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32장 - 스승 안정록 (1) >
“그렇게 된 거였구나. 네가 한 일이었어. 찬이 네가······.”
읊조린 뒤, 안정록은 한숨을 내쉬었다.
그 모습에 이찬의 기분도 우울해졌다.
“제가 너무 잔인했던 걸까요?”
“응? 아니, 그렇기야 하겠니. 허성윤도 결국은 검찰에 붙잡혔지 않니. 그냥 뒀다면 그 끝이 어떻게 됐을지 모르는 상황이었는데 말이야. 그게 잔인한 복수라고 생각지는 않는단다.”
그 말을 듣고 소년은 안도의 한숨을 삼켰다.
원래 계획은 잔인한 복수였다. 한림그룹을 자극한 건 의도적이었으며, 그들이 오너 일가의 수치를 폭로한 허성윤에게 불법적인 처벌을 가하는 것까지가 플랜이었다.
하지만 마지막 순간에 마음을 고쳐먹었다. 신성운 검사에게 전화를 걸어, 허성윤이 법망의 처벌을 받을 수 있게 했다.
‘그러지 않고 내버려뒀다면, 그 사람은······ 목숨을 잃었을지도 모르지. 19금 범죄영화 각본에 나오는 것처럼, 드럼통 속에 콘크리트로 매장돼서 바다에 던져졌을지도. 그렇게까지 가진 않았더라도 어쨌든 끔찍했을 거야.’
그날로부터 한 달이 흐른 지금, 이찬은 계략의 철회에 만족하는 중이었다.
적어도 비정한 결정을 내린 죄책감에 밤잠을 설칠 일은 없게 되었으니.
다만 허성윤의 체포로 인해 수사의 초점은 온전히 나라엔터의 비리 쪽에 맞춰졌다. 병환을 핑계로 불구속된 우종태는 강제로 투약당했을 뿐이라고 변명하는 중.
그렇게 재벌2세를 피해자로 코스프레 시키며 허성윤의 저열함을 비난하는 게 고려일보 쪽의 일관된 스탠스였다.
그런 전략은 놀랍게도 대중에게 먹혀들었다.
한림그룹의 약점을 잡아 돈을 뜯어내려던 홍보팀장의 계략이었다고 믿는 사람이 적지 않아, 우종태가 벌금형 정도로 풀려나더라도 국민 법감정은 크게 자극되지 않을 듯했다.
‘원래 계획대로였다면, 한림 똘마니들이 허성윤을 처리하는 방식까지 확인할 수 있었을 거야. 강력범죄의 교사로 우종태를 완전히 몰아붙일 수 있었을 거고. 하지만······ 사람을 죽음의 위기로 몰아넣으면서까지 해야 할 일은 아닌 것 같아. 천세영 누나한텐 미안하지만, 그런 건 정말 나쁜 사람들이 하는 일이야. 난 그렇게 돼선 안 돼. 그러면 하늘에서 그분이 많이 슬퍼하실 테니까······.’
그렇게 이찬은 마지막 한 방을 포기했다. 허성윤을 구속시키며 우종태에게 퇴로를 열어준 셈.
결과적으로 깔끔한 마무리였다 자평했지만, 이마를 감싸 쥐는 안정록의 얼굴이 소년에게 다시금 불안감을 안겨줬다.
“그럼······ 왜 표정이 어두우신 건데요?”
“왜 그런 것 같니?”
“잘 모르겠어요. 아저씨는 캐릭터 파악이 안 돼요.”
“캐릭터라니, 날 무슨 배역처럼 말하는구나. 어려운 게 아니야. 찬아, 나는 네게 미안해하고 있는 거란다. 그런 끔찍한 일들에 얽혔을 때 네가 가장 먼저 도움을 요청한 사람이 내가 아니었다는 점에서. 내가 네게 그 정도 신뢰도 주지 못했다는 점에서, 괴로워하는 거란다.”
정말 캐릭터 파악이 안 돼- 이찬은 고개를 흔들었다.
강정후와 소강그룹 깡패들에 대해선 감춰야 했기에, 안정록에겐 성범죄의 징후를 포착하고 검찰과 공조해 함정을 팠다는 정도로만 말해둔 상태.
수사를 위해 검찰 끈을 써먹었다는 당연한 전말을 듣고서 의지가 되지 못해 미안하다고 말하다니, 이해할 수 없는 감수성이 아닐 수 없었다.
