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5장 - 앵커 박재희 (3.) >
「 제목 : 이찬이에요. 어사신보 잘 읽었어요.
이렇게 갑자기 연락드려서 놀라셨을까 걱정되네요. 이제 막 첫 방송 나간 드라마에 창작 신문을 만들어주셔서 감사한 마음에 이메일 드리게 됐어요.
저희 드라마가 독특한 컨셉 때문에 대중들에게 어필하지 못할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는데, 양오리님처럼 좋게 봐주신 분들이 계신 덕분에 출연진들도 무척 기뻐하고 있어요.
앞으로도 좋은 활동 많이 부탁드려요. 매번 챙겨보고, 저도 가끔 댓글 달고 할게요. 」
‘양오리’ 박재희는 입술을 오물거렸다. 눈에서 뜨거운 눈물이 터져 나올 뻔했는데, 간신히 천장을 보며 참아냈다.
‘찬이가 나한테 메일을 해주다니. 평생 이런 일은 없을 거라고 생각했는데, 너무 행복해. 어쩌면 이렇게 마음씨도 따뜻하고 고운지······ 역시 우리 찬이가 최고야!’
사실은 화제성에 도움이 되는 2차창작물의 지속적인 연재를 독려하고자 가식적으로 써 보낸 메일이지만, 그를 알 리 없는 박재희에겐 감동적일 수밖에 없었다.
자신이 몹시 좋아하는 유명인에게 인정받는 것.
팬으로서 그보다 큰 기쁨이 있을 리 없다. 메일을 본 뒤 창작의욕이 몇 배로 치솟은 것도 당연한 일이었다.
“오늘도 수고 많으셨습니다. 선배님, 제가 집에 중요한 일이 있어서 먼저 들어가려고 하는데, 괜찮을까요?”
어제에 이어 한층 집중력 있는 모습으로 저녁뉴스를 마친 뒤, 박재희는 엄경신에게 그렇게 말했다.
평소 소극적이고 조심스럽던 모습을 떠올릴 수 없는 패기. 17년차 앵커도 그 변화에는 놀랄 수밖에 없었다.
“어······ 재희 씨, 혹시 안 좋은 일이야?”
“아닙니다. 좋은 일입니다. 조만간 보여드릴 수 있을 것 같아요. 아마······ 부서는 다를 수도 있겠지만요······.”
“그래? 무슨 일인지 굉장히 궁금하네. 알겠어, 가봐.”
“감사합니다!”
재빨리 운동화로 갈아신고 젖 먹던 힘까지 다해 집으로 뛰어간 박재희는, 그날도 무사히 <어사>의 본방송을 시청했다.
1화의 첫 씬처럼 획기적이진 않지만, 여전히 매력 넘치는 인물들. 그리고 그 배역을 120% 살려내는 명배우들.
2화 역시 감동의 향연이었다.
[나리! 나리, 정신 차리십시오!]
[······수옥이냐······?]
[예? 소녀 채화입니다. 정신이 드십니까?]
[수옥아······ 미안하다. 내가 널 지켜주지 못해, 미안하다.]
단 두 씬 등장했을 뿐이지만, 임희재의 화려한 미모와 강렬한 액션으로 주목받았던 역적도당의 검객 수옥. 유관이 된 이찬이 그런 이름을 입에 담으며 채화의 품에 쓰러진다.
기존의 인물관계를 뒤집으며 3화를 기대하게 만들 암시.
그 시나리오에, 박재희의 창작욕은 하늘까지 솟구쳤다.
*
<어사>는 화요일의 2화에서 평균 19.8%까지 시청률을 끌어올렸다. <여름들판>의 31%와 <야인>의 20.6%에 이은 3위이긴 하지만, 2위와의 격차는 극미해졌다.
뿐만 아니라 양일간 연재된 창작물 어사신보가 도합 20만의 조회수를 달성했다. 개인으로서는 유례가 없는 지표였다.
그에 자극되어 다른 네티즌들도 창작물을 쏟아내기 시작했고, 그에 상응해 MSB 홈페이지에는 <어사>의 창작물 게시판이 신설되기에 이르렀다.
“아직까진 대중적인 이슈는 아닙니다. 하지만 대학생을 비롯한 젊은 네티즌들을 위주로 빠르게 소식이 전파되고 있어, 이번 두 방송사의 합동인터뷰가 방영되면 흐름이 꽤 커질 겁니다. 5화쯤부터는 시청률 1위 경쟁도 충분히 가능합니다.”
홍보팀장 허성윤의 보고를 듣고, 이군영은 흡족해했다.
“좋아 좋아. 정후 <여름들판>은 부동의 1위, 찬이 <어사>는 그 뒤를 맹렬히 쫓는 슬리퍼 히트. 어느 쪽이 이기든 우리는 이득이구만.”
