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훔치는 연기자-97화 (97/250)

< 35장 - 대표 강정후 (1) >

“찬이 네가, 시상식에 가본 적이 없다고?”

주동한의 질문에 이찬이 고개를 끄덕였다.

“아니, 왜? <가을하늘>로 아역상 탔잖아? 진아랑 둘이 나란히 같이 수상했다고, 화제도 됐었던 것 같은데?”

“상만 타고 참석은 안 했어요. 몸이 안 좋아서요.”

“아이고, 그랬구나. KBC 그 꼰대들이 용케 대리수상을 허락해줬네?”

“별로 중요한 상도 아니니까요. 초회부터 시청률 30%를 뚫어준 아역한테 안 줄 수 있는 상황도 아니었고.”

아역상이라는 건 KBC에서는 97년도부터, SBC에서는 98년도부터 시상되기 시작한 부문.

대단한 영예라기보단 자라나는 새싹에게 꿈과 희망을 안겨주자는 취지였으니, 불참했다 해서 빼앗을 이유도 없었다.

물론 그게 생애 첫 수상을 남에게 맡겨야 할 충분조건은 아니다. 또한 이찬은 당시에 무척 건강한 상태였다.

그러니 시상식에 가지 않은 건 외적인 이유 때문.

강정후와의 내기에서 패배한 까닭이었다.

‘2년간 쉬겠다고 한 건 연기에 국한됐으니 CF야 양껏 찍을 수 있었지만, 연기대상은 연기에 포함되는 건지 아닌지 애매했단 말이지. 그런 걸 전화해서 물어볼 만한 사이도 아니었으니, 덮어놓고 불참할 수밖에. 그래서 415만을 동원하고도 레드카펫 한 번 밟아본 적이 없는 신세가 됐어.’

KBC 연기대상에 불참한 것처럼, <미스 스캔들>의 주역들이 빠짐없이 초청됐던 국내 3대 영화시상식에도 이찬은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신인남우상을 모조리 휩쓸어 한동안 대리수상의 아이콘이라 불리기도 했다.

“그러면······ 오늘이 정말 처음인 거구나.”

“예. 생전 처음이죠. 그래서 꼭 수상을 했으면 좋겠어요.”

“하하, 그렇게 될 거야. 우리 시상식엔 아역상도 따로 없으니, 시청률 40%를 견인한 최고의 배우한테 신인상을 주지 않을 도리가 없지. 네가 만 14세지? 오랫동안 깨지지 않을 최연소 신인상 기록이 될 것 같구나.”

현재 MSB의 최연소 신인상 기록은 2001년 혜성처럼 등장했던 주경희의 만 19세.

그걸 무려 5년이나 앞당기며 2003년 최고의 신인임을 입증할 수 있는 기회였기에, 주동한의 목소리는 밝았다.

다만 이찬은 이상한 소리를 들었다는 듯한 표정이 됐다.

“신인상이요?”

“어······ 그래, 찬아. 네가 탈 게 분명한데, 왜?”

“전 대상 얘기한 건데.”

패기만만한 말에 주동한이 입을 떡 벌리고, 소년이 킥 웃었다.

“농담이에요. 이제 첫 드라마 출연한 꼬맹이한테 그런 큰 상을 줄 리가 없죠. 오랫동안 방송사에 공헌했는지 여부도 평가의 요인이고, 그게 아니더라도 올해는 <서장금>의 김은희 아줌마가 있으니까.”

“아, 하하하, 그렇지. 화제성으로만 보면 우리가 최고의 작품을 만든 셈이지만, 시청률에서는 50% 넘는 장금이가 압도적이니까 말이야. 거기다 몇 년 동안 영화만 파던 김은희가 복귀작으로 MSB를 선택해준 거니까, 아역 파트 때문에 출연 분량이 적었다고 해서 대상을 안 줄 수는 없을 거야. 처음 주연 데뷔한 어린 배우한테 대상 노미네이트를 해준 것만으로도 내부에서 말이 많았다고 하니까.”

“그렇죠. 아쉽네요. 신인상이 아니라 대상이었으면, 세계적으로도 드문 사례가 됐을 텐데.”

“하하하······ 그거 참, 아쉬운 일이지.”

주동한은 조금도 아쉬움을 느끼지 않으며 답했다.

연기대상의 최연소 수상 기록은 만 21세. 98년도에 나라엔터의 오연진이 그 진기록을 달성했을 때에도 논란이 거셌다.

