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6장 - 배우 정신혜 (1) >
리니지와 스타크래프트 열풍 속에서 빠르게 전파된 PC방은, 2002년을 기점으로 서서히 변화하기 시작했다.
기존에는 성인 남성 게임 마니아들을 위주로 어두운 조명과 편안한 흡연 등을 마케팅 요소로 삼았지만, 시간이 흐르며 점차 청소년층과 여성층이 잠재고객으로 대두된 것.
그렇기에 금연실, 여성전용실, 1인실 등을 갖춘 이른바 ‘업그레이드 PC방’의 창업이 유행하고 있었다.
오랜만의 휴일을 맞아 정신혜가 찾은 장소 역시 그런 업그레이드 PC방 중 한 곳이었다.
개인실 및 고급화된 음료 등이 마케팅포인트인, 대학생 및 젊은 직장인들을 위한 휴식공간. 모자와 마스크로 얼굴을 가린 소녀 배우 역시 잠깐의 휴식을 위해 방문한 입장이었다.
하지만 그게 쉬운 일은 아니었다.
“저기, 혹시 오진주 아니세요? <여름들판>······.”
주문을 받아 포스를 조작하던 점원이 눈을 크게 뜨며 묻는다. 이미 12화까지 방영된 드라마에서 널리 얼굴을 알리고 있기에, 얼핏 드러난 눈매로도 그녀를 알아본 모양이었다.
정신혜는 기계적으로 웃으며 고개를 숙여 보였다.
“맞아요. 알아봐주셔서 고맙습니다.”
“와, 짱이다! 저기, 명진아랑 친하죠? 실물도 진짜 예뻐요?”
“네, 되게 예뻐요.”
“그······ 이찬? 이찬은 어때요? 진짜 그렇게 커요?”
“네. 아저씨보다 커요.”
“아, 너무해. 나 아저씨 아닌데? 대학생이에요.”
“아, 그렇구나. 난 또. 너무 편하게 이름으로 부르시길래 나이가 되게 많으신 줄 알았네요. 오해해서 죄송해요.”
“아······ 네. 어······ 음료 준비해드릴게요, 저쪽 방이에요.”
반투명 칸막이로 가려진 1인실에 들어선 뒤에야 정신혜는 편안하게 쉴 수 있었다. 입속의 볼멘소리와 함께.
‘하여튼 세상에 예의 없는 사람들이 많단 말이야. 얼굴도 못 본 사람 이름을 왜 마음대로 부르고 난리야?’
점원의 무신경한 발언 때문에 기분이 나빠졌지만, 그로 인해서 떠올린 두 사람의 이름 쪽은 달랐다. 정신혜는 인터넷 익스플로러를 켜고 검색창에 명진아의 이름을 써넣었다.
나오는 건 전날 검색했던 것과 크게 바뀌지 않은 기사들.
주로 네티즌 사이의 <어사> 열풍 속에 명진아가 최고의 하이틴스타로 급부상했다는 이야기들이 보였다.
다만 지식검색에 해괴한 질문 하나가 새로 올라와 있었다.
「 Q : 명진아 어사 남주랑 사겨요~?
드라마 어사 잘보고있는데요 진짜 재밋고감동적이예요~
근데 주인공 두명이 너무 애틋한연기를잘해서 혹시 사귀는사인지 궁금해서요 ^_^
가을하늘 드라마에서도 같이 연기했었다고 하던데~
혹시 그때 열애설같은거 잇었나요~? 」
막 발끈해서 키보드를 내리치려고 할 때, 점원이 커피와 함께 개인실에 들어섰다.
“여기, 주문하신 음료 나왔어요. 뭐 보고 계셨어요? 와, 이게 뭐야? 이찬이랑 명진아랑 사귀어요?”
“아니거든요? 그리고 노크할 줄 모르세요?”
“예? 아니 주문을 했으니까 가져온 건데 무슨 노크를 해요? 성격 이상하시네 진짜.”
“······죄송합니다. 제가 요즘 연기 때문에 좀 예민해서요.”
“참나. 연예인이 뭐 벼슬인가? 이따 싸인이나 해주세요.”
모자 아래로 입술을 깨물며, 정신혜는 울화를 참았다.
관점에 따라 서로 다르게 판단할 수 있는 문제였다. 게다가 공인(公人) 취급을 받는 배우로서 매장에서 점원과 실랑이를 벌일 수는 없는 노릇.
참는 것이 이기는 거라고 그녀는 스스로를 다독였다.
대신, 점원이 나간 뒤에 지식검색 질문자에게 화를 풀었다.
「 A : 와~~ 말도 안되는 헛소리네요~~
둘이 사귀긴 왜 사겨요??
진아 언니가 이찬보다 두살이나 더 많거든요!!
