로 갈까? 찬아, 기념으로 쇼핑 할까?”

“뭔 쇼핑이에요? 스케줄 끝났는데 집 가야지.”

“아······ 바로? 오랜만에 나온 건데······?”

“쇼핑 가면 사람들 몰려들잖아요. 귀찮아요.”

“별로 많이 알아보지도 않잖아? 키 크고 얼굴도 바뀌어서 다들 갸웃거리면서 가던데? 아, 회사 들러서 오디션 결과 말씀드리자. 그래, 오랜만에 선배 배우들한테 인사도 드리고-”

“결과는 팀장님한테 문자로 전했어요. 가서 운동해야 돼.”

“으······ 집 가기 싫은데······ 체육관이라도 잡으면 안 될까?”

그 말에 답하지 않은 채, 이찬은 창밖에 시선을 고정했다.

“뭐야? 어디 봐? 누구 있어? 어? 신혜네?”

MSB 방송국의 회전문 안쪽에, 정신혜가 있었다. 매니저도 없이 홀로 선 채 멍하니 창밖을 내다보고 있다.

“쟤 또 물먹었나?”

“물을 먹어요?”

“응? 아, 그냥 들은 얘기야. 여기저기 배역 알아보고 다닌다던데, 이젠 잘 안 되는 모양이더라구. <가을하늘> 이후로 주조연 몇 개 맡았던 게 다 평이 별로였잖아?”

그건 소년도 알고 있는 일이었다. 그 드라마와 시청평 대부분을 모니터링 했으니까.

2년간 세 차례의 검정고시를 치르면서도, 하루에 두세 편 정도의 드라마를 볼 시간은 있었던 것이다.

보이는 모든 것을 인지하는 관찰력은 그 한 가지 재능으로 그치는 능력이 아니다. 무수한 정보를 수집하고 분류하는 이찬의 뇌는 기억력 측면으로도 초인적이었고, 그를 통해서 순식간에 성적을 제고할 수 있었다.

소년은 학업에 있어서도 천재였다.

학문의 영역으로 간다면, 이해력과 창의력이 요구되는 만큼 자잘한 문제를 겪을 수도 있겠지만.

“연기 자체는 나쁘지 않았는데.”

“그랬어? 난 별로던데? <가을하늘> 때 인상이 강해서 그런가······ 다른 드라마에선 영 죽만 쑤는 것 같았어. 그러니까 짱짱했던 ‘시라’ 약빨도 다 떨어져버린 거지.”

그렇게 들으니 이찬으로서도 느껴지는 바가 있었다.

‘기대심리 같은 걸까? <가을하늘> 때 자기 실력 이상을 발휘한 탓에, 감독에게도 대중에게도 기대 이하라는 느낌을 주게 됐다든가. 아니면······ 신혜 누나 본인의 과신이 문제가 됐을 수도 있겠네. 격찬을 받은 그 작품 이후로 무게감 있는 배역에 쏙쏙 들어갔지만, 점점 분량이 줄어드는 느낌이 들었지. 명성에 비해 실력이 안 받쳐줘서 그랬던 걸지도.’

정신혜는 재능 없는 배우는 아니었다. 그러나 다른 또래들을 제치고 앞서나갈 수 있을 정도의 재원도 아니다.

거기다 페이스 자체도 대중적으로 사랑받기 어려운 여우상. 성인이 돼도 악녀나 여주인공 친구 역에 만족해야 할 터였다.

그렇지만 <가을하늘>에서 그녀는 이찬의 코치로 자기 한계를 넘었다. 향상된 연기력으로 동정여론까지 일으켜서, 인터넷상에서 ‘안지혜’ 팬덤과 ‘신시라’ 팬덤이 맞부딪치는 일까지 생겼을 정도였다.

그런 정황에 그녀 본연의 강한 자기애가 곁들여졌다면, 계란으로 바위 치기 같은 무리수만 두고 있을 법도 했다.

“누나. 저 누나는 회사가 어디였죠?”

“쟤가? 어디였지······ 작은 데였는데. 아니, 오랜만에 만난 건데 불러서 얘기나 할래? 종방연 때 보고 처음이잖아?”

“아뇨. 그럴 건 없고요.”

“정말? 와, 2년 만에 보는 건데?”

“전화번호도 아는데, 보고 싶으면 연락을 했겠죠.”

반갑지 않은 사람은 아니나, 정신혜와는 인연이 복잡했다.

첫키스의 상대. 성인이 된 뒤 찾아오라는 말을 남기고 쿨하게 돌아섰던, 헐리웃에나 어울릴 법한 소녀 난봉꾼.

저렇게 마음이 약해진 상태에서 마주하게 되면 또 무슨 대시를 당할지 알 수 없었다.

“그냥 저 누나 매니저님한테 얘기 좀 전해주세요. 제가 생각할 때 신혜 누나는 <여름들판> 오진주 역에 어울린다고.”

“어? 그래? 엉뚱하고 귀여운 중학생 역에 어울린다고?”

“네. 본인은 잘 모르는 것 같지만, 심성윤 감독님이라면 잘 써줄 수 있을 거예요. 그런 식으로 얘기 좀 전해줘요.”

“그래? 흠, 뭐, 그럴 수도 있겠네. <가을하늘>에서도 감독님 덕분에 좋은 연기가 나왔던 걸지도 모르니까. 알았어. 걔네 로드한테 한번 연락해볼게.”

로드매니저가 배우의 작품 선택에 큰 영향력을 끼칠 수 있는 건 아니지만, 개인적으로 오디션 권유 정도는 해볼 수 있을 터였다.

