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훔치는 연기자-74화 (74/250)

< 26장 - 배우 정신혜 (3.) >

정신혜의 병환을 처음 들었을 때 이찬이 떠올린 건, 윤대흥의 얼굴이었다.

피하고 또 피하다가 임종도 지켜주지 못한 형사.

그때처럼 또 좋은 사람을 멍하니 잃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도저히 논리적인 생각을 할 수가 없게 됐던 것이다.

그렇지만 그건 어느 정도 오해가 작용한 부분이었다.

“<여름들판> 내용에 오진주가 MRI를 찍는 씬이 있었잖아요? 병원 분들이, 어차피 장비 작동시켜야 되니까 겸사겸사 실제로 한번 찍어봐도 좋다고 하시더라고요. 그랬는데 거기서 종양이 발견됐던 거죠. 일찍 발견한 거라 전이도 거의 안 되고 종양 크기도 안 커서, 절제가 쉬울 거래요.”

“그런 거구나. 정말 다행이다, 신혜야. 진짜······ 다행이야.”

대화를 나누는 두 배우를 바라보며, 소년은 혀를 찼다.

‘어쩐지. 허성윤 그 아저씨가 왜 그렇게 속 편한 소릴 했나 했더니, 어차피 생명에는 지장 없는 상황이었던 거로군.’

명재경각에 놓인 사람을 두고 홍보를 논하는 건 악마도 하지 않을 일. 정말 그런 부류였다면, 허성윤과의 인연은 거기까지였을 터였다.

‘그야 개두술 진행하면 위험이 아주 없다고는 못하겠지만, 이건 행운이라고 불러도 돼. 전조증상이 거의 없는 뇌종양을 드라마 촬영 덕분에 발견한 거니까. <여름들판>엔 최고의 호재, 우리 쪽엔 최고의 악재······ 그 아저씨도 애가 탔겠네.’

단순히 조연 한 명이 중병에 걸렸다는 뉴스라면, 시청률에 큰 영향을 주지는 못할 것이다.

그렇지만 한 소녀의 소아암 조기진단에 드라마가 기여했다는 스토리는 그야말로 빅이슈. 분명 <여름들판>의 시청률은 반등하고, <어사> 쪽은 주춤하게 될 터였다.

그 추론에 눈살을 찌푸리다가, 이찬은 픽 웃고 말았다.

‘뭐 됐어. 저 누나가 살게 됐으니까. 그깟 드라마 시청률 높고 낮은 게 무슨 상관이겠어. 이게 최선인 거지.’

그 뒤 정신혜의 양친이 돌아와 스타 배우들의 인사를 받고, 이후 취재진이 세 사람의 병문안 과정을 스케치했다.

허성윤이 불러들인 일간지 사람들이었다. 저녁뉴스에 쓰일 영상은 이미 낮에 촬영이 끝난 상황이지만, 이튿날 조간에는 병문안 과정이 상세히 보도될 수 있게끔.

<어사>의 주연이 된 <가을하늘> 때의 동료들이 시급히 병원으로 달려왔다는 표제를 통해서, 어느 정도 화제를 끌어오려고 한 시도였다.

그런 저간의 사정을 모르는 조혁수는, 그 과정이 모두 끝나고 보호자들마저 교수실에 불려간 타이밍에 병실로 향했다.

한참 전에 도착했지만 병실이 비워지기를 기다렸던 것.

그랬기에 이찬과 명진아의 모습에 꽤 놀라야 했다.

“뭐야? 너희 한가하냐? 소식 듣자마자 달려와 있었어?”

“선배님, 병문안을 오셨으면 환자랑 대화를 하셔야죠?”

이찬이 히죽거리며 그를 베드 앞으로 이끌었다.

정신혜 입장에서는, 같은 드라마에 이름을 올렸을 뿐 사적으론 어색한 손님인지라, 불편하게 웃으며 고개를 꾸벅였다.

“안녕하세요, 선배님. 와주셔서 감사합니다.”

“그래. 수술을 한다고? 머리도 밀겠네?”

“네, 선배님. 다시 기르려면 한세월 걸리겠어요.”

“사극 준비해둬라. 가체 쓰면 길든 짧든 상관이 없으니까.”

“······아 네. 조언 감사합니다.”

“드라마에서야 불치병 걸리면 픽픽 죽어나가지만, 현실은 그렇지 않아. 인간 명 질기다. 항암치료 잘 받고 빨리 복귀해.”

“네······ 근데 뭐 음료수도 안 사오셨어요?”

“급하게 오느라. 흠, 얼굴 봤으니까 이만 가볼게.”

하여튼 사회부적응자라니까- 그렇게 생각한 이찬이 조혁수를 배웅했다.

“선배님. 좀 더 다정하게 말할 줄 몰라요?”

