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훔치는 연기자-57화 (57/250)

< 21장 - 배우 최정하 (1) >

동작구의 액션스쿨에 이찬이 처음 모습을 드러냈을 때, 무술감독은 고개를 갸웃거렸다.

“어······ 넌 누구니?”

“안녕하십니까, 감독님. 이찬이라고 합니다.”

“어? 이찬이라고? 어이고, 자세히 보니까 그런 것도 같네. 그런데 너 이제 열다섯 아니니? 무슨 키가 이래? 너는 모델이나 농구 쪽으로 나가도 되겠다 야.”

“그쪽엔 관심 없습니다. 연기만 할 거예요.”

“그래? 연기가 너무너무 좋다? 좋아. 그런 열정 마음에 든다. 일단 저기 가서 몸 좀 풀고 있어. 레슨은 다른 배우들 오면 시작할 거니까.”

호랑이 같은 액션배우라는 소문에 비해 쾌활한 태도였다.

아마도 교습 때만 엄격하게 구는 사람인 모양이라고 생각하며 가볍게 몸을 풀고 있자, 곧 통유리 문 밖으로 명진아가 뛰어오는 모습이 보였다.

“안녕하세요, 감독님!”

“어, 그래. 진아 네 오빠 와 있다. 같이 몸 좀 풀어.”

그 말을 듣고 그녀는 곧바로 고개를 돌리진 않았다. 어깨를 잠시 움츠렸다가, 1초쯤 지난 뒤에 돌아봤다.

“찬아! 벌써 왔어?”

“어, 누나. 오랜만.”

“너는 참, 요즘도 성실하구나? 나도 30분 일찍 나온 건데.”

“내가 아침잠이 좀 없어서.”

“그래도 잠을 푹 자야지 키가 쑥쑥······ 아······.”

곁에 다가가면서 자연스레 말이 끊겼다. 성장을 위해 푹 자야 한다는 새 나라의 어린이 덕목을 말하기엔, 이미 올려다보기에 목이 아플 정도로 폭풍성장한 소년인 까닭에.

“진짜, 다시 봐도 적응 안 된다 얘. 이젠 나랑 20cm는 차이가 나는 것 같아.”

“누나가 몇이더라?”

“아, 비밀이야. 그런 거 물어보는 거 아니다 너?”

“몸무게는 두 배 차이 나겠는데? 누나 몇이야?”

“그건 더 안 돼! 바보야.”

스스럼은 있지만, 정다운 대화였다. <가을하늘> 촬영 때와 하나도 달라진 게 없는.

그렇게 두 사람이 10분쯤 몸을 풀었을까. 마침내 세 번째 수강생인 최정하가 모습을 드러냈다.

“안녕하십니까, 감독님! 어? 뭐야, 둘 벌써 왔어? 이거 왜들 이래? 주연들이 이렇게 빨리 와서 기다리고 있으면, 20분 일찍 도착한 조연 체면이 뭐가 되냐?”

“안녕하세요, 오빠!”

“안녕하세요. 선배님이신데, 당연히 저희가 빨리 와야죠.”

“이 자식은, 형이라고 부르라니까?”

“노력하겠습니다, 선배님.”

네 번째 수강생 임희재는 그 뒤에야 모습을 드러냈다.

사실을 말하자면, 가장 늦게 도착한 인물인 건 아니었다.

“감독님, 야외 매트 설치했습니다. 어? 선배님들 오셨어요?”

“오냐. 희재 후배 세팅 잘하고 있었니?”

“이찬 넌 그러면 안 되지! 네가 무슨 선배야!”

득달같이 달려들어 이찬의 볼을 움켜쥐려 했지만 허사였다. 방에서 홀로 운동한 것만으로도 무술인의 몸을 완성한 소년은, 액션을 연기로만 접해본 처녀에겐 지나치게 강적이었다.

목표를 놓치고 허탈해하는 임희재를 최정하가 다독였다.

“희재야, 넌 또 왜 이렇게 일찍 나왔어? 그럴 필요 없다니까. 다음부턴 내가 할게. 넌 그냥 시간 맞춰 와.”

“앗. 어떻게 선배님한테 맡겨요? 저랑 찬이랑 할게요.”

“에이, 주연한테 그런 걸 시킬 수 있나? 안 그래도 영화 준비한다고 바쁠 텐데. 찬이 넌 오늘이 첫날이니까, 기초 닦는다고 생각하면 될 거야. 절대 무리하지 말고. 알겠지?”

“예, 선배님. 절대로 무리하지 않겠습니다.”

