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훔치는 연기자-54화 (54/250)

< 20장 - 감독 계진행 (1) >

<어사>의 주연진이 확정되고 로케이션과 세트 제작이 진행되는 동안, 2003년은 2월을 맞이했다.

그 시기 최고의 화제는 라스베가스와 제주도 등 화려한 로케이션 촬영분을 방영하기 시작한 SBC의 <승부>.

톱스타인 조혁수와 신수영의 첫 연인 연기라는 이슈에, 아역 구진철의 활약으로 초반 입소문까지 더한 그 작품은, 금세 시청률 30%를 넘기고 흥행가도에 올랐다.

그러나 정작 조혁수는 주변의 찬사를 만끽할 새도 없이 또 전국을 떠돌아야 했다. 무려 1년의 제작기간을 예정한 블록버스터 <형제>의 촬영이 시작된 까닭.

그 조혁수와 처음으로 호흡을 맞추게 된 강정후 역시 각지의 촬영장을 전전하게 됐다.

그 타이밍에 업계에는 <684>의 제작 소식이 퍼져나갔다.

15세가 된 이찬의 복귀작으로, 100억 규모의 대규모 블록버스터가 될 것이라는 게 정보의 핵심.

그 소식을 듣고, <684>의 각색을 맡은 작가 김우연은 곧장 사계 프로덕션의 계진행 대표를 찾아갔다.

“감독님! 이게 어떻게 된 겁니까?”

“뭐가? 차분하게 말을 해봐.”

“<684> 주연이 이찬이라뇨? 조혁수가 <형제>를 촬영한다뇨? 조혁수 <공적> 때 강한 인상을 받으셔서, 그 배우라면 이 영화를 완성해줄 수 있으리라고 생각하시고, 저한테 각색 맡기신 거 아니었습니까? 열다섯 살짜리 이찬은 안 됩니다. 그 캐스팅 보면 누구도 투자를 안 할 겁니다!”

단호하게 외쳐 말하는 고향 후배를 바라보며, 계진행은 길게 콧바람을 뿜었다.

<684>는 충무로에 오래 떠돌던 시나리오였다.

그걸 사서 대규모 블록버스터를 계획하게 된 건 <공적> 때 함께 작업한 조혁수 때문인 게 사실이다. 그 정도의 주연이 없다면 결코 완성할 수 없을 영화였기에.

오직 최고 수준의 연기자만이 소화할 수 있는 배역- 그 점에서 계진행의 생각은 변한 바가 없었다.

1968년의 무장공비 사태인 ‘김신조 사건’으로 촉발된 박정희 정권의 684부대는, 김일성의 목을 따 흡수통일을 이루기 위해 조직된 북파특수부대. 실미도에서 3년간 지옥훈련을 수행하며 그들은 살인기계로 변모했다.

그러나 정국이 전환되자 해체 명령이 떨어졌다. 향후 문제의 소지를 없애기 위해 전원 사살하라는 내용.

그 사실을 미리 알게 된 부대원들은 반란을 일으켜 육지로 향했고, 결국 군에 포위된 채 폭사했다.

냉전시대의 애달픈 실화. 그걸 기반으로 만들어진 것이 시나리오 <684>였다.

군사정권 시절에는 심의 때문에, 문민정부 시절에는 올 로케이션의 과도한 제작비 때문에 오랫동안 묵혀졌던 각본.

2000년을 지나 멀티플렉스 시대가 도래한 뒤에야 그나마 제작을 타진해볼 수 있는 여건이 생겼다.

다만 마지막 남은 문제가 바로 주연이었다.

과연 어떤 청년 배우가 주인공 ‘인하’ 역을 맡아, 지옥훈련과 배신 속에서 칼날 같은 고뇌를 표현할 수 있을 것인가.

주인공이 매력적인 인물상을 그려내지 못한다면 음울한 블록버스터의 흥행은 물 건너간 일이 된다. 그렇기에 캐스팅 없이는 투자조차 받기가 어려웠다.

그 상황에 유일한 희망이 조혁수였다.

계진행은 그만을 믿고 있었다. 이제 청춘스타라는 딱지를 떼고 명배우로 인정받고 있는 조혁수만이, 무수한 난관을 타파하고 대중에게 ‘인하’의 매력을 보일 수 있을 거라고.

그렇기에 그를 위한 각색을 지시했던 것이다.

그 생각을 전환시킨 건, 나라엔터 정보망을 통해 새 블록버스터의 기획을 알게 된 이찬의 방문이었다.

