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훔치는 연기자-56화 (56/250)

< 20장 - 감독 계진행 (3.) >

<684>의 프리프로덕션은 빠르게 진척됐다.

이찬 캐스팅 때에는 뜨악한 반응이 컸지만, 덕분에 51억이라는 투자금이 들어왔다. 당장 실미도에 세트장 지으며 일정을 진행하기에 부족함이 없는 거금이었다.

안정록이 주연으로 자원한 것 역시 굉장한 호재였다. 세계적으로 이름을 떨친 영화인과 함께 촬영하고 싶다는 마음에, 무수한 명품배우들이 사계 프로덕션을 찾았다.

그중에 연극판에서 잔뼈가 굵은 소해진과 왕호준이 있었다.

출중한 연기력으로 여러 영화에서 활약하며 인지도를 높인 인물들인 만큼, 남은 두 주조연 자리를 맡기기에 부족함이 없었다.

다만 오디션 때에는 조금 혼란이 일기도 했다.

“안정록 선생님이 오디션까지 오셨네! 야, 진짜 연예인 만난 기분이에요. 전에 단역 때 뵌 적 있는데, 기억하시려나?”

“니 와꾸를 어떻게 잊겠냐? 그런데 그게 중요한 게 아니라, 아까 걔는 대체 누구야? 젊은 애.”

“아, 걔요? 그러게요. 작가라기엔 좀 어려 보였는데. 그렇지만 감독이랑 같이 들어간 걸 보면 면접관인 건 맞을 텐데.”

“야, 야. 너희 모르냐? 걔가 이찬이야.”

“이 형님이 무슨 헛소리야? 그 꼬마 본 적 없어요?”

“이 새낀. 걔 나온 <미스 스캔들>을 내가 몇 번을 봤는데. 그래서 하는 말이야. 얼굴이 딱 이찬이었다니까?”

“뭔······ 2년 만에 180이 돼서 나타났다고요? 말이 되는 소리를 하셔야지. 얼굴도 전혀 다르더구만요.”

“다르긴! 그리고 애들 2년이면 20cm 금방 큰다 너?”

“아이고, 희망사항이시겠죠. 열다섯에 무슨 180이야. 아드님 우유 많이 먹이시고요, 형님도 좀 더 크세요.”

“이 자식이 사람 말을 못 믿고?”

그렇게 수군대던 배우들은, 열 명씩 조를 이뤄 면접장에 들어선 뒤에야 진실을 마주했던 것이다.

“안녕하십니까. ‘인하’ 역에 캐스팅된 이찬이라고 합니다. 제가 여기 앉은 건 감히 여러분을 평가하려는 건 아니고, 많은 선배님들을 뵐 기회라고 생각해서 인사를 드리고자 감독님께 부탁드린 겁니다. 모쪼록 많이 가르쳐주세요.”

마음에도 없는 소리였다. 이찬은 그들을 마구 평가하고 재단해서 배역 선정에 입김을 불어넣을 목적으로 오디션장에 들어온 입장이었다.

하지만 ‘심리학자’ 안정록조차 속이는 연기로 진심을 모사했기에, 그 마음을 의심하는 배우는 전무(全無).

덩치가 좋아 건달 역을 많이 맡았던 소해진은 신기해하며 질문을 건네기도 했다.

“감독님, 죄송합니다. 제가 너무 궁금해서 그런데, 쟤 정말 열다섯이 맞습니까?”

“하하, 맞아. 몇 살로 보여?”

“적어도 스물은 넘어 보이는데······. 저기, 찬아? 뭘 먹고 그렇게 쑥쑥 큰 거야? 얼굴은 또 왜 그렇게 세월의 풍파를 직격탄으로다가 맞았고?”

“······조숙하다고 표현해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선배님. 매일매일 끼니 거르지 않고 정성 가득한 가정식을 먹었더니 쑥쑥 큰 것 같습니다. 저희 매니저님이 솜씨가 좋으셔서요.”

“와······ 그 매니저 정말 탐나네. 내가 독립해서 데려오든가, 우리 아들 크면 나라엔터 보내든가 해야 되겠다.”

“자 자. 해진아, 헤드헌팅은 나중에 크랭크업 하고 나서 생각하고, 우선은 연기부터 좀 보자고. 24씬 가보자. 찬이랑 실제로 한번 맞춰보는 거야.”

그 즉석연기가 이찬이 오디션에 동석한 두 번째 목적이었다. 대본리딩에 앞서 자신의 연기력을 보여주려 한 것.

열두 살에 데뷔해 2년 넘게 휴식한, 이제 막 열다섯이 된 어린 배우. 그런 선입견을 가진 건 대중만이 아니다. 작품으로 설득하게 될 대중에 앞서 동료 배우들에게 인정받는 것이 소년의 선결과제였다.

