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2장 - 배우 구진철 (2) >
‘저 사람도 매는 아니었구나.’
반쯤 비운 식판을 들고 터덜터덜 걸어가는 구진철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소년은 조금 아쉬워했다.
조혁수가 좋게 본 것 같아 기대했으나 매는 아니었다. <미스 스캔들> 남태형의 연기를 최고라고 평한 걸 보면.
소년과 같은 눈썰미를 갖고 있다면, 주변과 호흡하지 못한 그 흉내에서 어긋난 느낌을 받았어야 마땅했다.
‘그렇지만 행글라이더를 탄 인간 정도는 될 거야. 몇 가지만 도와줘도 씬스틸러로 만들 수 있어. 남태형 아저씨 때에 비해서도 신혜 누나 때에 비해서도 훨씬 더 수월할 거야. 그걸로 이번 영화도 입소문에 탄력을 받을 수 있겠지.’
마케팅의 핵심은 안정록과 이찬이 될 것이다. 20세기 최고의 연기자와 21세기 최고의 천재가 붙었다는 식으로.
그런 캐치프레이즈만으로도 대중의 관심을 끄는 데에는 부족함이 없겠지만, 모두가 예상하는 성과는 화제성이 적은 법.
그렇기에 이찬은 구진철이라는 신인배우를 활용하고자 했다. 의외의 연기력에 놀란 시사회 참석자들이, 당장이라도 키보드를 잡고 싶어 안달이 나게끔 만들기 위해서.
‘조혁수의 두 아역이 한 영화에서 활약한다. 이미 기대감이 높던 이찬은 물론이고, 다양한 모습을 보여주지 못했던 구진철도 충격적인 연기력을 선보였다. 이런 식으로 화제가 되면 다들 호기심을 누르지 못할 거야. 배우들 사이의 관계에 대한 추측성 기사도 많이 나올 거고, 그 타이밍에 조혁수 아저씨한테 부탁해서 또 인터뷰 하나 터뜨리고······. 음, 너무 멀리 갔나?’
아직은 먼 이야기였다. <684>의 개봉은 빨라도 12월이니.
당장은 격주로 진행될 영화와 드라마의 촬영에 집중하는 것이 소년의 유일한 의무. 벌써부터 딴 생각을 할 건 없었다.
그렇게 생각하면서도, 이찬은 식판을 만지작거리며 공상에 빠져들었다.
언젠가 먼 미래에 그 스스로가 안정록과 같은 입지를 갖게 되었을 때. 아무한테나 연기지도를 한대도 문제없을 그 시점에, 믿음직한 배우들만 모아서 영화를 만든다면 어떨까 하고.
‘이찬 사단’이란 이름 아래 뭉친 배우들이 누구 하나 결점 없이 완벽한 인간군상을 연기해내는 영화.
거기에 칸 영화제 감독상에 빛나는 안정록이 메가폰을 잡고, 이찬을 비롯해 매와 같은 연기자들이 주연으로 나와서, 단 한 명의 형사를 위해 만들어가는 레퀴엠.
먼 일이지만, 생각하는 것만으로도 기분 좋은 이야기였다.
*
소년은 낮 촬영 내내 스탭과 단역들을 놀라게 만들었다.
배역 덕이었다. 그가 맡은 ‘강인하’ 역은 어린 나이에도 최고의 행동대장으로 활약하던 살기등등한 조폭이고, 그런 까닭에 초반의 훈련에서 돋보이는 씬이 많았다.
그리고 이찬의 신체는 그 모든 훈련에서 실제로도 다른 배우들을 압도할 만한 근력을 갖추고 있었다.
그에 비해 구진철의 ‘이동만’ 배역은 아직 단역 수준.
1일차가 다 지나갈 때까지 그가 주목받는 장면은 없다. 배우의 신체능력 역시 배역에 딱 적당한 정도였고.
그를 비롯한 조연들의 첫 촬영은, 촬영이 아닌 훈련이었다. 후반 촬영에 필수적인 전투력을 끌어올리기 위한.
그러나 2일차에는 구진철이 활약할 씬이 나온다. 그렇기에 이찬은 뭍으로 나오자마자 그를 자기 숙소로 이끌었다.
“자, 잠깐만. 내 짐은 호텔에 좀 놓고 가자.”
“됐어요. 예약 취소하고 내 방에서 자요. 일부러 넓은 데로 잡았으니까.”
그렇게 미리 얘기를 들었지만, 막상 국제공항 인근의 최고급 호텔 스위트룸에 들어선 뒤엔 황망해지지 않을 수 없었다.
