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9장 - 배우 임호준 (2) >
뜻밖의 전화로부터 일주일이 흐른 뒤.
가을이 완연해진 날씨 속에서 옷깃을 여미며 고급 한식집에 들어선 임호준은, 내부를 둘러보며 생각했다.
‘시벌. 여기 엄청 비싼 데 아닌가? 덕 필름이 <칠월칠석>으로 돈을 많이 벌긴 했나본데.’
제작비에 채 20억이 안 들어간 영화가 500만 관객을 달성했다. 투자자 수익 분배하고도 프로덕션에 최소 30억 정도는 떨어졌을 터였다.
그렇다면 까메오 섭외를 위해 고급 식당 예약하는 것도 큰 문제는 아니었으리라. 임호준은 그렇게 생각했다.
프리이빗 룸에 들어선 뒤에야 그게 착각이었음을 깨달았다.
자연스레 손님을 반기는 첫 번째 얼굴을 통해서.
“어서 오세요, 선배님.”
“어, 이찬? 반갑다. 그런데 오 감독님은?”
“방금 통화했습니다. 5분 안에 오신대요.”
“음······ 그래. 이 키 큰 친구들은 뭐야? 경호원이냐?”
“저희 회사 후배 분들이에요. 이번 영화에 추천할 생각인데, 선배님께 미리 인사드리면 좋을 것 같아서 데려왔어요. 후배님들, 인사드리세요.”
늘씬하고 잘생긴 남자 두 명과, 어지간한 기성배우들도 기죽일 만큼 예쁜 여자 한 명.
그들의 인사를 흘려들으며 임호준은 이찬에게 집중했다.
“내가 상황을 제대로 전달을 못 받았는데······ 혹시 이 영화, 나라엔터에서 투자하냐?”
“표면적으로는요. 실질적으로는 제가 투자자예요.”
“아, 그래? 그럼 여기도 네가 사는 거구나? 그런데 네가 무슨 돈이 있어서? 드라마 출연료는 다 기부했다면서?”
“일단은 CF 계약금으로 충당할 건데, 촬영하다보면 <684> 개봉해서 러닝개런티가 들어올 거예요.”
“아, 그게 러닝이었어?”
“거기에 그 영화에도 투자금 좀 걸었어요. 1억 정도지만요.”
“······너 그럼 당장 돈이 없겠는데? CF를 몇 개나 했길래 당당하게 투자자니 뭐니 말을 하는 거야?”
“열두 개요. 지금 찍어놓은 건 핸드폰이랑 비타민 두 개인데, 감사하게도 촬영이 끊이지 않을 것 같네요.”
입이 떡 벌어지는 이야기였다.
말이 열두 개지 실제로 들어온 러브콜은 그 배는 되었을 것이다. 나라엔터 홍보팀에서 간판급 배우 이미지를 위해 거르고 거른 결과물일 테니.
그렇다면 나이 어린 A급 배우를 쓸 수 있는 광고주들은 전부 다 몰렸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터였다.
“······무지하게 들어왔네. 하긴, 드라마가 워낙 명작이었지.”
“운이 좋았죠. 하지만 이렇게 선배님까지 모셔왔으니, 이번 영화도 사활을 걸고 명작 한번 만들어보려고 합니다.”
“나 아직 한다고 안 했는데?”
“예. 아직은 말씀 안 하셨죠.”
그렇게 말하며 생글생글 웃는 모습이 꽤 능숙해 보인다. 나이를 모르고 만났다면 저절로 고개가 끄덕여졌을 법한 노련미였다.
하지만 임호준은 소년의 나이를 알고 있다.
고작 열다섯 소년이 영화의 투자자라는 점에서 불편함을 느낄 만한 상식도 갖고 있었고.
“흠······ 괜한 간섭일 수도 있긴 한데, 이 말은 해야겠다. 너 돈 좀 벌었다고 너무 겁이 없어진 것 같은데? 영화 투자라는 게 그렇게 생각 없이 해도 되는 일이 아니야.”
“하지만 누군가는 해야 하죠. 기왕이면 많은 사람들이요. 그래야 더 많은 작품이 스크린에 오르고, 그중에서 예상치도 못한 명작들이 탄생하지 않을까요?”
“어린 게 말을 참 잘하는구나. 부모님은 아시냐? CF로 번 돈을 이런 데다 투기를 한다는 걸?”
“에이, 투기라뇨. 순수하게 한국 영화산업의 발전을 위해 노력하는 건데요?”
“하 참. 말로는 못 당하겠네.”
거기까지 대화를 나누고서야 자리에 앉았다.
