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훔치는 연기자-62화 (62/250)

< 22장 - 배우 구진철 (3.) >

“진철이에게 연기를 가르치고 있더구나.”

차를 우리며 꺼낸 안정록의 말에, 이찬은 움찔했다.

“와. 어떻게 아셨어요?”

“어떻게 알긴. 딱 봐도 네가 가르친 게 티 나는데.”

“제가 가르친 티가 나요? 그 연기에 쪼가 있었다고요?”

소년이 당황한 건 논리적인 불가해 때문이었다.

배우 이찬에게 자신만의 표현양식이란 건 존재하지 않는다. 구진철에게 가르친 것도 다큐멘터리 인터뷰를 보며 분석한 전후세대의 미세표현일 뿐, 이찬 본연의 무언가가 아니었다.

그러나 안정록은 웃으면서 고개를 흔들었다.

“찬아. 진철이 연기에서 네가 보인다는 말이 아니야. 다만 그 표현들 자체가······ 말하자면, 극사실주의였다는 거지.”

“극사실주의? 아하. 그런 말이군요.”

“하하, 바로 알아듣는구나. 그래. 그것 때문에 네가 가르쳤단 걸 알 수 있었다. 나조차 쉽지 않을 표현들이었거든.”

소년은 입술을 동그랗게 만들며 고개를 끄덕였다.

자신조차 쉽지 않을 거라고 말하는 건 일정 부분 겸양의 말이겠지만, 어쨌든 구진철 스스로는 불가능한 변태(變態)인 게 사실이었으니.

꼭 전달을 위해 표현을 과장하는 연극이 아니라고 하더라도, 대부분의 연기는 현실보다 조금 더 과장되게 마련이었다.

배역의 감정을 자기 자신에게 고스란히 옮겨 담는다면 보는 이들에게 감탄을 줄 수 있다. 그러나 리스크가 커, 미세한 몇 가지 표현만 어긋나더라도 죽도 밥도 되지 않는다.

반면 과장된 표정과 목소리 등으로 그럴싸한 감정을 꾸며내는 것은 보다 쉬웠다. 격찬까지는 못 받더라도, 감독이나 관객에게 욕은 안 먹을 수 있으니.

비유하자면 만화가들이 실제에 비해 훨씬 큰 눈을 그리는 것과 같은 이치였다. 가성비에 입각한 전략인 것.

사진과 같은 컷을 그리기 위해서는 명암이나 원근감 등 지나치게 많은 부분을 신경 써야 하는데, 그렇게 한들 노력만큼 커다란 차이가 만들어질 가능성은 낮다.

그렇기에 매 컷마다 리얼리즘을 담는 건 그저 낭비. 그와 같이 연기 역시 매 씬마다 현실을 경주하는 일은 없었다.

그러나 이찬은 달랐다. 완벽한 현실의 모사야말로 그가 가장 자신하는 능력이고, 그를 통해 아주 사소한 장면에서도 현실의 인간을 그대로 옮겨놓았다.

그게 베테랑 배우들조차 소년에게 감명을 느끼는 이유.

이찬에겐 숨 쉬는 것처럼 쉬운 일일 뿐이지만, 범인에게는 아마 사생대회에 나타난 밥 로스처럼 보일 터였다.

“흥미롭네요. 그럼 아저씨, 남태형 아저씨랑 정신혜 누나 연기는 어떠셨어요?”

“아, 그 얘길 이제야 나누게 되는구나. 작품 끝낸 시점부터 널 도무지 볼 수 없었으니 말이야.”

“이해해주세요. 아저씨랑 친해 보인 것 때문에 강정후 그 인간이 눈에 불을 켜고 있었다고요. 그리고 그 뒤로 아저씨도 많이 바빠졌잖아요? 모델 연기자들 주조연 들어가면서.”

“그래, 그랬지. 헌데 그 두 친구를 가르친 방향은 많이 달랐을 것 같다. 그렇지? 남태형에겐 하나부터 열까지 외우게 만들었고, 정신혜에겐 어느 정도 재해석의 여지를 남겨줬지?”

과연 거장다운 눈썰미였다. 소년은 찻잔을 들며 빙그레 웃었다.

“맞아요. 남태형 아저씨는 연기에 대한 개념 자체가 없었거든요. 머리가 나쁜 건 아닌데 몸이 안 따라주는 느낌? 그렇지만 신혜 누나는 그래도 가능성이 있어 보였어요. 1회용이냐 아니냐, 그런 차이였죠.”

“그랬구나. 그런데 그에 비해서 두 사람의 진전은······ 아마 네 생각과 반대로 갈지도 모르겠다.”

“예? 왜요? 신혜 누나가 지금 정체돼 있어서요? 그렇지만 그 누나, 이번 작품에서 재기할 수 있을 거예요.”

