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9장 - 연출 주동한 (3.) >
“오랜만에 나타나서 한다는 소리가, 인터뷰를 내달라고?”
조혁수는 불쾌하다는 듯 인상을 찌푸렸다. 여전히 하관보다는 짙은 눈썹의 움직임이 뚜렷했다.
다만 이찬은 그의 얼굴 아래에서 진한 흥미를 느꼈다.
“예. 선배님이 제일 아끼는 아역이 기대감 낮은 현대적 사극에 도전한다는데, 그것도 심성윤 PD님 경쟁작에 주연으로 나간다는데, 이걸 인터뷰를 안 해주시면 안 되죠.”
“뻔뻔한 자식. 대가는?”
“이런. 병장 출신 대통령도 당선되고 진심이 통하는 사회가 된 줄 알았는데, 이렇게 타산적으로 나오시다니?”
“지랄한다. 열다섯 살이 주연 맡은 사극이라니, 망하겠네.”
이 아저씬 하나도 변한 게 없다니까- 소년은 키득거리면서 주변을 둘러봤다.
“근데, 세트장 재밌네요. 이번 드라마는 카지노 얘기예요?”
“그래.”
“······오락프로 나가면 MC들이 싫어하죠? 단답형이라고.”
“글쎄.”
“내용 좀 설명해주세요. 무슨 내용이에요?”
“타짜 아들이 누명 쓰고 교도소 다녀온 뒤에 카지노 도박으로 성공하고 사랑을 쟁취하는 이야기다.”
“와. 정말 재밌겠다. 짝짝짝.”
빈정대는 말을 무시한 채 조혁수는 촬영장을 돌아봤다.
아직 세팅이 끝나기까지 좀 시간이 남아 있었다. 바쁘게 움직이던 스탭들 중 몇은 주연배우와 담화를 나누는 키 큰 소년을 보며 몇 차례 고개를 갸웃거렸다.
아마도 낯은 익은데 누군지 알아보지 못한 탓일 터.
“네가 너무 큰 게 아쉽다. 아니었으면 여기 추천했을 텐데.”
“아하. 이번에도 어렸을 때 얘기로 시작이 되는 거군요?”
“그래. 너 같은 녀석이 아역이면 편했을 텐데, 생짜 신인이라서 하나부터 열까지 내가 가르쳐야 했던 거다.”
“되게 잘하나보네요.”
“뭐?”
“가망이 없는 배우였으면 선배님이 붙잡고 가르치지도 않았겠죠. 애초에 캐스팅부터 반대했을 테니까.”
“······멋대로 생각해라.”
<승부>의 조혁수 아역 구진철이라는 이름을 기억하며, 이찬은 다른 이야기를 시작했다.
“그러니까 이 드라마는 <가을하늘> 카지노 버전이고, 선배님이랑 신수영 누나가 ‘투톱’인 거죠?”
“투톱? 축구 같은 표현이군.”
“월드컵 이후로 유행이잖아요? 원톱 투톱 하는 식으로.”
“흥. 그렇게 말하자면 내가 원톱이지.”
“에이. 선배님보다 수영 누나 보려고 TV 켜는 아저씨들이 더 많을걸요? <미스 스캔들>에 <칠월칠석>까지 대흥행하고 나서 그 누나 팬이 얼마나 많아졌는데.”
조혁수는 어깨를 으쓱였다.
소년의 말대로, 신수영은 두 편의 영화를 흥행시키고 최고의 청춘스타로 자리매김했다. <승부> 여주인공 캐스팅에서는 무려 이소연과 주경희를 밀어냈을 정도.
그렇지만 <네 친구>로 공전절후의 히트를 친 조혁수에 비하자면 한 수 아래다. 이찬의 말은 그저 농담이었다.
“그 <칠월칠석>의 강정후는, 요새 이상한 작품만 고르고 있던데. 왜 그러고 있는 거냐?”
“이상한 작품이라니, 너무하시네요. <소녀 성공기>에서는 착한 재벌2세 역할이었고, <라이터>에서는 정의로운 예비군 역할로 나왔는데. 다 잘 어울리지 않았어요?”
“돋보이질 않잖아. 그 녀석 성격에 그렇게 뚜렷하지 않은 인물상을 선호할 리가 없는데.”
“심경의 변화가 있었겠죠. 전 몰라요.”
대충 답하며, 소년은 강정후의 속내를 추정해봤다.
‘행적을 보면 일부러 무난하고 선량한 역할만 찾는 것 같았는데······ 그게 안정록 아저씨한테 잘 보이는 방법이라고 생각한 걸까? 도대체 속을 모르겠네. 요즘 지나가다 보면 쓸데없이 싱긋 웃고 그러던데.’