이제 막 MSB 드라마에 출연한 이찬이 대상까지 도달하려면, 적어도 3년 이상의 경력이 더 필요할 터였다.

주동한은 그렇게 확신했으나, 소년은 그와 생각이 달랐다.

애초에 전제부터가 정반대였기에.

“진짜로요. 아마 이게 마지막일 텐데.”

“어, 뭐? 마지막이라고?”

“예. 드라마는 더 하고 싶지 않거든요. 그래서 처음이자 마지막 연기대상일 텐데, 노미네이트로 만족해야 한다니.”

“어······ 왜? 드라마를 왜 안 한다는 거야?”

“영화가 더 재밌어요. 방영하는 내내 이것저것 신경 써야 되는 드라마는 하기 싫어요.”

“그러면 안 되지! 내가 앞으로 너랑 같이 계속 명작 만들어서, 최우수상도 안겨주고 대상까지 안겨주려고 했는데?”

“다른 좋은 배우 많잖아요? 전 됐어요.”

거기까지 들은 뒤에, 마침내 정창영이 입을 열었다.

“저기, 찬아.”

“예?”

“드라마 정말 안 할 거야?”

“예. 영화가 더 수익성이 좋잖아요? 다음 주말 지나면 손익분기점 넘어서 고스란히 수익으로 돌아올 텐데, 비교가 안 되죠.”

“꼭 수익성이 아니더라도, 다시 생각해보는 게 어떨까? 영화관을 찾는 사람들도 대중이라고 부를 수 있지만, 아무래도 TV만큼 대중적인 건 아냐. 예를 들면 노인들이라든가, 쉬는 날이 많지 않은 사람들이라든가, 오직 TV만 벗 삼아서 여가를 보내는 사람들도 세상엔 많단 말이지.”

소속 배우가 수익성을 말하는데 회사 대표가 시청자들의 사정을 논거로 재고를 요청하는 상황.

입장이 뒤바뀐 게 아닌가 하는 의문이 당연한 상황이었지만, 주동한은 옳다구나 하면서 그에 찬동했다.

“바로 그거야! 극장가가 이제는 연간 1억 관객을 돌파했다고 하지만, 그거야 봤던 사람들이 여러 번 봐서 그런 거고, 실제로는 영화를 보지 않는 인구가 더 많을 거거든. 우리한테는 그런 사람들에게도 멋진 작품을 보여줄 의무가 있어.”

“······무슨 의무까지야. 제가 배우지 국회의원인가요?”

“아무튼, 생각 좀 해봐라. 드라마엔 영화하곤 다른 매력이 있단 말이야. 너한테 엄청난 팬덤에 CF까지 잔뜩 안겨준 게 우리 드라마잖아? 소위 문화적 파급력이라는 거야. 그리고 또 드라마는 해외 수출이 더 수월하단 말이지? <겨울바다> 일본에서 난리 난 거 못 들었어? 너도 그렇게 될 수 있어. 최고의 한류스타 이찬! 얼마나 멋있냐?”

PD와 대표의 열렬한 눈빛을 마주하며, 소년은 한숨을 내쉬었다.

‘왜 이렇게 드라마를 못 시켜서 안달인지 원. 그야 뭐 영화 홍보하기 위해서라도 방송국에 잘 보일 필요가 있는 건 맞지만, 드라마 한다고 하면 수영 누나가 달라붙을 텐데.’

곧바로 떠오르는 건 <연애의 조건> 시놉시스.

남학생과 여교사의 로맨스를 그리는 그 작품의 제작이 세간에 알려지면, 곧바로 신수영이 ‘마이 찬’을 외치면서 전화를 걸 게 뻔했다.

그렇지만 그런 가능성을 스타PD와 대표이사에게 설명하는 건 귀찮은 노릇. 결국 이찬은 고개를 끄덕였다.

“생각해볼게요. 아무튼, 입장 언제예요? 기다리기 지루하네.”

“어, 이제 슬슬 이동하면 될 것 같은데? 혹시 PD님도 같이 입장하실 건가요?”

“아니, 잠깐 들른 거야. 찬아, 먼저 들어가 있을게.”

주동한이 차량에서 내린 뒤에 차를 돌린 정창영은, 룸미러를 일별하며 새로운 화제를 꺼냈다.

“찬아. 오늘 신인상이야 그렇다 치고, 강정후랑 한 내기는 어떻게 될 것 같아? 인터넷에선 아직까지도 갑론을박이 치열하던데.”

“그야 모르죠. 저야 제 영화든 그 영화든 볼 수가 없는데.”