그렇기에 각양각색의 배우 300명이 몰린 <684>의 조연 오디션은 그에게 기회의 장이었던 것이다.

“선배님, 제가 먼저 들어가겠습니다. 누가 말 놓으래? 넌 씨발 니 장모도 어려 보이기만 하면 말 놓을 거냐, 이 씹새꺄?”

“······어어.”

“선배님?”

“아, 이거 대사지? 너무 실감나서. 정말 잘하네. 혹시 진심으로 한 말은 아니지? 내가 너무 초면에 말을 놔버렸나?”

“아닙니다! 그저 24씬 대사 읽었을 뿐입니다! 죄송합니다!”

“아이고, 아냐, 아냐. 내가 미안하지. 감독님, 선생님, 죄송합니다. 다시 한 번 하겠습니다. 찬아, 부탁해.”

슬쩍 진심을 담아봤던 이찬은 속으로 키득댔다.

그간 맡아왔던 거친 배역들과 달리 너스레가 일품이었던 소해진과 반대로, 왕호준은 현실에서도 대단히 진중했다.

“아······ 이찬 군이 맞았군요. 반갑습니다. 잘 부탁해요.”

“뵙게 되어 영광입니다, 선배님. 말씀 편히 해주십쇼.”

“나중에요. 감독님도 계시고 안 선배님도 계신데, 사적인 이야기는 여기까지 하겠습니다. 바로 연기 보여드리겠습니다.”

냉정하고 무뚝뚝한 이미지로 유명한 배우다웠다. 반쯤 벗겨진 머리가 그 기상을 대변하듯 번뜩였다.

다만, 이찬은 그의 미세한 표정들을 통해 내면의 심리를 짐작할 수 있었다.

‘안정록 아저씨를 무지하게 존경하는 것 같네. 초롱초롱 바라보는 게 거의 강정후 수준인데? 잘된 일이야. 소해진 아저씨하고도 왕호준 아저씨하고도, 잘 지낼 수 있을 것 같아.’

그렇게 하루 내내 진행된 조연 오디션 이후, 이튿날부터 진행된 단역 오디션은 연출부가 전담했다.

다른 배역은 몰라도, 부대원 23인과 기간병 29인은 거의 모든 로케이션 촬영에 참여한다. 거의 주조연 같은 단역인 것.

그렇기에 무려 4000명의 신인급 배우가 지원서를 올렸다. 감독과 주연배우들이 선별하기엔 지나치게 많은 수였다.

그들을 뒤로한 채 주연들은 실미도를 찾았다.

인천 무의도 서쪽의 외딴 무인도. 30여 년 전에 31명의 결사대원들이 지옥훈련을 받았다는 섬은, 역사를 모르고 본다면 그저 감탄만 하게 될 아름다운 무인도였다.

다만 지금은 인천항에서 넘어온 인부와 공사장비들로 북적거렸다. 이후 반 년 가까이 촬영을 진행할 <684>의 핵심 세트장이 올라가고 있었다.

“······기분이 복잡하구나. 어렸을 땐 이 섬이 이렇게 가까운 줄 몰랐는데. 이렇게 금방 올 수 있는 거리였다니······.”

이찬의 곁에 선 채 안정록은 그렇게 읊조렸다.

배의 진동 때문이라고 보기엔 좀 심하게 떨리는 목소리. 소년은 얼핏 들은 이야기를 떠올렸다.

“강정후 아저씨한테 들었는데, 백부님이 월북하셨다면서요?”

“아, 그걸 들었구나. 그래, 그랬지.”

“말씀드릴까 말까 고민했는데, 백부님 자제분들은 안 계세요? 아저씨 사촌이요.”

“만나보고 싶으냐? 모사하기 위해서?”

“네. 영상으로 접할 수 있는 건 탈북자밖에 없었거든요. 월북자 가족들 인터뷰 자료는 희한하게 없었어요.”

“······그렇게 언론에 주목을 받을 입장이 아니니, 당연한 일이지. 하지만 찾아보면 자료가 아주 없지는 않을 거다. 다큐멘터리로도 제작된 게 있다고 들었어. 회사에 얘기해보렴.”

잠깐 머뭇거리다가, 이찬은 재차 물었다.

“아저씨 사촌 분들은요?”

“미안하다. 다 돌아가셨어.”

“······죄송합니다. 괜히 캐물었네요.”

“하하하, 착한 녀석 같으니. 나로서도 아쉽구나. 네 기준에서 완벽한 연기를 보이기 위해서는, 월북자의 가족들을 만나보는 일이 필요할 텐데 말이야.”

“다큐멘터리 찾아볼게요.”

