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30장 - 미끼 천세영 (2) >
2003년 제8회 PIFF의 개·폐막식은 수영만 요트경기장에서 개최되었다.
해안에 접한 도시의 영화제라는 특성을 살리기 위한 기획으로, 비록 10월의 해안 날씨가 춥긴 하지만, 입장관객수나 국제적 이미지를 생각할 때 꽤 적절한 조치였다.
<684> 메이킹필름의 상영은 그 폐막식의 사전행사였다.
국내 배우·감독들의 입장은 아직이지만, 계진행의 말대로 해외 바이어들은 자리를 꽉꽉 메우고 있는 상황. 그곳에 실미도에서 진행됐던 반년의 촬영상황이 펼쳐졌다.
그들 사이에서 무수한 언어로 이찬의 이름이 불렸다.
“저 배우가 리-찬이지? 몸 관리를 아주 잘했는데?”
“그러네. 인상도 강렬하고, 좋은 캐스팅 같은데······ what?”
“왜 그래?”
“나이가 15세야. 정말 성장이 빠른데.”
“정말 그렇네. 15세인데 저런 체격이면······ 잠시만. 한국은 나이를 한 살 더 많게 세지 않나?”
“아, 그렇게 들었어. 맙소사. 그러면 14세라는 건데.”
“남들은 틴에이지 배역만 맡을 청소년기에, 자기 나이보다 한참 많은 20대를 연기하고 있는 거야. 드문 사례인데······ 그럴 만도 해. 표정이나 동작에 군더더기가 없어.”
“어떤 친구인지 궁금한데? 영어로 소통이 가능하면 좋겠어.”
메이킹필름 상영 뒤에 이어진 GV에서, 이찬은 그들의 기대에 부응했다.
“안녕하세요, 이찬이라고 합니다. 제가 많은 언어를 알지 못해서 영어로만 인사드리는 걸 이해해주세요. 각국에서 여기까지 와주신 데 감사드립니다. 많은 관계자들의 관심과 노력 속에서 한국영화는 부흥기를 맞고 있습니다. 특히 저희 <684>는 분단된 국가의 격동기를 살아간 개인들이 어떤 고뇌를 겪었는지에 초점을 맞춘, 매우 한국적인 영화예요. 그런 동시에 특수부대의 훈련이라는 보편성 또한 갖추고 있죠. 이 영화를 해외에서도 많은 분들이 보실 수 있게 되면 좋겠네요.”
말을 마치고 마이크를 내려놓는 소년의 어깨를 소해진이 황급히 두드렸다.
“야. 찬이 너 혹시 유학파였어?”
“유학은요. 그냥 집에서 공부한 거예요.”
“아닌데? 너무 유창한데? 어, 너한테 질문 들어온다.”
검정고시를 위해 기초 단어를 외우고 헐리우드 영화 몇 편을 본 것으로, 이찬의 영어회화 능력은 급격히 향상됐다.
전문용어만 아니라면 소통에 막힘이 없을 정도로.
특히 발음 면에서는 유창함을 넘어 원어민 수준이었다. 들은 그대로 발성하는 것도 그의 특기 중 하나였기에.
그 덕분에 짧은 질의응답을 통해서 해외 영화인들에게 깊은 인상을 남겨줄 수 있었다.
그들의 얼굴에서 강한 흥미를 읽어낼 수 있었기에, 이찬은 객석으로 내려오며 밝은 미래를 예상해봤다.
‘수출이 잘돼서 해외에서도 <684>가 인기를 끌게 된다면, 오래지 않아 여기저기서 팬클럽이 생길지도······ 음······ 좀 성급한 생각인가? 너무 기대하진 말자. 이건 영화니까.’
안정록이 칸 감독상에 오르며 독특한 정서로 주목받았다곤 하지만, 아직 한국영화는 세계시장에 널리 알려지지 않았다.
상업적인 면에서 대성공을 거둔 작품이 없는 까닭.
‘아직 영화로 세계를 누비긴 시기상조야. 그런 면에서 해외 팬덤을 만들려면 드라마 쪽이 더 유리할 것 같긴 한데······.’
영화에 비해 한국 드라마는 특유의 신파로 이미 의외의 팬덤을 형성하고 있다.
이찬이 칩거하던 무렵에 제작된 <겨울바다>는, 이후 동남아에서 높은 시청률을 기록하고 일본 위성TV까지 진출했는데, 호평이 줄을 이어 2004년 NHK 편성까지 예정된 상태.
허성윤이 추천한 <연애의 조건> 역시 비슷한 문화권의 아시아에 먹힐 가능성은 충분했다.
‘······하지만 이건 아냐. 신수영 누나랑 애절한 연인을 연기한다면 이상한 소문이 쭉쭉 나올 거라고. 열두 살 때라곤 해도, 3개월간 합숙한 사이니까. 그러니까 이건 묻어둬야지.’
