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3장 - 배우 명진아 (2) >
아역 출신 배우들이 노출을 감행하는 건 주로 이미지 변신을 목적으로 한다.
어리고 귀여운 이미지가 붙은 채로는 성인 배역을 맡기 어려우니, 새로운 연기를 위해 대중에게 자신의 성장을 각인시킬 필요가 있다. 거기에 가장 확실한 방법이 바로 누드씬이었다.
그렇기에 소년기에 유명해진 배우들 중 몸매에 자신이 있는 축은, 때가 되면 과감하게 옷을 벗어 자신의 변화를 어필하곤 했다.
하지만 어디까지나 성인에 국한된 이야기. 남자고 여자고 20세를 넘기기 전에 몸매를 노출하는 일은 드물었다.
배우 본인과 부모가 용인했다고 하더라도, 미성년자의 노출은 보는 이들을 불편하게 만든다. 어린 마음에 내린 결심이 후회가 되는 일이 없길 바라는 마음이다.
그나마 남자배우의 상반신 누드에는 개방적인 편이지만, 그렇다고 해도 고작 15세에 이미지 변신을 목적으로 노출을 감행하는 경우는 없었다.
다만 이찬의 경우엔 어차피 <684>에서 몸을 보일 예정.
애초에 성인역 소화력을 어필하기 위해 만든 근육질이었으며, 그 영화의 기대감을 높이기 위해서라도 <어사>의 시청자들에게 맛보기를 보여줄 필요가 있었다.
그렇기에 계약서를 받자마자 셔츠를 벗어 보였던 것이다.
그 행동의 결과가, 날 풀리자마자 날아온 노출 씬 쪽대본.
몸 좋은 소년은 그 내용에 크게 만족하고 있었다.
‘이게 3화에 들어갈 장면이란 말이지? 아주 좋아. 여전히 <가을하늘>의 어린 남매를 기억하는 시청자들에게 우리 둘의 러브라인을 확 어필할 수 있겠어. 좀 고전적인 클리셰긴 하지만, 사극에서는 오히려 희소성이 있는 에피소드야. 이 씬이 방영되면 아마 난리가 나겠지. 그날 화제성은 <야인>도 <여름들판>도 감히 이 드라마를 따라오지 못할 거야.’
객관적이고 논리적인 분석. 그 안에 자신의 맨몸과 마주해 연기를 수행해야 할 명진아에 대한 배려는 없었다.
그건 천재소년으로서도 어쩔 수 없는 부분이었다.
명진아는, 이찬과 친구 관계라도 유지해야 한다는 결의 속에서, 그간 필사적으로 자신의 마음을 감춰왔다. 14세 때의 첫 만남에서조차 이찬을 속일 뻔했던 연기력으로.
거기에 어떤 악의라도 담겨 있었다면 낌새를 맡았을 것이나, 그 의도가 순수했으며, 행동은 조심 그 자체였던 것이다.
그렇게 그녀는 거짓된 친구사이를 유지할 수 있었다.
그리고 지금 명진아는, 그 갑갑하면서도 포근했던 관계가 끝날지도 모른다고 생각하는 중이었다.
‘들키지 않을 리 없어. 찬이가, 천 한 겹 안 걸치고 내 앞에서 검을 휘두른다는 거야. 그리고 내 위로 엎어지기까지 한다는 거야. 그 상황에서 내가 마음을 감출 수 있을까? 절대 불가능해. 분명히, 곧바로 알아차리고 말 거야. 그리고 그렇게 되면······ 우리 사이는 끝이야······.’
이찬의 휴식기 동안에, 명진아는 그 소년과 종종 만날 수 있었다. 때로는 분기에 한 번, 때로는 반년에 한 번씩.
그렇지만 그 2년 반의 교우관계에 정신혜는 없었다.
<가을하늘>의 마지막 촬영에서 정신혜의 마음을 밀어낸 뒤에, 소년은 단 한 차례도 그녀와 어울리지 않았다. 종방연 때에도 고개만 꾸벅하고 멀어졌던 것이다.
‘<여름들판> 오진주 역 추천하는 것조차 나한테 말을 전해달라고 부탁했지. 그런 아이인 거야. 연기에 대한 열망이 너무도 커서, 거기에 방해가 될 만한 여자애는 옆에 두지 않는 거야. 그걸 아니까 어떻게든 숨겨왔는데······ 망했어! 이런 씬이 있는 줄 알았다면, 절대 맡지 않았을 텐데. 찬이 주연 드라마의 첫 상대역이라는 말에 들떠서 혼자 좋아하지 않았을 텐데······.’