느긋하게 웃어 보이면서, 이찬은 <어사>의 오각관계를 만들어나갈 청춘스타 4인방을 둘러봤다.

‘종사관 황보준 역의 정길승 아저씨는 사극 액션 경력이 많으니까, 이렇게 넷이서만 배우게 된다는 거지? 물론 난 무리하지 않아도 중간에 빠지겠지만. 오늘 끝나지 않으려나?’

신체의 통제에 자신이 있는 이찬에게 액션은 결코 어려운 분야가 아니었다. 그렇기에 윤진선 작가가 신이 나서 액션 씬과 상반신 누드 씬을 계획해도 곤란할 게 없었다.

그렇지만 나머지 세 사람은 달랐다. 이찬보다 한참 먼저 와서 액션을 배우기 시작했지만, 여전히 갈 길이 멀다는 모양.

‘다모 채화 역의 명진아. 연기력으로 따지면 10대 중에 적수가 없을 정도니, 그쪽에선 걱정할 게 없어. 그렇지만 액션은 처음이라서 좀 고생하고 있다고 했지. 촬영장 나가면 옆에서 내가 많이 도와줘야 할 거야.’

드라마의 액션을 완성해내는 게 결국 카메라워크와 편집기술이라곤 하지만, 그것도 어느 정도 베이스가 있어야 가능한 작업이다. 꽃다운 열일곱 소녀에겐 무거운 짐일 터였다.

마찬가지로, 호위 ‘수옥’ 역을 맡은 임희재 역시 앞으로 고생길이 창창했다.

‘운동신경이 좋은 편인데도 고전하고 있다고 했지. 상대적으로 감정 씬이 많은 다른 배우들에 비해서, 이 누나는 싸우고 또 싸울 검객 역할이니까. 괜히 어려운 거 골라가지곤.’

임희재의 <어사> 참전은 소년이 의도한 바는 아니었다. 오래 쉰 탓에 끼워팔기를 할 만한 입지가 아닌 건 둘째 치고, 임희재는 그 정도 조연을 맡기엔 아까운 배우였다.

이제 방송가에 데뷔한 지 2년이 좀 넘은 미녀 배우의 행보는 꽤나 빨랐다. 연기력 출중한 인재인데다 이찬의 휴식기 동안 나라엔터 3팀의 지원을 오롯이 홀로 받게 됐던 까닭.

그렇게 드라마 조연과 영화 주조연을 거쳐, 이제는 떠오르는 기대주 중 한 명으로 평가받고 있는 것이다.

그런 그녀가 이찬의 복귀작에 빠질 수 없다며 대뜸 오디션에 지원한 것에, 주동한과 윤진선은 몹시 감동했다.

인상적인 씬이 별로 없는 배역이라서 예쁘장한 체육계 신인이나 넣을까 했던 수옥 역이었기에.

그런 과정으로 역에 비해 과분한 배우가 들어오게 됐다.

그리고 그 두 여인에 비해서도, 역적 ‘가림’ 역의 최정하는 상황이 심각했다.

‘청춘스타 최정하. 외모도 연기력도 상당하고, 팬덤까지 있는 인물이야. 그런 사람이 악역에 들어와 줘서 참 고마운 일이긴 한데······ 잘 따라올 수 있을지 모르겠네. 액션 경력도 없는 사람이 어쩌자고 그걸 덥석 물었는지 원.’

금양기획을 설득하기 위해 윤진선 작가가 칼을 갈고 만들어낸 캐릭터, 가림. 초반에는 흑막 속에서 암약하다가 점차 조선제일검의 수제자로서 실력을 드러낼 배역이다.

그런 까닭에 감정연기는 물론이고 고난도 액션 씬이 무수히 들어갈 예정이라, 셋 중에서 가장 힘든 시간을 보내고 있다고 했다.

‘그렇지만 저래 봬도 조혁수 아저씨가 인정한 배우니까, 결국은 해내겠지. 덕분에 대결구도가 꽤 재밌어질 것 같아. 나중에 상황 봐서 내 액션 씬도 좀 늘려달라고 할까?’

다른 배역에 비해 암행어사 ‘유관’에게 요구되는 건 많지 않았다. 수사관들과 함께 지내는 동안 검술을 익혀 결정적인 순간에 몸을 던져 ‘채화’를 구하는 게 유일한 액션 씬이기에.

그렇기에 첫날의 커리큘럼 역시 단조로웠다.

