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훔치는 연기자-82화 (82/250)

< 30장 - 미끼 천세영 (1) >

“그렇게 된 거예요. 화제의 국민배우 임호준 아저씨까지 까메오로 출연 약속했고, 거기에 처음으로 모습을 드러낸 신인 미남미녀의 활약까지 준비됐죠. 참 재밌는 작업 아니겠어요? 이 영화가 2004년의 최대 흥행작이 될 거예요. 물론 그 전에 <684>가 흥행해줘야 될 일이긴 하지만, 걱정할 건 없죠. 그게 망한다면 세상에 성공하는 영화가 없을 테니까.”

짐짓 뻐기듯이 웃는 소년을 바라보며, 허성윤은 조심스레 말을 골랐다. 기뻐하는 배우의 마음을 어지럽혀야 한다는 사실에 안타까워하면서.

“찬아. 미안한데······ 천세영은 빼야 될 것 같아.”

“예? 왜요?”

“걔가 들어갈 프로젝트가 있어서. 걔 말고 다른 신인으로 하면 안 될까? 어차피 걔는 실력도 별로라고 들었는데.”

합리적인 말이었다. 실력이 한심해서 뛰어난 미모에도 불구하고 1년 넘게 단역밖에 못 잡고 있던 천세영이니까.

도저히 가망이 없던 남태형만큼은 아니지만, 그녀 역시 연기자로 대성하기엔 재능에 부족함이 있었다.

‘내 입장에선 바로 그렇기에 제일 적합한 인선이었던 건데······ 지금 중요한 건 그게 아냐. 이 아저씨가 나한테 뭘 감추려고 하는 거지? 이런 적은 별로 없었는데.’

말을 고르는 허성윤의 얼굴에는 여러 감정이 담겨 있었다.

가벼운 민망함과 어색함, 그리고 진한 기만의 징후.

그것들을 조합해본 결과, 홍보팀장이 천세영을 두고 그 모르게 비밀스런 계략을 진행하고 있다는 결론이 나왔다.

‘똥구녕 엿먹이는 계획 중에 포함돼 있는 거로군. 당장 떠오르는 건 미인계나 성상납 같은 건데······ 하지만 그럴 리는 없겠지. 죄책감을 조금도 보이지 않는 걸 보면.’

소년의 천부적인 관찰력은 극도로 훈련된 전문가가 아니면 피할 수 없는 것. 사회생활 좀 해봤을 뿐인 허성윤이 그의 감각을 속이고 있을 리는 없었다.

그렇기에 성과 관련된 이슈는 용의선상에서 제외되었다.

만약 천세영의 미모를 무기로 뭔가를 획책했다면, 그건 도구가 된 이에게 배우로서도 여성으로서도 큰 상처를 안기게 된다. 자연히 주모자의 얼굴엔 죄책감이 가득해질 터였다.

그렇지만 그게 아니라고 하면 마땅히 떠오르는 가능성이 없다. 이찬은 입술을 내밀며 추궁했다.

“무슨 프로젝트인데요?”

“그건, 나중에 알려주면 안 될까?”

“왜요? 저한테 숨기실 필요 없잖아요?”

“하지만 꼭 알려줄 필요도 없는 일이라서. 나중에 다 처리되고 나면 자연히 알게 될 거야.”

“몰라도 되는 일이라는 거죠? 실패할 확률은요?”

“없어. 모든 게 완벽해. 넌 그저 작품만 생각하면 되는 상황이야. 천세영 말고······ 그래, 김주나 어때? 걔가 실력으로는 훨씬 낫지. 몸매로도 더 인기가 많을 거고 말이야.”

여전히 작은 죄책감의 징후도 보이지 않는 홍보팀장을 보며, 이찬은 그쯤 하고 넘어가주기로 했다.

“그럼 좀 기다리죠. 어차피 당장 오디션 열 상황은 아니에요. 저도 핵심 주연으로 참석할 일정인데, 당장은 부국(부산국제영화제)부터 시작해서 <684> 홍보가 많으니까요.”

“음······ 아니, 천세영한테 불발됐다고 얘기를 해야 돼.”

“당장요? 명목은요?”

“대표님이 중간에 커트하실 거야.”

“연기력 없는 애라 끼워팔면 안 된다고 보고하실 거죠?”

“바로 알아채는구나. 맞아. 내가 그렇게 설득하려고. 그러니까 김주나로 가라. 천세영은 한동안 작품 잡으면 안 돼.”

오디션 아닌 오디션에서 본 신인들의 면면을 떠올려본 뒤, 소년은 고개를 저었다.

“김주나 누나는 안 맞아요. 그 배역은 오디션으로 돌릴게요. 가능하면 빨리 처리해주세요.”