당황해서 황급히 내뱉은 말에, 안정록은 고개를 저었다.

“그런 뜻이 아니다. 신혜라는 아이도 아마 좀 더 나아질 수 있겠지. 하지만 오히려 난 남태형 그 친구가 더 기대된다는 거다. 거의 백지에 가까웠던 청년이 제 나이 또래의 그 누구도 해낼 수 없는 수준의 연기를 체현했어. 그게 단순 모사였을 뿐이라고 할지라도, 그 의미는 작지 않다. 대부분의 위대한 예술가들 역시 처음에는 거장을 모사하며 시작하거든.”

열두 살 소년의 연기에 예술계의 거장들을 빗댄 표현이다. 하지만 이찬은 그 금칠을 당연하다는 듯 받아들였다.

그 대신, 남태형의 미래 쪽에 집중했다.

“정말 그렇게 생각하세요? 그 일을 계기로 그 아저씨가 훌륭한 연기자가 될 수 있을 거라고요?”

“확신은 아니지만, 기대는 하고 있다. 결코 쉽지는 않겠지. 천재가 범상한 삶을 살게 되는 것만큼이나 확률이 낮을 거야. 하지만 네 말마따나, 연기의 개념조차 잡지 못하던 상태에서 완성형에 가까운 극사실주의 연기를 소화하지 않았겠니? 그런 집념이 있는 아이라면 또 모를 일이지. 누구도 기대하지 못했던 수준까지 성장할 수 있을지도.”

소년은 차를 한 모금 더 마시곤 입맛을 다셨다.

아무리 생각해도 그렇게는 안 될 것 같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대선배의 말에 토를 달 필요는 없을 듯했다.

“그럼······ 구진철 아저씨는 어떨까요? 이미 배경 정도는 그려져 있던 그림에 제 방식을 덧씌운 건데.”

“흠. 내가 볼 적엔 스케치에 채색을 하듯 잘 덧씌웠다고 생각했는데, 어떤 게 걱정되는 거니?”

“그냥, 혹시 신혜 누나처럼 헛바람 들어서 자기한테 안 맞는 배역을 찾아다닐까 싶어서요. 그래서 레슨 하면서도 최대한 몰아붙였어요. 자기 실력에 헛배 부르지 않게요.”

“하하하. 그 녀석, 정말 힘들었겠구나. 평소에도 사람들 마음 괴롭히곤 하는 녀석이 의도적으로 몰아붙였으니 말이야.”

“제가 뭘 어쨌다고요? 누구 괴롭힌 적 없는데.”

“때로는 존재 자체가 괴로움이 되기도 한단다. 나이를 떠나서 누구라도 질투하지 않을 수 없는 재능이니. 게다가 남들이 보기엔, 시련도 없이 데뷔하자마자 스타가 된 아이가 아니겠니? 그 현실에 저열한 감정을 품은 사람들도 있을 거야.”

이찬은 고개를 갸웃거리며 주변 사람들을 떠올려봤다.

‘드라마 같이 찍고 있는 배우들 중에······ 희재 누나는 날 거의 동경하는 사람이고, 진아 누나도 여전히 나쁜 감정은 없어 보였지. 하지만 최정하 아저씨의 경우엔 질투심 때문에 꽤 곤란해질 수도 있었어. 다행히도 호승심 쪽으로 가닥을 잡긴 했지만, 그런 게 아니었다면 적의로 발전한대도 할 말 없었지. 존재 자체로 괴로움을 준다라. 가능할 법도 한 일이야. 앞으론 정말 좋은 사람들만 잘 골라야 되겠는걸. 이젠 더 이상 귀여운 아역이 아니니까.’

아역 시절에 만난 사람들은 악의를 걱정할 필요가 없었다.

동년배들은 최고의 재능에 감탄할 정도의 순수함을 갖고 있었고, 어른들 역시 배역이 겹치지 않기에 그저 흐뭇해했다.

그러나 앞으로는 달라질 것이다. 유사한 배역에서 경쟁할 청년들 일부는 이찬의 성공을 질시하고 그를 적대할 터였다.

지금 소년의 눈앞에 그런 질시의 산증인이 앉아 있다.

“아저씨는 어땠어요? 똥구녕 대표가 많이 괴롭혔어요?”

“군영이······ 아니, 그러지 않았다. 얄미운 녀석이지만 그래도 공정한 성격이야. 그 녀석이 자기 영향력으로 괴롭히고자 했다면, 내가 지금처럼 배우로서 존경받을 수는 없었겠지.”

“그 아저씨 옹호해주는 사람은 처음 보네요.”

“어쩌겠니, 스스로 적을 만드는 성격인 것을. 하지만 내 입장에선 그럴 수가 없구나. 그 녀석의 마음을 잘 아니까.”

