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5장 - 앵커 박재희 (2) >
<어사>의 1화는 평균시청률 17.2%를 기록했다.
초회에서 30%를 돌파해버린 이찬과 명진아의 전작 <가을하늘>에 한참 못 미치는 지표.
그러나 오히려 그때보다도 더욱 충격적인 결과였다.
“조혁수에 이소연이라는 흥행카드들이 투입되고 3사 신규편성에 맞춰 1화 선보였던 <가을하늘> 때하곤, 상황이 전혀 다른 거지. 먼저 시작한 <여름들판>이 30%대고 <야인>도 20%대를 고수하고 있던 상황에, 등장하자마자 그 둘 시청률을 5% 가까이 끌어온 거니까 말이야. 최고의 스타트야.”
정창영의 말에 이찬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 말대로였다. 스타PD 심성윤의 기대작이나 1년 가까이 이어진 인기 대하드라마를 단번에 누르지 못했다고 해서 초조해할 이유는 없었다. 대결은 이제부터가 시작이니까.
그런 의미에서 그날의 일정이 특히 중요했다.
“촬영은 잘 진행되고 있대요? 혹시 연장이 된다거나.”
“취재팀 도착할 때쯤에는 확실히 끝날 거라고 하더라. 신혜는 거기서 분장한 상태 그대로 합류할 거고, 진아도 안 늦게 도착할 거고. 하여튼 심성윤 PD님도 정말 대인배란 말이지. 동시간대 경쟁작 찍고 있는 주연들이 촬영장 와서 합동인터뷰 찍는 걸 허락해주고 말이야.”
“오히려 호재라고 생각했을 수도 있죠. 우리 쪽이랑 연합해서 화제성 높이면, <야인> 쪽 시청자가 움직일 테니까.”
“하하, 그렇게 볼 수도 있긴 하지. 하지만 내 생각엔, 개인적으로도 오랜만에 너희가 모인 걸 보고 싶었던 거 아닌가 싶다. <가을하늘> 때 그렇게 너흴 좋아하셨잖아?”
열린 전작제인 까닭에 아직도 간헐적으로 후반부 촬영이 진행되고 있는 <여름들판>. 오늘 이찬과 명진아는 그 촬영장에 방문해, ‘오진주’ 역의 정신혜와 합동인터뷰를 찍게 된다.
월화 미니시리즈 경쟁을 벌이는 두 드라마의 주역이자, <가을하늘>에서 아역으로서 이름을 날렸던 세 배우의 재회.
그 아이템을 놓고 두 방송사의 연예정보 프로그램이 컬래버레이션 인터뷰를 진행하게 된 것이다.
그 기획을, 심성윤은 별 고민도 없이 받아들였다고 했다. 자칫하면 시청자들을 빼앗길 수도 있는 일인데도.
“애들을 좋아하시는 것 같긴 했죠. 아직도 독신이죠?”
“어, 그렇지. 연애도 안 하시는 것 같다던데.”
“자기가 배우인 줄 아시나. 얼른 좋은 인연 찾으실 것이지.”
“하하하. 그러게나 말이다. 안쓰러운 분이야.”
그렇게 차에서는 뒷담화를 나눴지만, <여름들판> 촬영장에 도착한 이찬은 심성윤을 보며 진심으로 반가움을 느꼈다.
한국드라마사에 손꼽히는 아역 씬을 완성해 그에게 명성을 안겨준 사람이다. 계절 연작 2부에 해당하는 <겨울바다>로 아시아 전역에 이름을 떨친 명감독이기도 하고.
우호적인 관계를 만들 이유는 넘쳐났다.
“오랜만이에요, PD님. 잘 지내셨어요?”
“야, 우리 찬이! 이게 얼마만이냐? 너는 인마, 명절 때만 달랑 문자 몇 개 보내고 말이야.”
“나중에 PD님 드라마 출연하려면 학력도 필요할 것 같아서 열심히 공부했다고요. 엘리트 주인공만 자꾸 쓰시니까.”
“오! 혹시 서울대학교도 들어갈 거니? 내 후배가 되려나?”
“그건 아니지만요. 기회비용이 너무 아까워요.”
“하하하. 그래, 벌써 주연작 맡으면서 톱스타 길 걷기 시작한 네가 굳이 공부에 매진할 필요는 없지.”
이찬 이상으로 환하게 웃으며 반긴 심성윤이었지만, 시간을 오래 내주지는 못했다. 진행 중인 촬영의 총책임자인 까닭.
이찬 역시 이후 여기저기 돌아다니며 3년 전에 함께 작업했던 스탭들과 인사를 나눠야 했다.
그 뒤에야 집안 씬의 촬영을 마치고 모니터를 확인하러 온 강정후와 정신혜를 마주했다.
