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훔치는 연기자-55화 (55/250)

< 20장 - 감독 계진행 (2) >

“괜찮아요? 아무렇지 않으시니까 더 이상한데. 하고 싶은 말 있으시면 미리 하세요.”

“하고 싶은 말이라.”

강정후는 피식 웃으며 시선을 돌렸다.

리허설에 들어갔는지, 기관차가 증기를 뿜어내고 있다.

“······<684>하고 이 <형제>하고, 아마 개봉 시기가 꽤 겹칠 거다. 계진행 감독님은 어떻게든 연내에 완성하겠다고 하시는 모양이더라만, 섬에서 촬영한다는 게 쉬운 일은 아니니까.”

“그렇죠. 좀 딜레이가 되면, 개봉 겹칠지도 모르겠어요.”

“그렇다면 참 재밌는 일이 될 거야. 나랑 조혁수가 한 팀, 너랑 안 선생님이 한 팀이 돼서, 동시기에 경쟁을 한다니.”

“흠. 선배, 조혁수 선배님이라고 하셔야죠?”

“까불지 말고.”

소년은 악의는 없다는 듯 두 손을 펴 보였다.

“제가 감히 어떻게 까불겠어요. 선배님 집안을 아는데요.”

“그래. 그 집안에서 네 영화에 50억을 넣기도 했지.”

“엇? 정말요? 아······ 와. 그래서 그랬던 거구나?”

“뭐가?”

“계진행 감독님이 저보고 계속 투자자님이라고 부르더라고요. 거기서 넣은 돈이 저 때문이라고 생각하신 모양이에요.”

“틀린 말은 아니지. 내가 그렇게 부탁했으니까. 계약서상으로도 널 주연으로 캐스팅한다는 조건이 붙어 있었을 거야.”

예상치 못한 말에 이찬이 뜨악한 표정을 지었다.

“왜요? 죄송한데, 이유 없는 친절은 곤란한데요? 우리가 그렇게 도와줄 만큼 가까운 사이였어요?”

“도와주려는 게 아냐. 네가 말했지? 다음 내기에서 내가 이기면, 안 선생님께 내 얘길 좋게 해주겠다고.”

“예, 뭐. 그렇게 말했죠.”

“그래서 부탁드린 거다. 네가 오랜만에 잡은 복귀작이 어그러지지 않길 바랐으니까. 그래야 <형제>하고 경쟁할 수 있게 될 거 아니냐.”

“어······ 그 내기는 드라마로 할 생각이었는데요?”

“그 짝퉁 사극? 그걸로 <여름들판>하고 시청률 내기를 하겠다고? 웃기는 소리. 그딴 내기는 내가 납득할 수 없어.”

소년은 어깨를 으쓱였다. 강정후만이 아니라 많은 사람들이 그렇게 생각하고 있을 것임을 알기에.

연타석 흥행한 <가을하늘>과 <겨울바다>에 이은 세 번째 계절 시리즈를 진심으로 누를 생각인 건, 이 시점에선 오직 이찬과 주동한뿐일 터였다.

“뭐 좋아요. 솔직히 주연 네임밸류가 많이 차이나긴 하죠.”

“그래. 너랑 명진아? 하. 코웃음이 나온다. 이쪽은 강정후에 주경희란 말이다. 그래서야 공평한 내기가 아니지.”

“엄청 공정한 척하시네요. 투자자로 스파이 심었으면서.”

“작품에 간섭하는 일은 없을 거다. 절대로 망할 수 없는 영화라고 해놨어. 그래봤자 <형제>만큼은 아니겠지만.”

“그래요? 신뢰가 대단하시네요?”

“그럴 만도 하잖냐. 조혁수 저 연기 귀신을 보고 있으면, 아무 불안이 없어진단 말이야. 이 영화는 반드시 천만 찍는다. <684>로는 아무리 해도 상대가 안 될 거야.”

“안정록 교수님이 들어오셔도요?”

“······그래서 그나마 경쟁이 되는 거다. 그분 덕분에 주연 네임밸류는 얼추 맞춘 셈이니, 나머지는 너와 내 경쟁이지.”

충무로의 거인인 안정록이 이찬을 서포트한다면, 그건 조혁수+강정후라는 전무후무한 투톱과도 비견될 만한 일.

그래서 강정후는 불편한 소식조차 감내하는 중이었다.

그 덕분에 제대로 된 내기를 할 수 있게 됐기에.

그렇기에 얄밉고 불편한 소년을 향해서 고개를 숙여 보일 수도 있었다.

“그러니까, 부탁한다. 그날만 기다리고 있으니까.”

