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9장 - 배우 임호준 (1) >
상업영화의 감독이란 대단히 어려운 직업이다.
업종을 분류하자면 예술적 상품을 만들어 파는 직종인데, 본질적으로는 소설가나 만화가 등과 크게 다르지 않다.
다만 거기에 들어가는 돈이 여타 예술과는 차원이 다르다는 점이 문제였다.
장비의 대여 비용, 세트 제작비, 로케이션 섭외비, 스탭들의 인건비, 홍보와 배급 부대비용, 거기에 배우들의 개런티까지.
각 분류마다 적어도 억 이상이 소모되는 그 제작비를 마련해야 자신의 영화를 만들 수 있는 것이다.
만약 재벌2세거나 다른 사업으로 번 돈이 많다면 사재를 털어 제작할 수도 있다.
이런 경우를 자주제작이라 부르는데, 당연한 얘기지만 극히 소수에 해당하는 케이스였다.
대부분의 상업영화는 투자자들을 유치한다. 상영 이후의 수익 배분을 약속하고 미리 자본을 끌어오는 것.
일부 성격 좋은 감독들은 그 역할을 스스로 맡곤 한다. <684>의 계진행 감독이 대표적인 케이스.
‘사계 프로덕션’의 대표를 겸하는 그는, 직접 투자자와 면담하고 차기작의 마케팅포인트를 설명하는 데에도 능했다.
하지만 극히 예외적인 사례일 뿐. 일반적으로 붙임성이 좋지 않은 감독들에게는 쉽지 않은 작업일 수밖에 없다.
그래서 그런 과정을 타인에게 위탁하는 일이 흔했다. 그런 이들은 투자자를 모으고 제작비를 집행하는 권위를 갖게 되는데, 그런 직종을 따로 제작자라 불렀다.
그렇게 자본주의에 입각한 관계 속에서 감독은 소외된다. 투자자들과 제작자 사이에서 영화의 모든 요소가 결정되니, 의견차가 큰 경우엔 감독조차 소모품처럼 교체되곤 했다.
그렇기에 대부분의 감독들은 일종의 하청업자다. 제작자와 투자자들의 입맛에 맞는 영화를 만들기 위해 자신의 날개를 꺾어야 하는.
그러면서 언젠가 거장이 되어 자신의 이데아로 날아갈 날을 갈망하는 것이다.
그러나 사실은 그 인내조차 흔치 않은 행운이었다.
감독의 재능도 작품의 성공도 쉽게 예단할 수 없는 일이고, 직접 작품을 만들 기회는 아무에게나 주어지지 않는다.
자연히 수많은 감독들이 조감독이나 촬영감독으로 부업을 하며 생활비를 충당하곤 했다.
그러니 대단히 어려운 직업이 아닐 수 없는 것이다.
길고 긴 사다리를 올라가 피라미드의 꼭대기에 선 이들만이 누릴 수 있는, 조금 과장하면 피의 권좌라고 해도 과언이 아닌 자리.
그렇지만 그 결과 주어지는 건 소국의 옥새에 불과해, 막상 감독이 된다 해도 투자자들 등쌀에 자기 작품을 난도질당하기 십상이다.
신체적으로도 고단하며 정신적으로는 그 몇 배의 스트레스를 받게 되는 직업.
그저 꿈꾸는 것만으로 끝났으면 좋았을, 어리석은 진로.
그러나 그 안에서도 빛나는 별과 같은 이들이 존재한다. 바닥에서 시작해 하늘 꼭대기까지 올라간 입지전적인 인물들이.
그중 대표적인 사례가 오덕환이었다.
그는 계진행과는 달리 타인과 소통할 줄 모르는 괴짜였다. 특출한 재능이 있었기에 프로덕션의 설립자로 위촉됐지만, 어디까지나 이름만 올린 공동대표였다.
그런 주제에 자존심은 거장들보다도 강했다. 각본 수정을 요청한 투자자들을 찾아가 들이받았다가 프로젝트가 무산된 적이 한두 번이 아니었다.
표현은 못해도 마음은 따뜻한 오덕환은, 그런 경험 속에서 조금씩 철이 들었다. 프로덕션 식구들을 위해서라도 자신을 억눌러야만 한다고 생각하게 되었다.
그런 변모의 끝에서 꿈을 꺾고 끼워팔기와 난도질을 용인했던 <미스 스캔들>.
그러나 그 작품은 종내 단 한 줄의 칼질도 당하지 않은 채 원안 그대로 스크린에 올랐으며, 2000년도 한국영화 중 2위의 흥행을 거뒀다.
1위가 제작비 30억짜리 블록버스터 였으니, 순수익으로 따지자면 그 해 최고의 작품이었던 셈이고.