“그래. 네 재능이라면 짧은 인터뷰만 가지고도 구체적인 캐릭터를 완성할 수 있겠지. 세상 누구보다도 완벽하게 ‘인하’를 연기할 수 있을 거다. 그런 재현(再現)이, 버려졌다는 아픔 속에 살아온 이들에게 카타르시스를 안겨줄 수 있겠지.”

카타르시스. 비극의 감상을 통해 굳어져 있던 마음속의 응어리가 해소되는, 문학과 심리학에 모두 쓰이는 용어.

소년에겐 그저 이론적으로만 공부한 어휘였다.

그러나 안정록이 그 단어를 뱉자 조금쯤 다르게 느껴졌다.

‘카타르시스······ 어쩌면 <미스 스캔들>이 내게 그런 가치였는지도 몰라. 나 자신의 어리석은 결정을 다시 한 번 경험하면서, 오히려 괴로움을 덜 수 있었으니. 음, 물론 비극이라기엔 결국 통속적인 해피엔딩이 되지만, 의미 자체는 통하겠지. 그리고 이 작품에서······ 안정록 아저씨는 군인으로서 자식 같은 특수부대를 버리는 결단을 내리게 된다.’

들은 바에 따르면, 계진행 감독은 두 가지 안을 놓고 고심했다고 한다.

첫째는 인정파. 교육대장 ‘이성일’이 끝내 부대원들을 죽이지 못해 ‘인하’로 하여금 부대 해체 계획을 알게 만드는 것.

둘째는 내전파. 이성일이 끝내 군인으로서 의무를 완수하고자 하지만, 이미 기간병들이 당해낼 수 없을 정도의 실력자가 된 부대원들에게 살해당하는 비극.

실제에 가까운 건 둘째였지만, 매력적인 건 첫째 방안이었다. 관객에게 보다 큰 여운을 남길 수 있을 것이기에.

그럼에도 둘째 안이 채택된 건 안정록의 결정이었다.

내적 고뇌를 충실히 표현해낸다면 구태여 상황을 왜곡하지 않아도 괜찮으리라는 것이 이유였다.

하지만 이찬은 그 마음속에 표면적인 근거와 다른 무언가가 자리해 있음을 느낄 수 있었다.

‘나쁜 의도는 아닌 것 같았지만, 스스로도 어쩔 수 없는 충동을 느낀 것 같았어. 무의식적 카타르시스······ 그러니까······ 안정록 아저씨가 강정후에게 한 일이 그런 거였단 말이지. 자식처럼 키우던 제자를 내친 셈이니까. 아직까지도 그걸 자책하는 마음이 선택에 영향을 준 게 아닐까? 나 같은 놈이 연기하는 교육대장은 평온한 자살로 생을 마감해선 안 된다, 처절하고 끔찍하게 살해당해야 마땅하다······.’

대놓고 물어볼 수 있는 일은 아니었다. 강정후만큼은 아니겠지만, 안정록에게도 그 일은 역린일 터였기에.

그렇기에 소년은 그저, 자신보다 키가 작아진 대배우의 어깨를 토닥거렸다.

“힘내세요, 아저씨.”

“허허허. 이 녀석, 이런 것도 할 줄 알았어?”

“제가 제일 좋아하는 분이, 동료들한테 이렇게 하던데.”

“아······ 그래. 그건, 고맙구나. 하지만 인석아, 네 나이 때는 그것보다 더 좋은 위로 방법이 있단다.”

“그게 뭔데요?”

“이런 거지.”

안정록의 인자한 얼굴이 소년의 높은 어깨 위로 올라가고, 나이답지 않게 넓은 소년의 등 위로 두 손이 얹혔다.

“이렇게 꼭 안아주면 된단다. 아, 여자아이한테는 조심해야 돼. 크게 오해를 살 수 있으니까 말이야.”

“······따뜻하네요.”

“그렇지? 너희 세대는 스킨십 세대니까, 잘 기억해두렴.”

꼭 세대가 바뀐 것만은 아니리라. 단 한 번, 윤대흥 형사 역시 그렇게 소년을 끌어안은 적이 있었다.

행복해지기 위해서가 아니라 그저 불행을 피하기 위해 배우가 되겠다고 말했을 때였다.

다시는 느껴보지 못할 거라고 생각했던 포근함이, 그 투박한 형사의 품 안에 안에 있었다.

“······아저씨.”

“왜 그러니.”

“만약에요. 이번 영화가 <형제>보다 잘되면요.”

“그러면?”

“이렇게 한번만 안아주세요. 강정후 그 사람이요.”

약속에 위배되는 부탁.

원래대로라면 <형제>가 <684>보다 더 높은 흥행성적을 기록했을 때 강정후와의 관개 개선을 부탁해야 한다.

그러니 방금 한 말은 일종의 이면계약인 셈이었다. 철저하게 강정후에게 유리한.

