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6장 - 배우 정신혜 (2) >
22일 조선대학교에서 개막식을 거행한 GIFF.
하지만 여전히 촬영이 진행 중인 <684>팀은 23일에야 잠깐 짬을 내어 충장로 일대를 찾았다.
그곳의 극장 한 관에 시민들을 초대해 예고편을 상영하고, 그 뒤에 감독과 주연들이 관객과의 대화를 진행할 예정.
그 행사 뒤에는 곧바로 다시 비행기에 오르는 일정이었다. 경기도 일대에서 결말 파트 촬영에 돌입하기 위해서.
“누나는 가는 길에 집 근처에 내려줄게.”
“나도 시사회 보고 싶은데. 같이 충장로까지 가면 안 돼?”
“보고 싶으면 그래도 되긴 하는데······ 약속 잡은 거 없어?”
“응? 응. 그냥 집에서 뒹굴뒹굴?”
“그런 건 서울 숙소에서 해도 되잖아?”
“어······ 아주 어려서부터 살던 집이거든. 그래서 거기가 참 좋아. 그냥, 아무것도 안 하고 있어도 참 포근해.”
이찬은 명진아의 대답을 머릿속으로 곱씹었다.
‘난 아주 어렸을 때부터 살던 고아원에 아주 학을 뗐는데. 이게 우리의 차이인가? 나도 어쩌면, 누나처럼 따뜻한 집에서 자라났다면, 이렇게 기분 좋은 사람이 될 수 있었을까?’
알 수 없는 일이었다. 그 과도한 천재성이 따뜻한 집안마저 잡아먹었을지도 모를 일이니.
소년의 상념 속에서 밴이 충장로에 도착했을 때, 명진아는 네이티브로서 광주를 홍보해야 한다고 생각한 것 같았다. 주 청자는 최연장자인 안정록 쪽이었다.
“여기가 중심가예요, 선생님. 이쪽 길은 주로 옷가게나 금은방이 많이 있고요, 저 앞에 밀리오레에서는 문화행사 같은 걸 많이 하고요, 저 앞쪽으로 더 나가면 도청이 있어요. 5.18 때 저항군이 본거지로 삼은 곳이에요.”
“거기까지 이어지는구나. 얘기는 많이 들었다. 한번쯤 와봐야지 했는데, 오랜 시간이 흘러서야 홍보차 오게 됐어.”
“어······ 다음에 또 내려오실 일 있으시면, 저 불러주세요. 제가 여기저기 소개해드릴게요.”
“하하하, 바쁜 청춘스타를 어떻게 부르겠니? 나중에 혼자 와서 천천히 둘러봐야지.”
토요일 낮의 중심가지만, 다니는 사람은 많지 않았다. 아마 몇 블록 떨어진 금남로 쪽에서 행사가 진행 중인 모양.
그 많지 않은 사람들을 통해서 이찬은 인기를 실감했다.
그야 국민배우 안정록이 나타났으니 사람들이 몰릴 거라고는 예상하고 있었지만, 그 인파가 자신에게까지 다가올 줄은 모르고 있었던 것이다.
“오메! 안정록 옆에는 암행어사 아녀?”
“이, 글고만. 안정록이하고 암행어사하고 거시기 하나벼.”
“암행어사라고? <어사>에 나온 걔여?”
“못 알아보겄냐. 잘생긴 것이 딱 봐도 배우잖여?”
“야 야, 옆에 명진아도 있어야!”
“워······ 천사 아니냐? 겁나 이쁘네. 가봐도 되나?”
“안녕하세요, 이찬입니다. 와서 브로셔 받아가세요.”
“아이고, 훤칠한 거 봐! 승혜야, 좀 나와 봐야! 니 좋아하는 암행어사가······ 뭐였지? 이, 희찬이가 와 있어야!”
“희찬이? 이찬? 악! 엄마, 엄마, 나 지금 나가!”
그렇게 몰려드는 시민들에게 일일이 인사하고 GV 일정을 홍보한 뒤에야 극장에 들어설 수 있었다. 이찬은 엘리베이터 앞에서 참은 한숨을 내뱉었다.
“휴······ 33%가 이 정도면, 50% 때는 난리였겠네.”
“투자자님, 왜 남 얘기처럼 말해? <가을하늘> 때는?”
돌아보는 계진행 감독의 질문에, 소년은 어깨를 으쓱였다.
“그땐 공부하느라 밖엘 안 다녀서요.”
“그래? 그 뒤로······ 아, 검정고시 준비하면서 계속 운동만 했댔지. 그러고는 계속 드라마 영화 찍었고. 드라마 방영하고 나서 사람들 많은 데 나온 건 이번에 처음인 거네?”
