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훔치는 연기자-96화 (96/250)

< 34장 - 대표 계진행 (3.) >

‘투자-제작-배급-극장의 수익구조를 일원화한다면, 정말 대단한 일이 될 거야. 어쩌면 무리한 투자로 한꺼번에 망해버리는 일이 될 수도 있겠지만······ 계진행 아저씨라면 해낼 수 있을지도 몰라. 그렇게 된다면 이 아저씨는 한국 영화계를 쥐락펴락하는 거물이 될 거야.’

물론 쉽지는 않을 터였다. 작은 성공이라도 선례가 생긴다면, 그 즉시 대기업의 자본이 제작 업계까지 흘러들 테니까.

돈으로 찍어누르는 그들의 방식 앞에서 순수 영화인이 버틸 수 있을지는 알 수 없는 일이었다.

‘······하지만 딱 하나, 대기업이 돈으로 살 수 없는 게 있어. 인맥. 흥행파워를 지닌 배우들은 러닝개런티와 CF를 통해서 충분한 수익을 올릴 수 있어. 그런 사람들을 그저 돈으로만 꼬드길 수는 없는 거야. 그런 의미에서 이 아저씨한텐 영화인으로서의 강점이 있는 거지.’

거기까지 생각한 뒤에, 이찬은 가볍게 대꾸했다.

“잘되셨으면 좋겠네요. 그런데 그 애길 왜 저한테 하시는 거예요?”

[미리 말이나 해두는 거야. 아까 오 감독님 뵀는데, <고등형사>엔 덕 필름하고 너하고 반반씩 투자할 거라면서? 내가 잘돼서 배급사 차리게 되면, 그 작품을 한번 맡아보고 싶어.]

“투자자로서 권한이 있긴 한데······ 의리로 들어드리긴 좀 위험한 제안인데요? 신생 배급사가 일을 잘해주시려나?”

[하하하, 냉정한 녀석 같으니. 오픈기념으로 반값에 해줄게. 그 정도면 어때? 끌리지 않아?]

통상적으로 배급사는 극장과 나눈 수익 중 10%를 가져간다. 그걸 절반으로 줄여준다면, 투자수익이 수억 이상 향상될 터였다.

그런 호조건을 제시하는 이유 역시 명확했다. 확실한 흥행카드를 통해서 신생 배급사의 협상력을 제고하려는 것.

서로에게 도움이 될 솔깃한 이야기였다.

“정말 배급사 차리시면, 긍정적으로 고려해볼게요.”

[그래. 사실은 배급이 아니라 투자를 해보고 싶었는데, 오덕환 감독님이 거절하시더라. 네가 들어올 자리라고.]

“맞아요. 그래서 이번 영화가 잘돼야 해요. 여기서 충분히 자금 못 만들면 외부 투자자 유치해야 되는데, 좀 싫어서요.”

[그래? 그럼 난 내 영화가 잘 안 돼서 너한테 수익이 안 생기길 기원해야 되나? 하하하하.]

쓸데없는 이야기에 대충 답하며 통화를 마친 뒤, 이찬은 조심스레 계진행의 앞날을 그려봤다.

‘극장을 소유한 대기업 계열 배급사들만이 지배하는 이 시장에, 순수 영화인이 일원화된 계열사를 만들어 정착시킬 수 있다면······ 정말 엄청난 신장률이 나오겠는데? 그럴 가능성이 보인다면 진지하게 투자를 고려해봐야 되겠어. 물론 계진행 아저씨 말마따나 아직 먼 일이긴 하지만······.’

먼 미래를 머릿속에 그려보며, 소년은 거실로 돌아갔다.

*

크리스마스에도 <684>의 흥행돌풍은 꺾이지 않았다.

그보다는 오히려 더욱 기세를 올려, 83%에 달하는 기형적인 좌석점유율로 57만 관객을 동원했다.

기존의 흥행 기록들을 모조리 갈아치우며 이틀 만에 달성한 91만 스코어.

그 놀라운 성과에 극장 측에서도 빠르게 응답했다. <왕의 귀환>에 배정되어 있던 스크린 일부를 <684>로 돌려, 위대한 한국영화의 앞길에 청신호를 켜준 것이다.

그렇게 즐거운 소식들이 쏟아진 12월 26일.

합동인터뷰 일정으로 안정록과 이찬을 맞이한 계진행은, 설레는 얼굴로 희망적인 전망을 입에 담았다.

“오늘 100만 돌파는 기정사실인 것 같습니다. 거기에 주말 관객몰이가 잘되면······ 연내에 200만을 돌파할 수 있을지도 모르죠! 그 뒤에도 입소문이 유지되면 평균 30만 선에서 관객이 이어질 거고, 그렇게 되면······ 내년 1월 안에 <네 친구> 기록을 돌파할 수 있습니다.”