“뭘 그렇게 심각하게 반응하고 그러세요? 앞으로 그런 일들이 벌어지지 않게, 제가 더 잘되면 돼요. 건전하면서도 압도적으로 잘나가는 기획사를 만들어서, 나쁜 회사 사람들을 다 눌러버리면, 욕심쟁이들도 점점 꼬리를 말게 될 거예요. 그런 의미에서 아저씨 힘이 필요한 거고요.”
“그래. 내가 어떻게 힘이 돼주면 좋겠니?”
“나중에 인터뷰를 좀 해주셨으면 해요. 이찬의 새 기획사에 참여해서 많은 신인배우를 양성하려고 한다, 그러니까 재능 있는 신인들은 여기부터 찾아와라, 이런 식으로요.”
“다행이구나. 내 허명이나마 필요하다니.”
“아저씨가 허명이면 전 그냥······ 미꾸라지죠. 꾸물꾸물.”
의태어와 함께 몸을 뒤틀어 보이자, 그제야 안정록이 씩 웃었다. 그리고 이찬은 그 얼굴에 민망함을 느꼈다.
단순히 선의로만 부탁한 일은 아니었다. 시사회 일정 끝나고 영화 개봉일이 코앞에 다가왔을 때 터뜨릴 예정이었기에.
<684>에서 호흡을 맞춘 안정록과 이찬이 함께 기획사를 만든다는 소식이 영화의 화제성 증가에 공헌하게 될 터였다.
‘순진한 사람 이용하는 것 같아서 민망하긴 하지만, 이 아저씨도 러닝개런티니까 상부상조하는 셈이지 뭐. 그런데 그렇게 됐을 때 강정후 선배가 어떻게 나올지 궁금하네. 대표직 때려치우고 이쪽으로 넘어오겠다고 하지는 않으려나?’
설마 그렇게까지 할까 싶어서 어깨를 으쓱일 무렵, 안정록도 시선을 옮겨 객석 쪽을 바라봤다.
이제 몇 분 뒤면 업계의 명사들이 자리를 채울 200석.
그들을 상대로 펼쳐질 <684>의 첫 번째 VIP시사회에서, 이찬은 무대인사만 마친 뒤에 장내를 빠져나가야 한다.
“네 영화의 첫 시사회를 직접 보지 못해서 어떡하니?”
“괜찮아요. 집에서 혼자 보죠 뭐.”
“하하하······ 그건 안 된다.”
“안 된다는 것도 웃기지 않아요? 청불 씬들이 거의 다 제가 출연한 장면들인데, 그게 잔인하다고 해봤자 저한테 악영향을 미칠 리는 없는 거잖아요?”
“그거야 네 말이 옳지만, 일단은 법이 그렇지 않니. 청불 영화는 보호자를 동반하더라도 못 보는 게 규정이야. 그러니까 조금만 참고 기다리렴. 아마······ 내 생각에는, 네가 이 영화를 볼 수 있게 될 때쯤에는, 군영이도 출소할 것 같구나.”
“엑. 얘기가 왜 그쪽으로 돌아가요?”
질색하듯 표정을 찡그리는 소년을 보며 안정록은 또 한 번 웃었다. 그렇지만 미소는 짧은 시간 뒤에 사라졌다.
“사실 나는, 이 영화를 군영이한테 꼭 보여주고 싶었다.”
“예? 왜요? 그 아저씨도 시대의 피해자나 그런 거예요?”
“그런 건 아니야. 군영이는 풍족한 환경에서 자랐지. 가지고 싶은 걸 못 가져본 적이 없었고, 인물도 좋은 데다 말까지 잘하니 언제나 떠받들어지기만 했던 거야. 그러니까 극단에 들어왔을 때가 처음이었겠지. 자기가 주인공이 되지 못하는 현실을 실감한 건. 그때부터 비뚤어지기 시작했을 거야.”
“······그렇게 말씀하셔도 동정심은 안 생기는데요?”
“하하. 동정심을 안 느꼈다고 하기엔 너무 풀어준 게 아니냐? 검찰 들어가기 전에 인터뷰까지 하게 해줬지 않니? 그걸로 허성윤과 비위를 분담하게 되었으니, 그 녀석 형기는 아마 몇 년쯤 줄어들 거다.”