상식적으로 생각하면 무의미한 염려였다.
그녀가 맡은 배역 ‘채화’가 처음으로 ‘유관’을 이성으로 느끼게 되는 씬이니, 감춰온 진심을 다 표현한다 해도 좀 과한 연기로만 보일 터였다.
하지만 명진아가 자신의 우려를 스스로 해소할 기회는 주어지지 않았다.
이후 리허설을 진행하며 이찬이 마침내 상체를 내보인 순간, 논리적인 생각이 모두 사라져버린 탓이었다.
“자, 다들 봐봐! 죽이지? 떡 벌어진 대흉근에 삼각근, 쫙쫙 갈라진 복직근에 복사근까지. 저 정도로 단련하려면 어른들도 몇 년은 운동만 해야 할 거야. 열다섯에 저렇게 된 건 타고난 골격에 노력이 더해진 결과지. 다들 우리 주연배우한테 박수!”
메이킹 카메라를 의식해 너스레 떠는 주동한 감독의 말에 스탭들이 키득거리며 웃었다. 그러나 소년의 몸에 고정된 눈길을 떼는 사람은 드물었다.
특히 명진아는, 눈앞에서 꿈틀거리는 구릿빛 근육에 거의 넋을 놓았다.
“아······.”
“누나?”
“아······.”
“진아 누나, 어딜 보는 거야?”
“아앗! 미, 미안해, 찬아. 안 그럴게.”
“뭘 안 그래? 됐고, 빨리 익숙해져. 아이 같지 않아서 이상하게 보이겠지만, 이런 아이도 있는 법이라고. 집중 못해서 자꾸 NG 내면 나 감기 걸릴지도 몰라.”
경험해본 적도 없는 감기를 입에 담자, 이내 소녀의 표정이 결연해졌다.
“아, 알겠어. 그러면 안 되지. 너 지금도, 영화랑 드라마 병행한다고 고생하고 있는데, 아프기까지 하면 안 돼.”
“그렇지. 우리 누나 착하네. 그럼 리허설 이어가보자. 내 탈의에 부끄러워하는 표정······은 잘하고 있고, 아까보다 한참 소극적인 태도로 검 맞대는 거야. 자, 들어간다.”
소년이 검을 들자, 대흉근과 이두박근이 춤을 췄다.
그 현란한 살빛 오케스트라에 당황한 나머지, 명진아는 약속된 액션을 취하지 못했다. 금세 목 앞에 칼이 드리워진다.
상대역이 이찬이 아니었다면 다쳤을지도 모를 상황이었다.
“······누나, 이러면 곤란해. 왜 이렇게 집중을 못해?”
“아, 미, 미안해. 죄송합니다! 제대로 하겠습니다!”
“어, 그래. 두 사람, 준비 되면 리허설 이어가라.”
심호흡 끝에 재개된 리허설에서 그녀는 간신히 칼을 맞댈 수 있었다. 근 몇 달 동안 반복해온 연습량 덕분이었다.
그러나 다음 순간 소년의 달콤한 목소리가 귓가에 닿았다.
“헉, 헉. 어떠냐? 이 정도면 꽤 예리하지 않았느냐?”
“꽤, 꽤 잘하셨습니다. 하지만 그 정도론, 멀었사옵니다.”
명진아는 자신의 연기에 확신을 가질 수 없었다.
눈앞에 온통 이찬만이 서 있다. 아주 작은 틈도 없이, 실미도의 햇볕에 탄 강철 같은 몸이 꿈틀대며 눈앞을 수놓았다.
도무지 정신을 차릴 수가 없는 상황에서 소녀는 이성이 아닌 본능으로 대사를 내뱉어야 했다.
그 연기 아닌 연기에 주동한이 탄식을 내뱉었다.
“맙소사······ 쟤 왜 저렇게 잘하냐? 희재야, 네가 보기에도 대단하지 않아? 리허설인데도 연기라는 생각이 전혀 안 들잖아? 부끄러워서 시선 피하는 게 정말 실제상황처럼 느껴져. 연습할 시간도 별로 없었는데, 정말 대단하지?”
“네, 네.”
“······넌 촬영 응원하러 왔으면 모니터를 좀 봐라. 그렇게 뚫어져라 보다가 애기 몸 닳겠다.”
“네, 네.”
