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31장 - 인간 허성윤 (2) >
허성윤의 심문까지 마친 뒤에, 이찬은 천세영과 마주앉았다. 그리고 조심스레 진심을 입에 담았다.
“미안해.”
“뭐······ 뭐가?”
“나 때문에 이런 일 겪게 만들어서. 보상이라고 하면 좀 이상하지만, 내가 정말 스타로 만들어줄게. 이군영한테 들은 말들은 신경 꺼. 그건 이제 진짜 구시대적인 악습이 될 테니까. 난······ 착한 사람들이 성공하는 회사를 만들 거야. 난, 좋은 사람이 될 거야.”
다짐하듯 말하며, 소년은 주먹을 움켜쥐었다.
어려운 길은 아니다. 이미 세상은 조금씩 바뀌고 있고, 이찬에게는 그 누구보다도 뛰어난 연기의 재능이 있다. 그의 아래로 온 배우들은 누구든지 스타가 될 수 있을 터였다.
다만 그 과정에서 모든 악습이 구시대의 유물로 저물 수 있을지는 확신할 수 없는 문제였다.
‘그늘을 걷기 위해서는 햇볕이 필요해. 허성윤이 한 짓은, 이기적이고 비겁한 협잡질이었지만, 어쩌면 살균 작용이 될 수 있었을지도 모르지. 적어도 성상납이란 것이 비정상적이고 이상한 일이라는 걸 많은 연예인 지망생들에게 알려줄 수 있었을 테니까. 하지만 그 길은 선택할 수 없는 난코스야.’
이군영과 한림의 우종태 전무가 나눈 비열한 거래에 대해 고발하면, 천세영의 연기 인생은 필연적으로 끝장난다. 누구도 그녀를 작품에 불러주지 않을 터였다.
그건 범죄자 카르텔의 불합리한 따돌림 때문이 아니다.
작품에 작품 외적인 시선이 묻지 않도록 피해가려는 건 업계의 자연스러운 선택. 대중의 보는 즐거움을 위해서, 불편한 이슈에 연루된 배우들은 어쩔 수 없이 배제되곤 했다.
‘그걸 빼고 마약 건으로 고발한다 해도, 조사 과정에서 모든 게 드러나고 말 거야. 나야 두들겨 팬 것도 정상참작이 될 거고, 오히려 정의로운 이미지로 더 큰 인기를 얻을 수도 있어. 하지만 천세영 누나는 전혀 다른 미래를 맞게 되겠지. 그러니까 이번 일은 덮어야만 해. 허성윤도 이군영도, 심지어 우 전무라는 재벌2세 새끼도 법으로는 처벌할 수 없어. 그러니까, 지금은 형사가 아닌 암행어사가 나설 차례인 거지.’
거기까지 생각했을 무렵에, 천세영의 입이 열렸다.
“나······ 또 당한 거구나.”
“또? 언제 이런 일 당한 적 있었어?”
“사기를 당했어. 삼천만원······.”
“멍청하긴. 사람 보는 눈 좀 키워.”
“······방금 미안하다고 했으면서.”
“미안한 건 미안한 거고 멍청한 건 멍청한 거야. 이상하다는 생각도 안 들었어? 상황이 궁금하면 이군영한테 가기 전에 나한테 전화부터 했······ 아, 미안. 영화제 중이라 꺼놨었지.”
천세영은 솔직한 사과에도 얼굴을 펼 줄 몰랐다. 이찬은 그 우울이 자신에 대한 원망 때문이 아님을 알아챘다.
“왜 그래? 스타 되기 싫어?”
“되고 싶지. 되고 싶은데······ 그러려면······ 이번 일은 말 안 하고 넘어가야 되는 거지? 날 이용해서, 짐승처럼, 그렇게 군 새끼들······ 다 놔줘야 되는 거잖아. 그렇지?”
“그렇다고 하면 어쩌게? 스폰서 강요당했다고 고발이라도 하게? 앞으로 연기는커녕 한국에서 살기도 힘들어질 텐데?”
“······하면, 이것들 다 구속시킬 수 있는 거지?”
“와. 진심으로 그런 소릴 하네? 열성적인 자세는 좋은데, 복수는 그런 식으로 하는 게 아냐. 자기 삶을 다 바쳐서 나쁜놈들 잡아 처넣는다고 뭐가 되는데? 씨발, 내가 살아야지. 내가 살아야 처벌도 의미가 있는 거지.”
씹어 뱉듯 말하는 소년은 윤대흥을 생각하고 있었다.
자신의 목숨마저 도외시하고 범죄자를 추적했던 그는, 결국 그 강력범의 체포에 공헌했다. 자신의 목숨을 바쳐서.