모난 데 없는 꽃미남의 가면은 여전히 단단하다. 다만 이찬을 볼 때면 종종 내면의 진짜 감정을 드러내곤 했다.
질시, 호승심, 그리고 동경 등을.
그런 진심들이 오히려 인물평을 어렵게 만들었다. 강정후는 천재소년이 유일하게 이해할 수 없는 인물이었다.
“근데 은근히 관심 많으시네요? 혐오스럽다고 했으면서.”
“······요즘 검토하는 작품이 하나 있다. <형제>라고, 한국전쟁을 배경으로 한 블록버스터인데.”
“어? 그거 강정후 선배 들어간다고 했는데?”
“그래. 나랑 강정후를 ‘투톱’으로 뽑으려 한다고 하던데.”
“와······ 맙소사. 구체적으로 얘기가 된 거예요?”
“그래. 2월부터 촬영 들어갈 예정이라 나도 슬슬 결정을 내려야 되는데······ 그놈하고 형제애를 연기해야 된다는 게 별로야. 그것만 빼면 마음에 드는 작품인데.”
대한민국 최고의 청춘스타로서, 조혁수와 강정후는 단 한 번도 같은 작품에 출연한 적이 없다.
일반적으로 남자주인공 두 명의 배역에는 우열이 있게 마련. 각자 소속사의 간판을 담당한 배우들인 만큼, 쉽사리 같은 작품에 들어갈 수 없었던 것이다.
그렇지만 <형제>의 경우에는, 떠오르는 거장 강준경 감독의 초대형 블록버스터로, 여주인공과의 로맨스보다 두 남자의 형제애에 집중하는 휴머니즘 전쟁영화.
그런 작품이기에 조혁수와 강정후의 ‘투톱 체제’를 추진할 수 있었던 모양이었다.
“선배님. 그거 그림 좋은데요? 해보시면 좋을 것 같은데.”
“그 이상한 놈이랑 붙어야 되는데?”
“이상하지만, 나쁜 사람은 아닌 것 같던데.”
“같은 회사라고 감싸는 거냐?”
“그럴 리가요. 그럼 제가 왜 그 선배 드라마하고 동시간대를 골랐겠어요? 조만간 콱 밟아버릴 거라고요.”
“미친놈.”
“칭찬 감사합니다. 아무튼 좋은 기회라고 생각해요. 선배님한테도 강정후 선배한테도. 해보세요.”
“······난 네가 맡아주길 바랐는데. 왜 거절했냐?”
“응? 아하. 그렇게 된 거였어요?”
강정후가 픽스되기 전에, <형제>의 동생 역은 이찬에게도 들어왔었다. 아주 안 맞는 배역은 아니라지만 상당히 뜬금없었던 제안.
그게 물밑 협상 중이던 조혁수의 추천 때문이었던 것이다.
“됐어요. 우린 <가을하늘> 때문에 이미지 겹치잖아요.”
“그거야 연기로 해소할 수 있을 텐데?”
“할 수야 있겠지만, 별로예요. 전 다른 거 들어가야 돼요.”
“다른 거? 뭔데?”
“<684>요.”
“그걸? 꼬맹이가 할 수 있는 역이 아닐 텐데? 키나 얼굴이 문제가 아니라, 거기 캐스팅된 성인 배우들이 모두 몸 만드느라 고생 중이라고 들었다.”
“오래 준비했어요. 그걸로 천만 관객 돌파할 생각이에요.”
천만. 멀티플렉스의 급격한 확장에도 불구하고, 아직 한국에서 단 한 번도 달성된 적 없는 신의 영역.
그것이야말로 영화 <형제>의 기획의도라고 할 수 있었다.
누구도 반박할 수 없는 최고의 캐스팅에 더해 압도적인 예산을 쏟아 부어, 최초의 천만영화를 만들어내겠다는 것.
그렇지만 <684> 쪽은 그런 야망과 무관하다. 논란거리 많은 폭로성 영화로, 그저 500만만 나와도 대박일 터였다.
그렇기에 조혁수는 고개를 저었다.
“안 될 거다. 네 연기는 둘째 치고, 극이 너무 무거워.”
“선배님 <네 친구>는 뭐 가벼워서 800만 뚫었나요? 두고 보세요. 이번엔 <형제>보다 먼저 개봉해서 아주 코를 납작 눌러줄 테니까. 그러니까 그 영화 꼭 들어가세요. 선배님 정도 상대역이 붙어줘야, 지고 나서도 변명거리가 없겠죠.”