그렇게 생각하며 품안의 시놉시스를 구길 때쯤, 그의 앞을 지나던 구진철이 조심스레 팔을 건드렸다.
“찬아. 저기······ 영어공부 어디서 했어? 엄청 잘하던데.”
“그건 왜요? 해외 진출하고 싶으세요?”
“아, 아니. 그냥, 꿈은 꾸고 있지. 나중에 헐리웃에 진출할 수 있을까······ 혹시라도······ 그런 생각.”
“참나. 아저씨는 지금 하는 한국어 연기나 잘하세요. 쓸데없는 꿈 때문에 할 일도 잘 못하시지 말고요.”
“어, 그, 그래야지.”
실망과 자괴감으로 멀어지는 여섯 살 연상 후배의 얼굴을 바라보며, 이찬은 잠시 고민했다.
‘너무 강하게 말했나? 좋게 말해줘도 될 일이긴 한데······ 기대감이 있으니까 해주는 말인 걸 알아줬으면 좋겠는데.’
소년의 직설적인 화법은 상대의 입지를 막론한다. 그러나 귀여운 재롱 정도로 받아들여주는 감독이나 선배 배우들에 비해서, 후배들의 입장에서는 느끼는 무게가 다를 터였다.
그렇기에 천세영을 비롯한 ‘이찬 사단’ 후배들을 대할 때도 그는 좀 더 나은 표현이 무엇일까 고민하곤 했다.
고민에 비해 확연히 느껴질 만큼 상냥해지진 못했지만.
‘어쩔 수 없는 거야. 너무 오냐오냐 받아주면 선배로서 권위가 안 사니까 말이지. 그렇지만 천세영 누나는······ 좀 걱정이네. 막 내게 신뢰감을 갖기 시작하던 차에 갑자기 캐스팅이 불발됐으니 마음이 꽤 상했을 것 같은데. 허성윤 아저씨가 너무 이상한 일을 계획한 게 아니라면 좋겠는데.’
그렇게 생각하는 와중에, 무대 뒤에서 관계자들을 만나고 있다던 정창영이 객석으로 돌아왔다.
“정 팀장님. 혹시 서울에서 뭐 연락 온 거 없어요?”
“연락? 아니, 없었는데?”
정창영은 싱긋 웃으며 답했다.
그렇지만 다음 순간 그 미소가 살짝 흐릿해졌다.
“어······ 회사에서 온 전화는 아닌데, 천세영이 연락했더라.”
“천세영 누나요? 왜 전화했대요?”
“왜는, <고등형사> 불발된 것 때문이지. 마음이 많이 상했는지 꺼이꺼이 울더라고. 그렇지만 할 수 없는 일이지. 다 이유가 있어서 내린 결정이잖아? 허 팀장님한테 그렇게 들었는데, 맞지?”
이유는 있을 터였다. 이찬이 알고 있는 바는 아니지만.
“흠······ 팀장님. 허 팀장 그분이요, 요즘 소문은 어때요?”
“어? 요즘은 뭐, 나쁘지 않지. 원래 잘나가는 사람일수록 적도 많은 법이라서 이런저런 안 좋은 말이 많았지만, 네 얘기 듣고 내가 물밑에서 도와주고 있단 말이야. 너, 내가 이래봬도 매니저들 사이에서 인망이 있다? 그러니까 좋은 말 몇 번 해준 걸로 이미지를 확 바꿔줄 수 있었던 거지.”
막 거기까지 대화했을 무렵, 해가 산 너머로 저물기 시작했다. 소년은 순간적으로 기시감을 느꼈다.
‘······GIFF 때 GV 포기하고 진아 누나랑 서울 올라오던 날에도, 비행기 안에서 이렇게 멍하니 일몰을 보고 있었지. 옆에 앉은 진아 누나가 불안해하든 말든 말이야. 그때는, 신혜 누나 중병을 알고도 홍보부터 생각하던 허성윤 아저씨한테 꽤 실망한 상태였는데. 하지만 이후에 종양이 아주 초기에 발견됐다는 사실을 알게 되고 실망감을 좀 덜게 되었······ 어?’
소년은 고개를 갸웃거렸다. 뭔가를 놓치고 있던 게 아닌가 하는 느낌이 강하게 엄습했다.
‘아주 초기에 발견되어 손쉽게 제거가 가능하다는 건······ 그날 병원에 가서 정밀검진 결과를 듣고 안 사실이라고 했는데. 그렇지만 허성윤 아저씨가 내게 전화를 했던 시각은, 신혜 누나가 병원에 입원하기 전이지 않았나?’
당시 이찬은 그 시간의 경과에 대해 통시적으로 고찰하지 못했다. 정신혜의 미래와 명진아의 마음 사이에서 내적인 고민이 많았던 까닭에.