“알겠어. 나만 믿고 있어라.”

비밀스런 구석이 있긴 하지만 실력 면에서는 의심할 나위 없는 모사꾼이다. 이찬은 담담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허성윤은 만족스럽게 웃으며 가방에서 시놉시스를 꺼냈다.

“그리고, 자. 꽤 괜찮은 드라마가 하나 들어왔는데, 너한테 직접 보여주려고 가져와봤어. 한번 살펴봐라.”

<연애의 조건>이라 적힌 표지를 넘기고 두 번째 장에 적힌 줄거리를 본 뒤, 소년의 표정이 일그러졌다.

「 패션에 관심이 많아 어른처럼 꾸미고 다니는 고3 남학생, 김서준. 그리고 학생들을 바르게 이끌고자 애쓰는 열정의 초임 여교사 성지현. 해변에서 처음 만난 서준에게 반해 진한 키스까지 나눴던 지현은, 이후 서준의 전학으로 서로의 나이차를 알게 되고······ 」

시대를 앞서간 막장드라마였다. 사제지간에 엄격한 관계가 강요되는 한국사회에서 절대로 나오지 않으리라 믿었던.

“이게······ 이건 안 되죠. 이런 걸 어떻게 해요?”

“하하, 그런 반응 나올 줄 알았지. 하지만 시청자들은 다를 거야. 작년에 MSB 단막극으로 여교사와 남학생의 로맨스가 조명된 적이 있었는데, 혹시 봤니?”

“보긴 봤는데요.”

“그게 호응도가 굉장히 좋았어. 그래서 논란 감수하고 드라마 제작해도 좋겠다고 판단이 섰던 거지. 그것도 있고, 일본에서도 같은 소재로 나온 드라마가 꽤 잘된 게 있었단 말이야. 단막극 이후에 MSB에서 그걸 리메이크 추진했던 거야.”

이상한 사람들이라고 생각하며 소년은 투덜댔다. 또래 간의 사랑도 체험해본 적 없는 그에게, 스승과 제자의 연애라는 건 불륜 같은 금기처럼만 보였다.

특히 신수영과의 키스신은 상상하고 싶지도 않은 비극이었다.

“음······ 작년부터 추진됐던 거면, 저는 왜 처음 듣는 거죠?”

“기획 단계에서 무산됐어. 주연하고 작가가 평행선이어서.”

“캐릭터 해석 면에서요?”

“그게 아니라 캐스팅에서. 각색한 작가가 꽤 잘나가는 분인데, 곧 죽어도 한 배우만 고집했단 말이야. 그 배우가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출연한 작품 보고 나서 완전히 반해버렸다나 뭐라나. 그런데 그 배우는 어째선지 계속 고사를 했거든. 그러니까 지지부진하게 미팅만 거듭하다가, 결국 국장이 다른 기획부터 먼저 밀어주게 됐던 거야.”

거기까지 듣자 이찬도 진상을 파악할 수 있었다.

“그 배우, 남태형 아저씨죠?”

“하하, 정답이야. 소재 때문에 이슈도 되고 시청률도 상당히 잘 나올 만한 기획이었는데, 이걸 끝내 거절했다고 하더라고. 왕대영도 참 대단하지. 좋은 기회니까 어떻게든 강요해서 배역 맡게 했을 법도 한데, 그러질 않았으니.”

그야 찔리는 게 있으니까 그랬겠지- 이찬은 속으로 키득거렸다.

프로액터스 대표 왕대영은, 계약기간의 만료가 가까워진 남태형을 <미스 스캔들>에 소모품 같은 얼굴마담으로 끼워팔려 했다. 그러나 뜻밖에 맹활약한 그 배우가 415만 관객에게 극찬을 받자, 부랴부랴 재계약을 제시했다.

그때 남태형이 정산 비율을 포기하고 작품 선택권을 받아냈을 거라고 이찬은 추측하고 있었다.

“뭔지 알겠네요. 그렇게 무산됐던 드라마가 다시 기획된 건, 작가님이 새 주인공을 찾아내신 까닭이겠죠?”

“그것도 정답. 찬이 널 보고 영감을 받아서 다시 펜 쥐셨다고 하더라. 네가 <어사>를 통해서 ‘성인처럼 보이는 청소년’이란 걸 완벽하게 보여줬잖아? 드라마 내용상 이만한 적임자가 또 없겠다고 생각하신 거지. 어때? 끌리지 않아? 이거라면 다시 한 번 누나들 사이에서 이찬 열풍을 일으킬 수 있어.”

“그렇겠네요. 그런데······ 일단은 덮어두죠.”