이찬의 나이는 현재 만 14세.

한 해가 더 지나 생일로 기록된 6월이 되어야 만 15세가 되니, 15세 관람가인 <형제> 역시 상영 중에 관람하는 건 불가능할 터였다.

“그렇지만 자신이 있으니까 내기를 한 거 아니야? 원래 조연으로는 작품 할 생각이 없었잖아?”

“그랬죠. 하지만 강정후 선배랑 같이 영화 하는 건 재밌겠다 싶어요. 한 작품 안에서 경쟁해서 그 높은 콧대를 눌러버릴 수 있을 테니까.”

“하하하······ 조연으로 주연을 눌러버리겠다?”

“예. 말 그대로 씬스틸러라는 거죠. 그래서 이기든 지든 별로 상관없는 내기예요. 이긴다면 차기작에 써먹을 수 있고, 진다고 해도 그 인터뷰로 이미 충분한 화제성을 얻었고.”

“그거 참. 정후 걔는 어떻게 생각하고 있을지 모르겠다.”

그런 대화 속에서 차량이 목적지에 도착했다.

양쪽으로 늘어선 기자들 사이로 쭉 뻗은 레드카펫과, 그 끝에 보이는 포토월.

이찬은 그 길을 홀로 걸었다. 거대한 환호성과 함께 플래시 세례가 그를 반겼다.

*

[······그렇습니다. 월요일인 어제 객수가 28만이었죠. 오늘도 기세가 줄지 않을 전망입니다. 오전에도 좌석점유율이 50%를 넘겼다는 곳이 많아서, 오늘 안에 250만 달성이 확실하다는 게 공통된 의견입니다.]

“······일주일 만에 250만이라. 알겠습니다. 감사합니다.”

극장 관계자와의 통화를 마치고, 강정후는 <684>의 기형적인 흥행에 대해 생각했다.

‘쌍끌이 흥행의 가장 완벽한 예시라고 할 수 있겠지. 유명한 외화 이슈에 극장가를 찾은 관객들마저 끌어들이면서, 그야말로 박스오피스를 융단폭격하고 있어.’

영화광이 아닌 이상, 관객들은 화제작이 있거나 언론에서 주목하는 대작이 개봉했을 때에나 인터넷을 통해 영화의 관람평을 검색하곤 한다.

그리고 그 행위는 단일 작품의 상영 시간을 확인하는 데서 그치지 않는다.

사람이라면 제한된 여가시간을 좀 더 알차게 보내길 바라기 마련. 보고 싶은 영화가 있다고 하더라도, 예매에 앞서 더 좋은 선택지가 없는지 재고해보게 되는 것이다.

그게 바로 쌍끌이 흥행의 핵심이었다.

주기적으로 영화를 시청하지 않는 사람들조차 극장으로 몰려들게 만드는 화제집중 효과. 그를 통해 총 관객수가 예년 이상으로 확장되었을 때, 오히려 무주공산의 1인자보다도 더 많은 관객을 동원할 수 있다는 이론.

에 이어 개봉한 <미스 스캔들>이 슬리퍼히트를 기록할 수 있었던 게 바로 그 쌍끌이에 힘입은 결과였다.

거기에 <684>에는 몇 가지 호재가 더 보태졌다.

세계를 뒤흔든 외화와 순수 한국영화의 경쟁이기에 애국심 마케팅이 빛을 발했고, 뒤이어 이찬이 강정후와 라이벌리를 형성하며 네티즌으로 하여금 몇 차례고 영화의 제목을 검색하게끔 만들었다.

그 덕분에, 그의 두 번째 주연작은 유례없는 속도로 한국영화계의 역사를 다시 쓰고 있는 중.

‘그런 화제성 덕분에 개싸가리까지 나버린다면······ 정말 이기기 힘들지도 모르겠어.’

개싸가리란 2주차에 이르러서도 드롭(개봉 이후 객수가 자연스레 줄어드는 현상) 없이 객수가 지속, 또는 증진되는 경우를 일컫는 은어.

이 개싸가리야말로 영화의 롱런을 가늠할 수 있는 중요한 요소였다.

개봉 첫 주의 관객들과 그 이후의 관객은 성질이 다르다.

전자는 감독이나 배우의 팬으로서 개봉되기 전에 이미 관람을 결심한 경우가 많지만, 후자는 주말을 보내며 영화의 관람평을 확인할 만한 시간적 여유가 충분한 것.