이찬은 진아 언니보다 정신혜를 더 좋아할걸요??
뇌가 없으신 거 아니면 이런 이상한 루머 만드실 시간에 맞춤법 공부나 더 하시죠?? 」
씩씩 숨을 내뱉으며 생각해보니, 정신혜를 더 좋아할 거라는 말은 약간 오버가 아니었나 싶었다. 그래서 답변을 게시할 때는 그 문장을 삭제했다.
그 뒤에야 커피를 한 모금 마시고 검색어를 ‘이찬’으로 변경했다.
마찬가지로 <어사> 열풍과 관련해 쏟아진 기사들. 인터넷 창작물의 홍수를 조명하는 문장들 속에서, 네티즌이 그 신선한 드라마에 얼마나 열광하고 있는지 잘 알 수 있었다.
그렇지만 대부분은 이미 본 내용들이다. 처음 보는 기사는 하나뿐이었다.
「 ‘빛나는 영화들’ 빛고을서 만난다 / 한경신문
······행사 중 볼 수 있는 반가운 얼굴에는 배우 이찬이 있다. <미스 스캔들>로 최연소 400만 주연에 등극한 연기신동은, <684> 예고편의 시사를 통해 다시 영화인들과 만나······ 」
광주국제영화제(GIFF) 관련 뉴스였다. 부산이나 부천보다는 무게감이 떨어지고, 그렇기에 인지도 높은 배우를 홍보대사로 임명해 적극적으로 홍보하는 후발주자.
그러나 2003년의 GIFF 기사 중에는 홍보대사인 하이틴스타 방주연보다도 이찬 얘기가 많았다.
5분짜리 예고편 시사 잠깐 하고 촬영을 위해 돌아갈 인물한테 보내는 관심이라고 하기엔 지나칠 정도로.
그 모든 게 <어사>의 화제성 덕분이라 할 수 있었다.
이제는 드라마를 보지 않는 이들에게도 유명한 신드롬이 되어버렸으니, 당연하다면 당연한 일.
이찬과 명진아라는 이례적인 10대 주연 캐스팅. 메이킹필름에 시청자시사회 등 양방향 소통에 애쓰는 제작진. 요즘 보기 드문 100% 사전제작으로 지루할 틈 없이 이어질 스토리.
<어사>는 방영 전부터 화제를 품고 있었다.
그랬던 게, 첫 방송에서 압도적인 영상미와 함께 수많은 명대사를 쏟아내더니, 3화에서는 이찬이 상의를 벗어던지며 각종 드라마 커뮤니티를 자기 스크린샷으로 뒤덮어버렸다.
심지어 그 며칠 뒤에는 지성미의 상징인 뉴스 앵커가 유명한 2차창작물의 제작자인 게 드러났다. 그녀가 이찬과 만나 행복한 시간을 보낸 모습이 연예정보 프로로 전파를 탄 것.
자연히 청소년들이 지식검색에 “어사 재밌나요” 하는 질문을 올려댔고, 거기에 기존의 어사폐인들이 작품의 관전요소를 알려주며 신참을 반겼다.
그와 비슷하게, 청년층 역시 빠르게 이동했다.
<어사>의 내용을 꿰고 있는 어사폐인들이 또래 사이에서 주목을 받기 시작했다. 뉴스데스크 앵커도 빠져든 드라마이니, 지성 있는 청년이라면 당연히 거기에 미쳐야 하지 않겠냐는 우스갯소리와 함께.
노인들이나 즐기는 거라고 생각했던 사극. 그러나 타이트한 현대극 구성이 붙자 그들의 입맛에도 꽤나 맞아서, 그로써 또 새로운 어사폐인들이 양산되었다.
그 효과가 8월 셋째 주의 5,6화 방송에서 드러났다.
마침내 28%를 넘긴 시청률로 15.3%의 <야인>을 크게 제치고, <여름들판>마저 30% 아래로 끌어내린 것.
거기에 8월 12일의 6화에는 다시 한 번 이찬이 옷을 벗었다. 역적 소굴의 탈출 과정에서 롱테이크 수영 씬을 소화하며 또 다시 무수한 스크린샷을 양산해냈다.
7화 이후의 극에 큰 이상만 없다면, 이후 동시간대 1위를 꿰차는 것은 물론이고, 30% 시청률도 충분히 달성될 상황.
그러니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지금은 누구든 이찬의 이름을 기사 앞에 붙일 수밖에.
다만 일주일이 지나면 또 상황이 조금 바뀔 터였다.
예지능력은 없지만, 정신혜는 그 미래를 잘 알고 있었다. 그리고 그 사실에 살짝 괴로워하는 중이었다.
‘실력으로 이기고 싶었는데, 다른 걸로 괴롭히게 생겼네. 하지만 어쩔 수 없지 뭐. 놔두면 위험하다고 하니까.’
