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31장 - 인간 허성윤 (3.) >
미리 전화를 받았기에 염수진은 크게 놀라지 않았다.
다만, 맨몸 위에 이찬의 큼직한 코트만 덮어쓰고 있는 천세영의 상태를 인식하고는, 은밀하게 귓속말을 건넸다.
“찬아······ 너, 아무리 질풍노도의 시기라고 해도 그렇지, 여자애 옷을 막 찢고 그러면 큰일 나.”
“그게 아니라 구출해서 데려온 거예요. 쓸데없는 소리 하지 말고, 욕조에 물 받아요. 이 누나 씻고 쉬어야 돼.”
의문과 호기심 속의 매니저가 욕실로 들어간 뒤, 이찬은 천세영을 소파에 앉혔다.
“일단 개운하게 씻고, 옷 갈아입고, 푹 자. 앞으로 저 누나 방에서 같이 생활하면 돼. 한 달 안에 다 끝날 거야.”
“······신수영 선배님도, 여기서 합숙하셨던 거지?”
“그랬지. 상황은 좀 달랐지만, 이찬 합숙 아카데미에서 수학하시면서 찍은 <미스 스캔들>로 415만 관객 동원하셨던 거야. 후배님도 열심히 연습해서 좋은 모습 보여줘.”
“나, <고등형사> 출연하는 거야? 감독님은······?”
“오덕환 감독님? 그분은 내가 추천한 배우 안 까.”
그럴 만도 한 일이라고 천세영은 곧 생각했다.
오덕환이 마침내 스타 감독 반열에 오르게 해준 <미스 스캔들>에서, 배우 이찬은 그야말로 타의 추종을 불허하는 연기력으로 극을 이끌었다.
톱스타 신수영의 활약과 신예 미남 남태형의 충격조차 소년이 연기한 ‘심지호’ 앞에서는 빛이 바랠 정도였다.
“많이 신뢰하고 계신 거구나. 오 감독님이.”
“당연하지. 심성윤 PD님, 주동한 PD님, 계진행 감독님도 다 그래. 앞으로 나라엔터를 직접 맡게 될 강정후 선배도 내 말이면 껌뻑 죽는 거 봤지? 황금동아줄 잡은 걸 축하해.”
“으, 응! 고마워, 찬아.”
“······그렇게 쉽게 믿지 말라니까? 전형적인 사기꾼 패턴으로 말한 건데 이걸 또 믿네. 내가 배신하면 어쩌려고 그래?”
“아······ 나 속일 거야?”
“안 속일 건데, 그래도 의심은 하고 살라는 거야. 세상에 믿을 사람 많지 않으니까.”
최소한의 인간성은 있을 거라고 믿었던 허성윤에게 방금 전에 배신당한 이찬이기에, 쓴웃음처럼 내뱉은 말.
그렇지만 천세영은 이내 고개를 저었다.
“어떻게 그래. 넌 나 구해준 사람인데.”
“그거야 그렇긴 한데······ 이제 너라고 부르기로 한 거야?”
“아, 미안. 아! 죄송합니다, 선배님.”
“이제 와서? 너라고 해. 나도 편하게 부를 테니까, 세영아.”
반쯤 농담으로 건넨 말이었는데, 천세영의 얼굴이 환해졌다.
“아! 집에 온 것 같아. 좋다······.”
“어, 뭐, 집이라고 생각해.”
눈물이 고여 반짝거리는 눈과, 따뜻한 아파트에 들어와 빨갛게 된 볼과, 드디어 불안을 떨쳐내고 편안함을 담은 입술.
그 모습에 순간적으로 심장이 크게 두근거렸다.
‘뭐야? 이건 뭐지? 설마 이게 사랑이란 건가?’
알 수 없는 감정에 당황했지만, 소년은 미녀에게서 억지로 시선을 뗐다. 쓸데없는 생각을 할 때가 아니라고 생각하며.
그는 방으로 돌아가 노트를 펼쳤다. 그리고 경황 중에 약식으로 짜냈던 시나리오를 다시 한 번 검토하기 시작했다.
*
“빠르게 처리를 할 필요가······ 있는 안건이에요.”
“그렇죠. 이군영 그 인간은 연락도 안 되는 상황이고.”
“스포츠지들이 온통 그 얘기만 하고 있습니다. 이군영이 배임과 횡령으로 처먹은 돈이 백억에 이른다는 말까지 나왔어요. 시간은 우리 편이 아닙니다. 오늘 바로 해임해야 해요.”
“맞습니다. 이번 건에 더 이상 나라엔터 대표라는 직함이 들어가선 안 돼요. 적어도 전(前)이라는 글자는 붙어야죠.”