다만 이찬이 그를 위해 말을 꺼낸 건 아니었다.

이길 게 뻔하다고 확신하고 있기에, 그 뒤에도 회사의 간판인 천재배우가 무너지지 않을 수 있게끔 퇴로를 열어준 것뿐.

배려와 자기확신 속에서 한 말에 안정록은 오래 대답하지 않았다. 그저 소년을 안은 채로 가만히 바다를 바라보다가, 장난기 가득한 소해진이 둘이 뭐 하는 거냐고 놀렸을 때에야 몸을 떨어뜨렸다.

*

위령제는 약식으로 진행됐다.

전통적으로 하자면 무당을 불러 굿판을 진행했을 것이고, 사회적으로 하자면 거창하게 악단을 불러 희생자들을 기렸을 것이나, 이번 위령제는 영화의 고사를 대신하는 행사.

실미도에서의 촬영을 허락받는다는 의미로 안주상을 거하게 차려놓은 채, 계진행이 산을 향해 외쳤다.

“우리가! 이제부터! 여러분의 넋을 기리고 진실을 알리기 위해서, 아주 상업적인 영화를 제작할 겁니다! 사실에 입각한 다큐 영화가 아니라서 죄송한데, 이해 좀 해줍시다! 그렇게 만들면 사람들이 안 본단 말입니다! 많이 보게 해야죠! 그래야 오명 속에 사과도 제대로 받지 못한 유족들한테 우리가 약소하나마 선물도 하고 그럴 거 아닙니까? 그러니까 잘 좀 도와주십쇼. 앞으로 반 년, 우리 배우들 스탭들이 무탈하게 촬영 마칠 수 있게, 여러분이 협조를 좀 해주셔야 됩니다!”

젊은 감독답게 패기 넘치는 축문이었다. 그 뒤에 계진행은 안정록에게 메가폰을 건넸다.

“잘하겠습니다. 열심히, 정성을 담아 연기하겠습니다. 모든 사람들이 여러분의 희생을 기억할 수 있도록 하겠습니다.”

다음 순서는 이찬. 비록 모든 배우와 스탭 가운데에서 최연소자지만, 배역상 먼저 나설 수밖에 없었다.

“흠. 이거, 천만영화로 만들겠습니다. 믿고 기다리세요. 후회하지 않으실걸요? 저승 팝콘 구입해서 시사회 오시라고요.”

살아있는 사람과 대화하듯 평온한 말투였다.

그런 식으로 유쾌하게 진행된 축문에, 겁 많은 일부 배우들도 역사의 한 페이지였던 무인도의 공포를 걷어낼 수 있었다.

특히 계진행이 이찬의 발언을 무척 높이 평가했다.

“아주 잘했어. 자네 아주 겁도 없고 참 마음에 들어. 투자자님, 다음에 나랑 영화나 한 편 보러 가자. 뭐 좋아하니?”

“저야 영화면 다 좋아하는데, 힘들 것 같네요. 드라마 촬영 때문에 이제 액션스쿨도 나가야 되거든요.”

“아, 사극이었지? 그러면 검술 합 맞추고 그러겠구나.”

“거기에 와이어 액션까지 들어간대요.”

“허허, 무협지처럼 만들 생각인가? 말했다시피 여기 로케는 일주일씩 들어와서 찍고 나가고 할 텐데, 양해는 구해뒀어?”

“예. 어차피 저야- 어? 저기요, 잠깐만요. 소해진 선배님? 저 미성년자거든요?”

“에이, 오늘 같은 날은 한 잔 해도 돼. 자, 쭉쭉 마셔.”

황소 같은 생김새와 달리 장난기 넘치는 소해진에 의해 막걸리 한 잔을 비우고, 이찬은 공터 중앙으로 끌려 나갔다.

그 뒤에 아저씨들의 춤판 속에서 한참 고생하다가, 안 되겠다 싶었는지 소품인 모형 총을 하나 들고 총검술 시범을 보이기 시작했다.

“야, 멋있다! 너 이 녀석, 사실 군대도 갔다 온 거 아냐?”

“저거 저거, 의장대에서나 하는 건데!”

“하하하하! 잘한다 이찬! 돌려라, 돌려!”

밝은 조명 속에서도 잘 보이지 않을 정도로 빠르게 총을 돌리는 소년은, 벌써부터 촬영장의 마스코트가 된 듯했다.

귀염둥이 마스코트라기엔 덩치가 좀 많이 컸지만.

유쾌한 광경을 한참 바라보다가, 계진행은 문득 고개를 들었다. 얼핏 고맙다는 말이 들린 것 같아서.

그렇지만 곧 술에 취한 탓이라고 생각하며 웃어버렸다.

< 20장 - 감독 계진행 (3.) > 끝

ⓒ 비벗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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