“그런 거죠. 진아 누나, 밖에 보지 말고 이리 들어와. 사람들 더 몰린단 말이야.”
명진아 역시 확 늘어난 관심도에 넋이 나간 눈치였다.
“아······ 진짜 신기해. 사람들이 나한테도 싸인 해달라고 계속 부르셨어. 안 선생님이랑 너만 유명할 줄 알았는데.”
“같은 드라마 찍고 있으면서 선 긋는 거야?”
“같은 드라마지만······ 난 연기도 잘 못하고······.”
“누나가 연기를 못하는 거면, 10대 연기자들 다 반성해야지. 여기 홍보대사는 머리 박아야 되고. 아마 누나가 영화 한 편만 더 찍었어도 방주연 대신 행사장 돌고 있었을 거야. 고향도 광주고, 국민여동생이니까.”
“그, 그런 게 어딨어? 자기가 국민남동생이면서.”
<미스 스캔들>로 415만을 울린 이찬만큼은 아니지만, <가을하늘>에서 임팩트 있는 연기로 사랑받은 명진아 역시 네티즌이 말하는 국민동생 계보에 이름이 올라 있었다.
그렇지만 양쪽 모두 옛날 이야기다. 이찬은 184cm의 거인소년이 됐고, 명진아도 화려한 액션 연기를 통해 이미지 변신에 성공했으니.
이찬은 그게 좀 아쉬운 일이라고 잠시 생각했다.
‘나야 어쩔 수 없었다곤 해도, 이 누나는 외모가 워낙 동안이라 오랫동안 아역으로 사랑받았을 수도 있는데. 하면 굉장히 잘할 수 있는 배역이 많았을 텐데 말이야.’
힐끔 돌아본 곳에는, 강아지처럼 올려다보는 자그마한 얼굴.
그야말로 모든 국민이 여동생으로 삼고 싶을 만한 순둥이의 뽀얀 볼과 맑은 눈동자가 어두운 복도에서도 반짝였다.
“왜? 찬아, 왜 뒤 보면서 걸어?”
“······누나, 원래 작품 왜 쉬고 있었어? 배역이 안 들어왔어?”
“어? 아니, 그냥 좀······.”
“누나가 잘할 수 있는 영화도 많이 있었을 텐데. 6월에 흥행한 공포영화 <배씨>에서, 여동생 역할 같은 거.”
“어? 와, 그거 나한테 들어왔었는데.”
“그랬어? 왜 안 했어?”
“어······ 너무 계속······ 동생만 하는 것 같아서. 이미지가 너무 고착되면······ 나중에 성인 역 맡기 힘들지 않을까······.”
솔직한 심정이었지만, 그건 마음을 살짝 감춘 이야기였다.
고졸 검정고시를 마친 이찬과 오랜만에 만났던 날. 그때 이미 180까지 자라버린 소년을 올려다보며, 명진아는 생각했다.
이 아이는 금세 하이틴 스타가 되고 성인역을 맡겠구나. 키 작고 순한 얼굴이라 오래 아역만 맡을 나와는 달리, 순식간에 새로운 이미지로 각종 배역에 캐스팅되겠구나.
그러니, 이찬의 첫 상대역이 되기 위해서는, 지금처럼 어린이 역을 더 맡아서는 안 되겠구나.
그건 이찬이 처음 3년의 공백을 생각했던 이유 중 하나와도 상통했다. 대중의 고착된 이미지에는 시간만이 약이라는.
계속해서 아역을 맡아 ‘국민동생’ 같은 소리를 듣는다면, 성인역으로 변신하는 데 커다란 저항이 따른다. 그러나 충분한 시간이 주어져 기억이 흐려지면 그 과정이 보다 수월해진다.
그렇게 생각하며, 명진아는 너무도 마음에 들었던 <배씨>의 ‘홍련’ 역을 반려했던 것이다.
그리고 그 덕분에 마침내 이찬의 상대역을 따냈다.
비록 최정하와 엮인 일종의 끼워팔기였고, 성인역이라기엔 좀 어리게 설정된 다모 역할이었지만, 결국 그토록 갈망하던 천재소년의 첫 번째 연인을 연기할 수 있었다.
물론 거기까지는 절대로 이찬에게 하지 못할 이야기. 그녀는 얼굴에서 잡념을 지워내려 애썼고, 이찬은 그저 고개만 갸웃거리며 돌아서야 했다.
머릿속으로는 명진아와 전혀 결이 다른 생각을 하면서.
‘이 누나를 하이틴 느낌으로 올려버린 <어사>가 득이 될지 실이 될지 모르겠어. 배역 스펙트럼을 넓혀주는 결과가 될지, 아니면 기존의 이미지마저 깨서 좋은 배역을 놓치게 만들지.’