그 뒤에 이찬이 먼저 마주앉았고, 신인배우 셋은 소리도 내지 않고 조금쯤 떨어져 자리를 잡았다.
그 모습을 가만히 지켜보다가, 임호준이 또 물었다.
“너희······ 대충은 알겠는데, 이찬 네가 키가 크니까, 상대역들을 키 큰 애들로 데려온 모양이지? 그런데 왜들 낯이 익지 않을까? 나라엔터에 잘나가는 모델 배우들 꽤 많잖아?”
“예. 그분들도 고려해보긴 했는데, 직접 만나봤더니 저분들이 더 역할에 맞을 것 같더라고요.”
“뭐야? 네가 형 누나들 오디션을 심사했어?”
“그게 감히 오디션이라고 할 것까진 아니고요. 그냥 감독님께 추천해드릴 배우들을 선별한 거죠.”
“그게 그거지. 야, 그래서 쟤들이 너한테 아주 깍듯하구나? 생사여탈권을 쥐고 있는 영화 투자자님이니까, 나이가 어려도 함부로 대할 수가 없는 거야. 맞지?”
그 짐작에 이찬은 긍정도 부정도 하지 않았다. 어디선가 봤던 것 같은 느긋한 미소만을 보였을 뿐.
“······아무튼, 너 방금 쟤들이 더 역할에 맞을 것 같았다고 했지? 어떤 면에서 그렇게 생각했는데?”
“일단은 뉴페이스라는 점에서요. 정후 선배한테 들으셨겠지만, 이 영화에서 제가 원톱이거든요. 이미 유명한 얼굴들 때문에 시선이 분산되지 않았으면 했어요.”
“그래서 실력도 없는 애들을 줄줄이 끼워팔기로 한 거야?”
“에이, 그렇지 않습니다. 두 번째 이유가 실력이에요. 누구나 반할 수밖에 없는 실력파 뉴페이스들만 모셔왔다고요.”
임호준은 별 헛소리를 다 듣겠다는 듯 웃었다. 조금만 쓸 만하면 선보이고 보는 나라엔터에 실력파라고 불릴 만한 뉴페이스가 있을 리 없기에.
하지만 잠깐일 뿐이었다. 이찬의 손짓에 세 신인이 자리에서 일어서자, 그는 금세 호기심 넘치는 표정이 됐다.
“뭐야? 뭐 하게?”
“선배님 지루하시지 않게, 짧은 연기 준비하셨대요. 이제부터 그걸 보여드릴 거예요.”
“뭐야? 나한테도 오디션 보겠다고? 난 아직 이거 한다고 안 했다니까?”
“알죠. 감독님 도착하실 때까지 혹시 심심하실까봐요.”
그 뒤에 세 배우의 단막극이 시작되었다.
먼저 입을 뗀 건 박준호라고 이름을 밝힌 날카로운 눈매의 청년.
“이 쉬이벌······ 이 새끼 대체 뭐 하는 새끼야?”
듣자마자, 임호준은 바로 알 수 있었다. 그게 <날 보러 와요>의 경찰서 씬이라는 것을.
남자 형사 둘과 여순경이 범인의 정체를 논의하던 장면이다. 신인 박준호가 뱉은 대사는, 작중에서 임호준이 연기한 시골형사의 바스트 씬이었다.
‘카피는 아니군. 나랑 다르게 자신만의 시골형사를 만들어낸 시도는 제법 잘된 것 같은데······ 그런데 이 자식들 무슨 자신감이야? 나한테 보여주겠다고 내가 찍은 영화 씬을 가져와? 당연히 촬영장 때랑 비교가 돼서 한숨만 나올 게 분명······한데······ 뭐야? 이 자식들 꽤 하는데?’
임호준 같은 베테랑에게 있어서, 초짜 연기자들은 척 보면 답이 나오는 대상에 불과했다. 초심자 특유의 어수룩함이 여러 군데 남아 있게 마련이기에.
인간은 많은 면에서 무의식에 지배당한다. 의식은 배역의 감정을 떠올리며 실감나는 연기를 펼치고자 하지만, 무의식이 몸을 지배해 그게 가짜라는 티를 내고 만다.
그렇기에 골방에서 대본을 죽어라 읽어봤자 연기는 늘지 않는다.
오직 반복 숙달을 통해서 몸이 연기에 대한 거부감을 잊게 되었을 때에야, 비로소 실제를 방불케 하는 자연스러움이 무의식에까지 녹아드는 것이다.
임호준은 길고 긴 무명 시절을 통해서 그런 신체의 통제력을 습득했다. 그 덕분에 천재라고 불리는 강정후와 연기대결을 펼치면서도 기세에 밀리지 않을 수 있었다.
