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8장 - 폐인 이사랑 (2) >
“우와······ 사람들이 정말 많아. 우리 드라마를 좋아해주시는 분들이 이렇게 많구나······.”
얼떨떨한 듯 중얼거리는 명진아를 돌아보며, 이찬은 고개를 흔들었다.
“뭘 새삼스레. 시청률 40%면 적게 잡아도 500만 명이야. 그만큼 많은 사람들이 본 드라마인데, 천 명도 안 모인 게 더 이상한 거지.”
“으, 그런 거야? 그렇지만 <가을하늘> 때도 이 정도는 아니었는데.”
“그때야 인터넷이 잘 보급 안 된 때였잖아. 팬들끼리 재창작을 하면서 ‘폐인’이 되기는 힘들었지. 그리고 그때는 흔하디흔한 멜로드라마 중 하나였고, 이번 드라마는 사상 처음으로 시도된 무협 사극이고. 희소성이 다른 거야.”
“희소성이······ 히히. 찬이 넌 정말 똑똑하구나?”
어깨를 으쓱이고, 소년은 장막에서 손을 떼었다.
오늘 두 사람은 주최자가 아닌 특별 게스트. 팬들끼리 인사를 나누는 등 먼저 진행될 식순이 있어, 그들이 입장할 때까지는 시간이 한참 남아 있었다.
“좀 쉬어, 누나. 계속 서 있다가 다리 풀리면, 이따 합이 제대로 안 맞을 거야.”
“으, 응. 그런데······ 너무 긴장된다. 팬분들이 나 실물로 보고 별로라고 욕하시면 어떡하지?”
“말이 되는 소리를 해. 화면보다 더 예쁘다고 환장할걸?”
“화, 환장? 정말······?”
“그래. 누나는 피부가 좋잖아. 백옥 같은 느낌은 HD 화질로도 잘 안 담기니까, 실물 보고 놀라는 사람이 많을 거야.”
“백옥······ 아······ 고마워, 찬아.”
“고맙긴. 사실만 말한 건데.”
그걸 사실이라고 단언하는 점이 고마운 거라고 명진아는 생각했지만, 소년은 대답을 기다리지 않고 화제를 전환했다.
“누나, 차기작 생각은 아직 없지?”
“어? 찬이 넌 벌써 작품 골랐어?”
“아마 영화 하나 더 할 것 같은데, 누나는 쉬어. 공부 못해서 학교 잘리면 나쁜 쪽으로 유명해질 테니까.”
“아, 아니거든? 나 공부도 잘하고 있어. 계속 작품 해서, 공부 잘하는 만큼 연기도 잘하게 되고 싶은 건데?”
“거짓말인 거 티 나. 하더라도 드라마는 하지 마. 영화도 블록버스터는 피하고. 학업에 지장 안 가게 가족영화 정도 찍어. 사람이 교양이 있어야 된단 말이야.”
“으, 응. 찬이 너는 어떤 영화 고르고 있어?”
“그냥 이것저것 보고 있는데······ 시놉시스 한번 볼래? 오덕환 아저씨 차기작인데, 내가 해도 괜찮을지 모르겠어.”
그 말에 명진아는 살짝 당황했다.
그녀가 볼 때, 자신의 연기력에 확신을 갖지 못하는 이찬이란 헤엄치지 못하는 고래만큼 이상한 느낌이었다.
“어······ <고등형사>? 형사 중에 높은 사람이야?”
“그게 아니라, 형사 영혼이 고등학생한테 들어가는 거야.”
“와! 재밌겠다!”
“벌써 재밌으면 어떡해? 아무튼 그 형사는 자기가 학생이 된 거에 당황하면서도 꽤 기뻐해. 그 학생이 1년 전에 폭행 사건이 발생했던 학교에 재학 중인 애였거든. 학생 한 명이 자살기도까지 했는데도 기소유예가 된 건이라, 정의감 빼면 시체인 이 아저씨는 계속 그걸 조사해왔던 거지. 그런 사람이라 자기 몸 되찾는 것도 나중 문제고, 당장 내부에서 그 사건을 파헤칠 수 있게 된 거에 신이 난 거야.”
가벼운 말투로 설명하며, 이찬은 윤대흥을 떠올렸다.
그 형사라면 필시 그랬을 것이다. 자신의 몸이 어찌되건, 피해자의 원통한 마음을 풀어주기 위해 사건을 파헤치는 일에만 집착했을 것임에 분명했다.
그렇게 생각할 때마다 그랬듯, 가슴이 옥죄듯 답답해졌다.