“알지만 안 해. 쓸데없으니까.”

“그래도 그렇지, 아픈 사람한테 드라마에서는 픽픽 죽어나간다 그런 말까지 해야 됐어요?”

“······현실은 그렇지 않다는 게 포인트였는데?”

“몰려 있는 사람이 듣는 포인트는, 맥락이 아니라 ‘죽어’ 같은 자극적인 단어에 집중될 수밖에 없는 거라고요. 기왕이면 드라마 얘기 빼고, 넌 마음이 강한 아이니까 병 따위에 지지 않을 거야, 그런 식으로 말했으면 좋았잖아요.”

논리적으로 대안을 제시해주자, 공감하는 능력이 억제되어 있다는 천재조차 고개를 끄덕일 수밖에 없었다.

“말 되네. 그래, 너 잘났다. 네가 가서 더 위로해줘라. 언제까지 있다 갈 거냐?”

“이따 촬영 있어서, 한 20분 뒤엔 나가야 돼요.”

“그럼 주차장 내려와서 전화해라. 데려다줄게.”

“매니저님 불렀는데요?”

“돌려보내. 그리고 너야말로 좀 다정하게 말할 줄 모르냐? 감사한 말씀이지만 매니저님을 불렀거든요, 이런 식으로.”

“선배님한텐 그럴 필요 없을 것 같아서. 아무튼 이따 봐요.”

티격태격하며 조혁수를 내려보내고 다시 병실로 돌아왔을 때에는, 어째선지 명진아가 보이지 않았다.

“진아 누나는요? 환자 혼자 두고 어디 간 거야?”

“내가 심부름 부탁 좀 했어.”

“그래요? 선배도 막 부려먹고, 곤란한 사람이네요.”

“부탁했다니까. 너랑 둘이 얘기 좀 하려고.”

그건 좀 더 곤란한데- 이찬은 그렇게 생각했다.

<가을하늘> 속 ‘신시라’ 배역에 갇혀 점점 잊히고 있던 정신혜는, 이찬의 조언을 전해 듣고 <여름들판>의 ‘오진주’가 되어 이미지변신에 성공했다. 그 덕분에 머릿속 종양까지 조기에 발견하게 되었다.

그 감격으로 다시 한 번 자신에게 대시하려는 게 아닌가, 그런 생각이 문득 들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이다.

그렇지만 그건 오해였다. 정신혜가 짓는 표정을 들여다본 뒤에, 소년은 그저 쿡쿡 웃게 되었다.

“뭐야? 왜 웃어? 이게, 선배 무서운 줄 모르고.”

“하하······ 무서운 선배네요. 할 말이 뭐예요?”

“응? 어, 고맙다고. 네가 오진주 역 오디션 보라고 해주지 않았으면, 한참 더 늦게 발견했을 테니까. 그러니까 수술날에 할 인터뷰에서는 네 얘기도 많이 해줄게. 옛날 동료들이 와줘서 정말 힘이 많이 됐다고. 뭐 그래봤자 우리 드라마가 이기겠지만. 너보다 내가 먼저 톱스타 될 거야.”

이미 10대 최고의 스타가 된 소년에게 감히 하는 말이다. 대수술을 앞두고서도, 정신혜는 여전히 정신혜였다.

그렇지만 이찬은 그 안의 마음을 직시할 수 있었다. 그렇기에 선뜻 고개를 끄덕여줬다.

“그래요. 꼭 그렇게 됐으면 좋겠네요.”

“넌 꼭 그렇게 긴장을 하나도 안 하더라.”

“너무 말이 안 되니까. 누나는 나한테 상대도 안 돼요.”

“뭐? 이 어린 게······ 진짜 막말하네. 너 그런 식으로 말하다가 만약에 나 죽으면, 후회하지 않을 자신 있어?”

“실패확률 거의 없다면서요? 의사 쌤도 자신 있어 하던데?”

“그 아저씨? 맨날 뚱하게 있어서 자신 있는지 없는지 모르겠던데. 너 그냥 대충 말하는 거 아니야?”

일반인의 눈에는 잘 보이지 않겠지만, 이찬은 취재진의 부름에 병실에 찾아왔던 집도의의 얼굴에서 강한 확신을 읽었다. 그렇기에 수술의 결과를 걱정하지 않을 수 있었다.

다만 이어진 정신혜의 말은 좀 의외였다.

“나 만약에 죽으면, 넌 평생 나만 생각하고 살아.”

“······뭐라고요?”

“다른 여자 만나지 말고, 나만 그리워하라고. 억울하니까.”

“내가 억울한데요? 그런 법이 어디 있어요?”

“참나. 실패확률 거의 없다고 했잖아? 자신 없어?”

그런 문제인가- 이찬은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러나 아무리 생각해도 말이 안 되는 논리였다.