“설마 그렇게까지야 되겠나? 그 작품이 800만 돌파에 100일 가까이 걸렸던 것으로 기억하는데.”

섣부른 기대에 안정록이 제동을 걸어봤다.

물론 세계적인 거장이라곤 해도 그는 영화산업에는 무지한 순수예술인. 그 발언은 업계의 흐름을 읽지 못한 태클이었다.

“그때는 멀티플렉스 도입 초창기였죠. 지금과는 극장 환경이 달랐으니, 하루에 동원할 수 있는 관객의 수가 적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대작의 상영기간도 길어졌던 거고요. 하지만 이쪽은 이틀 만에 100만이 코앞입니다. 인터넷을 둘러봐도 온통 우리 영화 얘기예요. 반응도 거의 다 호평이고요. 관객들은 계속해서 몰려들 겁니다. 물론 2월에는 <형제>도 개봉할 예정이라 롱런을 할 수는 없을 테니, 잘돼도 2월 말에는 내려야 하겠죠. 그 안에 천만을 달성하기 위해 이후로도 홍보에 총력을 기울일 셈입니다.”

“그거야, 나도 최선을 다해 도와야지. 보다 많은 사람들이 봐줬으면 하는 이야기니까. 우리 찬이를 위해서도, 잘돼야만 할 거고.”

대화 끝에 두 어른의 시선이 이찬을 향했다. 애정을 듬뿍 담은 따뜻한 눈빛이었다.

“······흠, 흠. 감독님, 얘기 나왔으니까 말인데, <형제> 흥행은 어떻게 될까요?”

“응? 하하, 벌써부터 경쟁작을 견제하는 거야? 왜, 네가 나온 회사에 뭉친 스타들의 기대작이라서 그래?”

“그런 건 아니고, 강정후 선배랑 내기를 했거든요. 어느 영화가 더 많은 관객을 끌지.”

“그래? 그렇다면 미리 축배를 들어도 되지 않을까? 그 영화가 순제작비만 100억 넘게 썼고 또 주연들의 이름값이 대단하다곤 하지만······ 그래도 이만큼은 안 될 거야. 이쪽은 20대 학생들에 더해서 넥타이부대까지 극장으로 불러들이면서, 정말 신드롬을 일으키고 있으니까 말이야.”

신드롬이라는 말은 합당했다. 기존의 최대 흥행작을 압살하는 수준의 기록에, 언론이고 네티즌이고 연일 <684> 얘기에 열을 올리고 있는 상황.

원래 첫 주말 지나서 진행할 예정이었던 합동인터뷰가 크리스마스 직후로 당겨진 것도 그런 까닭이었다.

“하지만 그건 저쪽에도 호재가 될 거예요. 우리가 끌어들인 중장년층은 자연스레 또 따른 블록버스터에도 눈길을 줄 거고, 업계 1위인 저쪽 배급사가 초기 스크린 수를 우리보다 한참 더 많이 잡아버리지 않겠어요?”

“그거야 그렇긴 한데······ 흠. 그러게. 이거 설마, 신기록 작성한 지 몇 달 지나지도 않아서 빼앗기는 상황이 나오지는 않겠지? 그러면 안 되는데.”

어느 쪽이 기록을 경신하건, 블록버스터들의 경쟁을 통해 한국 영화산업은 한층 더 발전하게 될 것이다.

그렇지만 가능하면 그 주역이 자신이었으면 좋겠다는 것이 계진행의 바람이었다.

“뭐······ 지금은 그쪽 완성도가 생각보다 낮길 바라는 수밖에 없겠지. 그런데 투자자님, 내기 판돈은 뭐야? 돈 걸었어?”

“돈은 아니고 좀 상징적인 판돈이 있었는데, 얼마 전에 없어졌어요. 그래서 새로 정해야 될 것 같아요.”

“새로 정한다? 뭘로 하고 싶은데? 일단 우리가 이긴다고 하면.”

“그렇게 되면 정후 선배를 제 차기작에 데려오려고요. 딱 맞아떨어지는 역할이 하나 있는데, 롤이 작아서 개런티를 많이 주기 힘들거든요. 그런 자리에 인맥으로 스타 꽂아 넣는 것도 흥행배우의 역량 아니겠어요? 마침 그 선배도 조연 한 번쯤은 해봐야 할 시기니까.”

그렇게 잔인한 판돈이라니- 계진행은 입을 떡 벌렸다.

아역으로 출연한 데뷔작조차 주조연이었고, 열병 같은 인기를 바탕으로 성인역도 주연부터 시작했던 강정후.