“안녕하세요, 강정후 선배님.”
“일찍 왔네? 꽤 한가한 모양이구나?”
“아녜요. 이거 끝나면 또 촬영이에요. 안녕, 신혜 누나.”
거의 3년 만의 재회.
정신혜는 턱을 잔뜩 치켜들고 이찬의 인사를 받았다.
“안녕. 너 활약하고 있더라? 복귀하자마자 주연이라니.”
“네. 어제 우리 첫방 봤어요?”
“설마. 인터넷으로 반응만 봤어. 호평이 많긴 하던데, 그래도 우리 드라마가 더 잘될 거야. 그래서 나도 조만간 주연 맡아서, 너보다 훨씬 유명해질 거고. 기대해, 이찬.”
당장은 도저히 가망 없는 미래의 일을 논한다. 한때 첫키스를 빼앗으며 고백했던 소년을 향해, 재회의 감회를 나누지도 않고 대뜸 하는 말이었다.
‘여전하네. 신기할 정도의 나르시스트야. 이렇게까지 자기애가 강할 수가 있다니, 감탄밖에 안 나온다니까.’
싫은 느낌은 아니었다. 악의보다도 가식을 싫어하는 이찬에게 있어서, 어깨를 당당히 펴고 속마음을 고스란히 입에 담는 소녀는 그저 귀엽게만 보였다.
올려다보지 않고자 깨금발을 디디는 모습이 특히 그랬다.
“알았어요, 꼬마 선배님. 나한테 신경 쓰지 말고 촬영 잘 마쳐요. 우리 인터뷰 밀리면 안 되니까.”
“당연하지. 잘 보고 있어? 누나가 명연기를 보여줄게.”
이후 정신혜는 심기일전하여 연기에 집중했지만, 이찬이 그 모습을 잘 볼 수는 없었다. 금세 명진아와 인터뷰 팀이 도착해 인서트 컷을 찍기 시작한 까닭.
옛 동료인 정신혜의 연기를 바라보는 이찬과 명진아의 모습이 카메라에 담기고, 이후 개별 인터뷰가 진행됐다.
그 뒤에야 세 사람이 한 자리에 모이게 되었다.
“안녕하세요, 진아 선배. 오랜만이에요.”
“반가워, 신헤야. 요즘 연기가 더 많이 늘었더라? 동시간대라서 본방송은 못 봐도, 다시보기로 계속 볼 생각이야.”
정신혜의 시선이 이찬을 향했다. 너도 한 마디 하라는 듯이.
“난 못 봐요. 아직도 영화 찍는 중이라고요.”
“치······ 나중에 다시보기 몰아서 봐.”
“시간 되면요.”
정 없는 대화를 나누면서도 얼굴은 환하게 웃는 두 사람을 보며, 명진아는 마음이 복잡해졌다.
‘······이상하네? 양호실에서 고백 거절한 뒤로 거의 처음 대화하는 거니까, 되게 어색할 거라고 생각했는데. 그런데 둘 다 참 편해 보여. 따뜻한 말을 하지는 않으면서도, 서로의 마음을 잘 알고 있는 듯한······. 혹시 찬이는, 어쩌면 신혜랑 참 잘 어울리는 게 아닐까? 혹시 나만 겉돌고 있었던 거 아냐?’
인터뷰가 모두 끝났을 때에도 두 사람은 미리 짠 듯이 손인사만 하고 돌아섰다. 마치 격식을 갖출 필요가 없는 십년지기 친구처럼 보였다.
주차장으로 향하는 길에 두 사람의 관계에 대해 캐물은 건, 그 묘한 박탈감 때문이었다.
“찬아. 신혜랑 너랑은, 아주 오랜만에 본 거지?”
“그렇지. 왜?”
“그런데, 참 되게 자주 본 사이 같았어······.”
“흠. 성격이 비슷해서 그런가?”
“비슷해? 너희 둘이? 아닌데······ 전혀 다른데?”
“비슷해. 저렇게 남들 신경 안 쓰고 제멋대로 사는 사람, 좋아하거든. 한때는 저런 게 롤모델이기도 했고.”
“좋······ 롤모델? 신혜가?”
“신혜 누나 말고, 집시가. 이제는 아니지만.”
추상적으로만 알고 있던 집시와 정신혜의 상관관계에 대해서 명진아가 고민하기 시작할 무렵이었다.
거리를 두고 뒤따르던 정창영이 두 사람을 불렀다. 그리고 최신형 컬러 핸드폰에 염수진이 mms로 전송해준 사진을 보여줬다.
“이게 뭐예요? 신문 같네요?”
“인터넷 신문이야. 위에 제호 봐라.”
“어사신보······?”
“밑으로 내려서 내용도 읽어봐. 잘 안 보이는데, 이렇게 OK 버튼을 누르면 확대가······ 자. 이런 식이야.”