열한 살 차이 나는 선배의 깍듯한 인사를 받는 상황에, 마주선 이찬은 딴청을 피우며 시선을 피했다.

그럴 수밖에 없었다. 온화하게 웃는 가면 속에서도 무서울 정도로 깊은 절망이 느껴졌기에.

“······흠, 흠. 선배, 대체 왜 그렇게 집착하는 거예요?”

“넌 말해줘도 몰라. 나한테는, 그분밖에 없다.”

“사실은 제가 종종 안 교수님한테 선배 얘길 했었는데.”

“뭐? 너 이 새끼, 뭔 소릴 했어!”

“아 좀, 목소리 좀 낮추세요. 좋은 얘기요. 옛날에 선배 영상 보면서 연기 연습했거든요. 극단 출신 선배들 중엔 강정후 연기가 제일 좋더라, 그런 식으로 얘길 했었죠. 그럴 때마다······ 이런 얘길 해도 될지 모르겠는데, 죄책감 같은 게 많이 보였어요. 선배 내친 게 후회되시는 것처럼요.”

다시 가면이 무너졌다. 내면의 강정후는, 나이답지 못하게 당장이라도 눈물을 흘릴 것처럼 울상이었다.

“음, 흠. 아무튼 선배, 힘내요. 아마 쉽지 않을 테니까. 칸 감독상까지 탄 거장이 직접 출연하는 영화예요. 논란의 소지가 많긴 하지만, 나름대로 블록버스터고요. 예전에 랑 <미스 스캔들>로 붙었을 때하곤 전혀 다를 겁니다.”

“그래. 그래야지.”

“그리고 드라마도 마찬가지예요. 전쟁영화 찍는다고 몰입하다가 로맨스 연기 어설프게 하시면, 연패하실 수도 있어요.”

“하하. 내가? 그럴 것 같아?”

온화하게 웃으며 하는 말에 귀기(鬼氣)가 느껴진다.

소름이 돋는 기분에, 이찬은 코트를 털며 일어섰다.

“아. 마지막으로 하나만 더요. 이 영화는 왜 고르셨어요? 요즘 계속 무난한 배역만 잡으시더니. 죽고 죽이고, 내적으로 고뇌도 많은 배역이던데. 갑자기 무슨 심경의 변화예요?”

“안 선생님 아버지 얘기 같아서.”

“······네?”

“그분 부모님이 전쟁 세대다. 백부 쪽이 월북하셨다고 들었어. 그래서, 아마, 이 영화는 분명히 보실 것 같아서······.”

대체 무슨 지극정성인 건지 모르겠다고 생각하며, 소년은 고개를 흔들었다. 이제는 떠나가야 할 때였다.

*

“계 감독? 여기였군. 나 왔네.”

“선생님, 오셨습니까! 제가 모시러 나갔어야 했는데······.”

계진행 감독은 즉시 일어나 허리를 90도 접어 인사했다.

30대 신진 감독인 그에게, 쉰을 바라보는 대선배는 그럴 수밖에 없는 존재였다.

그런 감독 때문에 이찬도 하는 수 없이 깍듯해져야 했다.

“안녕하십니까, 선생님. 오랜만에 뵙습니다.”

“······녀석. 정말 오랜만이구나. 이렇게라도 안 하면 얼굴 보기가 힘들어.”

“죄송합니다. 제가 열심히 홈스쿨링을 하느라고요.”

“변명도 참. 그래, 남들 12년간 할 학업을 2년 만에 다 마치느라, 고생이 많았다. 그새 키가 정말 많이도 컸어.”

“남들은 더 크려고 고민이라던데, 전 덜 크는 게 힘들었어요. 그나마 운동 열심히 해서 이 정도로 막은 것 같습니다.”

“하하하. 그것도 나름의 고충이 있었겠구나. 그래도 얼굴이 밝아 보여서 참 좋다. 집에서 공부만 하고 있다고 해서 걱정을 많이 했어. 네가 아니라 다른 사람이었으면, 곧장 끌어내서 학원 같은 데로 보냈을 거다.”

“다행이네요. 황금 같은 휴가를 방해받지 않아서요.”

이찬 입장에선 나름대로 예의를 갖춘 태도였지만, 계진행이 볼 때 그건 마치 조손의 대화처럼 보였다.

‘듣기로는 분명 1년 넘도록 못 본 사이라고 했는데, 하는 투는 마치 어제도 만났던 사이 같군. 이찬이 극단 ’별빛‘ 출신인 걸 생각해보면······ 그 시기엔 많은 교류가 있었던 걸까?’

상념에 빠진 계진행을 안정록이 돌아본다.