남의 일이지만, 기획사 독립의 동반자로 점찍어둔 사람이라서 여러 가지 고민이 되는 상황이었다.
고전소설 <장화홍련>을 재구성한 <배씨>는, 6월과 7월에 300만 관객을 동원하며 한국 공포영화의 신기원이 되었다. ‘홍련’ 역을 맡은 방주연을 일약 스타덤에 올리면서.
하지만 그게 명진아였다면 그보다 더 큰 성공을 거뒀을 터. 이찬 입장에서는 그 if의 역사가 조금 아쉬웠던 것이다.
소년은 극장에 들어설 때쯤에야 마음속 결론을 내렸다.
‘좋게 생각하자. 결과적으론 이득 쪽이 클 거야. 아마 계속 아역만 맡고 있었다면, 워낙 동안이니까, 20대 중반까지도 학생 역만 주어졌을지도 모를 일이지. 그걸 억지로라도 끌어올렸으니 앞으로 좀 더 많은 선택지가 주어질 거야.’
그런 생각을 하던 와중에 전화벨이 울려 퍼져, 계진행이 무서운 얼굴로 눈을 부라렸다.
“누구 전화야? 행사 때 벨소리 울렸단 봐라!”
“죄송합니다, 제가 깜빡 잊었어요.”
“어? 자네였어? 에이, 우리 투자자님은 괜찮지. 편히 통화하고 와. 아직 시간 많으니까. 자, 다들 통화할 거 있으면 해.”
그 너스레에 킥 웃으며 이찬은 다시 복도로 빠져나왔다.
친구가 없는 소년이기에 진동으로 바꿀 생각도 하지 않고 있었다. 번호를 아는 동료배우 몇 명과 나라엔터 사람들은 지금 그가 GV 행사 중임을 알고 있는 까닭.
그런 뜬금없는 전화의 발신자는, 홍보팀장 허성윤이었다.
“팀장님? 저한테 직접 전화를 주시고, 급한 일이에요?”
[어, 찬아. 이거 일이 묘하게 됐다.]
“묘하다고요? 뭔데요?”
[<여름들판> 말이야. 그쪽에 굉장한 게 하나 터졌어. 그래서 오늘 내보내기로 했던 뉴스는 미뤄질 것 같다. 저쪽 뉴스랑 붙어서 나갈 텐데, 분위기가 안 맞을 것 같대.]
그건 꽤 의아한 이야기였다.
그야 간판 앵커의 사적인 취미를 조명하는 어색한 보도는 취소되기 딱 좋은 꼭지이긴 하지만, <어사>의 경쟁작인 <여름들판>이라면 이젠 거의 후반부에 접어든 상태. 대단한 이슈가 터질 수 없는 상황이었다.
“그 얘길 개인전화로 하신 걸 보면, 저랑 관련이 있단 얘긴데. 혹시 강정후 아저씨한테 뭔 일 생긴 거예요? 시청률 반등시킬 만한 사건?”
[어······ 그런 건데, 정후 쪽이 아냐. 정신혜다.]
“신혜 누나요? 그 누나가 왜요?”
[뇌종양이라고 한다.]
덜컥- 이찬은 뭔가가 떨어지는 소리를 들었다고 생각했다.
“뇌종양······ 노인들이나 걸리는 거잖아요?”
[그렇지도 않아. 소아뇌종양이라고 백혈병만큼 무서운 케이스인데, 이게 굉장히 상황이 묘하게 됐다. 그게 오늘 저녁뉴스에 대서특필될 거고, 아마 화제효과와 동정심 때문에 그쪽 시청률이 상당히 반등할 거야. 그래서 네가 병문안을 가봤으면 좋겠다. 이 화제에서 떨어져 있어선 안 돼. 후반부 싸움이 아주 치열해질 테니까 말이야.]
싸움 같은 소리 하네- 이찬은 입속으로 뇌까렸다.
‘이 아저씬, 도움이 되는 인물이지만, 역시 이상해. 앞길이 창창한 소녀의 머릿속에 종양이 생겼다는데 나오는 말이 고작 치열해질 것 같다? 그래서 병문안을 종용하려고 전화했다고? 미쳤어. 정말······ 절대로······ 좋은 사람이 아냐.’
지인의 중병 앞에서, 이찬은 처음으로 사악한 선인을 부정했다. 그와 함께할 미래를 의구했다.
하지만 당장 저버릴 수 있는 상황은 아니다. 경황 중에도 소년은 침착하게 전화를 끊었고, 차분하게 걸음을 옮겼다.
“저, 감독님. 정말 죄송합니다. 저 서울로 올라가봐야 할 것 같습니다.”
“응? 그게 무슨 말이야? 갑자기 왜?”