리허설 뒤에 이어진 롱샷 촬영에서도 감독은 연신 감탄했다.
산자락의 쌀쌀한 바람을 느끼지도 못하는 듯 열기까지 내뿜는 이찬의 액션 연기야 이미 예상한 바였지만, 그 앞에서 인위적인 기색 하나 없이 넘어지는 소녀는, 압권이었다.
“커엇! 오케이! 지금 아주 좋았어. 이대로만 해주면 오늘도 해 지기 전에 촬영 끝나겠다. 둘, 와서 모니터 확인해.”
주동한이 그렇게 소리친 약 8초간.
이찬은 자신의 몸 아래에 누워 있는 명진아를 노려봤다.
그녀의 새하얀 얼굴 위로 선명하게 자리한 핏빛 홍조를.
“······누나, 설마.”
“아, 아, 자, 일어나자! 옷 더러워진단 말이야.”
풀쩍 일어서서 손을 잡아주려 했지만, 소녀는 그 손을 피하고 등을 지며 일어섰다.
그러나 곧 소년이 그 팔을 잡아 돌려세웠다. 그러면서 눈으로는 붐마이크를 좇았다.
음향팀 보조는 스탭들 틈으로 빠져나가는 중이었다.
“진아 누나. 설마 아니지? 연기였지? 진짜 설렌 거 아니지?”
“아하하, 무슨 말이야? 당연히, 연기지.”
“리허설 땐 당황해서 그런가보다 했는데, 좀 이상해. 누나, 평소답지 않아. 진정하질 못하고 계속 이상한 표정 짓고······ 의심스러워.”
비수처럼 날카롭게 파고드는 추궁. 그 순간, 명진아의 순진한 뇌가 유례없이 빠르게 회전했다.
명재경각에야 드러나곤 하는 초인적인 정신력이, 마침내 그녀답지 않은 얄팍한 계책 하나를 떠올려냈다.
“내, 내가, 근육을 좋아해.”
“······그래?”
“으, 응. 부끄러워서 말 못했는데, 미스터코리아 이런 대회도 정말 열심히 보고······ 그런단 말이야. 너 때문이 아니야. 그냥 근육이 좋아서 설렌 거야. 그러니까 너, 착각하지 마?”
“근육이 좋다 이거지? 참 취향 특이하네.”
“뭐, 뭐가? 되게 자연스러운 거거든? 너는 그럼 여자 몸매 안 보니?”
“어? 아, 나도 많이 보겠네. 신수영 누나 보면서 눈이 높아졌을 테니까. 아무튼 그런 거면 됐어. 계속 잘해줘, 누나.”
납득했다는 듯 돌아선 이찬의 뒷모습을 멍하니 보며, 명진아는 생각했다.
‘몸매를······ 많이 보는구나.’
거의 20번 넘게 본 <미스 스캔들> 속 신수영의 실루엣이 떠오른다. 나올 데는 확실히 나왔으나 들어갈 데는 뚜렷하게 들어간, 여자가 봐도 신비로웠던 그 몸매.
다음으로 시선을 내려 자신의 몸을 바라봤다.
열일곱 소녀는, 여전히 작고 귀여웠다.
‘······안 돼. 역시 안 돼. 절대로 들키면 안 돼. 끝까지 숨겨서, 친구로라도 오래 찬이 곁에 있을 거야. 여자친구가 못 되면 어때? 이렇게 작품 속에서 커플이 될 수 있는데. 그러니까, 찬이 첫 번째 여자친구는 바로 나인 거잖아? 그거면 충분해. 나는······ 욕심 부리지 않을 거야. 놓치고 싶지 않으니까.’
스스로를 위로하는 생각.
현실을 자각하고 나면 허탈함만이 남게 될, 서글픈 다짐이었다.
*
‘무슨 그런 귀여운 거짓말을 하냐. 사람 무안하게.’
모니터 앞에서 다시 한 번 소녀의 연기를 확인하며, 이찬은 그렇게 생각했다.
소년을 속인다는 건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그간 놀랍도록 잘해온 명진아였지만, 한번 의심을 하고 나자 모든 증거들이 금세 포착되었던 것이다.
‘거짓말까지 하면서 변명한 걸 보면 스스로도 그 마음을 알고 있는 것 같았지. 나도 참 멍청하네. 몇 번이나 붙는 씬을 찍었으면서 이제야 이걸 깨닫다니······ 아니······ 그게 아니라 진아 누나가 대단한 건가. 내가 보고 있지 않을 때조차 행동거지를 조심해왔던 거니까. 대단한 정신력이야, 진짜.’