“뭘 이렇게 고급스런 데를······ 너희 회산 돈도 많구나.”
“고급 세단이 기름을 많이 먹는 법이잖아요? 저도 그런 거죠. 최고급으로 대우를 안 해주면 바로 옮길 거니까. 아저씨도 마찬가지예요. 최고급으로 따라오셔야 도와드릴 거예요.”
구진철은 소년의 말이 허세일 거라고 생각했다. 업계 최고의 입지를 가진 나라엔터를 걷어차는 건 바보짓일 테니.
그렇지만 이찬의 말은 진심이었고, 그의 레슨은 폭력적이었다.
신체가 아닌 정신적인 면에서.
“눈동자! 눈동자가 떨려야 한다고요. 왜 그걸 못 해요?”
“아, 좀. 하고 있잖아. 좀······ 이렇게 하면 되지?”
“그러느라 입꼬리가 죽었잖아요? 하나가 되면 하나가 안 되고, 왜 그래요? 다시 시범 보세요. 이렇게 하시라고요.”
처음부터 그랬던 건 아니었다.
나이차를 감안한 이찬의 코칭은 부드럽게 시작됐고, 그 가르침 역시 구진철이 인정하지 않을 수 없는 깔끔한 시범에서 비롯됐기에, 하나하나 따라가는 과정이 즐겁기까지 했다.
그러나 표정연기의 디테일로 들어가자 문제가 복잡해졌다.
소년이 요구하는 건 끔찍한 수준의 리얼리티였다. 단지 연기에 필요한 팁을 몇 개 주는 게 아니라, 짧은 경력의 구진철이 어설프게 익힌 모든 습관들을 벗겨내려고 들었다.
그 과정에서는 열정 가득하던 청년조차 지쳐서 볼멘소리를 내뱉게 됐다.
“좀 그만 좀 해라. 내가 네 봉인 줄 아냐? 지적을 하더라도 말이야, 어른한테 최소한 예의는 지켜서 해야 될 거 아니냐?”
“뭐라고요? 아저씨, 방금 뭐라고 하셨어요?”
“······아냐. 아, 입이 이게 잘 안 되네.”
다만 호랑이 선생에게 닿기엔 목소리가 좀 작았다.
구진철은 그런 식으로 자존감을 위로하며 두 시간의 레슨을 수료했다. 그 뒤에야 휴식의 시간이 주어졌다.
“이 정도면 내일 씬은 잘하실 수 있을 거예요. 씻으세요.”
“어, 고맙다. 먼저 씻어. 난 담배 한 대 피우고 올게.”
“응? 흡연자셨어요? 촬영 땐 안 피우시더니?”
“짬도 안 찬 내가 아무 때나 피우긴 좀 그래서. 수풀이 많으니까, 불똥 잘못 튀면 불날까 싶기도 했고.”
“사려 깊으시네요. 같이 가요. 좀 더 봐드릴게요.”
잠깐의 정신적 휴식조차 허락지 않는 꼬마 선생에게 잠시 분노했지만, 그 마음이 표현되는 일은 없었다.
이찬은 사실 그 점에 꽤 놀라고 있었다.
‘어디까지 몰아붙여도 되나 확인하려고 강도를 점점 높인 건데, 도무지 반항을 안 하네. 단지 선배라서 그러는 건 아니고 심정적인 문제인 것 같은데. 신기해. 왜 이렇게 순종적인 걸까? 조혁수 아저씨한테 배우듯이 배우려고 하네.’
그의 짐작대로, 구진철은 이찬을 조혁수라고 생각하는 중이었다. 어린 소년의 막말을 참아내는 데에 꽤 효과적이었다.
그게 가능한 건 선후배 관계 때문만은 아니었다.
첫 번째 스승인 조혁수가 이찬의 위대함을 세뇌하듯 주입한 까닭.
‘열두 살 때에도 다른 배우들 기를 죽일 정도로 대단한 배우였다고 했지. 그리고 열넷이 된 지금은, 어쩌면 자기도 쉽게 볼 수 없는 명배우가 됐을지 모르겠다고 했고. 그런 선생이다. 반항하지 말자. 참자. 그래서 하나라도 더 배워내자. 그래야 나도 더 높은 곳으로 올라갈 수 있어. 넘기 힘든 벽을, 어쩌면 넘을 수 있을지도 모른단 말이야.’
건물 밖으로 나와 담배를 꼬나물며, 구진철은 반복해서 그렇게 생각했다. 약해지려는 마음을 다잡고자.
그런 청년에게 소년이 조심스레 물었다.
“아저씨. 괜찮겠어요? 네 시간도 못 잘 텐데.”