그 숭고한 희생은 그의 영전에 1계급 특진을 안겨줬다. 그렇지만, 이찬에게는 그게 그저 덧없게만 느껴졌다.
“그렇게는 안 돼. 바보 같은 짓이야. 처벌이란 건, 완벽하게 내 거 다 지키면서 해야 되는 거야. 그래야 이기는 거야.”
그 말을 들으며 여인은 어머니를 떠올렸다.
딸의 결혼자금으로 어렵사리 모아둔 적금 삼천만원을 앗아간 사기꾼을 찾기 위해 피해자들을 규합하다가, 자신의 두 손을 잃었던 사람.
이찬의 말대로라면, 그녀는 바보 중의 바보였다. 복수에도 실패하고 자기 손도 지키지 못했으니.
“······그럼 어떡하라고! 나는, 힘이 없으니까, 이런 짓 당해도 가만히 있어야 된다는 거야? 네가 구해준 거에 감사하면서, 입 꾹 닫고 조용히 살아야 된다는 거야?”
“와. 진짜 자존심 세네. 근데, 그런 뜻은 아니야.”
“어? 그런, 뜻이 아니야?”
“아니야. 말했지? 나만 믿으라고. 괜히 한 말인 줄 알았어?”
소년은 픽 웃으며 천세영에게 다가갔다.
위험한 일을 당한 직후이니 움츠러들 법도 한데, 억지로 가슴을 펴는 스무 살 여인. 임시로 입혀준 코트의 앞섶이 그 결에 벌어졌다.
“잘 좀 입어. 이제 나가야 되니까.”
소년은 그렇게 말하며 코트의 단추를 여몄다. 그러느라 얼굴이 지나치게 가까워져, 천세영은 무심코 침을 삼켰다.
눈물범벅인 미녀의 코앞에서 이찬이 음흉하게 웃었다.
“제대로 된 복수라는 건, 내 손을 쓰지 않는 거야. 이이제이라고 알지? 팝콘은 좋아해? 신나는 영화가 시작될 텐데.”
*
“용서······? 아, 용서해준다고?”
눈 껌뻑거리며 중얼거린 허성윤의 얼굴에, 환희가 차올랐다.
“그래! 그래야지! 바로 그거야. 찬이 넌 역시 똑똑하구나. 바로 그게 좋은, 아주 좋은 선택이지. 이제, 이제, 몰래카메라 내용에서 네가 들어오는 부분부터 지워내고, 이군영이 성상납으로 어린 여배우를 이용했다는 얘기를 제보하면-”
“닥치고 들으세요, 팀장님. 그건 썩은 시나리오니까.”
“어? 어, 어. 그래. 그러면, 새 시나리오가 있는 거야?”
“당연하죠. 자, 여기 우종태 전무가 쓰러져 있어요. 순식간에 정신을 잃어서 마스크 쓴 내 얼굴조차 못 봤죠. 이 사람을 설득하는 게 팀장님의 벌이에요.”
“내······ 벌?”
“잘못을 하셨으면 벌을 받아야죠? 세영 누나는 제가 아끼는 후배······ 그러니까, 제가 좋아하는 여자였다고요. 그런 사람을 상납하려고 한 팀장님한테, 제가 화가 안 났을 거라고 생각하신 거예요?”
허성윤은 그 말을 통해서 마지막 퍼즐 조각을 맞춘 기분이 되었다.
‘그랬던 거구나! 맞아, 그거였어. 열다섯이면 딱 첫사랑을 할 만한 시기지. 천세영 저것이 연기력은 좀 후달려도 얼굴은 아주 끝내주니까, 미녀 여배우들 많이 본 찬이라도 뻑이 갔을 만도 해. 그 순정을 몰랐으니, 계획이 꼬일 수밖에.’
그 뒤에야 홍보팀장의 얼굴에 죄책감이 떠올랐다.
천세영에게는 눈곱만큼도 생기지 않았던 그 감정이, 이찬을 향해서는 너무도 쉽게 흘러나왔다.
“그런 거였구나······. 미안하다, 찬아. 내가 그것도 모르고, 네가 눈여겨본 아이인 줄도 모르고······.”
“그래서 무척 미운데, 마지막 기회를 드리는 거예요. 이제부터 이군영하고 저 개 호로자식······ 우종태 전무를 파멸시킬 거예요. 시나리오는 제가 짰지만, 중간중간 애드립이 필요한 부분이 많을 겁니다. 그래서 훌륭한 배우가 필요해요. 팀장님이 제 최후의 보루라고요.”
“아, 그렇구나. 그래. 내가, 잘해야 되겠어.”
“정말 열심히 하셔야 될 거예요. 그래야 일 다 끝나고 나라엔터 접수했을 때, 제가 팀장님한테 마케팅본부장 직함을 안겨드리죠.”