‘나는 그렇게 하지 못할 거야. 타산적이고 이기적이니까. 나쁜 놈까지는 아니지만, 절대 정의로운 사람은 아닌 거야.’
소년이 혼자 생각에 잠긴 동안, 소녀는 금세 시놉시스를 독파했다. 그리고 갈증 같은 호기심을 얼굴에 머금었다.
“이거, 이거 어떻게 되는 거야? 형사님은 어떻게 돼? 정의를 구현한 다음에 성불하시고 마는 거야······?”
“그거야 영화 나오면 직접 보시고.”
“으아, 그러면 한참 기다려야 되잖아?”
“알려줘? 나름 반전이 있는데, 알고 보면 재미없을 텐데?”
“으······ 아니야, 참을게. 그런데 찬아, 이거 왜 고민하고 있어? 너라면, 세상에서 제일 잘할 수 있을 것 같은데?”
그거야 당연한 일이지- 생각하며 이찬은 한숨지었다.
“내가 별로 정의로운 사람이 아니거든. <어사>나 <684>는 시대극이니까 편하게 연기할 수 있었는데, 이건 현대극이잖아. 나랑 잘 안 맞는 배역을 연기한다는 게 뭔가 좀 걸려. 표현이야 가능하겠지만, 무거운 배역을 어설프게 연기하면 나중에 창피할 것 같아서.”
대중이 느낄 수 있는 차이는 아닐 것이다. 조혁수쯤은 되어야 ‘눈이 죽어 있군’ 하면서 고개를 갸웃거릴 만한, 배역과의 괴리감으로 인한 미세한 오차일 뿐이니.
하지만 그 스스로에게는 차이가 너무도 명징하다. 이찬은 납득할 수 없는 연기로 형사 배역을 모독하고 싶지 않았다.
그리고 명진아는, 이찬의 그 고민이 모독이라고 판단했다.
“무슨 소릴 하는 거야? 찬아, 너 왜 그래?”
“왜 그러냐니? 연기자로서 고민하는 건데? 자아와 배역의 괴리를 느끼면서 제대로 연기를 할 수는 없잖아?”
“이······ 바보야. 너는 이거, 세상에서 제일 잘할 수 있어. 영혼이 바뀐 학생 역할이라서가 아니야. 이거, 오덕환 감독님이 찬이 너 위해서 쓰신 각본이지? 딱 그렇게 느껴졌어. 어울려. 찬이 네가 꼭 해야 되는 배역이야.”
“아, 누나 좀 착각하고 있구나.”
이찬은 히죽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수해복구 성금 낸 거 때문에 내가 정의로운 사람이라고 생각한 거지? 그거 아니야. 나 솔직히 기부하기 전에 계산 많이 했어. 착한 이미지가 CF 잡는 데나 팬덤 확장하는 데 도움이 많이 되니까 그렇게 한 거라고. 나 별로 정의감 없어.”
그 말에, 명진아는 전혀 놀라지 않았다. 그 대신 눈썹을 역팔자로 치켜세우며 몹시 뾰로통해졌다.
“바보 찬이. 정의로운, 그런 거 말하는 게 아닌데? 나는 벌써 봤단 말이야. 이 고등학생 형사님이 다친 학생 찾아가면서 눈물 참는 모습을, 벌써 봤다구······ 너한테서.”
“나한테서? 언제? 아, 유관 연기할 때?”
“아아니······. 신혜, 아팠을 때. 내 팔목 잡고 택시 잡으러 갈 때. 그때 엄청 무서웠어. 그렇지만, 되게 멋있었어. 이 영화 형사님처럼······.”
전혀 예상치 못한 이야기에, 소년은 고개를 갸웃거렸다.
하지만 추가적으로 설명을 들을 기회는 주어지지 않았다.
“찬아, 진아야. 이제 너희 나가면 된대. 자, 가보자.”
매니저 염수진의 부름에 자리에서 일어서며, 이찬은 명진아가 언급한 8월 23일을 회상했다.
그렇지만 정신혜의 질환을 들은 뒤에 어떤 표정을 지었었는지는 명확하게 기억나지 않았다.
윤대흥의 부고를 전해 들었던 순간과 마찬가지로.
*
팬들의 주관적인 시선에서, 팬미팅의 하이라이트는 스타가 등장하는 바로 그 순간이라고 할 수 있다.
<어사>의 첫 팬미팅 역시 그랬다. 이찬과 명진아가 장막을 걷고 무대 위에 유생 유관과 다모 채화를 선보인 순간, 연회장을 가득 채운 팬들은 뜨거운 환호로 그들을 반겼다.