오직 시놉시스만을 읽고서 비공개 오디션을 요청한 소년. 그는 독대한 지 30분 만에 오직 조혁수뿐이던 계진행의 머릿속을 뒤흔들어버렸다.

그 이튿날에는 혼란을 잠재울 투자까지 들어왔고.

“하······ 우연아.”

“예, 감독님.”

“일단 이 작품, 지금 투자금 51억이 들어왔어.”

“예? 정말요? 어디서요?”

“소강그룹. 이찬 뽑는 조건이었어. 걔가 끌어온 거야.”

“그, 그 녀석이, 거기 후계자라도 된단 말입니까?”

“그런 건 아닌 것 같던데, 인맥이 좋은가보지 아마.”

“······그래서, 그 돈 때문에 열다섯 살짜리 꼬마를 주연으로 삼으셨다는 겁니까? 감독님답지 않습니다!”

각본에 저 비슷한 대사가 있었지- 생각하며 계진행은 키득 웃었다.

“다음 대사가 나다운 게 뭔데, 이거였지? 그런데 우연아. 내가 그럴 사람으로 보여?”

“그러실 분이 아니라고 믿었습니다. 정말 친형처럼 감독님 믿고 따랐습니다. 그래서 배신감이 더 큽니다. <684> 각본, 정말 제 영혼을 갈아 넣어서 만들었단 말입니다.”

“나도 알아, 새끼야. 나도 너 친동생처럼 생각하고 있어. 그래서 나도 영혼을 갈아 넣었다. 조혁수보다도 더 ‘인하’에 어울리는 배우, 이찬을 잡는 일에 말이야.”

“······예?”

황당한 듯 되묻는 김우연을 보며 계진행은 한 달 전을 떠올렸다. 눈으로 보고서도 믿을 수 없었던 소년의 변신을.

“열다섯 살짜리라고 했지? 네가 그 녀석을 못 봐서 그런 소릴 할 수 있는 거지. 걔, 조혁수보다도 더 커졌다. 그리고 몸은, 이소룡 알지? 근육이 그렇게 돼버렸어.”

“그, 그럴 리가요? 열다섯 살이 무슨······?”

“2년간 운동만 한 모양이야. 체지방률 떨어뜨린 덕분인지 볼살도 쪽 빠져서, 따로 분장 안 해도 열다섯 소린 절대 안 나오겠더라. 아마 피부 톤 때문에 태닝은 좀 해야 되겠지만. 자, 이게 걔 프로필이야. 어때? 애기 같냐?”

김우연은 입을 뻐끔거리며 뭐라 말을 하지 못했다.

상반신 누드 속의 배우는 그가 알던 이찬이 아니었다. 잘 벼려진 칼을 보는 것 같은 턱선과 넓게 벌어진 어깨 아래로, 어디 한 군데 흠을 잡을 수 없이 잔근육들이 즐비했다.

“그리고 이 자식이 굴러다니던 시놉시스만 보고서 제 나름대로 ‘인하’를 만들어왔는데, 그 연기 보고 나서는 조혁수도 눈에 안 들어오더라. 물론 그 친구가 대본 보고 오래 준비하면 꼬마보다 더 나을지도 모르지만······ 조혁수도 절대 따라올 수 없을 특장점도 있었지. 그래서, 지금 내 생각은 이래. ‘인하’는 이찬이야. 그 녀석 말고는 없어. 그래서 잡았다. 거기 팀장이 <형제> 쪽 제안도 고려하는 중이라고 하길래, 거의 바짓가랑이 잡을 듯이 애걸을 했다는 거야.”

김우연은 이제 더 이상 추궁하는 말을 꺼내지 못했다.

계진행이라는 영화인이, 목에 칼이 들어와도 허언을 하지 않을 사람이라는 것을 알기에.

“그럼, 정말로······ 이찬이 최고의 옵션인 거죠?”

“그래. 일단 화제성부터 빵빵하지 않겠니? 아직 대중은 이찬이 어떻게 변신했는지 몰라. 다들 너처럼 반응하겠지. 도대체 청불(청소년 관람불가) 블록버스터에 15세 소년을 캐스팅하는 게 말이 되느냐 하면서, 날 두고 미쳤다고들 할 거야. 하지만 7월에는 그 녀석 드라마가 방영된다. 그때가 되면 논란은 고스란히 전환되어 기대감이 되겠지. 열다섯에 이미 성인들보다도 완벽한 신체와 연기력을 갖춘 그 녀석이, 과연 정예 특수부대 역할을 어떻게 펼쳐낼지 말이야.”