“어······ 괜찮아. 이 정도야 뭐.”
“존경스럽네요. 이렇게까지 안 하셔도 될 텐데.”
이렇게까지 시킨 놈이 그런 소릴 하다니- 생각하면서도, 구진철은 가벼운 침음으로 반감을 걷어냈다.
“흠. 너야말로 존경스럽다. 왜 이렇게 애를 쓰는 거야? 남의 배역까지 그렇게, 진지하게 연구를 해서는.”
그가 맡은 배역 이동만은 무수한 조연 중 한 명일 뿐이다. 그러나 캐릭터가 단순하다고 말하기는 어려웠다.
한국전쟁 때 부모가 모두 사망한 고아. 당시 어린 나이였기에 정황을 분명하게 기억하지는 못하되, 북한에 대단한 적개심을 품고 있는 인물.
그런 복잡한 배역을 이찬은 철저하게 분석했다. 대본 위에 쓰여 있던 무수한 필기를 보면, 아마도 전쟁세대를 조명한 다큐멘터리까지 섭렵한 것 같았다.
그렇게 그는 이동만의 인물상을 스스로 체화했다. 그리고 편리한 코칭을 위해 경력 없는 구진철을 배우로 추천하고, 아이라면 잠이 올 수밖에 없는 새벽까지 성심성의껏 가르쳤다.
그런 정성이 가벼운 이유로 나왔을 것 같진 않았다.
그러나 이찬의 대답은 간명하고 담담했다.
“제가 투자한 영화잖아요. 조금이라도 잘되길 바라는 거죠.”
“어······ 되게 단순하네.”
“그럼요. 열다섯 꼬맹이가 뭐 복잡한 생각을 품고 있겠어요? 전 그것보다 아저씨가 더 신기해요. 아까 레슨 하면서, 기분 좀 상하지 않았어요? 제가 말을 함부로 했잖아요.”
“······알고는 있었냐.”
“네? 뭐라고요?”
“아냐, 아무것도. 그냥······ 뭐라고 해야 할까. 나한테 연기란 건 굉장히 높은 장벽처럼 느껴지거든. 회사 식구들한테 물어보면, 처음부터 조혁수 같은 천재 아역을 맡아서 그런 거라고들 하던데, 모르겠어. 그 선배는 정말 연기를 잘하는데도 아주 사소한 것까지 체크를 하더라고. 너처럼 말이야.”
소년은 어깨를 으쓱이며 그 판단을 정정했다.
“제가 그분 따라하는 것뿐이에요. 저도 아저씨처럼 그분 아역으로 연기 시작했잖아요?”
“아, 그렇지. 아무튼 그런데, 이번 작품 잡고 난 다음에 신수영 선배가 날 불러서 네 얘기를 하셨단 말이야.”
“수영 누나가요? 뭐라고 하셨는데요?”
“완벽한 배우라고. 나이랑 무관하게 하나라도 더 배우고 싶은, 엄청난 천재라고. 배울 점이 정말 많을 거라고.”
“아하. 그 누나가 금칠을 해줬네요.”
“그분뿐만이 아니라 조혁수 선배님도 그런 얘길 했어.”
“그 아저씨야 뭐, 원래 칭찬을 잘해요.”
“말도 안 돼. 너 말고는 칭찬하는 꼴을 못 봤다. 아, 나중에 강정후 선배 얘길 꺼내긴 하던데. <형제> 촬영 같이 하고 계실 건데, 어떤 작품이 나올지 기대되네.”
그건 이찬 역시 기대하고 있는 부분이었다.
내기라는 외적인 상황을 빼고 본다면, 조혁수와 강정후라는 두 매가 투톱이 된 영화의 성과란 꽤나 흥미로운 것.
그렇지만 소년은 외적인 현실을 입에 담았다.
“경쟁작이 될 수도 있어요. 이길 생각을 하셔야죠.”
“어······ 그렇지. 사실 그쪽은 워낙 기대작이라 이기지는 못할 거라고 생각했는데, 막상 촬영 와서 생각이 바뀌었다.”
“그래요? 가망이 있을 것 같아요?”
“그래. 안정록 선생님이랑 너 연기하는 거 보니까, 이 정도면 조혁수 두 명이라도 이길 수 있지 않나 싶더라. 아, 물론 내가 감히 평가하고 그럴 입장은 아니지만. 나야 그냥, 너한테 하나라도 더 배워서 좀 더 나은 연기를 해야겠지.”
겸손한 목소리였다. 언급한 이들을 진심으로 공경하고 있음이 표정에서도 느껴졌다. 이찬까지 포함해서.