2주차에 개봉 직후만큼의 관객을 동원한다는 건 대중에게 작품성으로 인정받았다는 증거였다.

‘우리 쪽도 화제성의 효과는 어느 정도 받을 거야. <684>의 성공이 크면 클수록 그것과 비교하며 보는 시선들이 있을 거고, 조혁수가 이적하면서 나와의 호흡에 대해 기대감도 커졌으니까. 하지만 개봉일이 2월 4일······ 구정 대목까지 다 보내고 난 뒤란 말이지. 아무래도 초반 파급력에서 밀릴 가능성이 있는데, 그렇게 되면 오직 작품의 완성도로 승부해야 하는 셈이야. 과연 입소문으로 <684>를 누를 수 있을까.’

생각하다가, 그는 눈살을 몹시 찌푸렸다. 정말이지 어처구니없는 상황이 아닐 수 없다는 생각에.

‘청불 딱지 붙어서 최소한 100만 이상의 잠재관객을 잃은 그 영화에 이렇게까지 긴장하는 게 말이 되냐고. 젠장. 이찬이란 놈은 정말······ 짜증나는 괴물이야. 열다섯인 지금도 이 모양인데, 나이가 들어 20대가 되면 대체 어떤 놈이 될지.’

그러나 강정후는 생각과 달리 자신의 입이 웃고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여느 때와 달리 마음속의 목소리가 단 하나도 들리지 않는다는 사실 역시.

머릿속으로 이찬을 곱씹을 때마다 잦아들었던 목소리는, 이제 인식하기 어려운 수준까지 침잠해 있었다.

‘안 선생님 덕분이기도 하지만······ 인정할 건 인정해야겠지. 그놈이 나타난 뒤로 모든 게 달라졌어. 우리에게 있어선 빌어먹을 꼬맹이지만, 내게는······ 구세주 같은 녀석이야.’

자신의 비범함조차 한심하게 여겨질 정도로 압도적인 천재.

그런 존재가 쌓아나가는 이례적인 커리어를 보며, 미쳐가던 청년의 마음은 점차 무게중심을 찾아가고 있었다.

그에 대해 강정후는 나름의 가설을 고안해냈다.

‘배역에 머릿속 일부분을 빼앗겨버리던 기존의 방식으로는 극복할 수 없는 적이라는 걸 무의식이 깨달은 탓······ 이라고 하면 과한 생각일까? 알 수 없는 일이지. 하지만 제법 매력적인 논리야. 정말 그런 거라면, 아직 내게도 기회가 있는 셈이니까. 빌어먹을 천재 놈들을 쓰러뜨리고 최고가 될 기회가.’

그렇게 생각할 무렵, 타이밍 좋게 빌어먹을 천재 놈 2가 대표실에 들어섰다.

“강 대표, 바쁘냐?”

“······노크 할 줄 모릅니까? 비서는 괜히 있는 줄 알아요?”

“내 알 바냐? 안 바쁘면 TV나 보자. 시상식 한창인데 멀뚱하니 뭐 하고 있는 거야?”

조혁수는 그렇게 말하며 대뜸 리모콘을 쥐었다. 집무실 벽에 설치된 스크린에, 빔프로젝터가 공중파를 송출했다.

[자 그럼, 발표할까요? 2003년 MBC 연기대상 남자신인상. 수상자는 한 명입니다. <어사>의 이찬 씨, 축하합니다!]

[이찬 군은 <어사>에서 주인공 유관 역을 맡아서 어린 나이답지 않은 훌륭한 연기를 선보이며, 전국에 <어사> 신드롬을 일으켰습니다. 축하합니다.]

카메라에 잡힌 이찬은, 대수롭지도 않다는 듯 담담하게 일어서서 무대로 향했다. 첫 시상식인데도 떠는 모습을 전혀 보이지 않았다.

마이크 앞에서 늘어놓은 수상소감은 더 가관이었다.

[감읍할 따름이오. 이리 좋은 상을 주시니 몸 둘 바를 모르겠소. 이 모든 것이 본관의 능력이 아닌 백성의 힘이오.]

배우 이찬이 아닌, 암행어사 유관의 목소리였다.

“하하하! 저 자식, 공식석상에서 뭐 하는 짓이야?”

“그러게요. 미친놈 같으니.”

미친놈이 씩 웃는 화면을 바라보며, 나라엔터의 두 간판배우는 나란히 비슷한 미소를 지었다.

< 35장 - 대표 강정후 (1) > 끝

ⓒ 비벗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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