“신혜 누나가 중병이라고 해요. 촬영에 지장을 드리지는 않겠습니다. 먼저 서울 올라가서, GV 진행되는 시간 동안만 병문안 갔다가, 촬영 때 늦지 않게 합류하겠습니다.”
“잠깐, 잠깐. 중병이라고? 걔, 아역 정신혜 말하는 거잖아?”
“뇌종양이라고 합니다.”
그 한마디에, 계진행의 얼굴이 굳었다. 지인 중 소아암으로 아이를 잃은 친구가 있는 그는 종양의 무서움을 잘 알고 있었다.
“이런, 씨발. 정말 좆같이 됐구만. 앞길이 구만리 같은 애가 대체 왜······ 아니, 이럴 때가 아니지. 얼른 올라가봐라. 뇌종양이라는 게 전조증상이 거의 없어서, 어쩌면······ 아, 아냐. 헛소리야. 가봐. 안 선생님껜 내가 말씀드릴게.”
허리를 숙여 보인 뒤에 이찬은 명진아를 찾았다. 그리고 다짜고짜 그녀를 이끌어 바깥으로 향했다.
“찬아? 무슨 일이야? 왜 그러는 거야?”
“신혜 누나, 뇌종양. 입원.”
“어? 뭐?!”
“가자. 누나 어차피 광주에 볼일······ 볼일이 있어도, 좀 미룰 수 있지? 같이 병원 가자.”
“으, 응! 같이, 같이 병원 가자······.”
*
베드에 누운 채, 정신혜는 생각했다.
‘누구누구 오려나? 이제부터 5일간 오는 사람들이 내가 그간 살아온 인생을 대변해준다고 할 수 있겠지. 명배우 정신혜로 살았나, 아니면 허접배우 정신혜로 살았나.’
수술 전 입원기간은 단 5일.
예후가 좋아 금세 일상생활로 돌아오더라도 한동안은 사람을 피할 예정이었다. 머리를 여는 개두술을 진행할 거라서, 아마 흉측한 몰골이 되고 말 테니.
‘물론 난 머리카락 좀 없어도 얼마든지 예쁠 수 있지만, 그래도 절개 부위 위쪽으로 모자 쓰고 있으면 염증이 생길 수 있다고 했으니까 말이야. 그러니까 딱 5일만 사람 만날 건데······ 이찬 걔는 딱 5일 뒤에 촬영이 끝난다고 했었지.’
기묘한 우연이었다. 드라마 촬영 중에 미리 결정된 수술일자와, GIFF 일정으로 예정보다 조금 연기된 이찬의 크랭크업이, 8월 28일로 정확하게 일치하는 날이라는 것이.
그 우연에 문득 생각하지 않을 수 없었다.
절대로 떠올리지 않으려고 했던, 죽음이라는 미래를.
‘의사는 아무 걱정 말라고 했지만······ 머리 열고 수술하다 잘못되면, 무조건 죽는 거잖아? 그러니까······ 만약 그렇게 되면, 걔는 다시는 못 보겠네. 그럼 합동인터뷰 찍고 바이바이 한 게 마지막인 셈인데. 내가 그때 좀 어땠지? 별로였지? 중학생 역이라서 기초화장밖에 못한 상태였는데. 아, 짜증나. 왜 하필이면 우리 촬영장에서 인터뷰를 해가지고는. 걔는 평생 정신혜 하면 그 모습만 떠올릴 거 아냐.’
아주 억울한 일이라고 정신혜는 생각했다. 그렇기에 다시 한 번 각오를 다졌다.
지옥불을 다 집어삼켜서라도 이승으로 돌아오고 말겠다고.
‘음······ 근데 지옥이고 뭐고 일단은 배가 고프네. 아, 생각하니까 화나네? 난 검사 때문에 밥도 못 먹고 누워 있는데, 우리 엄마아빠는 둘이서 밥을 먹으러 갔다는 거지? 진짜 치사해. 종양 유전자 물려준 건 자기들이면서 말이야. 흥이다 흥. 오늘 밤에 잠들었을 때 발가락으로 코 막아버릴 거야.’
막 그런 생각을 하고 있던 무렵이었다.
병실의 문이 열리고, 이상한 얼굴이 나타났다.
“······이찬?”
“신혜 누나. 아프다고 해서 와봤는데.”
그건 굉장히 이상한 얼굴이었다. 정신혜는 이찬이 그런 표정을 짓고 있는 걸 단 한 번도 본 적이 없었다.
하지만 그 이질감을 오래 분석할 수는 없었다. 이찬의 옆으로 튀어나온 명진아가, 무섭게 달려들어 그녀를 덮쳐버렸기에.
< 26장 - 배우 정신혜 (2) > 끝
ⓒ 비벗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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