그리고 드라마의 주연배우들은 그날의 하이라이트가 되었다. 객관적으로 봤을 때에도.
“채화야. 내가 기루에 갔다니, 말도 안 되는 낭설이다.”
“어찌 발명(發明)을 하십니까? 그게 무슨 나쁜 일이라고.”
“그런 게 아니다. 내 주상 전하의 밀명을 받잡고 기루에 잠입했다가, 신분을 들킨 탓에 취객인 척했을 뿐이야.”
“그렇지만 늘씬하고 어여쁜 기생들을 끼고 진탕 노신 것도 사실 아닌지요? 애쓰실 것 없습니다. 제가 면천을 했다지만, 여전히 나리의 집안과는 어울리지 않는 것을요.”
박수와 환호성은 한참 전부터 멎어 있었다. <어사> 때의 복색 그대로 무대에 올라 뜬금없이 후일담을 연기하는 두 사람에게, 800의 어사폐인들은 순식간에 빠져들었다.
인터넷 생방송을 진행하던 일부 IT 폐인들만이 간신히 정신을 차리고 카메라 프레임을 연신 확인했다.
그런 상황에서, 이찬이 연습용 가검을 뽑았다.
“하는 수 없구나. 네가 이토록 날 믿어주지 않으니, 널 향한 단심(丹心)을 검으로 보이는 수밖에.”
“좋습니다. 어디 얼마나 솜씨가 느셨는지 볼까요?”
그 뒤로 이어진 연기는 액션 씬이라기엔 지나치게 아름다웠다. 그건 정교하게 어우러지는 한 편의 검무(劍舞)였다.
일당백의 홍보로 드라마를 응원해준 폐인들을 위해 준비한, 두 배우의 선물인 셈이었다.
그렇게 스타가 팬에게 소중한 기억을 선사하는 것과 같이, 때로는 팬이 스타의 특별한 경험이 되기도 한다.
이찬의 경우에는 소녀 이사랑이 그에 해당했다.
“안녕하세요, 배우님? 저는 이사랑이라고 합니다.”
“안녕하세요. 학생이신가 봐요? 교복 입으셨네요.”
“네! 저 중학교 2학년이에요. 이찬 배우님이랑 동갑이에요.”
무려 3년의 시간을 보내고 복귀한 이찬이지만, 연기판에서 그의 나이는 아직도 어린 축에 속한다. 아역이 거의 등장하지 않은 <어사>와 <684>에서 그는 가장 어린 배우였다.
그렇기에 동갑과 마주하는 건 수년 만의 경험이었다.
‘대화를 나눈 걸로 치자면 고아원 나오고 나서 처음인 셈인가? 되게 반갑네. 교복을 입은 중학생이라······.’
그는 입어본 적 없는 현대적인 교복. 하늘색 셔츠 아래에 까만 치마를 받쳐 입은 소녀가 황홀하다는 듯 웃는다.
또래들 사이에서는 익숙해야 마땅한 모습이지만, 이찬에게는 그게 낯설고 멀었다.
“그럼······ 우리 말 놓을까?”
“네! 아, 응!”
“반가워. 앞으로도 많은 사랑 부탁해, 사랑아.”
“으, 응! 영원히 사랑할게!”
대화는 딱 거기까지였다. 어리지만 멋진 스타들과 악수하기 위해 팬들이 줄을 지어 서 있었기에, 그중 한 명과 긴 이야기를 나눌 수는 없었다.
하지만 기억력 좋은 이찬의 머릿속에 이사랑의 모습은 분명하게 각인되었다.
그렇기에, 그 1주일 뒤에 거행된 행사에서 그녀를 곧바로 알아볼 수 있었다.
“사랑이네? 뭐야? 여기도 왔어?”
“차, 찬아! 응! 교복 입은 거 진짜 멋있어!”
팬클럽 창단식의 이벤트로서 <가을하늘> 배역에 맞는 구식 교복을 입고 행사장에 들어섰을 때.
그때도 소녀는 하늘색 교복을 입고 있었다.
토요일이니 방과후에 집에 들러서 옷을 갈아입고 와도 됐을 법한데, 이사랑은 동갑내기 스타에게 외모로 어필할 생각은 전혀 없는 듯 보였다.
‘열다섯이면 보통 엄청 꾸미고 싶을 나이 아닌가? 진아 누나랑은 또 다른 의미에서 순수한 것 같아.’