반감보다 큰 존경으로 말하는 연상의 후배 배우에게, 소년은 복잡한 표정으로 물었다.
“왜 그러는 거예요? 프로필 봤는데, 스무 살까지 연기에는 관심 없이 사셨잖아요? 너무 열정적이셔서 좀 신기해요.”
“음. 그냥, 이거라도 잘해야겠다 싶어서. 내가 좀 불량하게 살았어. 그래서 부모님 속도 많이 썩혔고. 근데 연기는, 하면서 칭찬도 많이 듣고, 체질에도 꽤 맞는 것 같단 말이야. 이거라도 잘하지 않으면 갈 데가 없겠다는······ 그런 생각이 있지. 그래서 최선을 다하려는 거야.”
모든 진심을 다 말한 건 아닌 것 같은데- 이찬은 곧바로 그렇게 느꼈다.
그렇지만 입을 열어 추궁하진 않았다. 적어도 최선을 다하겠다는 말만큼은 진심인 것이 분명했기에.
두 사람은 말없이 호텔 앞바다를 바라봤다. 담배 두 대를 연달아 피운 구진철이 올라가자고 말할 때까지.
*
훈련이 일주일째에 접어들 무렵, 684 부대원들은 마침내 암벽등반 훈련에 동원된다. 추격전 속에서 급박하게 탈출하는 상황을 가정한 방편이었다.
거기서 가장 열성적으로 훈련에 임하는 게 이동만.
북한에 강한 적개심을 품은 그는 교관들의 눈에 들고자 무리한 경사를 기어오르고, 조장인 강인하의 염려를 산다.
조원들을 독려하며 맨 밑에서 뒤따르던 강인하는 그렇기에 황급히 꼭대기까지 올라간다. 그 뒤에 로프를 고정하고 빠르게 이동만을 향해 되돌아간다.
자기 부하를 잃지 않고자 애쓰는 강인하와, 어떻게든 자력으로 올라가고자 더 서두르는 이동만의 얼굴.
수 미터 높이의 암벽에서 진행되는 클로즈업 촬영이다. 하부에 안전그물을 설치했다곤 하지만, 공포와 불안 속이기에 베테랑에게도 표정연기가 쉽지 않을 터였다.
바로 그런 상황에서 구진철의 연기력이 불을 뿜었다.
“비켜! 내가 올라갈 수 있어! 로프 매지 마, 이 새끼야!”
“이 병신새끼! 이러다 너 죽어! 뒈질려고 여기 왔냐, 이 미친 새끼야!”
“닥쳐! 조금만 더 가면 돼, 조금만······ 조금만 더 가면, 나도 씨발, 북괴 새끼들 다 잡아 족칠 수 있어. 내 힘으로 해야 돼. 우리 불쌍한 엄마아빠 죽인 놈들, 내가 다 잡아 족쳐야 된단 말이다!”
조연 중 한 명이다. 그저 684부대에 지원한 각양각색의 이유들 가운데 하나를 드러내는 에피소드일 뿐.
그렇지만 그 씬에서 구진철은 스스로 주인공이 되었다.
전날 압박식으로 진행된 레슨 덕분인지 공포도 없이 연기에만 집중할 수 있었고, 거기서 드러나는 표정연기는 이미 대가 수준인 이찬이 하나하나 잡은 포인트들이었다.
그렇기에, 모니터 앞의 계진행은 깊은 탄식을 내뱉었다.
“하······. 모든 인물이 주인공이 되는 영화. 누구 하나의 사정도 소홀히 다루지 않는 아름다운 군상극. 어쩌면 가능할지도 모르겠어. 시간관계상 하나하나를 모두 조명할 순 없겠지만, 소해진에 왕호준에 더해서, 아무도 주목하지 않던 구진철까지 저렇게 나온다면······? 이거 굉장히 멋지겠는데?”
긴 혼잣말 끝에야 컷 사인이 나왔다.
암벽에 매달린 채 구진철의 허리에 퀵드로를 매달며, 이찬은 몇 차례 고개를 갸웃거렸다.
“어째 어제보다 훨씬 더 자연스러운데요? 원래 실전에 강한 타입이에요?”
“그런 건 아닌데······ 갑자기 이입이 잘되네, 하하.”
뭔가 감추고 있는 것 같긴 했지만, 나쁜 느낌은 아니었다. 소년은 웃으며 로프를 늘어뜨렸다.
이제는 롱샷을 위해 다시 과정을 반복할 차례였다.
< 22장 - 배우 구진철 (2) > 끝
ⓒ 비벗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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