그렇게 생각하며 뉴스의 하단을 더 살펴봤다. 이찬이 영화제에 참석하는 건 이틀째인 8월 23일이라고 적혀 있었다.
그건 정신혜가 <여름들판> 촬영을 이미 다 마친 뒤. 9월 9일까지 이어질 극 후반부의 핵심은 남녀 주인공이기에, 여동생 오진주 등장 씬은 기 촬영본으로 충분하다고 했었다.
그 외에 다른 이유가 하나 있기도 하고.
‘얘는 광주 갔다가 올라와서 또 바로 실미도 가려나? 그러면, 아마 못 오겠구나. 어쩌면 다시는 못 볼지도······.’
정신혜는 두 친구 이후에 자신의 이름을 검색하지는 않았다. 다만 어른처럼 커피를 마시며 느긋하게 눈을 감았다.
그러다가 문득, 괴로움을 견디려는 듯 이를 갈았다.
에어컨이 작동하는 PC방은 그저 시원하고 평온하다. 무덥고 소란스러운 건, 그녀의 머릿속뿐이었다.
*
[찬아, 너 광주 내려갈 때 뭐 타고 가? 차? 기차?]
명진아의 질문에 이찬은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건 왜 물어봐?”
[으응? 어, 같이 내려갈까 해서······ 마침 주말이라 학교 안 가도 되구, 할머니 보고 싶기도 하구.]
“어? 고향이 광주였어?”
[치. 그것도 몰랐어? 되게 관심 없네.]
틀린 말이기도 하고 맞는 말이기도 했다.
명진아라는 배우는 이찬으로서도 종잡을 수 없는 감성파 천재. 그의 정교함과는 다른 분야에서 뛰어난 스타일이며, 좋은 사람이기까지 하니, 그녀에 대한 관심은 꽤 큰 편이었다.
다만 집안 문제에 대해선 구태여 알아보지 않았다.
명진아처럼 사랑스러운 사람이 자라난 평안한 집구석이라는 건, 소년에겐 여전히 보기 불편한 것이었기에.
“관심이야 그렇다 치고, 같이 내려가긴 좀 그런데? 영화 제작진이랑 같이 김포공항에서 국내선 탈 거야. 매니저도 따로 안 붙을 건데, 거기 끼면 민망하지 않겠어?”
[어? 그러면, 안정록 선생님도 같이?]
“응. 출연진은 그분이랑 나랑 둘만.”
[갈래! 인사드리고 싶어. 시상식 때 한 번 뵀었는데, 너무 좋으신 분 같았어. 나 기억하실지 모르겠지만······.]
그렇게 말했던 명진아를, 안정록은 기억하고 있었다. 택시를 타고 김포공항으로 달려온 명진아에게 그는 환하게 웃어줬다.
“그래, 진아로구나. 99년도에 봤던 것 같은데, 기억나니?”
“네! 완전요! 다시 뵙게 돼서 영광이에요, 선생님.”
“하하하, 내가 영광이지. 요즘 아주 장안의 화제잖니? 너랑 찬이랑, 아주 네티즌들을 들었다 놨다 하고 있더구나. 방영을 할 때마다 화제가 되고, 시청률도 동시간대 1위가 됐다지? 대단한 일이다. 아주 잘하고 있어.”
그건 <684> 팀에도 굉장히 고무적인 일이었다.
비록 배우들끼리는 이찬의 연기력에 감탄만 해왔지만, 대중의 시선에서는 15세 소년의 21세 배역 연기에 의심의 눈초리가 있었을 터.
그러나 <어사>의 흥행을 통해 이찬의 몸이 성인과 다를 바가 없으며, 그 연기력은 어른들 이상이라는 게 증명됐다.
거기다 33%의 시청률로 팬층까지 나날이 늘려가고 있으니, <684>의 초기 흥행에도 큰 도움이 될 게 분명했다.
명진아는 바로 그 <어사>의 인기를 책임지고 있는 신성. 그렇기에 소녀를 바라보는 영화팀의 시선은 곱기만 했다.
다만 이찬 쪽은 표정이 곱지 않았다.
“왜 혼자 온 거야?”
“어? 어······ 그냥, 괜히 귀찮으실 것 같아서. 원래 집에 갈 땐 혼자 다니고 그랬거든.”
“그거야 옛날엔 그래도 됐겠지만, 지금은 동시간대 1위 월화드라마 주연이잖아? 이렇게 생각 없이 혼자 돌아다니다가 무슨 시비라도 걸려봐. 괜히 드라마에 폐 될 수도 있어.”
“아, 그, 그렇구나······! 어떡하지? 지금 전화해볼까?”