“미친놈 같으니. 너 알아서 해라.”
콧방귀를 뀌는 조혁수의 얼굴을 잠깐 살펴본 뒤, 이찬은 마침내 본론으로 들어갔다.
“선배님. 이건 좀 진지한 얘긴데요.”
“진지한 얘긴 너희 대표나 찾아가서 해. 관심 없다.”
“관심 있으실걸요? 저 이번 드라마에, 진아 누나도 들어올 것 같아요. 아마도 로맨스까지 성사되는 투톱으로요.”
“······뭐? 너희 둘이? 꼬맹이 둘이 무슨 주연을······ 잠깐만. 심 감독님 새 드라마하고 동시간대라면서?”
“네. 그래서 진지한 거예요. 이게 성사가 될까요?”
조혁수는 눈을 감고 생각에 잠겼다.
촬영준비가 끝났는지 조연출이 다가와서 기웃거리기 시작했지만, 매니저 윤강호가 어깨동무를 하며 적당히 둘러댔다.
그렇게 1분쯤이 지나서야 청년의 진한 눈이 뜨였다.
“성사될 거다.”
“정말요? 그렇게 되겠어요?”
“넌 그때랑 이미지가 많이 바뀌었지. 키도 훌쩍 컸고, 얼굴에도 제 마음대로 새로운 인상을 심을 수 있는 놈이고. 오디션 직접 봤으니 주동한 감독도 그 사실을 알았을 거다. 그리고 명진아는 재작년 <상인>에서 사극 소화력을 증명했지. 그게 MSB 작품이었고, 드라마국 국장이 그걸 무척 즐겨 봤다고 하더라. 나이를 떠나 기대를 걸어볼 만도 해. <가을하늘> 팬덤을 끌어올 수 있다는 기대까지 들었을 테니까.”
“오······ 근데 결과는 어떨까요? 열다섯 열일곱, 원래대로면 아역이나 해야 되는 두 사람이 주연을 맡는 건데.”
“대박이 나겠지.”
“정말요? 확신하세요?”
“떠보지 마라, 애늙은이 놈아. <가을하늘>에서도 아줌마 아저씨들 눈물 쏙 빼서 최종화까지 회상 씬 들어가게 만든 녀석들이, 나이 때문에 밀릴 이유가 뭐가 있냐. 오히려 반신반의하며 첫화 시청한 사람들이 깜짝 놀라 입소문을 내주겠지.”
당대 최고의 흥행배우가 두 아역의 주연 데뷔가 성공하리라 확언한다. 소년은 그 상황에 기분 좋게 웃었다.
“그럼 인터뷰 해주실 거죠? 제작 기사 뜰 때쯤에 터뜨려주세요. 둘 모두 최고의 배우니까 믿고 봐도 될 거라고요.”
“뻔뻔한 자식. 더 할 말 없으면 간다.”
이찬은 그쯤에서 얌전히 고개를 숙여 보였다.
*
이군영 대표와의 미팅을 위해 나라엔터 사옥으로 향하는 길에, 주동한은 꽤나 긴장하고 있었다.
최근 소소한 배역들만 고르며 이름값이 낮아졌다곤 하지만 여전히 최고의 주가를 자랑하는 톱스타 강정후가 있고, 거기에 ‘800만 배우’ 이소연이 진정 감독의 차기작을 준비하고 있으며, 안정록의 트레이닝으로 준비된 ‘모델 군단’ 역시 주연으로 활약을 시작한 기획사.
이제 3대기획사는 옛말이고 오직 나라엔터만이 최고라는 것이 업계의 정설이다.
그런데 주동한은 그 나라엔터의 강정후가 출연할 <여름들판>의 경쟁작 <어사>를 연출할 사람이며, 그 작품의 주연으로 이찬을 낙점했다.
오디션에 보낸 걸 보면 대표도 결사반대까진 아닌 듯했지만, 회사 내의 대결구도를 마뜩찮게 여길 가능성은 충분했다.
그러나 막상 대표실에서 마주한 이군영은 무척이나 즐거워 보였다. 곁에 앉아 있는 이찬 역시 편안해 보였고.
“어, 주 PD 왔어요? 오랜만이네. 저번 작품 잘 봤어요.”
“영광입니다, 대표님.”
“오디션에서 우리 찬이한테 굉장히 좋은 인상을 받았다고?”