시선은 따뜻했지만, 입에서 나오는 말에는 뼈가 있었다.

“계 감독. 이번 영화, 난관이 많을 거야.”

“아, 예. 알고 있습니다, 선생님.”

“정말 알고 있는 거지? 시나리오 몇 번에 걸쳐 읽어봤어. 관련 기사도 여럿 찾아봤고. 소송이 줄을 이을 거야. 중정이야 이름이 바뀌었으니 무방하겠지만, 유족들의 분노를 피하기 어려워 보여. 부대원 유족 측에선 적기가를, 기간병 유족 측에선 죽음의 방식을 지적할 거야. 영화적 상상력을 들어서 그들을 설득할 수도 없는 일이지. 실제 부대명을 대놓고 영화 제목으로 박는 이상에는 말이야.”

“알고 있습니다, 선생님. 유족들께는 촬영 전에 제가 직접 몇 차례고 찾아갈 생각입니다.”

“······가게 되면, 같이 가지. 자네 혼자 가는 것보단 나을 거야. 허명이나마 그래도 이름이 좀 있으니.”

불감청고소원이었다. 계진행은 감격해서 고개를 조아렸다.

“감사합니다, 선생님! 이 은혜는 잊지 않겠습니다!”

“그럴 것 없어. 감독이 배우한테 그렇게까지 하면 되나. 앞으로 다른 배우들 볼 때는, 나한테도 똑같이 하라고.”

“그럴 수야 있겠습니까?”

“말만 높이고 대접은 같게 하라는 거야. 메가폰 잡은 사람이 배우한테 굽실거리면, 될 촬영도 망하고 말아.”

맞는 말이기에 고개를 끄덕이면서도, 계진행은 속으로 딴청을 피웠다. 메가폰 잡았다고 해서 안정록을 함부로 대한다면 그를 존경하는 배우들이 오히려 반발할 테니까.

“그런데······ 계 감독. 그런 부분 말고도 궁금한 게 많아. 내 경우엔 이 찬이가 하는 일이라면 뭐든지 신뢰를 하지만······ 정말 괜찮을 거라 보나? ‘인하’ 역은 스물한 살이야. 그 시기에 가장 잘나가던 조폭 행동대장 배역인 데다, 훈련에서도 가장 완벽한 성과를 보여주게 될 예정이지. 대부분은 대역을 쓰지도 못할 씬들인데 말이야.”

그 말을 듣고서야 계진행은 안정록과 이찬이 오래 만나지 못했다는 사실을 실감할 수 있었다.

“선생님. 대역은 절대 안 됩니다.”

“그래, 안 돼. 쇼트를 잘 연결해서 자연스럽게 만들 수가 없지는 않겠지만, 어쨌든 최소한의 액션은 직접 소화해야 해.”

“어, 그래서 드리는 말씀입니다. 이 녀석 액션 수준에 맞게 스턴트를 하려면 적어도 10년 이상 경력 되는 사람이 붙어야 할 텐데, 그 중에는 이런 체격이 거의 없어서요.”

“······그 말은?”

“최고라는 거죠. 누나 카레라이스 먹을래요- 그렇게 외치던 꼬맹이가, 최고의 액션배우가 돼서 나타났습니다.”

그 말을 곱씹은 뒤에, 안정록이 이찬 쪽을 돌아봤다.

“너 이 녀석, 공부만 열심히 했다고 하더니.”

“에이, 당연히 운동도 했죠. 얼굴이 꽤 바뀌었다곤 해도, 이미지 변신엔 액션만 한 게 또 없잖아요? 태권도, 절권도, 복싱, 무에타이, 검도, 이것저것 다 연습했어요. 나이가 어려도 성인역 얼마든지 맡을 수 있다는 걸 보여주려고요.”

“믿어지십니까, 선생님? 이 꼬맹이가 비공개 오디션 보겠다고 하고 절 찾아와서 쉐도우 복싱을 보여주는데, 마치 앞에 정말로 상대가 서 있는 것처럼 그림이 그려졌습니다. 나중에 그게 무하마드 알리의 실제 경기를 따라한 거라고 듣게 됐죠. 오디션 영상하고 경기 영상을 비교해서 보는데······ 햐, 소름이 돋아서 정말, 캐스팅을 안 할 수가 없더라고요.”

주연과 감독의 설명을 다 들은 뒤, 안정록은 눈을 감았다. 그리고 속으로 탄식했다.