그렇게 말하다가, 계진행은 진동하는 핸드폰을 들었다.

발신자는 별 세 개와 함께 저장된 이름이었다.

*

“안녕하십니까, 감독님.”

[어, 우리 투자자님. 잘 지냈지?]

과장하여 건네는 인사에 이찬이 킥 웃었다.

투자자라고 불리기엔 나라엔터 법인의 이름을 빌려 고작 1억을 넣었을 뿐이다. 세트장에만 10억의 예산이 들어갈 영화의 투자금으론 약소하니, 그런 지위쯤 무시해도 무방할 터.

그렇지만 이 젊은 감독은 꼭 ‘투자자님’이나 ‘자네’ 하는 식으로 소년을 높여주곤 했다. 기분 좋은 장난이었다.

[공식적으로 할 얘긴 아니라서, 매니저 말고 자네한테 직접 전화를 넣었는데.]

“네. 무슨 일인데요?”

[그러니까 지금······ 우리가 이제 주연 캐스팅에서, 교육대장 ‘이성일’ 역으로 원래 장건형 배우하고 협상하는 중이라고 했잖아? 그런데 상황이 좀 바뀌었단 말이야.]

“안 좋은 쪽으로 바뀐 건가요?”

장건형이라고 하면 표정연기의 대가 중 한 명. 그 캐스팅이 틀어졌다면 프리프로덕션 과정이 지체될 확률이 컸다.

그렇지만 계진행의 대답은 그와 정반대였다.

[안정록 선생님이 연락을 주셨어.]

가벼운 말투와는 어울리지 않는 내용. 어지간해선 놀라지 않는 소년조차 입을 떡 벌리고 말았다.

“아니······ 그분이 왜요?”

[말은 안 했는데, 사실 기획 단계부터 계속 연락은 드리고 있었어. 이성일이 완전히 그분 생각하고 만든 배역이거든. 그랬는데 계속 답이 없으셔서, 역시 또 한동안 쉬시려나보다 생각하고 있었지. 그런데 갑자기 전화를 주신 거야.]

이야기를 들으며, 이찬은 몇 차례고 침음을 삼켰다.

안정록.

연기를 시작한 지 고작 10년도 안 되어 국민배우라는 칭호를 받은 연기자이자, 거기에 안주하지 않고 극작과 연출을 연구해 <장승업>으로 칸 영화제 감독상까지 수상한 거인.

그런 그가 결과를 장담할 수 없는 <684>에 출연을 자청했다는 건 그야말로 축복 같은 호재였다.

하지만 이제 막 복귀하려는 이찬에게는 그게 당혹스러웠다.

같은 소속사의 간판배우인 강정후가 자타공인의 안정록바라기인 까닭에.

지금이야 이찬이 안정록과 거리를 두고 있어서 조금쯤 순해진 듯 보이지만, 두 사람이 같은 영화에 출연한다고 들으면 또 어떻게 돌변할지 모를 일이었다.

“너무 갑작스럽네요. 왜 갑자기 그런 결정을 하셨대요?”

[음······ 사실 그걸 자네한테 묻고 싶었는데. 안정록 선생님이 왜 그런 결정을 내리셨을까?]

“예? 그걸 왜 저한테 물어보세요?”

[그분이 그러시더라고. 이찬의 복귀작이니, 기대가 된다고.]

소년은 다시 한 번 입을 떡 벌렸다.

*

전라남도 곡성역에 증기기관차가 들어서 있다.

실제로 운행할 수 있도록 정교하게 제작된 일회용 열차.

그 거대한 소품을 배경으로 피난민들이 몰려드는 그림을 담는 게, 2월 12일 <형제> 11회차 촬영의 내용이었다.

“이찬? 여기까지 쫓아왔냐? 너 내 스토커야?”

눈을 가늘게 뜨고 묻는 조혁수가 그 주연 중 한 명이고.

소년은 어깨를 으쓱인 뒤에 고개를 꾸벅였다.

“죄송한데 오늘은 아니에요. 저쪽 뵈러 왔거든요.”

“저쪽? 강정후?”

“예. 촬영 잘하세요. 전 좀 바빠서.”

한 번 더 고개를 꾸벅이고, 이찬은 휴식 중인 강정후를 향해 돌아섰다.