“쓸데없는 소리 하지 말고, 얌전히 몸조리나 잘해요.”

“진심이야. 너 만약에 나 죽고 딴 여자 만나면, 내가 원귀가 돼서 찾아가서 계속 괴롭힐 거야. 특히 진아 선배는 안 돼. 그건 너무 억울해. 나는 없는데, 둘만 남아서 행복한 거, 싫어. 나······ 만약에 잘못되면······ 네가 처음이자 마지막인데.”

“뭐가요?”

“좋아한 거. 키스한 거.”

키스라는 말에 어울리는 경험이었나 하는 고민은 잠깐 들고 사라졌다. 이찬은 한참이나 움츠러든 듯한 소녀에게 그런 식으로 말하고 싶지 않았다.

그는 조혁수에게 했던 조언을 떠올리는 중이었다.

‘몰려 있는 사람이 생각하는 포인트는 평소 때와는 다른 법이지. 이 누나가 지금 그래. 그 넘치는 자존감에도 불구하고- 아니, 오히려 그렇기 때문에 더 힘들어하고 있어. 더 이상 존재할 수 없게 될지도 모르는 상황이니까. 거기에는 논리적인 확률 판단 같은 게 낄 수 없는 거야. 그러니까······ 신혜 누나는, 살기 위해서 말하고 있는 거야. 날 괴롭히기 위해서가 아니라, 반드시 살아야 할 이유를 다짐하기 위해서.’

소년은 또 윤대흥의 편지를 떠올렸다.

죽지 않기 위해서, 죽고 나서도 이찬의 미래를 돕기 위해서 썼던 그의 유서를 기억했다.

방법은 정반대지만 정신혜 역시 마음은 비슷할 터였다.

자신의 존재를 기억시키기 위해서. 혹시 모를 미래에도 이찬의 마음속에 중요한 사람으로 기억되기 위해서, 악담이라는 방법으로 그 존재를 각인시키려고 하는 것이다.

그 마음을 이찬은 무시하고 싶지 않았다. 그렇기에 구태여 오만한 얼굴로 작은 소녀를 내려다봤다.

“누나 죽으면, 바로 진아 누나랑 사귈 거예요. 키스도 많이 하고 완전 행복하게 둘이 잘 지낼 거예요. 나보다 먼저 스타 된다면서요? 스무 살 넘으면 찾아오라면서요? 자기가 했던 말도 못 지키고 도망치는 사람한테 관심 없어요.”

“야······ 이 나쁜 놈아! 내가 언제 도망쳤어!”

“그러니까 살아요. 그러니까, 죽지 말아요. 멀쩡히 살아나서 또 제대로 붙어보자고요. 스무 살 넘어서도 나한테 계속 관심 있으면, 그때는 긍정적으로 고려해줄 테니까. 물론 난 이미 톱스타 반열에 올라 있을 거니까, 아주 공손하게 와야 돼요?”

정신혜의 가면은 그 말을 들은 직후에 무너졌다.

강인한 자기확신으로 지켜왔던 표정이 흐트러진다. 그 아래에서 공포와 애수가 홍수처럼 쏟아지기 시작했다.

가면 속을 바라보는 이찬이 기다리고 있던 변화였다.

“흑······ 진짜, 너, 나쁜 놈이야······ 기다려. 나 다시 머리 길러서 연기 시작할 때까지, 딱 기다리고 있어. 그 전에 누구 만나기만 해봐. 내가, 내가 머리 빡빡 밀고 찾아가서, 걔 머리카락도 싹 다 뽑아버릴 테니까.”

“아이고 무서워. 그날 스포츠지가 아주 불티나게 팔리겠네요. 누나한테 고맙다고 홍보비 주겠어요.”

“씨이······ 진짜······ 기다려. 절대 안 죽을 거니까······ 킁.”

그 대화를 마지막으로 병실을 빠져나오며, 소년은 명진아를 생각했다.

‘참······ 그 누나한텐 여러모로 미안한데. 스무 살까지 5년이나 남았는데, 그동안 같은 회사에서 짝사랑만 하게 만들겠어. 그래도 이렇게 하는 게 맞는 거겠지. 죽은 사람 소원도 들어주는데, 산 사람 소원을 들어주지 않을 순 없는 거잖아.’

이찬의 발 앞에, 이제는 두 개의 소원이 놓였다.

윤대흥은 그가 행복해지길 바랐다. 사람들을 피하지 말고 좋은 사람들과 동행하며, 배우가 아닌 사람으로서 행복할 수 있기를 기원했다.

정신혜는 치기 어린 저주를 했다. 자신에게도 공정한 기회가 주어질 수 있도록, 스무 살이 될 때까지는 어떤 여자도 만나지 않기를 바랐다.

두 소원은 양립 가능한 것. 그렇지만 명진아에겐 조금 아픈 동행이 되지 않을까 싶었다.