그는 조연 롤과는 인연이 없었다. 조혁수와 투톱으로 나선 신작 <형제>가 그나마 비중이 낮다고 말할 수 있을 정도로.

이제 고작 스물일곱을 앞두고 있는 미남 배우이니, 이후로도 십년 동안은 조연 쪽으로 눈 돌릴 일이 없을 터였다.

그런 강정후에게 후배가 원톱으로 활약할 영화의 조연을 맡긴다는 것이다. 상대에게 강요할 수 있는 가장 악독한 수를 걸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그렇게 생각하자, 그 반대급부 쪽이 몹시 궁금해졌다.

“그럼 졌을 땐? 그에 상응하는 판돈을 걸어야 될 거 아냐?”

“저도 똑같아요. 지면 그 선배가 하는 영화에 조연으로 가줄 생각이에요.”

“하하하. 그렇게 되면 네 쪽이 너무 유리한 조건 아니야? 후배 입장에서 조연을 맡는 거야 심리적인 저항은 없잖아?”

“아니거든요? 한국 최고의 배우가 되기 위해서 갈 길이 멀단 말입니다. 이건 사나이들의 진검승부예요.”

“글쎄, 강정후가 그렇게 받아들여줄지 의문인데. 어쨌든 내기의 결과가 굉장히 궁금해진다 야······.”

시답잖은 얘기 속에서 퍼뜩 떠오르는 아이디어가 있었다. 계진행은 재빨리 본론으로 돌아왔다.

“야, 찬아. 마침 오늘 인터뷰에도 <형제>하고 비교하는 질문들이 몇 있을 거라고 했어. 내랑 거기 강 감독님이랑 호형호제 하는 사이기도 하고, 너랑 정후, 혁수도 이런저런 연결고리를 갖고 있으니까 말이야. 아예 그 질문에 이슈를 더해보는 것도 좋을 것 같은데? 어떻게 생각해?”

“저희끼리 한 내기를 공표하라고요?”

“그래, 그거야. 우리 배급사에서야 한국 최초의 천만영화를 함께 만들자는 애국심 마케팅에 주력할 거지만, 거기에 자극적인 양념이 더해지면 효과가 배가될 것 같아. 괜찮으면 강정후랑 한번 연락해보는 게 어떻겠어?”

나쁘지 않은 제안이라고 소년은 생각했다.

‘사람들은 스타들의 내밀한 이야기에 호기심이 많아. 거기다 나랑 강정후 선배는 나라엔터와 하늘기획으로 갈라선 일로 지금까지도 추측성 게시물들이 양산되고 있는 관계란 말이지. 신임 대표와 사이가 안 좋아서 독립한 거다, 그게 아니라 강정후가 이찬을 아껴서 날개를 달아준 거다, 등등. 그런 관심의 불씨에 기름을 끼얹어서 라이벌리를 형성한다면, 화제성이 대단할 거야. 그건 나에게 최고의 기회라고 할 수 있어. 제2의 강정후를 넘어서 제1의 이찬이 되는 디딤돌로서······.’

이미 <어사>의 흥행돌풍으로 강정후의 <여름들판>을 누른 바 있지만, 아직까지도 15세 소년 이찬의 이름은 반짝스타처럼 여겨지는 상황.

그러나 그 톱스타와 영화의 맞대결까지 내기했다는 사실이 알려지면 인식을 뒤집을 수 있다.

그런 생각에, 손이 자연스레 호주머니로 향했다.

*

[······이런 식으로 인터뷰를 할까 하는데, 어떻게 생각해요?]

강정후는 눈살을 찌푸렸다. 그리고 할 수 있는 한 가장 정중하게 대답했다.

“썩을 놈아, 바빠 죽겠는데 뭔 개소리야.”

[아, 욕이 찰지네요. 된다는 걸로 알고 끊을게요.]

“이 새끼가······ 말이 되는 소리를 해야지. 네가 조연 들어오는 거랑 내가 조연 가는 게, 어떻게 등가교환이 되냐? 그따위 내기는 할 생각 없다.”

[그래요? 저런. 안정록 아저씨한테 푸념을 해야겠네. 강정후 선배가 매정하게 대해서 정말 우울하다는 식으로.]

“하든가 말든가.”

[······어? 뭐지? 왜 이렇게 대수롭지 않게 반응하지? 블러핑 같지는 않고······ 뭐예요? 혹시 뭔 일 있었어요?]

퍽 당황한 듯 연거푸 묻는 소년의 목소리가, 지속되는 서류 업무로 짜증 가득해졌던 마음을 좀 풀어줬다.

“내기 조건 똑바로 정해. 아니면 취소다.”