“아니, 왜? 찬아. 영화도 좋지만 드라마야말로 수많은 대중과 호흡할 수 있는 매체야. 출연료도 회당 1200까지 맞춰줄 것 같더라. 이걸 걷어차는 건 너무 아까운 일이야.”

소년은 다시 한 번 신수영과의 키스신을 상상해봤다.

그리고 굳은 얼굴로 고개를 저었다.

“죄송한데, 별로예요. 당장은 영화에 집중할래요.”

“저런. 네가 그렇게 하고 싶다면, 할 수 없지. 그러면 정 팀장한텐 내가 얘기를 해둘게.”

허성윤은 조언자로서의 역할에 충실했다. 방송국과 교류하여 의견을 제시하되, 결정권은 순전히 이찬에게 일임하며.

그렇게 겸손할 줄 아는 참모란 이찬에게도 꽤 기꺼웠다.

‘쓸데없이 진행상황을 숨기려고 들어서 좀 짜증나긴 하지만, 그거야 이해해줄 수 있는 일이지. 내가 작품 외의 일에 시간을 허비하지 않도록 하는 게 자신의 의무라고 생각하는 사람이니까. 이대로 둬도 큰 문제는 없을 거야.’

자리에서 일어서며, 소년은 <연애의 조건> 시놉시스를 품에 챙겼다. 부산 내려가서 태워버려야겠다고 생각하며.

*

“너희 둘, 오케이 났다. 신인 치곤 정말 운 좋은 케이스야. 개런티도 비중에 맞춰서 챙겨준다고 하니까, 일생일대의 기회라고 생각하고 열심히 하라고. 이찬 볼 때마다 항상 깍듯하게 대하고. 무슨 말인지 알지?”

신인개발팀 매니저의 설명을 들으며, 박준호는 턱 끝까지 차오른 말을 침으로 삼켰다. 혹시라도 입을 열어 반문했다간 그 행운이 달아나버릴 것만 같아서.

하지만 그러는 동안 김성대가 참지 못하고 목소리를 냈다.

“매니저님, 세영이는요?”

“세영이는 안 됐어.”

“안 됐다고요? 걔가 왜요? 연기는 제일 잘했는데······?”

“헛소리는. 야, 너희가 무슨 공식적인 오디션이라도 받은 건 줄 아냐? 그냥 이미지 정도 확인해봤던 거야. 거기서 감독님 보시기에 안 맞았으니까 성사가 안 된 거겠지.”

“그런 게 아니라, 찬이가 그 영화 투자자 될 거잖아요? 시키는 대로 잘 따라오면 꼭 꽂아주겠다고 했는데.”

“이상한 소리 하지 말고, 너흰 너희 할 일에 집중해. 기껏 찾아온 기회 놓치고 싶냐? 연습 착실히 해야지. 안 그래?”

신인들 다루는 데 도가 튼 매니저의 말에, 김성대는 반론도 제대로 펴지 못하고 낑낑거려야 했다.

그 대신 그는 사무실을 나선 뒤에 박준호에게 매달렸다.

“형, 이거 가만있으면 안 되지 않아? 세영이가 우리 중에 제일 열심히 했는데, 걔는 쏙 빼고 우리 둘만 됐잖아?”

“······적당히 해라. 나도 마음은 안 좋은데, 감독님이 깠다는데 우리 따위가 뭔 말을 해?”

“그게 아니라, 그 감독님도 결국 이찬 보고 이 영화 하고 있는 거잖아? 다시 한 번 얘기해보면 분명히-”

김성대의 말을 끊으려던 순간, 박준호는 계단 층계를 돌아 내려오는 이찬을 발견했다.

그쪽에 시선을 준 김성대도 스스로 입을 틀어막았다.

“헙! 차, 찬아, 안녕?”

“······두 분, 축하드려요.”

“어, 어. 알고 있었어?”

“제가 모르고 있을 리가 있나요.”

“아······ 정말? 그럼, 넌 알겠구나? 이게 어떻게 된 거야? 왜 세영이만 빠진 거야? 우리는 진짜 이해가 안 돼서-”

“원래 이 바닥에 이해되는 일 별로 없어요.”

“아니 그게, 난 진짜······ 찬아? 야, 찬아!”

이찬은 두 남자와 스쳐서 그대로 계단을 내려갔다. 입술을 삐죽거리면서.

‘아, 곤란한데. 천세영 누나 제외된 것 때문에 저 후배님들 신뢰까지 흔들리는 것 같아. 서로 별달리 가까운 사이는 아닌 것 같아서 문제없겠거니 했는데, 그게 아니었어. 음······ 이건 좀 손실인데. 허성윤 아저씨가 진행하는 계획에 꼭 필요한 사람이라면 내주는 게 합리적이겠지만, 사실 구태여 나라엔터를 다 말아먹고 나갈 필요는 없단 말이지.’