그러니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기사(奇事)였다.
단 한 씬이라곤 하지만, 영화광인 임호준이 얼굴 한 번 본 적 없는 신인들이 작은 어수룩함도 없이 연기를 마무리하는 모습이라는 것은.
“······야. 얘들이 전부 신인이라고?”
“단역은 몇 번 하셨대요.”
“단역 빼고는 처음이라 이거지?”
“예. 다들 정말 잘하시죠?”
“······괜찮긴 한데. 저런 애들이 왜 여태 배역을 못 잡았어?”
“안정록 선생님이 가르치셨거든요. 그분이 준비되지 않은 배우 선보이는 걸 싫어하셔서 그랬던 거 아닐까요?”
“너희 회사에서 선보였던 모델 출신 애들 중에, 쟤들보다 잘하는 애들 별로 없었던 것 같은데?”
“그분들이야 대표님께서 억지로 계약 잡으신 거고요. 이분들은 운이 좋은 건지 나쁜 건지, 아직 대표님 눈에 띄지 않으셨더라고요. 여기 데려온 것도 모르세요. 감독님께서 허락하시면 그때 보고할 생각이라서요.”
그 월권에 대해 좀 더 캐물으려던 때였다. 미닫이문이 열리고 오덕환 감독의 얼굴이 나타났다.
“벌써 오셨네. 안녕하세요, 임 배우님.”
“어, 오 감독님? 반갑습니다. 말씀 편히 하십쇼. 한참 연상이신데.”
“한참까진 아닌데······ 알겠어. 호준 씨 담배 하지? 식전에 잠깐 어때?”
“아, 예. 뭐 그러시죠. 나가시죠.”
임호준은 흉가체험을 마치고 빠져나오는 사람처럼 연신 고개를 갸웃거렸다. 이상한 현상으로부터 탈출해 상식의 시간을 회복하고 싶다는 투였다.
그렇게 감독과 까메오가 방을 나선 뒤, 이찬이 말했다.
“박준호 후배님. 그게 많이 어려웠어요?”
“아······ 아니.”
“그래요? 이상하네요. 이마 꿈틀거리는 게 중요하다고 제가 여러 번 말씀드렸던 것 같은데. 그것만 제대로 하셨어도, 임호준 선배님 입에서 ‘괜찮긴 한데’가 아니라 ‘잘하네’란 말이 나왔을 거예요. 어렵지 않았다면서 왜 못하셨어요?”
“······미안하다. 그게, 선배님이 갑자기 확 빨아들일 듯이 쳐다보시니까, 너무 긴장이 돼서······.”
이해할 수 있는 변명이라고 이찬은 생각했다. 본격적인 감정연기로 이어질 무렵부터 임호준의 눈이 안광을 뿜을 것처럼 날카로워지는 것을 그 역시 봤기에.
그렇지만 따뜻한 위로를 건네줄 타이밍은 아니지 싶었다.
“미안하실 건 뭐예요? 인상적인 연기 못 보이면 손해인 건 후배님인데요? 김성대 후배님이랑 천세영 후배님도 마찬가지예요. 제가 처음에 뭐라고 말씀드렸어요? 여러분 추천하는 일에 저는 부담감 없다고 말씀드렸죠? 어차피 제가 투자할 작품이니까 아무나 데려와도 상관없어요. 그런데 저야 가벼운 마음으로 하는 일이라도, 여러분한텐 다르잖아요? 대표한테 알랑방귀 안 뀌면 작품 못 잡는 여러분들한텐 이번 기회가 천금 같을 거라고 제가 말씀드렸잖아요? 그런데 이 기회를 그렇게 못 살리세요? 제가 여러분을 잘못 봤나 싶네요. 거기 계신 분들 중에서 제일 절실하신 분들 같아서 추천하기로 결심했던 건데, 고작 한 씬도 제대로 소화 못 하실 줄은.”
“······미안하다.”
“다음번엔, 더 잘할 수 있어. 정말이야.”
“믿어주세요, 선배님. 진짜, 진짜 열심히 하겠습니다······.”
다섯 살에서 일곱 살까지 더 나이가 많은 후배들의 애원.
낙하산 임원 앞에서 고개 조아리는 만년과장들 같은 그 모습은, 일반적으론 있을 수 없는 비상식이었다.
그렇지만 소년은 그 상황을 예상하고 있었다.