한 목소리로 외쳐대는 중늙은이들을 바라보며, 강정후는 속으로 헛웃음을 지었다.
‘다 그 꼬맹이가 원하는 대로 흘러가는군. 열 받은 우종태가 내부자 허성윤과 함께 이군영의 비리를 풀기 시작하니, 자연히 긴급이사회가 소집되고, 손절매 쪽으로 가닥이 잡힌 거야.’
물론 이사진 가운데에는 이군영의 수족과도 같은 사람이 많다. 그들 중 몇몇이 조심스레 비호 의견을 펼치기도 했다.
“하지만, 그분이 좋아하시지 않을 겁니다.”
“맞습니다. 동향에 고등학교까지 같아서 아끼시는 후배인데, 기다려보면 어련히 무마를 해주시지 않겠습니까?”
“이제 야인이 되셨다곤 하지만, 여전히 문화계에서 큰 존경을 받고 있는 분입니다. 그분이 나서면 상황이 바뀔 겁니다.”
이찬이 한때 궁금해했던 이군영의 뒷배는, 다름 아닌 문광부의 전 장관. 강정후조차 최근에 알게 된 정보였다.
‘그렇지만······ 생각해보면 자연스런 일이었지. 그 인간이 안정록 선생님의 목줄을 쥐고 있었던 게 그저 지원금 몇 푼을 통해서는 아니었을 테니까. 문광부 장관의 말 한마디 한마디가 한국 연극계의 사활을 결정하는 시대였으니, 그분으로서도 이군영의 말을 감히 거부하기가 어려웠을 거야.’
그 생각대로, 이군영은 때때로 지연과 학연으로 친밀한 문광부 장관을 통해 연극계를 지원해주곤 했다.
이찬을 영입했을 무렵에 극단 별빛의 <떠들이의 죽음>이 우수작품에 선정되게 만든 것도 그 일환. 그는 그런 식으로 안정록이 자신을 거스를 수 없게 만들었다.
그 장관으로 말하자면, 문민정부와 국민의 정부에서 계속해서 신임을 받았던 문화계의 태산.
그의 비호 속에서 이군영은 승승장구하며 업계의 1인자로 군림할 수 있었다. 그렇기에 중앙지검의 부장검사조차 이군영의 진짜 비위 행적에는 접근할 수 없었다.
하지만 한림그룹의 개입은 그들의 카르텔마저 무너뜨렸다.
“그래도, 안 돼요. 본인이 모습을 감춘 상황에서 대 한림그룹이 대놓고 이군영 하나를 물어뜯고 있는 겁니다. 이 와중에 전 장관인들 무슨 뾰족한 수가 있겠어요?”
“맞습니다. 지금까지 따로 지시가 없으신 걸 보면, 그분도 이미 가지를 쳐내신 겁니다. 우리가 잡을 끈이 아니에요.”
“바로 해임하고, 새 대표를 선임해야 합니다.”
“······해임안에 대해 다른 반대의견이 없으시면, 바로 표결에 들어가겠습니다. 동의하십니까?”
대화의 흐름을 살피며, 강정후는 다시 한 번 감탄했다.
‘믿었던 수족들 중에서도 배신자가 속출하네. 그야 논리적으로는 당연하지. 이대로는 내년으로 예정됐던 코스닥 상장이 미뤄질 판인 데다, 사실은 저것들도 대부분 이군영이랑 쿵짝이 맞아서 별별 돈을 처먹었던 것들일 테니, 일이 더 커지기 전에 논란에서 발을 빼고 싶은 거야. 그렇게 생각하면 간단한 일이긴 한데······ 열다섯 꼬맹이가 여기까지 예측했다는 건 참······. 빌어먹을 천재놈 같으니. 도대체 IQ가 몇이야?’
그렇게 생각하며 눈살을 찌푸릴 무렵에 표결이 끝나고, 이군영은 나라엔터 대표직에서 해임되었다.
그 뒤에야 강정후의 이름이 호명됐다.
“신임 대표직에는 강정후 이사를 추천합니다. 지금은 이미지 쇄신이 필요해요. 전 국민에게 사랑받는 젊은 스타라면, 악습을 끊어내고 바른 경영을 할 만한 인물로 보일 겁니다.”
“동의합니다. 나이가 젊긴 하지만, 그간 경거망동을 한 적도 없었고, 사람이 아주 바르고 성실하니까요.”
늙은 축에 속하는 이사의 말에, 강정후는 속으로 웃었다.
‘바르고 성실하다? 하하. 잘도 그런 소릴 하는군. 떡고물 잘 던져주는 어린놈이라는 말을 저렇게 잘 포장하다니.’
그간 외적으로 선량하고 정정당당한 인물의 가면을 고수해온 게 강정후의 처세술이었으니, 스타의 대표 선임을 통한 이미지 쇄신 효과라는 게 완전히 없는 얘기는 아니었다.