“그렇습니다. 1위 경쟁이 치열해지는 시점에 두 사람의 합동인터뷰를 추진해보는 것도 좋을 것 같습니다.”
“하하하, 그것도 좋겠어. 안 그래도 아침에 유 부장이 전화를 넣었더라고. 이거 이러다 <어사>에 잡히는 거 아니냐면서, 정후 쪽에도 좀 푸시를 해달라고 말이야.”
그러면서 상체를 숙이며 목소리를 낮춘다.
“그거 어사신보, 자네가 한 거지? 아주 센세이션하던데?”
“예? 그건 아닙니다.”
“그래? 정말로? 강정후 모르게 찬이 띄워주려고 만든 작품 아니었어? MSB에서도 전혀 모르던 눈치던데.”
“지시하신 대로 따로 준비한 홍보용 게시물이 몇 개 있지만, 시청률이 궤도에 오른 뒤에나 공개하려고 했습니다. 안 그러면 아르바이트 동원해서 선전한다고 빈축을 살 수 있으니까요. 어사신보는 정말로 시청자 작품 같습니다.”
“정말 그런 거면······ 대단한데? 난 그거 보면서 그냥 희한한 사극이구나 정도로만 생각했는데, 젊은 친구들한테는 꽤나 감동적인 드라마였던 모양이지? 좋은 일이야. 이대로만 가면, 정말 몇 년 안에 간판 갈 수 있을지도 모르겠어.”
그렇게 말하며 히죽 웃는 얼굴에는 음흉함이 가득했다.
3팀장 정창영에게도 말한 적 없는 나라엔터 대표의 복안. 이군영은 애초부터 이찬을 그런 목적으로 데려왔다.
자신의 배우 보는 안목을 입증함과 동시에, 자기 말 안 듣고 안정록만 입에 담는 강정후를 조련하기 위해, 천재소년을 나라엔터의 새로운 간판으로 키워내려 했던 것이다.
처음에는 10년 이상을 바라본 긴 계획이었다. 첫 계약 당시의 이찬은 고작 열두 살 꼬마일 뿐이었으니까.
그렇지만 그 소년이 믿을 수 없는 속도로 성장해, 벌써 드라마 주연이 되어 강정후와 경쟁하고 있다.
나이의 한계가 있으니 빠르게 많은 배역을 맡을 수는 없겠지만, 이 기세라면 스물이 되기 전에 간판을 대체할 수 있을지도 모를 일이었다.
그렇기에 이군영은 연신 환하게 웃을 수 있었다.
다만 바로 다음에 나온 안건에서는 인상을 팍 찌푸렸다.
“추가 투자는 결국 불발될 것 같습니다. 한림도 다른 그룹들도 지금은 아낄 때라고 판단한 거겠죠.”
“하, 젠장. 멍청한 놈들이야. 미디어 업계는 지금이야말로 르네상스를 맞이했는데, 그걸 모르고 겁만 내고 있다니.”
하이닉스 사태를 위시해 경제적으로 다사다난했던 2002년만큼은 아니지만, 2003년 역시 경기는 침체 상태. 소비심리 위축으로 내수시장이 무너져 기업들이 투자를 꺼리고 있다.
특히 공급과잉상태에 이른 부동산에는, 이후 새 정부의 투기억제정책까지 예고되어 있었고.
신사옥을 위해 투자를 당기려 했던 이군영에게는 악재 중의 악재가 된 셈.
“아무래도 안 되겠어. 개새끼들, 그동안 받아 처먹은 건 까먹고 지 살길 찾고 있다 그거지? 그럼 씨발 더 먹여야지. 돈보다 더 맛있는 걸 안겨주면 지들이 끝까지 개기겠어?”
“······대표님, 차라리 정후하고 얘기를 나눠보시는 게 어떻겠습니까? 자금이라면 소강도 충분히-”
“그 깡패새끼들하고 딜을 하라고? 미쳤어? 내가 회사에서 깡패 물 빼느라 그 개고생을 했는데, 그것들하고 똑같은 놈들 밑으로 기어들어가라고? 어차피 정후 그놈도 외가에선 내놓은 자식이야. 걔하고 딜을 할 수 있을 리가 없지.”
강정후와 한때 인간적으로 가까웠던 허성윤은 대표의 그 생각이 착각임을 알고 있었다. 이유는 알 수 없지만, 그 톱스타는 소강그룹 내에서 꽤나 영향력을 갖고 있는 편이니.
그러나 조폭 계통의 돈이 위험하다는 말에는 반박할 수가 없었다.