“지금 연락하면 언제 오냐? 그냥 우리 팀 따라다녀. 집에 가면 얌전히 있다가 변장 잘하고 올라오고.”
“아, 알았어. 철저하게 숨길게!”
영화와 무관한 명진아의 비행기 좌석은 이찬 옆으로 배정됐다.
<684>와 무관한 사람을 홍보비로 동석시킨 것이었으나, 크게 문제 될 일은 아니었다. 투자자 자격의 이찬이 지인을 동반한 것으로 처리했기에.
그렇게 두 사람은 비즈니스석 창가에 나란히 앉게 되었다.
“와······ 비즈니스석 좋다. 처음 타봐.”
“그래? 난 비행기가 처음인데.”
“어? 정말? 한 번도 타본 적 없어?”
“탈 일이 없어서. 누나는 언제 타봤는데? 해외여행?”
“아냐, 해외는 못 가봤어. 가족들이랑 제주도 갈 때 이코노미로 탔었는데······ 어······ 응.”
“왜 말을 하다 말아? 제주도 재밌었어?”
“응······ 되게 예쁘더라. 나중에 같이 가볼래?”
“누나랑? 에이, 누가 보면 난리 난다. 난 됐어.”
제주도 처음 갈 때 안내해주고 싶은데- 명진아가 속으로만 생각하는 동안, 소년은 고개까지 절레절레 젓고 있었다.
마음을 티 낼 수는 없는 일이다. 그녀는 빠르게 머리를 굴려 다음 화제를 생각해냈다.
“그, 우리 드라마 정말 너무 잘되는 거 아니야? 벌써 시청률이 33%라니······ 말도 안 되는 것 같아. 그야 찬이 너는 그럴 만한 배우가 맞는데, 나는 너무 얹혀가는 것 같아서······.”
“헛소리 하네. 여주인공 잘 뽑았다고 난리던데 뭘.”
“아, 정말? 어디서 봤어? 나도 보고 싶다.”
“지식검색에 답변 그렇게 달렸던데.”
“아······.”
“왜?”
“그, 그거, 내가 쓴 걸지도 몰라······.”
“······나중에 걸리지 마. 들켜도 귀엽게 보일 거긴 한데, 사람들이 엄청 놀릴 거야. 아무튼 누나 연기 잘하고 있어. 작품에도 잘 맞아서 누가 봐도 채화야. 그러니까 자신감 가져.”
명진아는 입발림 말 듣기 싫다는 듯 고개를 홱 돌렸다.
물론, 창밖을 보는 그 얼굴에는 홍조가 가득했다. 그녀는 10초쯤 딴청을 피운 뒤에야 신색을 회복할 수 있었다.
“흠, 흠. 찬아, 그럼 우리 드라마, 얼마까지 갈 수 있을까? 아, 시청률에 막 목매는 건 아니지만······ 더 많은 사람들이 봐주시면 좋을 것 같은데. 할 수 있는 일이 없을까?”
“우리 둘이 길에서 싸우면 시청률 폭발할 것 같긴 한데.”
“으, 으아······.”
“농담이고, 그냥 둬. 한참 오를 테니까.”
“왜? 어떻게 확신하는 거야? 난 지금도 실감이 안 나는데.”
“오늘 저녁에 뉴스 나갈 거거든.”
“뉴스? 무슨 뉴스? 어? <뉴스데스크>?”
“응. 오늘 박재희 누나가 공식적으로 보도될 거야.”
총 조회수 100만을 돌파한 인터넷 창작물 어사신보의 작가, 양오리. 그 주인공인 앵커 박재희가 8월 23일 저녁뉴스에서 취재 대상이 된다는 이야기였다.
정말 그렇게 된다면 엄청난 화제가 될 건 명약관화.
그러나 그게 웃으면서 할 말은 아닐지도 몰랐다.
“찬아, 정말 그래도 괜찮은 거야? 왜 전에 연예TV 나오셨을 때도 말이 많았잖아? 어떤 분들은, 저렇게 이상한 사람을 앵커에 앉혀놓는 게 말이 되냐는 식으로까지 말씀하시고.”
“그랬지. 당연한 일이야. 아무래도 노년층에겐 익숙하지 않은 문화니까. 그렇지만 정치적 행보도 아니고 개인 취미일 뿐이잖아? 보도국에서도 이번에 강행돌파를 해보기로 했대. 젊고 개성 있는 뉴스로 자리매김할 기회라고 생각한 거지.”
아마 거기에 더해서 <서장금> 띄우려는 드라마국 입김도 많이 들어갔겠지만- 하고 생각하며 이찬은 웃었다.
마침내 모든 조건을 달성하고 2003년의 드라마로 거듭날 <어사>를 생각하며.
< 26장 - 배우 정신혜 (1) > 끝
ⓒ 비벗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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