“그렇지. 실수 없이 완벽하게 해내마. 어떤 시나리오야?”
대본을 갈구하는 신인배우처럼 눈을 반짝거리는 얼굴.
그를 내려다보며, 소년은 싱그럽게 웃어 보였다.
*
허성윤과 우종태만을 룸에 남겨두고 나왔을 때, 이찬은 의외의 장면을 목격했다.
강정후가 손수 뽑은 커피를 천세영에게 건네주고 있었다.
“선배? 뭐 하는 거예요?”
“뭐 하냐니? 커피 안 보이냐?”
“그러니까요. 왜 그러는 거예요?”
“이 자식이······ 왜는 왜야? 덜덜 떨고 있으니까 준 거지.”
“아니 그러니까, 선배가 왜 복도에 나와 있는 거냐고요. 천세영 후배님한테 보여줄 모습이 아닌 것 같은데?”
그제야 강정후도 이찬이 하려는 말을 이해했다.
“아하. 깡패들이랑 친한 걸 보여줘도 되냐는 거야?”
“예. 어, 대놓고 말씀하시네.”
“뭔 상관이야? 난 얘가 성폭행 당할 뻔했다는 걸 아는데, 서로 쌤쌤이지. 그리고 나도 나름 은인인데 어디 떠벌리고 다닐까? 얘 얼굴 봐라. 이렇게 고마워하고 있잖아.”
“아······ 선배도 사람 얼굴 잘 보시지. 내 속내는 하나도 못 맞추는 분이라 잠깐 까먹었네요.”
강정후는 별 말 없이 코웃음만 쳤지만, 옆에 서 있던 턱수염의 거한이 다가서며 으름장을 놓았다.
“키 큰 꼬마야. 아무한테나 깝치는 거 아니다. 알겠니?”
“네, 양 실장님. 조심할게요. 오늘 도와주셔서 고마워요.”
“······어······ 그래.”
빠른 태세전환에 당황한 그를 내버려두고, 이찬은 천세영에게 다가갔다.
“이분들이 많이 도와주셨어. 전화를 안 받으니까 어디 있는지 알 수가 있어야지. 그래서 눈 딱 감고 부탁드렸는데, 실력이 좋으셔서 늦지 않게 찾아주셨더라고. 누나도 인사해.”
“아······ 감사합니다. 정말 감사합니다······.”
헐렁한 코트를 덮어썼을 뿐 맨 다리가 훤히 드러난 미녀의 인사. 양주광 실장도 그 똘마니들도 얼굴이 벌게져서 헛기침을 해댔다.
깡패답지 않은 그 모습에도 이찬은 놀라지 않았다.
‘내면을 들여다보는 강정후 선배가 아무한테나 은혜를 입히지는 않았겠지. 수족같이 써먹는 이 사람들은, 조직에서 이례적으로 착한 인간들일 거야. 그래봤자 범법자들임에는 분명하지만······ 허성윤 같은 놈을 믿었던 나보다는 나아 보이네.’
잠깐 그렇게 자책한 뒤에, 이찬은 천세영의 손을 잡고 룸싸롱을 빠져나갔다.
바깥에는 양주광이 대기시킨 차량들이 늘어서 있었다. 그 맨 앞 차량에 천세영을 밀어넣고, 이찬은 재차 강조했다.
“이군영, 흔적 안 남게 깔끔하게 처리해주세요.”
“어······ 그래. 그래야지.”
강정후 쪽을 보며 한 말이었는데, 대답은 양주광에게서 돌아왔다. 그의 도련님이 이미 조수석에 탑승한 탓에.
“뭐야? 선배, 이거 우리가 탈 건데요?”
“같이 가. 나도 회사로 간다.”
“난 집으로 갈 건데요?”
“남자 혼자 사는 집에 여자를 들여? 미친놈.”
“내가 남잔가? 그리고 매니저 누나랑 같이 사는데요?”
“······닥치고 빨리 타라. 누가 알아본다.”
모자를 눌러쓰며 뒷좌석에 올라타자, 강정후가 차량의 출발을 기다리지도 않고 용건을 털어놨다.
“그래서 이제부터 어떻게 한다고? 제대로 설명을 해봐.”
“아까 다 설명했잖아요?”
“뭘 다 설명해? 나보고 나라엔터 대표가 되라니, 그게 설명이냐? 넌 새끼야, 말을 뭐 그렇게 앞뒤가 없게 하는 거야?”
그 질문에 이찬은 퍽 당황했다. 충분한 시간을 줬으니 알아서 답을 찾았을 거라고 믿고 있었기에.
“이게 어려워요? 뻔한 거 아니에요?”