그 믿을 수 없는 행운을 안겨준 건 단 한 명의 소년.
그가 지금 오덕환의 앞에서 눈치를 살피고 있다.
“그래서 생각해본 건데······ 이거 불쾌하게 생각하진 마세요? 주인공 배역을 조금 수정했으면 싶어요. 아주 조금요.”
“어떤 면에서?”
“제가 받은 25고에선 그야말로 정의의 화신이잖아요? 아마 이번 <어사> 보시고 그렇게 설정을 하신 게 아닌가 싶었어요. 그만큼 멋있기는 하지만, 제 생각에 ‘유관’ 캐릭터는 사극이라서 통용될 수 있었던 것 같거든요. 아무래도 경찰에 대한 사람들의 시각이 그렇게 곱지만은 않잖아요? 그런데 현대 배경에서 신기할 정도로 헌신적인 형사가 등장한다? 그러면 감정을 이입하기가 쉽지 않을 것 같아요.”
“그렇다면?”
“지금의 완성형 형사를 성장형으로 바꿔보고 싶어요. 처음부터 정의로 가득했던 게 아니라, 극이 진행되면서 조금씩 아이들의 고통에 공감하게 되는 식으로요. 어렸을 땐 그냥 싸움질 즐기는 불량배였고, 그나마 깡패는 되기 싫어서 형사라는 직종을 택했는데, 몸이 바뀌고 여러 사건을 겪으면서 진짜 존경스러운 형사로 변해가는 거죠.”
“좋은 생각이야.”
짧은 고민도 없이 고개를 끄덕이는 오덕환을 보며, 이찬은 머쓱해졌다.
‘혹시나 싶어서 장황하게 설명을 한 건데, 기만이나 분노의 징후가 아예 없네. 정말 희한한 아저씨라니까.’
감독의 권좌는 무겁다. 제작자나 투자자들에게는 늘 까이기만 하는 처지지만, 적어도 제작 과정 안에서 그 권위는 무소불위라고 불려 마땅했다.
그렇기에 주연배우라 할지라도 감독에게 각본의 수정을 종용하지는 못한다. 디테일을 추가하는 가벼운 애드립조차 조심스럽게 이뤄지는 게 상례였다.
거기에 오덕환은 거장이라는 이름에 도전하는 명감독.
스스로 각본을 쓴 <미스 스캔들>과 <칠월칠석>의 어마어마한 흥행을 통해서, 이미 가족영화 장르의 1인자 소리를 듣고 있다. 투자자라고 할지라도 함부로 입을 댈 수 있는 입지가 아니었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내게는 이렇게 고분고분하다는 거지. 이해할 수 없는 일이야. 남태형 아저씨 발전시킨 게 그렇게 인상적이었던 걸까?’
소년이 읽을 수 있는 건 어디까지나 감정뿐.
오덕환의 복잡한 사고체계 속에서 자신이 마치 태양과도 같이 빛나는 존재라는 건, 쉬이 알 수 있는 일이 아니었다.
하지만 얼굴에 드러난 신뢰와 경외의 미세표현만으로도 자신감을 얻는 데에는 충분했다. 이찬은 자신의 구상을 조금 더 표출해보기로 결심했다.
“그래서 형사 역 연기자도 생각을 좀 해봤어요. 물론 감독님께서도 생각하신 배우가 따로 있으시겠지만-”
“없어. 네가 원하는 배우로 섭외할 생각이었어.”
“아······ 그렇군요. 그러면, 임호준 선배님 어떠세요?”
뜻밖의 얘기를 들었다는 듯 오덕환이 눈을 크게 떴다.
“임호준······ 임호준. <날 보러 와요>로 이제는 대배우가 된 연기자. 거기서도 형사 역이었는데, 이걸 하려고 할까?”
“설득해봐야죠. 주연도 아니고 일종의 역(逆) 아역이라고까지 말할 수 있지만, 오히려 임팩트는 클 거라는 식으로요. 사실은 까메오가 돼야 하는 역이긴 한데, 친하지 않으시죠?”
“그렇지. 나랑은 친분이 없지.”
까메오라는 건 개런티를 주지 않는 캐스팅을 뜻하는 용어.
다양한 인간군상을 다룬 작품에서는, 작중 비중이 낮음에도 뛰어난 연기력을 필요로 하는 배역이 종종 있다. 이런 경우에 감독은 친밀한 스타를 소정의 사례비만으로 섭외하곤 한다.
제작비 낭비 없이 작품성을 제고할 수 있는 방책이자, 감독의 인맥을 자랑할 수 있는 이벤트인 셈이었다.
한편 배우 쪽에선 주로 두 가지 목적성을 갖고 까메오 제안을 받아들이게 된다.