그러나 요트경기장 앞의 객석에 앉아 노을을 바라보며, 그는 어제 일처럼 선명한 머릿속 기억을 더듬었다.
‘그 사람이 들은 건 어디까지나 신혜 누나가 촬영 중 알게 된 뇌종양으로 병원에 입원했다는 것까지······였어. 그런 상황에서 내게 전화를 걸어 GV 빠지고 병원에 가라고 했지. 그러는 게 화제성에 편승할 수 있는 최선책이라고. 그 사람은, 사실은 신혜 누나가 죽든 살든 아무 관심도 없었던 거 아닌가?’
배우 이찬의 상식으로는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인간의 생사 앞에서 담담할 수 있는 사람이 있을 리 없기에.
그렇지만 동시에 소년은 사회 밑바닥의 노숙자 출신.
그는 사람을 죽이고 그 시체 위에서 짜증을 부리던 괴물 같은 범죄자 역시 본 적이 있었다.
‘오늘 본 얼굴에선 아무 죄책감도 느껴지지 않았어. 그러니 별다른 문제는 없을 거라고 믿었어. 그렇지만······ 그에게 천세영 누나의 미래라는 게 길을 걷다 만난 개미들의 행선지처럼 무관심의 대상이었다고 한다면? 오직 유일성만을 추구하는 그 광신도가 실력 없는 배우는 어떻게 되든 아무 상관이 없다고 생각했다면? 밟아 죽여도 죄책감이 들지 않는 개미라고 믿었다면? 그런 거라면, 양심의 가책이나 작은 미안함도 없이, 사람을 구렁텅이 속에 몰아넣을 수 있을지도······?’
*
PIFF가 폐막의 밤을 맞이한 그 시기에, 천세영은 불이 밝혀진 복도를 걸어가고 있었다.
얼굴은 눈물자국으로 가득하다. 그 위로 또 새로운 눈물들이 흘러내렸지만, 그녀는 손을 들어 닦아낼 생각조차 하지 못했다.
‘내가 왜······ 대체 왜······? 분명히 잘했는데! 이찬 선배님이 시키는 대로만 하면 꼭 캐스팅해주겠다고 했는데, 대체 왜!’
캐스팅이 불발되었다는 정보는 더디게 전달되었다.
담당 매니저가 있는 것도 아니고, 그저 30여 장의 단역 프로필 중 하나에 불과한 스무 살 신인. 사무실 사람들은 그녀가 작은 배역을 따든 말든 별 관심을 두지 않았다.
거기다 그녀 본인은 연습실에 출근한 뒤로 이찬에게 받은 각본에만 눈을 두고 있었다. 주변의 염려스런 웅성거림에 귀를 기울이지 않은 채.
결국 천세영은, 잔뜩 찡그린 얼굴의 김성대가 조심스레 말을 건 저녁이 되어서야 실상을 알게 되었다.
셋 중 그녀만이 <고등형사> 배역을 따내지 못했음을.
그 얘길 듣자마자 이찬의 위치를 수소문했다. 그러나 서울과 300km 이상 떨어진 곳에 있다는 대답만 들을 수 있었다.
‘이찬 그 빌어먹을 선배님은, 이 꼴을 만들어놓고 영화제나 가버리고! 나는 어떻게 되든 상관없다는 거야? 자기가 준 영상 외우고 몸에 익히느라 내가 얼마나 고생했는지는, 관심도 없다는 거야? 이번엔 정말 잘해보려고 했는데······ 또 바보처럼 실패하지는 않겠다고 결심했는데!’
미니홈피 얼짱으로 유명해져 피팅모델 생활을 시작했던 천세영은, 처음부터 연기자를 지망하지는 않았다. 그저 적당히 돈을 벌어 옷가게를 차리는 것이 그녀의 소박한 꿈이었다.
원래 의상 디자이너였지만 결혼 이후 경력이 단절된 어머니와 함께, 고향인 대전에서 행복한 삶을 살아가는 것.
천세영은 그 정도면 만족하려고 했다.
그렇지만 목적이 돈인 까닭에, 연예기획사 사장이라며 명함을 건넨 인물에게 관심을 주고 말았다. 드라마를 통해 스타가 되면 월에 1억도 벌 수 있다는 말에 가게 전세금을 이미 마련한 것처럼 들뜨고 말았다.
그 결과는 3000만원에 달하는 사기.
무수한 연예인 지망생들로부터 적금, 집 담보 대출금 등 무려 3억여 원을 갈취한 그 사기꾼은, 누군가 눈치를 채기도 전에 유유히 해외로 도피했다.
그 사건은 천세영으로부터 그저 돈만을 앗아간 것이 아니었다. 소박하고 따뜻했던 꿈마저 그로 인해 지워졌다.