[에이, 그러지 말고 좀 있어봐요. 갑자기 세게 나오니까 적응이 안 된다고요. 아무튼, 그럼 하나 더 얹어줄게요. 만약에 내가 지면······ 음······ 조연 두 편 해주는 걸로?]

“필요 없어. 꺼져.”

[아 좀. 세 편은 너무 많잖아요.]

“됐고, 다른 걸 얹어. 네 회사 지분을 준다거나.”

[그건 절대 안 되고요. 그러면······ 이건 어때요? 조연 한 편에 까메오 두 편. 천만 배우를 이렇게 부려먹을 수 있는 기회는 또 없을 겁니다. 이 정도로 만족하시죠?]

마치 천만이라는 유례없는 성공을 이미 떼 놓은 당상처럼 여기는 듯한 태도. 강정후의 기분은 몹시 복잡해졌다.

“너······ 뭘 좀 착각하고 있는 것 같은데. 네가 출연한 영화는 청불이야. 뭘 어떻게 해도 산술적으로 천만이 나올 수가 없어. 그걸 갖고 내기하자고 덤비는 게 불쌍해서 취소해준다고 한 건데, 이렇게 끝까지 물고 늘어지려는 거냐?”

[뭐야? 고양이 쥐 생각해주는 거였어요? 그런 거면 필요 없습니다. 청불로 15세 관람가 누르는 거야말로 진정한 승리니까요.]

“이 미친놈이······. 그래, 해라 해. 나중에 울면서 용서해달라고 사정하지나 마라.”

[선배야말로. 고마워요, 끊을게요.]

통화를 마치고, 강정후는 입을 이죽거리며 생각했다.

‘기술시사 때 본 <형제>는, 아쉬움이 아주 없는 수준은 아니었지만, 어쨌든 조혁수와 내 연기력을 뽑아내는 데에는 성공했어. 그것만으로도 대기록의 주인공이 되기에 충분해. 그에 비해 <684>는······ 정말 잘 만든 영화고, 안 선생님과 이찬의 불 뿜는 연기가 카타르시스까지 선사해줬지만······ 그래도 천만을 넘길 수는 없을 거야. 이길 수밖에 없는 내기지.’

그렇게 판단하고 웃으려 했으나, 문득 기시감이 들었다.

‘······<여름들판> 때도 딱 이렇게 생각했었는데. 절대 질 리가 없으니, 내기의 가치조차 없다고. 그랬는데 결과는 처참한 패배였어. 설마 이번에도······ 에이, 설마. 그럴 리는 없겠지.’

*

방송 당일에 급박하게 진행된 인터뷰가 연예정보 프로그램에 공개되어, 이찬이 강정후와의 내기를 공표하고 난 뒤.

뜻밖의 이슈가 빠르게 인터넷기사를 양산했다. 그리고 그에 네티즌이 열광적인 관심으로 응답했다.

「 이찬 “강정후와 <684>vs<형제> 내기, 승리할 거예요.”

└ 우와?! 강정후와 이찬의 대결이라니 흥미진진하네요!

└ ㅎㅎ 684 정말재밌었어요 찬이 이겨라~ ^_^

└ 그래도 조혁수랑 강정후 작품인데 형제가 이기겠죠? 」

몇몇이 흥미본위의 댓글을 단 기사가 각종 커뮤니티 사이트에 전파됐다. 승패를 추측하는 댓글이 수천 건을 넘기고, 이미 개봉한 <684>의 관람평들이 다시 주목을 받았다.

그 과정이 네티즌의 무의식 속에서 이찬이라는 배우의 이미지를 제고시켰다.

지금까지는 연기신동, 벼락스타 정도로 봤다면, 이제는 강정후에 비견될 만한 톱스타라고 인식하기 시작한 것.

그런 한편으로, 영화 외적인 그 이슈는 <684>에도 호재를 안겼다.

인터넷 세상 어딜 가도 두 배우의 내기가 이슈인 상황. 영화 볼 생각이 없던 사람들조차 링크를 타고 <684>의 관람평들을 읽게 되었고, 그 관심이 박스오피스로 이어졌다.

그렇기에, 연이은 화제 속에서 12월의 마지막 주말을 보내고 29일을 맞이했을 때, <684> 제작사인 사계 프로덕션은 마침내 200만이라는 성적표를 받아들게 되었다.

개봉일로부터 고작 5일 만에 이뤄낸 쾌거.

그 결과를 듣고, 계진행은 임직원들을 불러 모았다.

“<684> 이후 차기작은······ 영화가 아닙니다. 우리는 배급업을 준비할 겁니다. 이 시장, 한번 제대로 지배해봅시다.”

충무로의 군주가 마침내 칼을 뽑아들었다.

< 34장 - 대표 계진행 (3.) > 끝

ⓒ 비벗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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