‘정말이지 이찬 이 아이는······ 어디까지 바라보고 있는 걸까. 이제는 소년이라고도 부를 수 없게 된 몸으로, 대체 어떤 연기를 보여주려고 하는 걸까. 완벽을 향해 한 걸음 더 다가간 이 천재소년이 뒤흔들 대한민국의 연기판이 궁금하구나. 그리고 그 끝에······ 이 아이가 어떤 행복으로 웃게 될지도.’

시치미를 뗀 매.

안정록에게 있어서 이찬은 그런 존재였다.

땅을 걷는 인간이 감히 재단하거나 간섭할 수 없는 천상의 존재. 그러면서도 그 마음 깊은 곳에는 따뜻한 인간애를 품고 있는, 세상에 두 번 다시는 없을 배우.

계진행의 배웅 속에서 프로덕션을 나서며, 안정록은 그 매를 향해 나지막이 물었다.

“들어보니 오래 준비한 모양이던데. 이번 영화에 의지가 대단한 것 같구나.”

“네. 이걸로 천만 찍을 생각이거든요.”

“······그렇게야 되겠니? 가족이 함께 보긴 힘든 영환데.”

“시대가 바뀌고 있어요, 아저씨. 예전에야 스크린 하나짜리 극장에 가족끼리 찾아가서 오순도순 보는 게 정석이었지만, 이제 그런 관객은 많지 않다고요. 연인이나 친구끼리 둘씩 셋씩 오는 게 태반이고, 그 사람들 입소문이 흥행을 좌우하게 돼요. <네 친구>가 성공한 게 그 덕분이죠.”

“음. 맞는 말이지 싶긴 한데, 희한하구나. 방에서 공부만 했다면서 어떻게 그렇게 꿰고 있는 거냐?”

“인터넷이 있으니까요. 덕분에 방에서 천리를 내다볼 수 있었죠. 아저씨도 얼른 배우세요. 뒷방늙은이 되긴 싫잖아요?”

짐짓 턱을 치켜들고 하는 말에 피식 웃음이 나왔다.

이찬은 여전했다. 그 누구와도 비견될 수 없는 재능을 가지고, 또래 중 누구도 이룬 적 없는 성과를 달성한 뒤에도, 그 마음은 봄날의 초원처럼 푸르렀다.

푸른 소년은 차에 올라타기 전에 안정록에게 물었다.

“얼마 전에 정후 선배를 만났는데요.”

“······그래?”

“그 선배가 그러더라고요. <형제> 찍으면, 그 영화는 아저씨가 보실 거라고 생각했다고요. 그래서 들어갔대요.”

“어리석은 생각이구나.”

“왜요? 안 보실 거예요?”

“그게 아니야. 그 녀석이 찍은 영화는 다 봤다. 한 편도 빼놓지 않고, 개봉일마다 직접 극장으로 찾아갔어. 왜 내가 안 볼 거라고 생각한 건지 모르겠구나.”

해가 동쪽에서 뜬다는 말을 하는 것처럼 평온한 태도. 이찬은 황당해져서 고개를 갸웃거렸다.

“아니, 그게 참······ 두 분 사이는 알다가도 모르겠네요. 그럴 거면서 왜 직접 만나지는 않으시는 건데요?”

“하하. 그게 많이 궁금했니?”

“많이는 아니고, 조금요.”

퉁명스레 둘러대지만, 소년은 연기로 감정을 숨기지는 않았다. 덕분에 안정록도 그가 꽤나 많이 궁금해하고 있음을 알 수 있었다.

그렇기에, 꽤 오래 고민했으나, 결국 답을 해줬다.

“정후에겐 내가 없어야 한단다.”

“어, 저쪽에선 그거랑 완전히 반대되는 얘길 들었는데.”

“그게 문제인 거란다. 하늘로 날아오른 매에게 다시 새장을 안겨준들, 그게 어떻게 보금자리가 될 수 있겠니. 그 아이가 필요로 하는 건 시치미를 쥔 인간이 아니야. 함께 창공을 가르며 나는 법을 가르쳐줄 동료가 필요한 거란다. 그리고 난 그 아이가 기대하는 것과는 전혀 다른 존재야. 그러니, 내게 의존하는 건 정후에게 더 큰 고통만을 안겨줄 거야.”

알 듯도 하고 모를 듯도 한 이야기였다.

“<형제> 같이 촬영 중인 조혁수 아저씨라면, 좋은 매 친구가 돼주겠네요?”

“그렇겠지. 내가 볼 적엔······ 네가 더 적절해 보인다만.”

“으엑. 싫어요, 관심 없어요. 저 가요.”

이찬은 입술을 삐죽거리며 차에 올라탔다.

< 20장 - 감독 계진행 (2) > 끝

ⓒ 비벗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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