‘사실은 바로 그렇기에 권한 거였는데······ 다른 루트라고 해도 나쁠 건 없지. 중간에 끼어서 양방의 피해자가 될 애들이야 불쌍하지만, 흥. 그런 것들까지 신경써줄 필요는 없어. 이걸로 확실하게 이군영의 약점을 잡는다. 그게 이찬을 위한 일이야.’
이군영은 감도 못 잡고 있지만, 야심가 허성윤의 눈에 보이는 건 이제 이찬뿐. 그 ‘유일’한 연기자의 미래를 지원하기 위해서라면 다른 일들은 얼마든지 무시할 수 있었다.
그게 몇몇 사람에게는 무서운 비극이 될지라도.
“그럼, 방향은 어디로 잡을까요?”
“한림 전무. 이번엔 그쪽을 뚫어보자고. 잔챙이들한테 돈 먹여봤자 의미가 없어. 제대로 된 줄을 만들어야지.”
비밀스런 회의를 마치고, 허성윤은 이찬에게 문자 한 통을 보냈다. 받는 사람 입장에서는 꽤 뜬금없을 이야기였다.
「 허성윤 팀장님 : 보고 바로 지워라. 투자금 관련해서 이군영이 움직이기 시작했다. 거기서 빌미를 만들 수 있을 것 같아. 잘하면 아예 나라엔터 전체를 묻어버릴 수 있을지도 모르겠어. 그게 된다면, 독립하는 과정에서 이쪽 애들을 상당수 데려갈 수 있을 거다. 최상의 시나리오지. 그쪽은 내가 처리할 테니 넌 연기에 집중해라. 」
사전에 의논된 바 없는 독자적인 행동. 그러나 허성윤이 뜻한 바를 이해하는 데에는 오랜 시간이 필요치 않았다.
이찬 역시 계속 고민해온 문제였으니까.
‘독립을 위해서 이군영의 약점을 잡는 걸 넘어서, 아예 나라엔터 풀까지 훔쳐가겠다? 흥미로워. 시키지도 않은 짓을 한 거지만······ 잘된 일이지. 내가 직접 움직여서 괜한 시선을 사는 것보단, 이 아저씨가 이군영 비위 맞추면서 뭘 잡아내는 게 더 빠를 테니.’
원래대로라면 <684> 촬영을 마친 뒤에 직접 이군영을 관찰해 비리를 잡아내려 했다. 그를 위해서 소형 녹음기와 카메라를 미리 구비해뒀다.
그렇지만 허성윤이 그 일을 대신해준다면, 괜한 문제에 신경을 빼앗기지 않을 수 있다. 영화 홍보와 차기작 준비가 좀 더 수월해질 터.
그렇게 생각하며 이찬은 문자를 지웠다.
짧았던 뭍 생활을 끝낼 시기였다.
*
뜨거운 햇살 속에서 8월이 도래하자, KBC와 MSB의 연예정보 프로그램의 컬래버레이션 프로젝트가 공개되었다.
<가을하늘>의 아역, 이찬, 명진아, 정신혜의 합동인터뷰가.
<여름들판>의 조연 한 명과 <어사>의 주연 두 명이니 무게추가 좀 기울긴 하지만, 정신혜도 8화까지 방영된 <여름들판>에서 신선한 캐릭터로 많은 사랑을 받는 중이다.
배경 역시 <여름들판> 촬영장인 만큼, 양측이 얻는 이익은 비등할 것으로 분석됐다.
둘째 주 월요일의 시청률에서 그 결과가 잘 드러났다.
<여름들판> 32.1%, <어사> 21.5%.
SBC의 <야인>만이 16.2%까지 급락하며 화제성의 패배를 여실히 보였으니, 결국 양자 모두 웃게 되었다. 주동한 PD가 이찬에게 전화를 걸어 치하한 것도 당연했다.
[찬아! 정말 최고였어! 인터뷰 때 보여준 너랑 진아 액션에 <야인> 시청자들이 상당수 유입된 것 같아. 월화 치열한 전쟁터에 제일 늦게 들어와서 3화만에 21%가 된 거니까, 여기도 아주 난리다. 방송국이 다 축제 분위기야.]
감격에 찬 어른의 말을 건성으로 들으며, 소년은 속으로 딴 생각을 하는 중이었다.
‘그 정도로 기뻐하면 되나. 앞으로 <여름들판> 제치고 30%도 넘겨야 되는데. 안정록 아저씨는 안쓰러워 하더라만, 강정후 그 인간한테 지기는 싫단 말이야. 내기야 영화로 하는 거라도 기왕이면 2연승이 기분 좋잖아? 이번에도 최대한 땡겨야지. 나중에 저녁 뉴스에서 보도될 수 있도록.’