이찬은 데뷔작 동료에 대한 배려를 그 정도로 정리했다.

그 대신 그녀가 아닌 다른 동료를 떠올렸다.

“누나. 남태형 선배님은 요즘 뭐 해요?”

“앗! 우리 꽃미남 태형 씨? 요즘도 열심히 모델 하고 있지. 이상하게 연기는 계속 쉬고 있어. 또 그 그윽한 눈빛을 보고 싶은데. 왜 안 하는 걸까?”

안 하는 게 아니라 못 하는 걸 텐데- 생각하며 소년은 어깨를 으쓱였다.

정신혜와 비슷하게 이찬의 코칭으로 자기 실력 이상의 연기력을 선보였던 남태형은, 이후 수많은 작품의 러브콜을 받았다고 했다.

모르긴 몰라도 정신혜 이상이었으리라. 나이도 성인이고, 페이스도 호불호가 안 갈릴 만큼 대단한 미남이니까.

하지만 그의 행적은 아역 소녀와는 정반대였다. 어떤 대작에서 콜을 보내도 눈조차 돌리지 않았고, 심지어 진정 감독의 차기작조차 거절했다고 한다.

그러나 이찬은 그가 연기의 뜻을 버리지는 않았으리라 생각했다.

‘아마 쫑파티 끝나고 찍어준 영상들 연습하고 또 연습하는 중이겠지. 그 몇 안 되는 캐릭터들에 맞는 배역이 들어왔을 때, 곧바로 맡을 수 있게끔. 그 정도로 집요한 사람이니까 <미스 스캔들>의 양지환을 완성할 수 있었던 거야. 그렇게 생각하면, 참 고마운 아저씨지.’

양지환이라는 배역이 죽었다면 415만이라는 대중적인 흥행을 달성하진 못했을 것이다. 신수영의 로맨스 분량이 청춘남녀가 그 영화를 선택했던 주요인이었으니.

처음에는 불안요소로 여겼던 배우지만, 결과적으로 그가 남태형이었기에 명작 <미스 스캔들>이 완성된 셈이었다.

‘그렇긴 해도, 앞으로는 좀 조심해야 되겠어. 내가 매번 일일이 가르칠 수 있는 입장도 아닌데, 무책임하게 이 사람 저 사람 코치해서 신혜 누나처럼 헛바람 들게 만들면 안 되잖아. 그런 건······ 나중에. 아주 나중에 내가 영향력 있는 배우가 돼서 내 사람들을 모을 수 있게 됐을 때, 그때 하면 돼.’

먼 미래를 그리며 소년은 눈을 감았다. 남 걱정 대신 집에 가서 몸을 좀 더 키워야겠다고 생각하면서.

그렇지만 염수진이 다시금 그를 불렀다.

“얘, 찬아. 진아 소식은 안 궁금해? 작년에 <소녀 성공기> 나오고 나서는 소식이 없잖아? 뭐 하고 지내는 걸까? 아! 아마 작품은 좀 쉬려나? 이제 고등학생이니까.”

정신혜나 남태형과 달리 이찬의 코칭 없이 스스로 성장한 명진아.

그녀는 여전히 최고의 아역으로서 활약 중이며, 평균시청률 32%를 기록했던 <소녀 성공기>에서는 주인공의 여동생 배역으로 탁월한 연기력을 또 한 번 인정받았다.

“진아 누나라······ 신혜 누나가 그 누나 말은 잘 들었는데.”

“그렇지! 어때? 오랜만에 진아도 볼 겸, 금양 놀러 갈래?”

“거기 사장님이랑 우리 똥구녕이랑 견원지간인데요?”

“에이, 무슨 상관이야? 배우들끼리 교류하는 건데.”

“흠. 한번 그쪽 근처로 가봐요. 전화로 불러내게.”

“정말? 아싸! 가자! 방구석 탈출이야!”

*

명진아는 복잡한 표정으로 이찬을 바라봤다.

예전보다 한참 더 키가 크고 훨씬 어른스러워진 소년이, 앉은 채로 소녀를 올려다보고 있다.

“찬아······ 안녕?”

“하이. 잘 지냈어? 반 년 만인가?”

“응. 오디션 잘 보고 왔어?”

“당연히 잘 봤지. 근데 나 오디션 본 거 어떻게 알아?”

그 질문에 소녀의 표정은 더욱 복잡해졌다.

“너······ 몰라?”

“뭘 몰라?”

“난 네가 추천해준 거라고 생각했는데.”

“뭐······? 아, 잠깐. 설마? <어사> 팀에서 연락 왔어?”

“어, 응. 아직 확정은 아니지만, 캐스팅 의사가 있다고, 혹시 다른 촬영 예정된 거 있는지 스케줄을 물어보셨대.”

이제는 소년의 표정이 그보다 더 복잡해졌다.

“아, 참, 이상한 아저씨네? 그런 전략인가? 양날의 검인데?”

“왜? 그러면 곤란해지는 거야? 난 좋은데······.”

“나도 좋지. 모르는 사람이랑 합 맞추는 것보다 누나가 훨씬 믿음직하니까. 근데 그게 문제가 아니라, 이거 되게 그림 이상해질 것 같은데. 정말 이래도 되는 건가? 아, 불안한데?”

고개 돌려 중얼거린 이찬은, ‘나도 좋지’라는 한마디에 분홍빛으로 물들어버린 명진아의 얼굴을 보지 못했다.

< 19장 - 연출 주동한 (2) > 끝

ⓒ 비벗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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