그거야 허성윤 쪽이 좀 더 미웠으니까 그랬던 건데- 소년은 속으로 구시렁거렸다.
하지만 안정록은 배울 점이 많은 몇 안 되는 어른. 불만을 감춰둔 채 이어지는 말까지 경청했다.
“군영이는······ 날 많이 미워했다. 나 때문에 앞길이 막혔다고 생각해서, 나보다 더 위에 서서 내려다보길 염원했어. 그게 연기에서 멀어져 경영에 집중하게 된 이유였지. 그러니 군영이가 한 그릇된 행동들은 모두 내 탓이라고 할 수 있다.”
“와. 비약이 심하신데요?”
“하하하. 어쩔 수 없지 않니. 인연생기(因緣生起)라고 한단다. 인과 연이 모든 번뇌의 출발이라는 얘기야. 생각해보렴. 내가 조금 더 주변을 살필 줄 아는 사람이었다면······ 내 연기에만 집착하는 광인이 아니라, 엇나가는 동기를 붙잡아줄 수 있는 사람이었다면, 군영이가 못된 인간들이나 벌이는 그런 짓을 배우는 결과는 나오지 않았을 거야.”
소년은 책임소재가 지나치게 소급되었다고 판단했다.
“아저씨. 불교 가르침이 대자대비한 건 잘 알겠는데요, 그거 너무 결과론적이에요. 진짜 착한 사람은 그런 짓까진 저지르지 않는다고요. 아무리 심리적으로 몰린다 해도요.”
“옳은 말이야. 하지만 네 말처럼 구분을 하려면, 세상 사람들 중 90%는 악인으로 분류되고 말 거다. 마음이 여린 이들에게는 선악보다도 환경이 크게 작용하는 법이니.”
“그야······ 그래도 다른 사람을 도구로 써먹진 않을걸요.”
“네 주변에, 절대로 그러지 않을 사람들이 몇이나 있니?”
“그야, 아저씨랑 정창영 아저씨랑 진아 누나랑······ 아 몰라. 어쨌든 범죄자는 옹호해줄 생각 없어요.”
겉으로는 고개를 흔들었지만, 소년은 일부 수긍하고 있었다.
이군영과 허성윤과 우종태가 태어난 순간부터 악인이었을까. 안정록과 정창영은 처음부터 정직하고 선량했을까.
아마 그렇지는 않았을 터였다.
‘인간은 살아가며 듣고 본 사람들의 양식을 배워가. 자기 혼자서 만든 인격이란 건 없다고 말해도 될 거야. 좋은 사람들에게 버림받고 범죄자들 틈바구니에서 살게 된다면, 정말 극소수를 제외하고는 양심을 지킬 수 없을 거야. 그렇게 인간은 주변의 인간을 훔치면서 자신을 만들어나가. 나는······ 그 과정이 세상 누구보다도 더 빠른 도플갱어인 거고.’
단적으로 비슷한 과정이라고 하기엔 격차가 컸다. 보통 사람들은 몇 년 관찰한 가족도 쉽게 따라하지 못하지만, 이찬은 단 3초 만에 외양을 완벽히 훔칠 수 있으니.
다만 아주 느린 사람조차도 몇 달 정도 어울리면 억양과 제스처가 닮아가곤 한다. 마음이라고 해서 영속적일 리 없었다.
“나도 그 녀석을 옹호하고 싶은 건 아니야. 밉다. 정말 미워. 하지만······ 시대 속에서 양심을 저버려야 했던 교육대장 이성일의 후회를 보고 나면, 군영이도 조금은 자신을 돌아보게 되지 않을까 생각했어.”
“반면교사라 이거죠? 하지만 너무 순진한 생각이에요. 영화가 사람을 바꾼다니, 동화 같은 얘기잖아요?”
“하하하. 맞는 말이다. 동화 같은 얘기지. 하지만 나는 그 동화를 꿈꾸며 살아왔단다. 욕망으로 양심을 저버리는 사람들에게, 내 연기가 작은 활로가 될 수 있으면 했어. 그게 내가 배우가 된 이유란다. 소박한 꿈인 거지.”
소박하지만 불가능한 꿈이라고 소년은 판단했다.
그렇지만 그 냉소적인 의식 아래에서, 그의 무의식은 잠시 동화 속 왕자님이 되었다. 늘 차갑게만 보였던 세상이 자신의 연기를 통해 조금이라도 따듯해질 수 있다면, 참 좋을 것 같다고 생각했다.