“자, 이제 시작하자. 찬이는 오늘이 첫날이니까 저쪽에서 가볍게 줄넘기 좀 하고 있고, 진아랑 희재는 어제 배운 검술 합 다시 체크하고 있어. 그러는 동안 정하는 와이어 액션 몇 개 더 배워보자. 초반부터 많이 들어갈 거라고 했으니까.”

“예, 알겠습니다!”

무술감독의 뒤를 따라간 최정하는, 높다란 크레인에 설치된 와이어를 올려다보며 침을 꼴깍 삼켰다.

“자, 다시 말하지만 당기는 사람하고 타는 사람의 호흡이 중요해. 지금 우리 애들 둘이 당겨줄 건데, 쟤네를 믿고 흐름에 네 몸을 온전히 맡겨야 된단 말이야. 그래야 뒤뚱거리지 않을 수 있다고. 지난주에 배운 수완(고공 백텀블링)이랑 벨트(공중회전)부터 체크해보자. 이젠 아무것도 아니지?”

“예, 감독님!”

전혀 아무것도 아닌 게 아니다. 2미터 가까이 솟구치며 적절한 동작을 수행한다는 건 땅 위의 연기와는 차원이 다른 고난이도였다.

그렇지만 따르지 않을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배역까지 바꿔가며 재도전한 작품에서 소년에게 지고 싶지는 않았기에.

잘 보이고 싶은 사람이 있는 촬영장에선, 특히 그랬다.

*

야외훈련을 마치고 메스꺼운 속을 달래며 체육관으로 돌아오던 최정하는, 문득 발소리를 죽였다.

일찌감치 훈련을 마쳤는지 주연 소년소녀가 대화 중이다.

스타 조연은 두 사람의 뒤쪽으로 숨어들며 귀를 기울였다.

“검 잡을 때, 좀 더 바투 잡는 게 나을 거야.”

“바투? 바투 잡는 게 뭐야?”

“이렇게 바짝 잡으라는 거야. 고등학생이 그것도 모르냐?”

“아······ 너무해. 그런 식으로 말할 거야? 연기 열심히 하느라 공부는 많이 못 했단 말이야.”

“최소한의 교양은 갖추셔야죠, 대배우님.”

“치. 너는 연기도 잘하고 머리도 좋고, 좋겠다 야.”

“좋지. 그리고 사실은 액션도 잘해. 자, 봐. 나 같은 경우엔 이렇게 손잡이 끝을 잡아도, 이렇게, 휘두르는 게 무리가 없어. 그렇지만 누나는 아니잖아? 감독님은 누나처럼 작은 사람한테 검술 가르쳐본 적이 없어서 이런 걸 모르실 거야.”

“내가, 그렇게 작진 않거든?”

“160이던데? 그것도 프로필 키고, 사실은 158정도 되지?”

“아, 아냐! 159 되거든?”

어깨를 으쓱인 이찬이 의장대처럼 빙글빙글 검을 돌린다.

최정하는 아이들의 티격태격하는 대화에 저도 모르게 미소를 지었다. 청소년 드라마의 한 장면으로 딱이다 싶었다. 이찬의 떡 벌어진 어깨만 빼놓고 본다면.

하지만 그 뒤에는 장르가 좀 바뀌었다.

“아. 누나, 신혜 누나는 어떻게 됐대? 오디션 봤대?”

“신혜? 응······ 봤대.”

“어떻게 됐대? 붙었대?”

“응. 난 사실 마음이 좀 그래. 우리 셋이 같이 드라마 하면서 재밌었는데, 이제 다른 작품에서 경쟁하게 된 거잖아.”

“뭐래? <가을하늘>에서도 우리 둘이 한 편이고 신혜 누나는 다른 편이었잖아. 그거나 이거나 그게 그거지.”

“아······ 그런가? 헤헤.”

“그렇게 웃지 마. 청순한 게 아니라 멍청해 보여.”

“아이, 야!”

그 대목에서 최정하는 웃음소리를 참기 위해 애써야 했다.

하지만 키 큰 소년은 별달리 웃지도 않고 말을 이었다.

“아, 기대된다. 오진주 역, 신혜 누나한테 진짜 잘 맞거든. 안여진 작가님이 그 누나를 모델로 썼나 싶을 정도였어.”

“어? 그래? 난 좀 고생하겠다 싶었는데. 신혜는 그렇게 귀여운 소녀 역할은 거의 안 해봤잖아?”

“그게 문제였지. 자기가 뭘 잘하는지도 모르고 뭐 좀 있어 보이는 배역만 쫓아다닌 거. 누나는 알 줄 알았는데, 몰랐나보네? 작품 끝나고 둘이 꽤 친해지지 않았어?”