“으, 싫네요. 난 그 아저씨 잘 알지 말아야지.”

“하하하. 그러고 보니 너는 군영이를 혼쭐내 주겠다고 했었지? 그 계획은 잘 진행되고 있니?”

“당장은 아녜요. 별명처럼 구린 구석이 많을 줄 알았는데 생각만큼은 아니더라고요. 회사가 잘나가서 암수를 쓸 필요가 없어서 그런 걸까. 하지만 지켜보면 뭔가 나오겠죠.”

안정록은 긍정도 부정도 하지 않고 차를 한 모금 마셨다.

그 타이밍에 바깥이 소란스러워졌다. 훈련 씬을 촬영할 진흙탕 세팅이 완료됐다는 신호와 함께.

*

배우들의 연기는 카메라가 돌기 전부터 시작된다.

감독이 레디 사인을 내면, 행인 배역의 보조출연자는 ‘와리가리’라고 불리는 이동을 시작하고, 그 상황에서 카메라가 리허설을 토대로 적절한 프레임을 구성하는 동안, 주연과 조연은 액션 사인으로 시작될 움직임을 준비하는 것이다.

그 액션을 기다리며 구진철은 진흙탕을 바라봤다.

‘이찬은······ 벌써 감정을 잡았군. 표정이 바뀌었어.’

시선 끝의 소년배우는 이미 강인하가 되어 있었다. 느긋한 분위기가 사라지고 강철 같은 군기가 들어찬다.

구진철은 살짝 소름이 돋은 오른팔을 내려다봤다.

‘몇 번을 봐도 적응 안 되는 녀석이야. 롱샷에서부터 저렇게 몰입을 하고······. 자유자재로 배역을 몸에 담는 게 정말 신기하단 말이야. 이런 부류의 연기를 해본 적도 없었을 텐데.’

그에 비하면 구진철 쪽은 상황이 더 나아야 마땅했다.

<승부>에서 연기한 조혁수의 아역은 하류인생으로서 거칠게 살아온 소년. 이동만 역과 어느 정도 접점이 있다.

그렇지만 그는 이찬처럼 빠르게 배역을 받아들일 수 없었다. 자기 기억을 토대로 감정을 재구성하는 과정이 필요했다.

구진철은 자신의 부모를 떠올렸다.

그가 철없이 사고만 치고 다니던 학창시절, 소중한 장남을 뒷바라지하기 위해 힘겹게 살아왔던 두 사람.

고3 때 민사소송에 휘말린 아들의 합의금을 마련하기 위해 사채를 빌렸던 소시민들이다.

그 이후, 내외의 삶은 크게 달라졌다.

하루 벌어 하루 먹고살던 서민 집안에는 고작 500만원 돈으로 시작된 일수조차 버거운 짐이었다. 모친은 종내 고통스런 현실을 견디지 못하고 집을 떠나고 말았다.

구진철은 그녀를 원망하지 않았다. 그런 마음조차 사치로 느껴질 만큼 죄책감이 컸다.

그리고 다행히도 그의 부친은 운이 좋은 사람이었다. 과거의 인연으로 부채를 탕감하고 번듯한 회사에 나가게 되었다. IMF 때 베풀었던 작은 배려가 큰 행운으로 돌아온 것.

그러나 모친까지 돌아오지는 않았다. 소식을 끊고 잠적한 여인은 아들에게도 연락을 하지 않았고, 청년이 된 장남은 자신을 원망했다.

한 순간의 감정을 참지 못한 스스로를 저주했다.

동시에 세상을 향한 분노가 자라났다. 고작 돈 오백 때문에 가정이 무너지고 마는 현대사회가 끔찍하게 여겨졌다.

그렇기에 현실을 도피하고자 연기를 탐했다.

작품 속의 캐릭터들은 적어도 그 자신보다는 훨씬 더 성숙하고 건전했으며, 그 결말 역시 대체로 해피엔딩이었다.

그리고 구진철은 연기자로 유명해지면 모친이 어디선가 자신을 보게 될 거라고 기대했다. 마치 <미스 스캔들> 속 여주인공의 부모가 그랬던 것처럼.

언젠가 그녀를 다시 만나 사죄하기 위해서, 그는 더 뛰어난 명배우가 되기를 염원했다.

그런 청년배우의 마음은, 전쟁으로 부모를 잃고 복수를 위해 훈련을 갈구하는 이동만 배역과 상통하는 면이 있었다.

“카메라 롤!”

“교관들 준비해! 자······ 액션!”

“정신 똑바로 차려! 등이 따갑고 손이 아파도, 실전이라고 생각하고 참아! 한 사람의 실수가 동료 모두를 죽일 수 있다!”

호랑이 교관 역으로 등장하는 왕호준의 목소리는 쩌렁쩌렁했다. 그 지시에 발맞춰 부대원들이 철조망 아래를 드러누워 통과한다.