하지만 그가 추천된 주된 이유는 그쪽이 아니다.
이찬의 계략이 시작된 뒤 2주간, 강정후는 이사들을 일일이 찾아다니며 당근을 던졌다. 돈과 미래를 약속받은 이들이 자신의 대표 선임안에 찬동할 수 있도록.
성과는 반대의견 하나 없이 진행된 표결에서 잘 드러났다.
강정후는, 만장일치로 나라엔터 신임 대표에 선임되었다.
“강 이사······ 아니지. 강 대표, 축하해요. 앞으로 하셔야 할 일, 잘 알고 계시죠?”
“물론입니다. 썩어빠진 이군영 전 대표와 선을 긋고, 업계 1위 기획사로서 건전한 기업문화를 만들겠다고 밝혀야죠. 해임안 가결은 바로 공표하고, 제 기자회견 일정은······ 2주 정도 시간을 둘까 합니다. 성대하게 하는 편이 좋을 테니까요. 그때쯤엔 이군영도 공식적으로 기소가 될 거고. 화제성이 최고조에 달하지 않겠습니까?”
“아, 그렇지요. 역시 아주 훌륭한 친구란 말이야.”
늙은 이사들의 훌륭한 친구를 연기하며, 강정후는 속으로만 그들을 비웃었다.
*
이후의 상황은 나라엔터 이사들의 생각대로 전개됐다.
이군영은 정식으로 기소되었고, 신수영의 부친인 신성운 검사가 진두지휘한 검찰이 그를 찾아 백방으로 움직였다.
그리고 강정후의 대표 취임 기자회견이 대대적으로 준비되던 10월 23일.
이군영이 검찰에 출두했다.
당연한 그 전개가, 허성윤에게는 몹시 충격적이었다.
‘이게 뭐야······? 이게 어떻게 된 일이지? 이군영은, 찬이가 깔끔하게 처리한다고 했는데? 절대로 발견될 수 없는 곳에 숨겨놓고, 일이 다 끝난 뒤에야 풀어줄 거라고 했는데······?’
그래야만 했다. 이군영의 존재는 내부고발자 허성윤에게 있어서 역린이었으니.
그가 우종태와 함께 고발했던 무수한 비위들 중 대부분은, 사실상 허성윤이 진두지휘한 사건들.
그걸 모두 이군영 개인이 한 짓으로 탈바꿈시켜 그를 파멸시켰다. 그로써 우종태의 신뢰를 사서, 마지막 플랜까지 완벽하게 처리했다.
우종태와 그 측근들이 이군영의 사회적인 사망을 자축하며 마약과 난교 파티를 벌인 현장의 몰래카메라.
10월 22일에 촬영된 그 영상이, 약 두 시간 전에 각지의 알바들에게 일제히 전파되어, 한림에서 미처 손 쓸 틈도 없이 무수한 커뮤니티에 업로드되기에 이르렀다.
이제 허성윤에게 남은 일은 우종태가 파멸하는 모습을 구경하며 이찬과 함께 축배를 드는 일.
그 상황에서 뜬금없이 이군영이 나타난 것이다.
‘이러면 안 되는데? 저 인간이 우종태에게 복수하려고 몰래카메라 찍은 걸로 몰아가는 게 원래 시나리오였는데? 곤란해. 이군영이 진행상황을 살펴봤다면, 내가 배신했다는 걸 곧바로 알아챘을 거야. 그러면 조사받는 건마다 내 이름을 거론하면서 책임을 피해가려 할 거고······ 자기한테 악감정이 있는 비열한 놈이 거짓말로 자길 모함했다고 주장하겠지? 그렇게 되면, 자칫하면, 회장 삼남의 마약 난교 영상을 공유한 자를 눈 부릅뜨고 찾아 헤맬 한림 놈들이, 나한테까지 눈길을 주게 될지도 모르겠는데?’
상황의 판단은 빨랐다. 그는 당장 집을 나서서 해외로 도피하는 게 안전을 위한 일이라고 생각했다.
그렇지만 그는 움직이지 못했다.
자택의 담벼락 너머로, 이찬의 모습이 보였기에.
‘찬이다. 찬이야. 역시 와줬어. 그렇다면, 잘못 생각한 거로군. 그냥 시나리오가 조금 변경되었을 뿐인 거야. 이군영을 설득해서 새로운 배우로 투입한 거야. 그럼 그렇지. 저 특별한 아이가 하는 일에 착오가 있을 리 없지.’
그렇게 생각하며 웃고 있는 허성윤의 앞에 이르러서, 이찬은 고개를 갸웃거렸다.