일찍이 처음 만났을 때에 느낀 바 있었다. 소녀는, 안정록이 말한 ‘매’는 아니었지만, 그 이상으로 독특한 연기자였다.
그녀는 정신혜 앞에서 이찬을 옹호하기 위해 자신을 완전히 바꿔냈다. 떨리는 손을 맞잡고 있지 않았다면, 이찬조차 그것이 연기임을 알아채지 못했을 터였다.
그러니 공교로운 일이었다. 소년이 소녀를 높이 샀던 게 바로 그런 마음 때문이었으니.
강인한 정신. 소년과 같은 기이한 재능이 없음에도, 의지 하나만으로 엄격한 선배를 연기해냈던 그 따뜻함.
그 마음이 이찬의 무시무시한 눈조차 피해갈 만한 연기를 완성해냈다.
천부적인 재능으로 신체를 통제함으로써 타인을 훔쳐내는 소년과는 달리, 그녀는 그저 의지 하나로 무의식적 재능을 끌어내 캐릭터를 완성하곤 했던 것이다.
‘그게 자유자재로 나오지 않는다는 점에서 한계가 있긴 했지만, 시간이 지나 경험이 쌓이면 해결될 일 같았어. 그래서 이 누나 연기에는 입을 대지 않았지. 그래도 아직은 한참 먼 일이라고 생각했는데······ 나조차 감쪽같이 속고 있었던 거야. 이미 이 누나는 괴물이야. 그럴 만한 마음만 생긴다면, 나만큼 정교하게 배역을 만들어낼 수 있을지도 몰라.’
그렇게 생각하고 보니 절로 한숨이 나왔다.
“응? 찬아, 왜 그러냐? 뭐 마음에 안 드는 그림 있어?”
“예? 아니에요. 잘 나온 것 같네요.”
“그렇지? 야, 진아가 정말 걸작이었어. 이 넘어지는 거 봐라. 의도한 게 아니라 정말로 실수로 넘어진 것 같잖아?”
의도한 게 아니라 정말로 실수였을 텐데- 생각하면서도, 이찬은 웃으며 고개를 끄덕여 보였다.
“맞아요. 상대역이 너무 잘해주니까 저까지 힘이 나요.”
“그렇지? 진아야, 정말 잘했다. 바로 바스트 딸 건데, 넘어지는 씬은 롱샷으로 뽑을 테니까 이번엔 풀썩 안 쓰러져도 괜찮아. 등은 괜찮니?”
“괜찮습니다, 감독님!”
“다행이네. 바닥을 고른다고 골랐는데, 고생시킨 것 같아서 미안하다. 앞으로는 이렇게 거친 씬 없을 거야.”
거친 걸로 말하자면 더한 장면들도 많다. 다만 그쪽은 주로 카메라워크를 활용해 그럴싸하게 묘사할 예정이었다.
감독의 칭찬과 걱정 속에서 모니터를 마치고 마당으로 돌아오며, 명진아는 애써 밝게 웃어 보였다.
“나 진짜 잘한 것 같아. 그치? 이제 옛날 명진아가 아니지?”
“그러네. 옛날 명진아가 아니야.”
“히힛. 그래도 너 따라가려면 먼 것 같아. 넌 정말, 언제나 존경스러워. 그, 근육도 그렇고. 정말 멋있단 말이야. 마, 만져보고 싶지만 참을게. 너 기분 나쁠 테니까.”
명진아는 여전히 근육에 열광하는 소녀라는 배역을 연기하고 있었다.
그 가상한 노력을 바라보며, 이찬은 생각했다.
‘여배우니까, 열애설이 많이 걱정이 되겠지. 그래서 저렇게 참고 있는 거야. 신혜 누나 때처럼 대뜸 고백을 했다면, 독립 때 이적시켜야 하는 내 입장에선, 받아주지 않을 도리가 없었을 테지만······ 저렇게 힘겹게 참고 있는 건 나도 배려를 해줘야지. 그래, 철저하게 모른 척해주자. 그런 거야 쉽고도 쉽지. 누나 말대로 난 정말 존경스러운 연기자니까.’
따뜻한 마음으로 위해주는 생각.
명진아가 알았다면 크게 놀라 엉엉 울었을, 오해 속의 다짐이었다.
< 23장 - 배우 명진아 (2) > 끝
ⓒ 비벗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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