구식 교복을 입은 50년대 학도가 현대적인 대본을 살피는 특이한 광경이 펼쳐져 있다.

그곳에서 이질적인 건 소년 쪽이었다. 천옷만 가득한 촬영장을 붉은 코트 차림으로 활보하고 있었으니.

보조출연자들 사이를 걸어오는 이찬을 본 강정후는, 이상하다는 듯 고개를 갸웃거렸다.

“이찬?”

“안녕하세요. 전 실장님, 잘 지내셨어요? 잠깐 지나갈게요.”

매니저와 스탭들에게 양해를 구한 소년이 강정후의 맞은편에 선다. 열한 살의 나이차에도 불구하고 오히려 키가 좀 더 커서, 자연스레 내려다보는 입장이 됐다.

“잠깐 드릴 말씀이 있는데요.”

“무슨 할 얘기가 있어서 이 먼 데까지 왔어? 전화를 하지. 정 팀장님, 얘 요즘 촬영 들어간 거 아니었습니까?”

“아냐, 아직 세트 짓는 중이야.”

“<어사>는 사극이니, 그럴 만도 하네요. <684>는요?”

“그쪽도 다음 달부터 들어갈 예정이야. 오늘은 중요한 얘기가 있다고 해서 데리고 왔지.”

중요한 얘기- 그 말을 되뇌고, 강정후는 조연출을 불렀다.

“저 잠깐만 얘기 좀 하고 올게요. 금방이면 됩니다.”

“아, 그래요. 다녀오세요. 제가 말해놓을게요.”

그렇게 강정후와 이찬이 구석진 곳으로 이동한 뒤에, 전태양 실장은 멍한 표정으로 정창영 팀장을 돌아봤다.

“와······ 팀장님, 찬이 진짜 많이 컸네요?”

“당연하지. 이젠 진짜 어른 같지?”

“예. 볼살이 빠져서 그런가, 더 잘생겨진 것 같아요.”

“당연하지. 점점 더 잘생겨질 거다. 오래 쉰 만큼 순식간에 잘나갈 거고 말이야. 아무튼, 이쪽은 어때? 조혁수랑 합이 잘 맞아? 두 명의 톱스타가 한 촬영장에 서는 건 본 적이 없어서, 되게 궁금하네.”

“음······ 그러게요. 약간 기싸움 같은 게 있긴 한데.”

“그래? 그러면 연기에 좀 곤란한 거 아닌가?”

“근데, 또 그게 그렇지도 않네요. 막상 카메라 돌면 둘 모두 정말 형제처럼 다정해지는 게, 보고 있기 신기할 정도예요.”

“그래? 하긴, 정후는 애가 싹싹하니까. 금방 친해지겠지.”

우리 찬이한테도 저렇게 친절하니까 말이야- 그렇게 생각하며 정창영은 강정후의 등을 바라봤다.

하지만 그 순간, 톱스타는 온화한 가면을 벗고서 눈을 부릅뜨고 있었다.

“안 선생님이······ <684>에?”

“선배님, 이쪽 보세요.”

일그러진 표정으로 떨기 시작한 강정후를 이찬이 자신 쪽으로 돌려세운다. 촬영팀으로부터 반대되는 방향이었다.

“나 참. 또 이럴까봐 내가 전화로 못 하고 이렇게 내려왔죠. 진정 좀 하세요.”

“하하하.”

오래 걸리진 않았다. 강정후는 곧 신색을 회복했다.

모래 위를 덮는 파도 같은 가면.

소년에게 있어서 그건 경이로운 변화였다. 비범한 관찰력으로 바라본 강정후는, 마치 SF영화에서 조금씩 얼굴을 바꾸는 외계인 같았다.

“음. 그래. 오케이. 고맙다.”

“고맙긴요. 아무튼 그래서 전에 했던 약속 못 지킬 것 같아요. 성장기라고 집에서 쉬는 동안에는 피할 수 있었지만, 같은 영화 주연이 돼서도 모른 척할 순 없으니까요.”

“그래. 그래야지.”

놀랍도록 담담한 말투였다.

소년의 속마음을 알았다면 조금 달랐을지도 모르지만.

‘당장 달려들기라도 할까봐 걱정했는데, 다행이네. 그렇게까지 미친놈은 아닌 걸까?’

그렇게 생각한 뒤, 이찬은 소품 더미 위에 엉덩이를 걸쳤다.

< 20장 - 감독 계진행 (1) > 끝

ⓒ 비벗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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