같은 방송국이라고 해도 보도국과 드라마국은 전혀 다른 부서이며, 특히 자사 드라마를 뉴스에 비추는 건 위험한 일이다. 밀어주기 의혹으로 논란이 될 수 있기에.
그 난관을 초월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사회현상.
드라마가 사회문화적으로 대중에게 큰 영향을 미쳤다는 사실이 입증되면, 그를 취재해서 보도해도 문제될 게 없다.
그게 한창 영화 촬영이 진행 중인 실미도에 MSB 예능국 취재진이 다가오고 있는 까닭이었다.
라이벌리 전략으로 만든 신작의 상승세를 이어가, 네티즌을 넘어 많은 대중에게 <어사> 열풍을 소개하기 위해, 마침내 어사신보의 창작자를 섭외하는 데 성공한 것이다.
“그런데 취재팀 대체 언제 와요? 아까부터 촬영 미루고 기다리고 있는데.”
[어? 글쎄, 나도 간략하게 얘기만 들어서. 지표 분석하고 편집 지휘하느라 좀 정신없기도 하고 말이야.]
“아, 지금 보트 소리 들리네요.”
[그래? 오게 되면 인터뷰 재밌게 잘해줘라. 지금 데려가는 사람이 대단한 미인에, 또 뭐 재밌는 요소가 있다고도 했는데, 자세하게는 말을 안 해줘서 모르겠다.]
그 모호한 말이 이찬이 들은 정보의 전부였다. 그렇기에, 30초 뒤쯤 나타난 보트 위의 얼굴에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와······ 맙소사. 재밌는 요소가 정말 있네요.”
[왜? 뭔데? 혹시 유명한 사람이야?]
“아뇨. 음, 이거 PD님도 방송으로 보세요. 끊습니다.”
[에이, 뭐야? 뭔데? 나 예능국에 친한 사람이 없단-]
저녁뉴스 앵커가 우리 드라마 광팬이라니- 이찬은 전화를 끊으며 웃었다. 그리고 보트 위의 박재희를 향해 외쳤다.
“안녕하세요, 박재희 앵커님!”
“앗, 저 알겠어요? 뉴스에만 나와서, 모를까 했는데!”
“어제 저녁에도 뵌 얼굴이신데요! 이렇게 오신 거 보면, 설마 앵커님이 양오리님이에요?”
“맞아요! 금방 갈게요, 잠시만 기다려주세요!”
예능국 스탭들은 김빠진 듯 아쉬워했다. 이찬이 박재희를 모르고 그저 팬으로만 대하다가, 나중에 아나운서라는 걸 알고 깜짝 놀라는 그림을 기대하고 있었기에.
물론 그들의 내심과는 달리 촬영은 훈훈하게 진행됐다.
직접 만든 스크랩북과 어사신보의 프린트본을 보여주고, 그 대가로 미소년 배우에게서 ‘어사폐인’ 증서를 받는 미녀 앵커의 모습은, 어떻게 봐도 훈훈할 수밖에 없는 그림이었다.
그 뒤에 이어진 드라마 속 대사 따라잡기 과정은 좀 우스꽝스러웠지만.
“다모 재희. 내가 너를 믿어도 되겠느냐.”
“어찌 그런 말을 하십니까? 저 같은 천한 년에게······.”
“······누나, 죄송한데 너무 뉴스 같거든요? 사극에 안 맞게 현대적이라서 많이 이상해요.”
“아, 좀 그랬어요? 아, 이게 직업병인가봐요.”
“그게 아니라 그냥 연기력이 없으신 것 같은데요? 직업 잘 고르셨네요. 앞으로도 최고의 보도 부탁드려요.”
본심은 아니고 예능적인 재미를 위해서 한 농담이라 주장한 그 대화 외에도, 이찬은 장난스럽고 재치 있는 모습을 보여줬다. 동시에 박재희에게 무척이나 살갑게 굴었다.
거기에 젊은 앵커가 무척 황홀해했음은 당연한 일. 연기력과 무관하게 행복 가득한 웃음이 계속 카메라에 담겼다.
그런 촬영의 끝에, 이찬은 선언했다.
“우리 극을 사랑해주시는 어사폐인들을 위하여, 주상 전하께오서 자주 이런 자리를 열고자 하시오. 매주 한 명씩, 창작물을 올린 폐인들 중 한 명을 뽑을 것이오. 그리하여 폐인 증서를 드리고, 원하는 배우 한 명과 시간을 보낼 수 있게 해드리리다. 앞으로도 열심히 활동해주시오. 이것은 어명이오!”
미래적인 홍보전략의 시작이었다. 전국의 드라마 애호가들이 열광할 수밖에 없는.
< 25장 - 앵커 박재희 (3.) > 끝
ⓒ 비벗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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