“예, 대표님. 아주 압도되는 기분이었죠. 이제 열다섯인데도 흠을 잡기가 힘든 사극연기였어요. 이건 반드시 된다, 그런 생각을 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하하하! 당연하지. 우리 나라엔터의 보물이니까 말입니다. 이 녀석이야말로 내 수제자란 말이에요.”
수제자. 그 표현에 주동한의 이마에 일자주름이 잡혔다.
‘수제자는 무슨. 남의 공 가로채기 선수답구만. 하지만 속이 빤해서 좋아. 아직까지도 인터뷰만 하면 안 선생님 타령을 하는 강정후보다, 자기 제자로 찜한 이찬을 밀어줄 생각인 거야. 그렇다면 홍보팀 역시 편파적으로 굴지는 않겠군.’
그런 PD의 판단을 이찬의 말이 입증해줬다.
“이렇게 계약서 들고 오셨으니까 드리는 말씀이지만, 저희 회사에서는 <여름들판>도 <어사>도 모두 성공할 수 있으리라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예정대로 동시간대에 편성되더라도 한쪽을 위주로 지원하진 않을 생각이에요.”
“음, 그렇구나. 그거 좋은 일이네.”
“그래서 여쭙는 건데, 진아 누나는 픽스됐나요?”
“어, 그렇지. 대표님, 명진아랑 최정하 모두 픽스했습니다. 이걸로 <가을하늘>의 막강한 주연진이 다시 모인 셈이죠. 그걸 위주로 마케팅을 하면, 생소한 장르라고 해도 충분히 성공할 수 있으리라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이군영은 고개를 끄덕이며 계약서를 살폈다.
“좋아요, 좋아. 아주 흥미로운 그림이 될 것 같아요. 조금양 그 사람을 잘 설득을 하셨나본데?”
“제가 잘 설득을 할 것도 없었습니다. 찬이 오디션 영상 가져가서 보여주고 나니까, 결국 대세에 따르게 된 거죠.”
“하핫! 아주 좋아요. 기분 좋은 일이야. 지가 2년 전까지나 3대기획사 대표였지, 이제는 조혁수네 구멍가게 기획사에도 밀리는 처지라는 걸 안 것 같군. 오케이! 바로 사인합시다.”
기본적으로 30대 이상의 배우들만이 주연을 맡는 사극.
사극을 표방했을 뿐 현대극의 시나리오를 가져온 주동한의 <어사>에 이제는 두 10대 주인공이 캐스팅됐다.
그것만으로도 충격적인 뉴스일 텐데, 심지어 그 둘은 과거 아역 씬으로 시청률 40%를 넘봤던 최고의 콤비.
마케팅을 성공시킬 요소는 충분했다.
그렇게 생각하며 웃는 주동한을 향해서, 이군영이 사인하는 모습을 지켜보던 3팀장 정창영이 넌지시 말을 건넸다.
“PD님. 대본 받아봤는데, 어째 유관은 액션 씬이 거의 없던데요?”
“어? 하하, 그렇지. 머리 쓰는 역할이니까. 찬이 나이가 너무 어리기도 하고, 액션은 다른 배우들이 도맡아 할 거야. 명진아도 겨울 내내 액션스쿨에서 연습하기로 약속을 했고.”
“흠······ 그렇지만 저희 찬이 장기가 그쪽인데.”
“응? 찬이가?”
황당해져 눈을 크게 뜨자 이찬이 설명을 이어받았다.
“제가 쉬는 동안 운동을 꾸준히 했거든요. 그래서 <684> 오디션에서도 곧바로 주연 따냈는데.”
“<684>······? 그거, 북파부대 다룬 영화 아니야? 그걸 네가 따냈다고? 주연을 아주 ‘몸짱’으로 뽑겠다고 했었는데?”
“그러니까요. 보여드릴까요?”
일어서서 셔츠를 탈의한 이찬의 역삼각형 상체에는, 열다섯이라고는 믿을 수 없을 정도로 발달한 근육이 가득했다.
권투선수 같은 몸이었다. 군살 하나 없이 잔뜩 갈라진.
“이, 이건······ 윤 작가? 이거, 이거 쓸 수 없을까?”
“와······.”
“윤 작가?”
“고쳐보겠습니다! 어차피 최정하 친구 배역 만드느라 수정해야 할 게 많은데, 유관이 검술 배우는 씬도 추가할게요!”
한때 각종 CF 속 애교로 전 국민의 사랑을 받았던 아역.
그러나 이제는 183cm에 체지방 8%의 괴물이 되어버린 15세의 소년이, 작감을 내려다보며 흐뭇한 듯 웃었다.
< 19장 - 연출 주동한 (3.) > 끝
ⓒ 비벗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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