첫째는 감독과 인간적인 신뢰관계를 구축하기 위해. 둘째는 스스로에게 새로운 이미지를 부여하기 위해.
스타라고 해도 기존에 맡아본 적이 없어 섭외가 들어오지 않는 배역이 있다. 그런 것을 까메오로 선보임으로써, 자신의 연기 스펙트럼을 확대하는 용도로 활용하는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임호준은 까메오 성사 가능성이 가장 낮은 배우들 목록에 속했다.
에서 강정후와 연기대결을 펼치며 일약 스타덤에 오르고, 이후 조금 부침이 있긴 했지만, 2003년 봄에는 화성연쇄살인사건을 다룬 <날 보러 와요>의 시골형사 역을 통해서 차세대 국민배우로서 입지를 굳힌 배우.
그런 그가 친하지도 않은 감독의 형사 역 까메오 제안을 받아줄 가능성은 낮았다.
“당장 제작할 거 아니니까, 우선은 친분부터 쌓아봤으면 좋겠어요. 제가 자리를 좀 만들어볼게요.”
“네가? 아, 강정후 통해서?”
“예. 그 선배가 의외로 인맥관리를 잘하더라고요. 최근까지도 임호준 선배님이랑 자주 연락했다고 들었어요.”
“그렇군. 그런데······ 이젠 선배라고 부르는구나?”
이번에는 소년이 눈을 동그랗게 떴다. 설마 그런 디테일까지 기억하고 있으리라곤 생각지 못했기에.
<미스 스캔들> 촬영 당시까지만 해도 강정후와는 대화 한 번 해본 적 없는 사이였고, 당연히 호칭은 아저씨였다.
그러나 이제는 여러 일로 얽히며 나름대로 인간관계라는 것이 생긴 상태. 비슷한 재능을 갖고 힘겹게 성장했을 인물에게 선배 대접 정도는 해주기로 한 참이었다.
다만 오덕환에게 그런 이야기를 해주기는 좀 민망했다.
“그냥 뭐, 아저씨보다 음절이 짧으니까요.”
“보기 좋네.”
“보기 좋을 것까진 없고요.”
“그러면 그쪽은 임호준으로 하고. 다른 배역은 어떻게 할래? 더 추천할 배우 있으면 얘기해. 나머지 배역들만 추려서 오디션 공고할 테니까.”
“오······ 그러면 끼워팔기도 돼요?”
“누구? 임희재?”
“그 누나는 마땅한 배역이 없던데요. 그냥, 저희 회사에 모델 출신 신인배우들이 좀 있거든요. 학생 역 맡기기 괜찮은.”
“모델 출신이라.”
“제가 키가 좀 많이 컸잖아요? 그러니까 붙는 씬에서 키 큰 배우들이 필요할 텐데, 그런 면에서 적절할 것 같았어요. 물론 연기도 썩 나쁘지 않아요. 아시잖아요? 저희 회사 신인들 안정록 선생님이 가르치고 계신 거.”
청산유수처럼 말하고 있지만, 이찬 입장에서도 예정에 없던 제안이었다. 회사 동료들을 팔아줄 만한 애사심은 없었기에.
다만 이찬은 편의성을 생각했다.
오디션을 통해 실력을 인정받은 배우들보다는 끼워팔기로 합류한 신인들 쪽이 대하기 편하다. 독한 말로 연기지도를 해도 반항을 하지 못할 테니.
오덕환 감독 역시 막 그런 가능성을 인지한 참이었다. 자연히 입가에 진한 미소가 감돌았다.
“남태형 같은 애도 환상적인 연기자로 탈바꿈시켰는데, 모델 출신이라고 다를까. 네가 데려오는 거라면 누구든 오케이.”
“와······ 감사합니다. 한번 만나보고, 추려서 데려올게요.”
웃으며 고개 끄덕이는 오덕환에게 인사하고, 이찬은 안정록에게 얼핏 들었던 신인배우들의 신상명세를 떠올렸다.
*
“이찬?”
뜻밖의 이름을 듣고, 임호준은 퍽 당황했다.
전화의 발신자가 그럴 만도 하다는 듯 웃었다.
[맹랑한 녀석입니다. 걔 연기하는 거 보셨죠?]
“드라마 영화 다 봤지. 애가 아주 되바라지던데?”
[원체 그런 앱니다. 이번에 <미스 스캔들> 때 호흡 맞췄던 오덕환 감독님이랑 차기작 준비하는 모양인데, 거기에 형님을 까메오로 엮고 싶은 모양이에요. 형님이 아니면 안 되는 배역이라고, 저보고 꼭 좀 다리를 놔달라고 부탁을 하네요.]