“찬이 넌······ 나와 달리 이미 네 사람들을 지키고 있지. 자기 연기에만 골몰해 있는 것이 아니라, 신혜나 진철이를 가르치고, 잘못된 일에 분연히 일어나 싸웠어. 그건 좋은 일이다. 다만, 그 과정에서 너 자신이 다치지는 않았으면 해.”
“그거야 뭐······.”
몇 마디 더 대답을 하려던 때에 안내방송이 흘러나왔다.
[알립니다. 포토존 촬영과 인터뷰가 진행될 예정입니다. 장내에 계신 출연진은 로비로 나와 주시기 바랍니다.]
대화가 아닌 스케줄을 시작할 시간이었다.
*
<684>의 첫 번째 VIP시사회에는 이미 무수한 유명인들이 참여를 예고한 바 있었다.
촬영에만 무려 80억이 투입된 초대형 블록버스터. 그리고 국가의 어두웠던 과거사를 직접적으로 조명하는 시나리오.
그런 것들이 중요한 게 아니었다.
칸 영화제에서 감독상을 수상한 안정록이 귀국한 뒤 처음으로 출연한 영화라는 점에서, 하루하루가 바쁜 톱스타들조차 열렬히 초청에 응했던 것이다.
임호준, 김은희, 오연진, 양원일, 주경희, 이소연, 차영기, 진유성, 감수재, 신수영, 최정하, 임희재 등등.
그렇게 반짝이는 스타들 중에서도 가장 뜨거운 시선을 받은 건, 친형제처럼 다정하게 차에서 내린 조혁수와 강정후였다.
“혁수 씨! <형제> 개봉도 초읽기에 들어갔다고 하던데, 경쟁작이 될 수 있는 <684> 시사회에 오신 게 의외인데요?”
“흠. 경쟁작이라기보다는, 한국 블록버스터의 새 장을 열 좋은 작품이라고 생각해서 이렇게 오게 됐습니다.”
“강정후 씨! 최근에 나라엔터 대표로 선임되시고 바쁘게 지내신 걸로 알고 있습니다. 오늘 시간 내기 힘드셨죠?”
“네. 어렵게 시간을 내서 오게 됐습니다. 은사이신 안정록 선생님께서 오랜만에 출연하신 블록버스터니까요.”
거의 기자회견처럼 뜨거워진 취재열기 속에서 그들이 붙잡혀 있는 동안, 이찬은 안정록, 소해진, 왕호준과 함께 로비에서 연예정보 프로그램의 인터뷰를 진행했다.
“반년 동안 무인도에서 동고동락하셔서 그런지, 정말 팀웍이 좋아 보입니다. 특히 형님들께서 우리 이찬 군을 아끼시는 느낌이 확 오는데요? 그런데 이찬 군은, 어떡하죠? 아직 나이가 어려서 오늘 시사회를 볼 수가 없다고요?”
“예. 평소에는 잊고 살지만, 사실 제가 열다섯밖에 안 돼서요. 그래서 감독님한테 몰래 파일로 전송해달라고 부탁드렸는데, 일언지하에 거절하셨어요. 제가 불법으로 업로드 사이트에 올릴 거라고 생각하신 모양이에요.”
“하핫! 하여튼 재간둥이라니까. 잘 타기만 하는 줄 알았는데, 이렇게 말을 잘하기도 하네요?”
“아······ 하하하······.”
그렇게 화기애애한 분위기 속에 인터뷰를 마치고, 내빈들의 박수갈채 속에서 무대인사 자리에 나섰을 때.
이찬은 익숙한 동료배우들의 면면을 눈에 담았다.
‘신수영 누나. 가정폭력 겪으면서 혹시 비뚤어질까봐 걱정했는데, 여전히 통통 튀듯이 밝은 사람. 최정하 선배. 희재 누나한테 푹 빠져서 나를 질투한 적도 있었지만, 사실은 순진하고 착실한 사람.’
우측으로 고개를 돌리자 좀 덜 친밀한 사람들이 보였다.
‘조혁수 아저씨. 연기 말고는 관심도 없고 말도 틱틱거리면서 하지만, 내면은 의외로 따뜻한 사람. 강정후 선배. 속을 들여다보면 싸가지가 바가지지만, 적어도 악인은 아닌 사람. 뭐 가면 위로는 누가 봐도 호인으로만 보일 거고.’