‘그만큼 더 잘해줘야지. 좋은 작품도 많이 잡아주고, 나 말고는 슬픈 일을 겪지 않게 해줘야겠어. 여자의 마음은 갈대······는 모르겠지만, 누구에게나 5년은 긴 세월이니까, 그 안에 더 좋아하는 사람이 생길 수도 있겠지. 그러니까 연애 같은 건 그때 다시 생각하는 거야.’

복도를 돌아서 나타난 명진아는 과자가 담긴 봉지를 들고 있었다. 정신혜가 시킨 심부름이 그것이었던 모양.

이찬은 그녀를 그대로 돌이켜서 엘리베이터로 데려갔다.

“어? 왜 그래? 벌써 갈 시간 된 거야? 그런데 이거 신혜 줘야 되는데? 나 아직 인사도 못했단 말이야.”

“나중에 해. 어차피 지금은 뭐 못 먹어. 그 누나 수술 끝나고 멀쩡해지면, 그때 찾아가서 많이 먹여줘.”

“어어······ 그런 거야? 그럼 왜 먹고 싶다고 한 거지?”

알 수 없다는 듯 복잡한 표정을 짓는 명진아는, 누가 봐도 사랑할 수밖에 없는 소녀였다.

‘이렇게 티 나는 방법으로 내보낸 건데도 의심 하나를 못하네. 진짜 답답한 누나야. 이런 사람을 혼자 둘 수야 있나. 짝사랑 때문에 좀 답답하긴 하겠지만, 꼭 이적시켜야 되겠어. 그래서 내가 곁에 두고 지켜줘야지. 성인이 되고, 좋은 연기를 하고, 또 다른 사람을 사랑하게 될 수 있도록.’

안쓰러운 관비를 바라보던 암행어사의 마음.

자신의 미래보다는 두 소녀의 심정을 더 염려하면서, 이찬은 내려가는 버튼을 눌렀다.

*

8월 25일과 26일, 양일간 방영된 월화 미니시리즈의 시청률 승자는 <여름들판>이었다.

정신혜의 뇌종양이 드라마 촬영 과정에서 발견되어 조기에 절제수술을 받게 됐다는 소식에, ‘오진주’가 수술을 받는 15,16화 분량의 화제성이 폭발적으로 증가했다.

덕분에 <여름들판>은 다시금 30%의 벽을 넘을 수 있었다.

다만 <어사> 쪽도 큰 낙폭을 보이진 않았다.

이쪽은 애초에 시청층의 나이가 어린 까닭에 뉴스의 영향이 크지 않았고, 결국 <여름들판>으로 이동한 건 <야인>의 골수 시청자들 위주였던 것.

결과적으로 시청률은 32:31:13으로 분포되어, SBC에서는 <야인>의 조기종영을 고려하기 시작했다.

다만 내용 면에서 보자면, 한국드라마 특유의 후반부 감정씬 위주가 된 <여름들판>보다는, 역적들의 내분이 격화되어 새로운 구도가 형성된 <어사> 쪽의 화제성이 큰 상황.

이대로 시청률이 굳혀질지 아니면 다시 1위가 바뀔지는 누구도 예상할 수 없게 되었다.

그렇게 격전 속에서 맞이한 8월 28일.

이찬은 성남시 인근의 국도에서 대규모 엔딩 씬의 촬영을 무사히 마치고, 마침내 반년짜리 ‘인하’ 역을 벗게 되었다.

“고생하셨습니다, 감독님. 그럼 전······ 먼저 좀 가볼게요. 안 선생님, 병원 들렀다가 바로 연회장으로 가겠습니다.”

“그래. 조심히 다녀오렴, 찬아.”

아침 일찍 시작된 수술은 4시간 정도가 걸렸다고 했다. 해가 진 뒤에야 성남에서 촬영을 마친 이찬이 분장을 다 지운 건 늦은 밤. 그렇기에 목적지는 집중치료실이었다.

그곳에 정신혜가 있었다. 두 눈을 무섭게 부릅뜬 채로.

“안녕하세요. 전에 인사 드렸던 이찬이라고-”

“야, 이찬. 내가 너 때문에 지옥에서 돌아왔거든?”

먼저 인사부터 건네던 이찬과 곁에 있던 양친이 함께 얼빠지게 만든 뒤에, 그녀는 조심스레 쪽지 하나를 건넸다.

“비번이야. 내 미니홈피에 글 좀 남겨줘. 힘들었지만 수술 잘 이겨냈으니까, 꼭 돌아가서 최고의 연기자 되겠다고.”

결의로 가득한 눈동자. 이찬은 결국 피식 웃고 말았다.

< 26장 - 배우 정신혜 (3.) > 끝

ⓒ 비벗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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