“내가 아니면 안 되는 까메오다? 근데, 오덕환 감독이 신작 썼다는 얘기는 내가 처음 듣는데?”
[그럴 만도 하죠. 3년 동안 무려 25고까지 수정하면서도 한 번도 외부에 반출한 적이 없었다고 하네요. 궁금하시죠?]
웃는 낯이 고스란히 연상되는 목소리. 임호준은 강정후가 자신을 참 잘 꿰고 있다고 생각했다.
‘굳이 감독 만나지 않는다고 해도 어차피 나중에는 볼 수 있게 되겠지만······ 이거 너무 궁금한데. 오덕환의 25고짜리 비밀 시나리오라. 보고 싶어 미치겠어. 거참. 내가 각본 호기심 많은 건 어떻게 알아가지고, 이런 걸로 꼬드기고 있네.’
그게 썩 기분 나쁜 일은 아니었다. 모난 데 없이 정도껏 까부는 강정후는, 그가 몹시 아끼는 후배 중 한 명이기에.
다만 하는 짓이 조금 얄미울 뿐이었다.
“뭐······ 일단 만나는 걸로 하고. 자리엔 누구누구 와? 감독이랑, 이찬 걔랑? 걔 배역은 어떤 건데?”
[원톱 영화라고 하네요. 혼자 북 치고 장구 치는.]
“그래? 흠······ 무슨 시나리오길래 그렇게 가지? 딱 떠오르는 건 액션활극인데, 오 감독이 그런 거 쓸 사람은 아닌데?”
[직접 만나서 들으시라니까요? 오 감독님한테 연락처 전할게요. 괜찮죠?]
“어, 뭐, 그래라. 야, 너는 그리고 이렇게 필요할 때만 연락을 하지 말고, 맛있는 거 먹을 때도 연락 하고 그래라. 전에 은희한테는 와인 샀다며? 왜 나하고 볼 때는 맨날 소주만 사는데? 이 자식, 이거 아주 편파적인 놈이야.”
[하하하하. 선배님, 후배한테 빨대 꽂으시면 되겠습니까? 선배님이 쏘세요. 영화도 잘되셨으면서.]
“······음. 다음에 보자. 너 이번 영화 개봉해서 천만 관객 찍고 하면, 그때 보자고.”
[예, 예. 그러시죠.]
불리한 화제를 피해 대화를 마무리하고, 임호준은 고개를 갸웃거렸다.
“오덕환에 이찬. 원톱이면 로맨스는 아닐 거고. 키 큰 꼬맹이 데려다 뭘 할까? 뭘 하지? 이거 상당히 궁금한데?”
어차피 감독과 만나면 다 듣게 될 일. 하지만 임호준은 꼼짝도 않은 채 오덕환 차기작 위로 상상의 나래를 펼쳤다.
*
“······된 거예요?”
“된 거지. 다 들었잖아?”
귀찮다는 듯 인상 찡그리는 강정후를 보며, 이찬은 찝찝한 기분에 의자 다리를 톡 찼다.
“뭐가 이렇게 간단해? 내가 직접 전화해도 됐었겠네.”
“이 새끼가 고맙다는 말은 안 하고. 야, 내가 이 선배랑 이만큼 인맥 만드는 데 들인 시간이 얼만 줄 알아? 낯가림 심해서 같이 영화 찍고도 연락처 못 받는 배우들이 수두룩한 사람이다. 네가 전화했으면 대화도 제대로 못 했어.”
“그래요? 신기하네. 목소리가 다정하던데.”
“내가 그만큼 잘 보였으니까 그런 거야.”
강정후가 선배 배우에게 잘 보이기 위해 아양을 떠는 모습을 떠올려본 이찬은, 곧 오한을 느끼고 몸을 떨었다.
“아, 괜히 상상했다. 아무튼 고마워요. 나중에 밥 살게요.”
“밥은 됐고, 약속한 거나 까먹지 마라. 내기 안 지키면 죽는다.”
“뭘 벌써 이긴 것처럼 그래요? 드라마로 탈탈 털린 거 벌써 까먹으셨나? 최종화 시청률이 10% 넘게 차이 났죠 아마?”
“······그거야, 그 미친 아나운서 때문이고. 젠장. 뭐 그딴 여자가 저녁뉴스 앵커여서 이슈를 만들고 지랄인지.”
“패배자의 변명 잘 들었고요.”
“이 새끼는 한마디를 안 지려고 하네. 꺼져.”
난폭하게 말하는 목소리지만, 얼굴은 웃고 있다. 이찬은 대충 목례하고 연습실을 나섰다.
< 29장 - 배우 임호준 (1) > 끝
ⓒ 비벗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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