“응······ 우리 친한데?”

이상하다는 듯 고개를 갸웃거리는 명진아는 뒷모습만 봐도 몹시 귀여웠다. 그렇지만 덩치 큰 이찬은 그쪽을 돌아보지도 않은 채 자기 생각에 빠져 있었다.

“하긴 뭐, 인간은 다면적이니까.”

“다면적? 그건 뭐야?”

“평면적이지 않고 다양하다는 거지. 누나한텐 야심찬 후배 배우처럼 행동하다가도, 내 앞에서는 얼렁뚱땅 귀여운 소녀로 보일 수도 있다는 거. 가식이라기보단 그냥 마음의 문제인 것 같아. 어떤 사람과 함께 있느냐에 따라서 마음의 색깔도 바뀌기 마련이니까. 요새 그런 생각이 자주 들어. 아마 그래서 좋은 사람하고 있어야 된다는 말을- 누나?”

“아유. 애가 참 말도 많아요. 쉬고 있어, 나 화장실 좀.”

“참나. 동생이 인생의 진리를 말씀하시는데, 버릇없네 참.”

소년이 혀를 차듯 말하고, 소녀가 뒤돌아서 걷기 시작한다. 엿듣고 있었음을 들키지 않고자 최정하가 매트의 탑 뒤로 숨어든 뒤였다.

명진아는 바로 그 매트 옆의 기재 사이에 쪼그려 앉았다. 그리고 얼굴을 감싸 쥐었다.

‘어라? 왜 저래? 어디 아픈가?’

걱정하며 내려다보고 있자, 소녀의 손이 스르르 내려갔다.

그 아래에 드러난 건 엉망진창으로 일그러진 창백한 얼굴. 울먹이는 것처럼 입술이 오물거리고, 눈썹은 역팔자를 그린 채 파르르 떨린다.

최정하는 뒤통수를 얻어맞은 기분이 되었다.

‘아. 이게 설마, 설마 이게, 방금 전까진 연기였던 거야? 아무렇지 않은 척 연기하고 있다가, 숨고 난 뒤에야 감정이 폭발한 거? 그게 열일곱 살 꼬맹이의 생활연기라고?’

작품에서 연기할 때는 최정하 역시 개인적인 감정들을 누르고 가면을 쓰기도 한다. 하지만 일상에서 가까이 지내는 사람을 앞에 두고서는 그런 일에 성공해본 적이 없었다.

그에게 연기란 그런 것이었다. 사생활과 엄격히 구분된 업무의 영역.

그러나 명진아는 마치 숨 쉬는 것처럼 생활연기를 해왔던 것으로 보였다. 저렇게 울상이 될 정도의 마음을 생동감 넘치는 소녀의 모습으로 덮으면서.

‘······열네 살 아역 때하곤 비교도 안 돼. 지금 명진아 저 아이는 정말 압도적인 연기자가 돼버린 거- 아니 잠깐만. 지금 그게 중요한 게 아니지. 지금 쟤가 왜 저러는 거지? 대화하던 맥락을 생각해보면, 이찬이 정신혜를 거론한 뒤에······’

막 그렇게 생각할 무렵, 시선이 마주쳤다.

눈을 커다랗게 뜬 명진아가 얼음처럼 굳는다. 들키지 말아야 할 비밀을 들켜버린 소녀의 태도였다.

최정하는 어색하게 웃어 보이며 생각을 이었다.

‘이찬이 정신혜를 거론한 뒤에, 좋은 사람 어쩌고 말했지? 정신혜한테 자기가 좋은 사람이라는 투로. 진아는 그걸 듣다가 벌떡 일어서서 이쪽으로 도망쳤어. 그러니까······ 이찬 때문인 거야? 우리 진아가 저 자이언트 베이비를 사랑하고 있는 거야?’

초등학생일 때부터 지켜봐온 기획사 후배의 짝사랑을 깨달은 최정하는, 침을 꼴깍 삼켰다.

그런 청춘스타를 향해 명진아가 수신호를 보낸다. 입가에서 맞붙은 엄지와 검지가 서서히 수평으로 이동했다.

의역하자면, 입 나불거리지 말라는 뜻.

‘어우. 이거 내가 괜한 걸 알아버린 것 같구만.’

열심히 고개를 끄덕이며, 최정하는 그렇게 생각했다.

< 21장 - 배우 최정하 (1) > 끝

ⓒ 비벗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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