「 어사신보 창간호 / 포도청 다모(가 되고 싶은) 양오리
‘충격!’ 암행어사 유관 “나를 ᄄᆞ르거라”
<사진 - 초절정 미남이자 최연소 장원급제자인 유관이 좌포청 다모 채화의 섬섬옥수를 쥐고 있소.(제공:엠에스비)>
대과에 장원급제하고도, 상감의 밀명으로 벼슬 없이 암행어사가 되어 고향에 돌아가게 된 유관 도령. 그가 안개 낀 호숫가에서 벚꽃비를 맞으며 채화에게 건넨 한마디가 화제요.
“그렇다면, 명하마. 나를 따르거라.”
이 말에 규방의 처녀들이 모두 무릎을 꿇고 따르겠사옵니다 외친 소리가, 이날 한성 땅을 크게 울렸다고 전해지오. 」
이리저리 확대하며 본 결과, 오직 드라마 내용을 통해 써내려간 창작 신문이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이찬과 명진아가 고개를 들자 정창영은 핸드폰을 조작해 몇 개의 사진을 더 보여줬다.
그 또한 비슷하게 작중의 내용을 조명하거나 이후의 전개를 예측하는 기사였는데, 필력이 좋고 디자인이 깔끔해 보는 내내 감탄이 나왔다.
“재밌네요. MSB에서 이번 드라마에 기대가 큰가봐요.”
“응? 아이고, 아니야. 이거 시청자가 만든 거라더라. 인터넷 홈페이지에서 조회수가 벌써 3만 건을 넘겼어. 원래도 개인 페이지에 장난스런 신문 올리던 네티즌이라던데, <어사> 첫방 보고 반해버려서, 앞으로 방영일마다 이렇게 어사신보를 만들어서 올릴 거래. 이른바 2차창작이라는 거지!”
2차창작. 양방향 소통 매체인 인터넷에서 유행하는 그 문화는, 단방향의 TV 프로그램을 새로운 방식으로 감상하며 몰입을 지속할 수 있도록 도와준다.
그런 게 1화 방영 직후부터 만들어졌다는 건 대단히 놀랍고 반가운 소식이었다.
“신기하네요. 가능성은 있다고 봤지만, 시간이 꽤 걸릴 줄 알았는데. 이거 만든 사람은 뭐 하는 사람일까요?”
“글쎄? 모르긴 몰라도, 글 쓴 거 보면 나이도 있고 공부도 꽤 한 사람일 거다. 그러니까 이게 바로 ‘어사폐인’이라는 거 아니겠니? 너희 둘의 로맨스가 1화부터 네티즌들의 마음을 확 사로잡아서, 멀쩡한 직장인을 폐인으로 만들어버린 거야.”
정창영의 말에, 명진아가 얼굴을 붉히며 딴청을 피웠고, 이찬은 픽 웃으며 고개를 흔들었다.
*
폐인.
보통 질병이나 중독 등으로 사회생활이 불가능해진 사람을 일컫는 용어로, 일반적으로는 부정적인 어휘였다.
그러나 인터넷 세대에게는 특별한 함의를 가진다. 실제로 일상생활을 못하는 것이 아니라, 다른 일에 신경을 쓰지 못할 정도로 특정한 취미에 푹 빠진 사람이라는 뜻으로.
전용(轉用)의 시초는 ‘디시인사이드’였다.
당초 사진의 공유를 위한 플랫폼이었지만 이내 거대 커뮤니티로 발전한 그 사이트에서, 신세대들은 ‘아햏햏’을 외치며 스스로를 ‘디시폐인’이라 불렀다.
일종의 자학개그였다. 스스로가 현실이 아닌 사이버 커뮤니티에 그만큼 집착하고 있다는 인식을 드러내는.
그랬던 단어가 점차 일반인에게도 전파되기 시작한 건 2002년작 MSB 드라마인 <제멋대로>가 계기였다.
배우들의 압도적인 연기력과 신파를 신파답지 않게 만드는 독특한 플롯에 청년층이 열광하게 됐는데, 그중 일부가 디시폐인처럼 스스로를 ‘제멋폐인’이라 칭했던 것이다.
비록 소수의 팬층일 뿐이었지만, 이후 미디어 업계에서 폐인이라는 용어가 유행처럼 번지기 시작했다.
그중 ‘양오리’는 원래 ‘컴폐인’으로 잘 알려진 인물이었다.
청소년기에 접한 PC에 큰 충격을 느끼고, 이후 통신과 인터넷으로 지속적인 활동을 이어온 까닭.
거기에 자신의 전공인 신문방송학을 엮어 한가할 때마다 반쯤 농담조의 창작 신문을 만들어 올리곤 했다.