“미친 천재 새끼가······ 답답하니까 똑바로 설명해.”
“진짜 별 거 없어요. 허성윤은 나한테 인정받고 싶어서 안달이 났거든요. 그러니까 자기 잘못을 용서받을 수만 있다면 뭐든지 할 사람인 거죠.”
“그런 것 같더라. 날 버리고 너한테 붙은 박쥐 새끼.”
“아무튼 그런데, 정신 잃고 있던 우종태 입장에선 상황이 제대로 파악되지 않을 거거든요. 대체 누가 자기 턱주가리를 날리고 엿을 먹인 건지 헷갈리겠죠.”
“그래, 그렇겠지.”
“거기서부터 시작하는 거예요. 허성윤이 우종태랑 운전기사를 병원으로 데려가는 거죠. 그리고 이 모든 게 이군영이 꾸민 일이다, 그 새끼가 한림 약점 쥐려고 너한테 마약이랑 여자를 들이민 거다, 그걸 알았지만 난 부하직원이라 말릴 수가 없었다, 이런 식으로 말하는 거죠.”
강정후는 눈을 부릅뜨고 이찬을 노려봤다.
“이 새끼······ 그래서 이군영을 감금하라고 했구나?”
“예. 돌아다니면서 헛소리 지껄이면 곤란하기도 하고, 혹시 열 받은 우종태가 이군영 죽여버리면 일이 너무 커지니까. 아무튼 우종태가 경황 중에 허성윤을 믿게 된다면, 그때부턴 지들 똘마니들 모아서 이군영을 찾겠죠. 몰카가 찍혔다면 똥구멍에 불이 붙은 셈이니까요.”
“그렇겠지. 최대한 빨리 찾아내려 할 거다.”
“그렇지만 소강그룹이 이쪽에서는 와따라면서요? 양 실장님이 잘 처리한다면 쉽게 발견되진 않을 거고, 그 와중에 허성윤이 이군영인 척하고 은밀히 협박을 할 거예요. 동시에 이군영의 비리를 건네주면서 신뢰를 살 거고, 그러면 한림 법무팀이 이군영을 고발하는 전개로 가겠죠. 그쪽도 파워가 있으니까 금방 사회적인 사망 상태까지 몰아갈 거고, 그 다음에 허성윤이 접대부들 동원해서 난잡한 섹스파티를 벌일 건데, 그때 우종태를 보내버릴 테이프를 찍는 거예요.”
“하······! 그러면, 허성윤은? 그쪽은 용서해주는 거냐?”
소년은 이글거리는 눈으로 고개를 저었다.
“그럴 리가요. 그 사람은, 제일 심하게 당할 거예요.”
덫에 갇힌 채로는 결코 볼 수 없을 미래. 이찬은 가장 끔찍한 처벌을 허성윤 앞에 예비해뒀다.
“자수하기 직전에, 이군영이 스포츠고려에 칼을 건네줄 거예요. 한림이 거기 최대광고주잖아요?”
“아하······. 계획대로라면, 결국 셋 모두가 끝장나는 거로군. 가위바위보처럼 자기들끼리 서로를 매장하는 거야.”
“그렇죠. 깔끔한 복수죠?”
“그게 잘될 거라고 생각하냐?”
“허성윤은 제 손바닥 위에 있어요. 연기력이 충분할지는 모르겠지만요. 그래서 그쪽이 실패했을 때를 대비해서 플랜B도 세워놓긴 했는데, 쓸 일은 없었으면 좋겠어요.”
“하하. 빌어먹을 천재놈. 너하고는 척지고 못 살겠다.”
“다행이네요. 나라엔터 신임 대표가 날 좋게 봐주셨으니.”
“일 깔끔하게 마무리하려면 내가 나서줄 필요가 있다는 거지? 흥. 똘마니 노릇은 안 해줄 거다. 어디까지나 거래야. 네가 민간인들 때려눕힌 CCTV가 나한테 있다는 걸 명심해.”
대충 고개만 끄덕여 답하고, 소년은 천세영을 돌아봤다.
그녀는 돌아가는 상황을 조금도 이해하지 못한 듯했다. 혼란과 불안으로 가득한 미녀가, 조심스레 이찬을 올려다본다.
“저기······ 나는 그럼 뭘 해야 돼······?”
“후배님은 그냥 구경만 해. 내 방에 숨어서 스타가 될 준비나 하고 있으면 돼. 축하해. 두 번의 사기 끝에 키다리 아저씨를 만나게 된 걸.”
“······키다리는, 맞지만······.”
여전히 멍한 얼굴이었지만, 곧 천세영은 고개를 끄덕였다.
< 31장 - 인간 허성윤 (2) > 끝
ⓒ 비벗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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