누구 하나 나쁜 사람은 없다. 그렇기에 곁에 두고 오랫동안 함께 걸어가고 싶은 좋은 사람들이었다.
그러나 그들의 선량함이 천부적인 것은 아닐 터였다.
‘신수영 누나가 계속해서 학대에 시달렸다면? 어쩌면 그 괴로움을 남에게 푸는 사람이 됐을지도 몰라. 강정후가 질투한 게 내가 아니라 평범한 아이였다면? 아마 불쌍한 아역을 연예계에서 퇴출시키고 더 나쁜 쪽으로 나아갔겠지.’
그러니, 운이 좋았다고 말할 수 있었다. 오지랖 넓은 소년과 만나 그들은 조금 더 좋은 사람이 될 수 있었다.
그리고 그건 이소연 역시 비슷했다.
‘저 아줌마가 만난 게 이군영보다 더 못된 인간이었다면······ 저렇게 밝은 얼굴로 웃는 사람이 될 순 없었겠지.’
이군영의 증언에 따르면, 나라엔터의 이소연은 신인 시절 성상납을 통해서 기회를 잡은 인물이다.
대가성 향응은 받는 쪽도 주는 쪽도 전적으로 범법. 이군영도 이소연도 결국 범죄자에 해당하고, 위력의 강제인지 호혜의 관계였을지도 알 수 없는 일이었다.
다만 그들은, 선인이 아닐 뿐 악인이라고 보기 어려웠다.
‘결국 중요한 건 환경이야. 개인은 약해빠졌고, 쉽게 유혹당하고 말아. 내 기획사는 그래선 안 돼. 누구도 자기 직무 안팎에서 특권을 갖고 있어서는 안 된다는 거야.’
열화와 같은 박수 속에서 무대에서 내려와 집으로 향하는 길에, 이찬은 정창영에게 넌지시 말했다.
“저녁은 강정후 선배랑 먹을 거예요. 서류 챙겨주세요.”
“아······ 드디어 시작이구나. 매니저들 좀 모아볼까? 일종의 위력시위를 보여주면 협상이 좀 용이해질 텐데.”
고개를 저어 보이며, 이찬은 윤대흥의 유지를 생각했다.
‘좋은 사람들과 함께하는 걸로 충분해. 좋은 작품도 좋은 회사도 결국은 사람한테서 나오는 거니까. 그렇게 나쁜 사람들로부터 멀어져야, 나도 좀 더 나은 사람이 될 수 있어. 그리고 그건······ 잔인한 복수보다도 좋은 보상이 될 거야.’
집에 도착해서 그런 생각의 전환을 토로했을 때, 좋은 보상의 대상자인 천세영은 당황했다.
“어, 찬아? 무슨 말인지 모르겠어. 풀어서 설명해줘.”
“멍청하긴. 뭘 더 어떻게 풀어서 설명해?”
“뭐? 치. 그건 됐고, 찬아, 오늘 외식할래? 냉면 먹자.”
“아직 안 돼. 우종태가 억하심정 품었을지도 모른다니까?”
“아, 그래, 흥. 난 밥도 굶고 혼자 방에 처박혀서 연기연습이나 하고 있을게. 안 먹어, 안 먹어.”
“······사다줄게. 그만 좀 칭얼대.”
“아! 히히, 고마워.”
말을 놓은 뒤로 친근감이 커졌는지 곧잘 장난까지 치는 천세영은, 집안에 갇힌 생활 속에서도 보석처럼 빛났다.
그렇지만 이찬은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제대로 복수해주지 못해 미안하다고 말하려던 건데, 답답해서 울컥 화를 내버렸네. 뭐 됐어. 본인은 이 정도로도 만족하는 것 같으니까, 얼버무리고 넘어가야지. 애초에 거기까지 신경 써줄 필요도 없는 사이잖아? 내가 이런 유치한 누나를 사랑할 리 없으니까 말이야. 그럴 리도 없고 그래서도 안 돼. 내가 무슨 베이비시터도 아니고 말이야······.’
다섯 살이나 연상인 미녀를 다섯 살 유아 취급하며, 소년은 저녁의 미팅을 준비했다.
< 32장 - 스승 안정록 (1) > 끝
ⓒ 비벗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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