보람 있는 취미생활이었다. 딱딱한 기성 신문과 달리 어려운 내용을 쉽게 풀어주는 인터넷 신문에, 젊은 네티즌들이 몰려와 응원하는 댓글을 많이 남겼던 것이다.
그렇기에 <어사>의 첫 방송을 본 뒤에 ‘어사신보’를 만들기로 결심한 건 당연한 귀결이었다.
독특한 장르라서 널리 사랑받기 힘든 그 작품을, 자신의 특기가 조금쯤 도울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기에.
그렇지만 그런 그녀도 그 실제 파장을 예상하지는 못했다.
설마 이튿날의 <뉴스데스크> 편집회의에서 자신이 만든 2차창작물이 거론될 거라고는, 꿈에서도 생각지 못했던 것이다.
“아, 재희 씨 혹시 그거 아나? 오 기자가 재밌는 걸 또 하나 발견했던데? 어사신보라고.”
주요 안건과 취재결과를 공유하고 나서, 향후 취재기자들에게 지시할 주변 뉴스의 안건을 결정하는 토의의 장. 그곳에서 앵커 엄경신이 어사신보를 언급했다.
박재희는 뒤통수를 맞은 기분으로 되물어야 했다.
“어, 어사신보요?”
“그래. 신작 드라마 <어사> 있잖아? 혹시 봤어?”
“모, 못 봤어요. 어젠 몸이 안 좋아서요.”
“아, 그랬지 참. 그게 첫방부터 아주 반응이 좋은데, 특히나 네티즌 사이에서 핫이슈인 모양이야. 어제 방영 직후부터 시청자게시판에 불이 났다고 하더라고. 그런 와중에 드라마 내용에 기초해서 만든 가상신문까지 나왔다는 거야.”
“아, 네······ 참 흥미롭네요.”
“그렇지? 열다섯 살 아이가 주연이라고 해서 난 별로 기대를 안 했는데, 네티즌 반응 보면 완성도도 꽤 높은 모양이야. 이게 잘돼서······ 계속 화제성이 있다고 하면, 이 어사신보를 만든 사람을 취재해보는 것도 좋을 것 같아. 왜, 이런 사람을 폐인이라고 하지? 예전 ‘제멋폐인’ 때처럼 우리도 ‘어사폐인’을 조명하면, 꽤 재밌는 기획이 될지도 몰라.”
박재희는 식은땀이 나고 있음을 느꼈다. 하지만 선배 앵커의 따뜻한 시선 속에서 손수건을 꺼낼 수는 없었다.
“그, 그렇지만, 이슈까지 갈 만한 일인지는 아직 알 수 없잖아요? 시청률도 그렇고, 아직은 첫방이니까······.”
“하하, 맞는 말이야. 재희 씨가 이제 감을 좀 잡아가나봐? 아직은 알 수 없고, 지켜봐야 될 일이지. 하지만 개인적으로는 잘됐으면 좋겠어. 꼭 우리 드라마여서가 아니라······ 좋은 문화상품은 힘든 사람들에게 큰 위로가 돼주기도 하니까.”
맞는 말이라고 박재희는 생각했다. 그녀 역시 힘든 수습 기간에 이찬의 연기를 떠올리며 심신의 안정을 되찾곤 했다.
“혹시 모르니까 오 기자한테 취재요청 보내두게 하려고. 아이템은 쓸지 안 쓸지 모르지만, 일단 좋은 관계 만들어서 나쁠 건 없으니까. 그런 관심에 본인도 더 힘을 내서 멋있는 후속작들을 만들어낼 수도 있겠고.”
맞는 말이라고 박재희는 생각했다. 존경하는 선배인 엄경신의 입에서 자신의 창작물이 나온 것만으로도, 당장 무수한 가상 기사들을 만들어낼 의욕이 솟구치고 있다.
‘하지만······ 정말 인터뷰를 할 수는······ 없겠지? 너무 이상하잖아. 저녁뉴스 앵커가 가상신문을 만들어서 올리다니, 전혀 인텔리하지 않고 이상해 보일 텐데······.’
그런 생각을 하며 앵커룸으로 가서 사설 메일함을 확인한 뒤, 박재희는 편집회의 때 이상으로 당황하고 말았다.
「 msb_odk : 안녕하세요^_^ MSB 오단규라고 합니다
nara-chang0 : 이찬이에요. 어사신보 잘 읽었어요. 」
오단규 취재기자의 메일 따위는 눈꺼풀로도 보이지 않았다.
그 아래, 나라엔터 매니저의 메일로 보낸 듯한 이찬의 메일만이, 박재희의 모든 시각을 빼앗고 있었다.
< 25장 - 앵커 박재희 (2) > 끝
ⓒ 비벗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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