그렇게 생각하며 돌아봤을 때, 명진아 역시 마주선 이찬과 이사랑을 바라보고 있었다.
“어······ 전에 오셨던 분!”
“네, 언니!”
“또 뵙네요? 찬이 많이 좋아하시나 봐요······.”
“네! 세상에서 제일 좋아요!”
“자, 이제 무대로 가자. 팬들하고 인사해야지.”
염수진이 두 사람을 잡아끈다. 한 명의 팬을 위해 시간을 길게 쓰기에는 객석을 메운 다른 팬들이 너무 많았다.
그렇게 이사랑과 멀어져 무대 위로 오르며, 이찬은 그게 조금 아쉬운 이별이라고 생각했다.
‘배우 이찬을 좋아하는 동갑내기랑 함께 시간을 보낼 수 있다면, 꽤 의미 있는 일이 됐을 것 같은데. 형이 원했던 것처럼 평범한 학생이 되어주는 대신으로······.’
그건 사실 이사랑이야말로 가장 간절하게 원하는 일이었다. 빛나는 스타인 이찬과 달리 일개 팬일 뿐인지라, 감히 뚜렷하게 희망할 수 없었을 뿐.
그런 두 사람의 바람은 우연한 계기로 달성되었다.
팬미팅 후반부에 진행된 식순을 통해서.
“다음으로는 스타와의 일일데이트 추첨을 진행하겠습니다. 여러분의 좌석번호가 적힌 제비가 이 상자 안에 들어 있는데, 그중에서 하나를 뽑을 거예요. 그래서 오늘 저녁 제 시간을 빌려드릴 예정입니다······.”
거기까지 말한 뒤에는 이야기를 더 이어가기 어려워졌다. 팬들의 환호성이 지나치게 커져버린 탓에.
“어······ 여러분, 조금만 조용히 해주세요. 아직 좋아하실 타이밍 아닌데. 만약에 여기 당첨되시면, 오늘 여러분이 하고 싶으신 거 뭐든 같이 해드릴게요. 범죄만 아니라면요. 경비는 제가 모두 부담할 거예요. 백만 원 한도 내에서 맛있는 거 다 사드리고, 놀 거 다 놀고, 그래도 돈이 남으면 선물까지 사드릴 거예요. 자, 여기서 박수 주셔야죠?”
어둑한 객석의 흐릿한 얼굴들이 웃으며 갈채를 보낸다. 그들의 감정이 손에 잡힐 듯이 들여다보였기에, 이찬은 편안하게 제비 상자로 손을 가져갈 수 있었다.
“당첨자는······ 317번이네요. 일어서 주실래요?”
바로 그때 교복을 입은 이사랑이 몸을 일으켰던 것이다.
꿈을 꾸는 것처럼 몽롱한 얼굴은, 당황 속에서 아직 기쁨조차 느끼지 못하는 것으로 보였다.
*
“저, 저거, 저도 같이 가면 안 될까요?”
잔뜩 떨리는 목소리로 급히 내뱉은 명진아의 말에, 금양기획 실장 조진영은 헛웃음을 터뜨렸다.
“하하, 무슨 소리야? 남의 팬이랑 뭐 하게?”
“그게······ 저도 오늘 게스트고, 찬이랑 두 작품이나 같이 했잖아요? 그러니까 찬이 팬도 저 좋아하시지 않을까요?”
“그럴 수도 있지만, 실례 아니겠냐? 좋아하는 스타랑 단둘이 보내는 시간에 방해가 될 수도 있단 말이야.”
“그럼 한번 물어볼까요? 같이 가도 될지······.”
“너도 참 공짜를 좋아하는구나? 하지만 오늘은 절대 안 되지. 감독님이랑 미팅 있잖아.”
그 말을 듣고서야 명진아는 혼돈 속에서 빠져나왔다.
‘그렇지. 오늘 김세진 감독님이랑 미팅이지. 그리고 같은 기획사도 아닌 내가 팬과의 만남에 끼어드는 것도 많이 이상해 보일 거고······ 어쩔 수 없이 빠져줘야 되는 거야.’
다시 한 번 장막을 들추자, 무대 위로 올라온 이사랑이 이찬과 악수하며 눈물을 왈칵 퍼붓는 모습이 보였다.
그걸 바라보며 명진아는 8월의 그날을 회상했다.
정신혜의 병환을 입에 담으며, 그 어떤 배역에서보다 무거운 표정으로 괴로워했던 이찬의 얼굴을.
< 28장 - 폐인 이사랑 (2) > 끝
ⓒ 비벗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