이동만은 그 안에 있지 않았다. 교관들의 뒤쪽에서 목발을 짚은 채로 동료였던 이들을 바라봤다.

모친을 잃게 만든 현실에 대한 분노와 이찬에게 배운 표정의 디테일을 뒤섞어, 구진철은 마침내 이동만이 되었다.

“교관님.”

“······이동만? 부상자가 여긴 왜 왔어? 돌아가.”

“저도 할 수 있습니다. 저도, 훈련받을 수 있습니다.”

“헛소리 하지 마. 다리 부러진 병신이 뭘 할 수 있어.”

“할 수 있습니다! 저도 할 수 있습니다! 저도 시켜주십쇼!”

“닥쳐 이 새끼야! 야, 데려가서 가둬.”

“교관님! 할 수 있습니다! 올라가야 됩니다! 저도 같이 올라가서 북괴 새끼들 쳐죽여야 됩니다! 교관님! 교관님!”

그렇게 끌려가는 이동만과 강인하의 시선이 교차한다. 시대에 내몰린 청년들 사이의 공감대가 그 씬의 기획의도였다.

롱샷과 풀샷에 이어 바스트샷 촬영까지 마친 뒤에, 진흙범벅이 된 훈련복 차림의 이찬이 구진철에게 다가왔다.

“연기 좋던데요?”

“어, 그랬어? 다행이네.”

“갑자기 추가된 씬인데, 이걸 이렇게 하시네. 제가 가르친다고 나설 필요 없었던 거 아니에요?”

“아냐. 너한테 배우면서 시야가 많이 트였어. 추가 씬도 결국 너 때문에 생긴 거나 다름없고.”

구진철은 진심으로 그렇게 생각했다.

그 혼자서는 할 수 없었을 일이었다. 아무리 감정을 유사하게 만들어본들 구진철과 이동만은 전혀 다른 인물이기에.

이찬이 눈빛과 얼굴 근육의 작은 움직임까지 지적하며 그에게서 구진철을 지워준 덕분에, 그는 새로운 캐릭터가 될 수 있었다.

“······그렇게 생각해주시면 고맙고요. 아저씨는 좋은 배우가 되실 거예요.”

“고맙다. 혹시, 형이라고 부를래?”

“싫어요. 아저씨가 편해요.”

“그런데 몇 년만 더 지나도 아저씨는 이상할 것 같은데. 아니 지금도, 네 키로 아저씨 아저씨 하니까 굉장히 어색해.”

“어색한 건 아저씨 목발 연기가 어색한 거고요. 바스트 위주라서 지적은 안 했는데, 다리 부러져보신 적 없죠? 오늘도 제 방으로 오세요. 제대로 보여드릴 테니까.”

“어······ 넌 다리 부러져본 적이 있는 거야?”

“전 없지만, 많이 봤거든요.”

병원 근처에서 노숙하던 시기에 목발 짚은 사람도 휠체어 탄 사람도 지겹도록 봐왔다. 뼈 부러진 청년의 고통을 표정에 담을 방법 역시 무궁무진하게 알고 있는 게 이찬이었다.

그렇지만 이어진 구진철의 질문에는, 곧바로 답을 내주기 힘들었다.

“찬아. 내가 이런 걸 물어보긴 좀 민망하지만······ 너무 궁금한 게 하나 있어. 나는, 너 같은 배우가 될 수 있을까? 언젠가는 너처럼 다양한 배역을 담아낼 수 있을까?”

“······글쎄요? 제가 뭐 점쟁이도 아닌데.”

“그렇지만 선배잖아. 경력으로도 실력으로도, 나보다 훨씬 낫잖아. 솔직하게 말해줬으면 좋겠다. 안 될 거라고 대답한대도 실망해서 연기 망치거나 하진 않을 거야. 그냥, 삶의 지표 같은 게 필요해서 그래.”

“삶의 지표요?”

“응. 별 건 아니지만······ 나한테는 중요한 일이 있어서.”

그 순간, 감정을 읽는 소년은 여섯 살 연상의 후배 배우로부터 너무도 익숙한 마음을 발견했다.

버림받은 인간의 애환. 그 누구보다도 더 사랑받았어야 할 사람으로부터 배제된 아이의 절망감.

“······하실 수 있을 거예요. 저보다는 좀 오래 걸리겠지만.”

“하하하. 되게 기쁜데. 고맙다, 선배. 오늘도 잘 부탁해.”

소년의 대답이 확신 없는 희망사항이었음을 청년은 알아보지 못했다.

진흙 냄새 가득한 언덕에 걸터앉은 채, 두 사람은 대화 없이 한참 바다만 바라봤다.

< 22장 - 배우 구진철 (3.) > 끝

ⓒ 비벗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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