‘이런 사람들이라서 뽑은 거지. 나이 어린 선배라고 해서 기어오르지 않을 만큼 온순한 성격인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연기에 대한 열망은 상당히 커 보였으니까. 탁월한 선택이었던 것 같아. 고작 일주일 만에 임호준 아저씨한테 괜찮다는 말까지 들을 수 있게 된 걸 보면 말이야.’
폐부를 찌르는 말을 건넸지만 그건 연기일 뿐. 이찬은 세 사람이 펼친 연기에 꽤 만족하고 있었다.
애초에 일주일 만에 숙달할 수 있는 연기가 아니었다. 그가 기초를 잡아준 그 교습은 지나치게 난폭한 방식이었다.
<날 보러 와요>의 임팩트 있는 씬에, <여름들판>에서 열연을 펼친 강정후, 주경희, 차영기의 캐릭터를 불어넣어 프레임 단위로 대사와 동작을 지도했던 것이니.
겪어본 적 없는 난관이었을 터였다. 남태형에 비하자면 실력이 있는 축에 속했지만, 세 사람에겐 그와 같은 처절함이 내재되어 있지 않았다.
그렇기에 이찬은 몇 가지 양념을 더했다.
이번 연기를 통해서 임호준에게 좋은 인상을 주면, 자신의 차기작에 꽂아주는 건 물론이고, 이후 심성윤이나 주동한 같은 유명 PD들에게도 좋게 말해주겠다고 약속했다.
하지만 그렇게 강요한 교습은 사실 그저 도구였다.
자신의 지도를 통해 임호준 같은 대선배에게도 좋은 평가를 받을 수 있다는 확신을 심어주기 위한.
그를 통해서 추후 자신이 하는 말이라면 뭐든 믿고 따라올 충성심을 배양하고자 했던 것이다.
그러니, 고작 영화 하나 잘 만들자고 부른 배우들이 아니다.
그들은 이후 이찬이 자신의 작품마다 추천해서 데리고 다닐 ‘이찬 사단’의 출범 멤버가 될 예정.
그런 면면들인지라, 아이답지 않은 채찍 뒤엔 달콤한 사탕을 보탤 필요가 있었다.
“그래도 다행이죠. 선배님이 ‘괜찮다’ 정도로는 말씀을 하셨으니까, 최저 기준은 통과하신 셈이에요. <고등형사>에는 캐스팅을 해드릴게요. 여기서 잘하신다면 약속대로······ 아시죠?”
“아, 알지!”
“열심히 할게······.”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선배님.”
마지막에 말한 홍일점 천세영에게, 이찬은 잠깐 시선을 줬다.
‘천세영 누나. 셋 중에 실력은 제일 부족한 편이었지만, 간절함은 가장 컸어. 한순간 정도는 남태형 아저씨보다도 더 강렬한 염원을 봤다 싶었으니까. 그 덕분인지 오늘 연기도 셋 중에서 제일 좋았고······.’
다음 작품에서는 좀 더 큰 배역을 안겨줄 수 있겠다고 생각하며, 이찬은 세 후배가 자리에 앉는 것을 허락했다.
*
“말씀은 알겠는데······ 시나리오가 참, 염려스럽네요.”
담배를 비벼 끄는 임호준의 말. 오덕환은 어깨를 으쓱였다.
“어떤 면에서?”
“이찬 한 명 가지고 극을 끌어간다는 게요. 쟤가 아무리 연기를 잘해도, 이제 열다섯인데. 그게 되겠습니까?”
“그러니까 그 부분만 해결이 되면 까메오도 괜찮다?”
“예 뭐. 시놉시스만 들었지만 괜찮다 싶긴 합니다. 정말로 제대로만 해준다면, 오히려 제가 원톱으로 찍는 것보다도 캐릭터가 잘 나올 수 있겠다 싶네요. 나를 완벽하게 따라해서 임호준보다도 더 임호준스러운 형사를 연기한다? 그게 되면, 제 입장에서야 아 땡큐예요. 근데 안 될 것 같으니까.”
오덕환은 고개를 끄덕이며 웃어 보였다.
“그럼 됐네. 예언 하나 할까?”
“예언이요?”
“호준 씨, 10분 뒤에 구두계약을 할 거야.”
말도 안 된다는 듯 웃어버렸지만, 임호준은 왕성한 호기심으로 다시 룸의 미닫이문을 열었다.
그리고 정확히 8분이 지난 뒤에 말했다.
“이······ 시벌······? 이거 난데? 뭐야? 언제 이렇게 분석했어?”
이찬과 오덕환의 환한 미소 속에, 형사 역의 까메오가 결정되었다.
< 29장 - 배우 임호준 (2) > 끝
ⓒ 비벗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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