“뭐야? 도망 안 쳐요? 왜 그렇게 환하게 웃고 있어요?”
“응? 그게 무슨 말이야? 하하하, 농담도 참.”
“농담은 무슨. 이군영 검찰 출두하기 전에 인터뷰 한 거 못 봤어요? 일부 과실은 인정하지만, 기소된 대부분의 죄목이 홍보팀장 혼자 벌인 짓이라고 밝혔어요. 허성윤이란 사람이 자기한테 억하심정을 품고 죄를 덮어씌웠으며, 그 과정에서 한림그룹 우종태 전무와 사이가 틀어져서 섹스 영상을 유통한 거라고 말했죠. 스포츠고려에서 특종으로 터뜨려서 벌써 일파만파 퍼지고 있을 텐데?”
과도하리만치 친절한 설명.
담담하게 사실관계를 설명하는 소년의 말은, 허성윤에게 마치 잠결에 듣는 자장가처럼 들렸다. 도저히 믿을 수 없는 상황에 배신감조차 느끼지 못하고, 그는 신음했다.
“그······ 어······ 나는, 그게 아닌데?”
“아니죠. 사실은 이군영이 주도한 사건들이 더 많았으니까. 하지만 새로 나라엔터 대표에 취임할 강정후가 그 말에 무게를 실어줄 거예요. 허성윤이란 사람이 얼마나 끔찍한 괴물이었는지, 아주 열성적으로 고발할 거예요. 오늘 기자회견이 아마 생방송으로 전국에 중계될 건데······ 재밌겠죠?”
“안 돼! 그건 안 돼, 찬아! 찬아, 그걸 막아야 돼! 나는, 그렇게 되면, 재기는커녕 한림그룹 놈들한테 추적당할 거야!”
“그러게 믿어줄 때 잘하지 그러셨어요? 난 배신자한테 관대하지 않아요. 그래서 똑같은 방식으로 갚아드린 겁니다. 믿고 있던 사람에게 배신당한 기분이 좀 어때요?”
그것이야말로 완벽한 복수.
자신의 믿음을 배신하고 비인간적인 범죄를 저질렀던 인물에게, 이찬은 똑같은 방식으로 잘못을 알려주고자 했다.
“네가?! 이걸, 의도한 거라고! 네가 날 배신했다고! 난 아니야! 오직 널 위해서였어! 널 유일한 배우로 만들기 위해서, 모든 걸 바칠 생각이었단 말이야!”
절규하는 중년인을 바라보는 소년의 마음은, 불편했다.
복수를 이뤘지만 즐거움은 샘솟지 않는다. 그저 일이 이렇게까지 치닫도록 만든 자신의 어리석음이 안타까웠다.
‘진작 이 사람의 진면모를 알아봤다면, 이 상황까지는 오지 않아도 됐을 텐데. 이 비뚤어진 욕망을 컨트롤해서, 그 머리를 좀 더 좋은 방향으로 사용하도록 해줄 수도 있었을 텐데. 하지만······ 용서할 수는 없어. 이런 사람을 더 곁에 둘 수는 없어. 그래서는 좋은 사람이 되지 못할 테니까.’
그러나 다음 순간에는 이상한 위화감이 들었다.
‘이 사람을 끔찍한 미래로 이끄는 암행어사는······ 좋은 사람인 걸까? 나는 정말 좋은 길로 가고 있는 걸까?’
미친 듯이 발을 구르며, 허성윤은 이찬의 멱살을 쥐었다. 알아들을 수 없는 말들이 그 입에서 침과 함께 비산했다.
그의 팔을 쳐내고 다시 자리에 앉힌 뒤, 소년은 물었다.
“어디로 가고 싶어요? 검찰로 갈래요, 아니면 당장 도망쳐서 한림그룹 사람들한테 쫓길래요?”
“나는, 어디에도 안 가!”
“······전자가 나을 거예요. 죄목을 인정하고 몇 년 들어갔다 나오시면, 출소한 뒤에는 제가 도와드릴 수 있을 테니까.”
“안 가! 못 가! 찬아, 찬아! 이걸 되돌려놔야 한다! 난 너한테 최고의 참모가 돼줄 수 있는 사람이야!”
그건 필요 없는데- 이찬은 그렇게 생각했다.
그리고 허성윤의 턱을 가격해 쓰러뜨린 뒤, 그의 정원을 걸어 그의 집을 벗어나려다, 걸음을 멈췄다.
‘난, 허성윤처럼 나쁜 사람이 아니야. 난 좋은 사람이야······.’
긴 혼란과 고민 속에서, 소년은 마침내 결심했다.
그는 핸드폰을 들어 익숙한 전화번호를 눌렀다.
< 31장 - 인간 허성윤 (3.) > 끝
ⓒ 비벗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