홍보팀장 허성윤은 ‘유일한 배우’ 이찬의 미래를 위해 최고의 발판을 마련하려 하고 있다. 그렇기에 이군영을 나락으로 떨어뜨리고 나라엔터 배우들까지 집어삼키려는 것.

그렇지만 이미 최고의 배우들과 교류하고 있는 소년 입장에서는, 그게 성사되든 안 되든 큰 상관이 없었다.

‘안 되겠어. 부산 갔다 오면 제대로 추궁을 해봐야겠다. 그저 걷기만 해도 되는 길을 굳이 공중제비 돌면서 넘어갈 필요는 없으니까.’

생각은 거기까지였다. 밴에 올라타 정창영과 합류한 이찬은, 이후 <고등형사> 각본 탐독에 정신을 쏟았다.

*

GIFF에서 5분짜리 예고편을 시사했던 <684>는, 그 홍보전략을 통해서 큰 화제를 끌지는 못했다.

그날 오후부터 정신혜의 뇌종양 기사가 연예계 이슈를 독차지한 덕분이었다. 주연인 이찬까지 정신혜의 병문안 이슈에 일조했던 덕에, 그날의 GV(Guest Visit, 관객과의 대화)는 조용히 묻혀버렸다.

상업적인 성공이야 배급만 잘 따내도 가능하지만, 해외 영화인들과의 교류는 영화제만이 가진 고유한 장점.

그렇기에 사계 프로덕션의 계진행은 30분 분량의 메이킹필름 제작에 심혈을 기울였다. PIFF에서는 제대로 이슈를 만들 수 있도록.

“국제영화제라는 게 결국 일반 관객보다는 세계 영화인들, 그리고 바이어들이랑 소통할 수 있는 기회거든. 우리도 이제 스크린쿼터에 의존한 내수만 노려선 안 돼. 적극적으로 외국으로 수출하고 해야지. 요즘 유럽에서도 아시아 영화에 대한 관심이 높아지고 있으니까, 역사적인 비극을 다룬 우리 영화 메이킹 상영에도 꽤 많은 바이어들이 몰릴 거야.”

계진행의 말을 들으며 이찬은 고개를 갸웃거렸다. 기존에 알고 있던 정보와 일부 차이가 있었기에.

“원래 바이어들은 필름마켓 위주로 돌지 않아요? 완성되지 않은 영화 메이킹에도 몰릴 수가 있는 거예요?”

“보통은 쉽지 않은 일이지만, 분단국가의 역사를 다룬 영화잖아? 아시아든 유럽이든 관심을 가질 수밖에 없는 소재니까. 그런데, 영화제 얘기는 또 누구한테 들은 거야?”

“인터넷이요. 이것저것 읽어볼 게 많더라고요.”

김대중 정부의 정보화PC 및 초고속인터넷 보급 정책을 통해, 한국의 인터넷이용률은 2003년 현재 전 인구의 60% 이상으로 끌어올려진 상태다.

그리고 그 정보화 체계를 가장 잘 활용하고 있는 것이 젊은 지식인층.

수십만 명의 대학생들이 매일같이 자신의 일상이나 학업으로 배운 정보들을 인터넷 세상에 풀고 있다.

특히 국제영화제 같은 큰 행사는 웹상에서 특히 인기가 있는 소재다. PIFF에 참여한 자원봉사자들도 저마다 자신이 배운 제반지식, 보고들은 것 등을 정리해 업데이트하는 데 여념이 없었다.

그를 통해 이찬은 영화제의 실상을 미리 조사할 수 있었다.

“하여튼 성실하다니까. 실질적으로 말하자면, 내가 영화제 사람들이랑 인맥을 잘 만들어둔 덕분이야. 개막식 직후부터 계속 우리 영화 얘기가 나오도록 미리미리 밑밥을 뿌려뒀단 거지. 그래서 이미 기대치가 만들어져 있어.”

“와. 감독님은 그 대인관계가 최고의 장점 같네요.”

“하하하. 영화는 잘 못 만든다는 말처럼 들리는데?”

“저야 모르죠. 계속 청불 영화만 만드셨잖아요?”

“우리 투자자님은 입발림 말 하나를 할 줄 모르는구나. 예의상이라도 좋게 말해주면 좀 좋냐? 그런 대접이 다 인맥이 되는 거라고.”

“감독님이랑은 이미 인맥이라고 생각했는데, 아니었나요?”

“뭐? 하하하! 아, 정말 못 당하겠구나.”

계진행의 웃음 속에서, 폐막식의 저녁이 다가왔다.

< 30장 - 미끼 천세영 (1) > 끝

ⓒ 비벗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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