사기꾼을 찾아내겠다며 피해자 연대 활동에 동분서주하던 모친이, 추돌사고로 인해 두 손을 잃게 된 탓에.
그로써 그녀는 어떤 옷도 만들 수 없게 되었다. 혼자 힘으로는 기성복조차 몸에 걸치기 힘든 처지가 되었다.
이찬조차 순간적으로 놀랄 만큼 간절하게 눈을 빛냈던 천세영의 동기는, 그 비극이었다.
자신을 피해자로 만든 사기꾼에게 복수하기 위해. 딸의 어리석음 때문에 장애인이 된 엄마에게 사죄하기 위해.
그녀는 비로소 연기자로서의 성공을 꿈꾸게 되었던 것이다.
그 새로운 꿈이 거의 손에 잡힐 듯 다가왔었다.
고작 열다섯임에도 불구하고 거장 안정록의 인정을 받은 신예 이찬의 눈길을 사로잡아, 마침내 그간 갈고닦은 연기력을 대중에게 선보일 수 있게 되었다고 믿었다.
그랬던 마음이, 고작 하루 만에 배신당했다. 이유조차 알 수 없는 캐스팅 취소를 통해서.
한순간에 천당에서 나락까지 떨어진 천세영은 그 배신에 그저 당하고만 있을 수 없었다.
이미 어젯밤, 모친에게 전화를 걸었기에.
이번에야말로 진짜 제대로 된 끈을 잡았다고. 곧 유명 배우 이찬과 함께 영화에 출연해, 극장에서 딸의 모습을 볼 수 있게 해드리겠다고.
그녀는 작은 의심도 없이 그렇게 말해버렸던 것이다.
그것이 다시 한 번 실망으로 돌아왔을 때 사랑하는 모친이 도대체 얼마나 슬퍼할지, 천세영은 상상하기조차 싫었다.
그렇기에 그녀의 걸음은 대표실로 향했다.
이 모든 사태의 원인을 알고 있을 총책임자를 향해, 자신의 분노와 의구심을 토로했다.
“저, 왜 떨어진 거예요? 저 잘했어요. 저, 찬이가 시키는 대로 다 했어요. 준호 오빠나 성대 오빠보다 훨씬 더 열심히 했어요. 그런데 왜 안 됐어요? 대체 뭐가 문제인데요?”
이군영은 한동안 멍한 표정으로 신인배우의 위아래를 훑었다. 그리고 자리에서 일어서며 짐짓 고개를 떨궜다.
천세영이 볼 수 없는 그 얼굴은, 환하게 웃고 있었다.
‘허성윤, 이 새끼! 머리 하난 정말 기막히게 좋단 말이야. 오늘이 딱 타이밍일 거라고 하더니, 이렇게 깔끔하게 상황을 만들어냈구만. 정말이지 장자방 같은 친구라니까!’
수족과도 같은 참모의 배신을 조금도 짐작하지 못한 채로, 이군영은 침중한 표정을 얼굴 위에 그려냈다.
“저런. 그것 때문에 왔구나. 난 네가 안타깝다 참. 아직도 연예계가 어떻게 돌아가는지 감을 잡고 있지 못하다니 말이야. 찬이? 걘 그냥 연기 잘하는 꼬맹이일 뿐이야. 걔가 아무리 날고 기어도 관행이라는 걸 어떻게 이기겠어? 너도 그걸 알아야 돼. 정말 잡아야 하는 동아줄이 어떤 건지 말이야.”
이찬이라면 보자마자 질색했을 사기꾼의 얼굴.
그러나 사람 보는 눈이 없어서 이미 한 차례 사기를 당했던 스무 살 처녀는, 진짜 실마리를 쥐고 있는 듯한 대표의 말에 순식간에 이목을 빼앗기고 말았다.
그 상황은 천세영에게 기대감을 불러일으켰으며, 동시에 자리에 없는 남자에게도 커다란 즐거움을 안겨줬다.
도청기를 통해 고스란히 그 대화를 듣고 있던 허성윤에게.
‘거의 다 됐다. 무대는 마련됐으니까, 이제 남은 건 찬이가 올라오기 전에 깔끔하게 마무리하는 일. 이걸로 이군영은 꼬리가 되어 잘려나갈 거고, 공중분해 직전에 놓인 나라엔터에서 배우들을 쏙쏙 뽑아서 데려갈 수 있게 될 거야. 강정후도 요즘 찬이랑 잘 지내는 눈치던데, 같이 데려갈 수 있으려나?’
장자방이라는 말에 어울리게 빠르게 회전하는 그의 머릿속에, 미끼가 된 천세영에 대한 염려는 들어있지 않았다.
< 30장 - 미끼 천세영 (2) > 끝
ⓒ 비벗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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