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35장 - 대표 강정후 (2) >
“······웃어주셔서 감사합니다. 감사드릴 분들이 참 많은데, 우선 제 팬클럽 <마이 찬> 여러분들께 감사드리고, 부탁인데 팬클럽 이름 좀 더 멋진 걸로 바꿔주시면 고맙겠어요. 그리고 주동한 PD님, 윤진선 작가님, 정길승 선배님, 최정하 선배님, 희재 누나, 진아 누나······ 우리 <어사> 제작진 모든 분들께 감사드립니다. 저 하나 믿고 하늘기획 맡아주신 정창영 대표님께도 심심한 감사의 말씀을 드리고요. 마지막으로, 제 주연 영화 관람해주신 200만 관객들께 감사드립니다. 부럽네요. 전 어려서 그거 못 봤거든요. 재밌어요?”
문맥상 말을 맺을 타이밍이 아니었지만, 이찬은 그쯤에서 다시 트로피를 손에 들었다. 그리고 허리를 깊이 숙여 인사하는 것으로 수상소감을 마쳤다.
그건 의도된 불협화음이었다.
유관의 말투로 수상소감을 시작했던 것부터 의문문으로 마무리한 것까지, 전부 <684>의 화제성을 높이기 위한 전략.
화제의 수상소감은 곧 영상과 스크린샷과 스크립트로 인터넷 커뮤니티에 퍼져나간다. <684>의 2주차 흥행에 그 화제성이 도움이 될 터였다.
물론 <어사>의 동료배우인 최정하는 그저 황당해했다.
“야, 넌 뭘 수상소감을 그런 식으로 하냐?”
“음······ 긴장이 많이 되더라고요.”
“어? 그런 거였어? 아, 역시 그랬구만. 짜식, 귀여워 귀여워. 하긴, 첫 시상식인데 긴장이 될 법도 하지. 하도 포커페이스라서 나까지 속아버렸는걸? 하하하!”
멍청하게 속아 넘어간 그와 달리, 명진아는 이후의 일에 더 관심을 가졌다.
“찬아, 잘했어! 다음 수상소감도 재밌게 할 거야?”
“잘했······ 근데 다음 수상소감 없는데?”
“어? 최우수상이랑 대상 남아 있잖아? 인기상이랑!”
“인기상은 누나가 탈걸? <어사> 신드롬인데도 게시물들 보면 ‘다모 신드롬’ 느낌이었으니까. 대상은 김은희 아줌마한테 갈 거고, 최우수상도 조시원 아저씨한테 돌아갈 거야. 14부작 꼬마 주연한테 그런 큰 상을 주진 않는 거지.”
“정말이야? 너무해! 올해 최고의 배우는 너였는데.”
“내용에는 동의하는데, 어쩔 수 없어. 시상식엔 어른들의 사정이 개입되는 법이니까.”
17세 소녀와 15세 소년이 얼굴도 안 붉히고 나누는 대화. 황당해야 마땅했지만, 주동한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았다.
‘틀린 말은 아니야. 찬이가 기존에 MSB 작품을 두 개 정도만 더 했다고 해도, 조시원 같은 친구가 최우수상에 거론되는 일은 없었을 테니까. 나이가 스물 이상만 됐더라도 대상까지 노려볼 수 있었을 거고. 아쉬운 일이야. 이런 명배우와 희대의 걸작을 찍고서도, 고작 신인상만 안겨줘야 한다는 게.’
<옥탑방 로맨스>의 조시원은 대상 후보 3인 중에서 실적으로는 가장 열세였다.
그렇지만 그는 신인상과 우수상 경력이 있는 MSB 탤런트.
<야인>의 맹렬한 기세를 막고 MSB 미니시리즈에 희망을 가져다준 충신에게 최우수상도 주지 않을 리는 없었다.
그리고 MSB 연기대상 시스템에서 자동으로 최우수상에 노미네이트되는 대상 후보자들은, 형평성을 위해서 우수상에서는 제외된다.
2003년 이찬의 수상이 신인상에서 그칠 수밖에 없는 이유였다.
‘하지만, 이게 끝이 돼선 안 돼. 팔색조 같은 이 배우가 앞으로 나와주지 않는다면, 대체 무슨 재미로 새로운 작품을 찍겠느냔 말이야. 어떻게든 설득해서 차기작에 데려와야 해. 김유경 작가가 <연애의 조건>에 찬이 쓰고 싶다고 고집부리던데, 그걸 내가 받아와야 되겠어. 이번 <어사> 성공을 바탕으로 어필한다면 국장님도 내 손을 들어주실 거야. 문제는 찬이 본인을 설득하는 일인데······.’
그렇게 PD가 딴 생각에 골몰하고 있는 동안에, <어사> 팀은 초반부의 상들을 쓸어 담았다.
작가 부문 윤진선, 인기상 명진아, 여자 우수상 임희재, 남자 우수상 최정하.
우수상에서 최정하에 밀린 정길승을 제외하면, 후보로 오른 모든 부문에서 수상에 성공한 셈이었다.
그건 <어사> 팀의 경사인 동시에 하늘기획의 쾌거이기도 했다.
애초에 한 팀이었던 이찬과 임희재에 더해서, 최정하와 명진아 역시 이제는 한솥밥을 먹게 된 상황이기에.
비록 촬영 당시의 소속사가 달랐기에 다로 소속사를 언급하지는 못했지만, 이날의 이례적인 싹쓸이 수상은 하늘기획의 첫 번째 성과로서 두고두고 회자될 터였다.
다만 남아 있는 최우수상과 대상 부문에서는 이찬의 명진아의 수상이 불투명한 상황.
그렇기에 한층 낮아진 기대감으로 무대를 바라보던 때에, 사회자가 미소를 띠며 다음 순서를 안내했다.
[이번에는, 올해 처음으로 시상되는 부문입니다. 바로 베스트커플상인데요.]
[네, 그렇습니다. 한 해 동안 가장 많은 사랑을 받은 커플에게 주어지는 상인데요. 시상에는, 연예계 잉꼬부부로 유명한 최헌중, 유선아 씨께서 수고해주시겠습니다.]
이찬의 시선이 주동한을 향한 건 당연한 일이었다.
“이게 뭐예요? 이런 것도 있었어요?”
“어······ 그러게. 나도 처음 듣는데? 갑자기 생겨났네?”
“PD님한테도 말을 안 해줬다고요? 그러면 최우수상은 물 건너간 셈이네요. 저도 진아 누나도.”
“어? 얘기가 왜 그렇게 돼?”
“올해 사랑받은 커플이라고 하면 저랑 진아 누나가 압도적이잖아요? 나이가 어려서 최우수상은 못 줄 것 같으니까, 급하게 깜짝선물 마련한 것 같아요. 나름 배려를 해준 거죠.”
“아······ 그럴 수도 있겠구나. 역시, 너는 천재라니까. 천재 찬이, 찬재다 찬재.”
“이상한 별명 붙이지 마세요. ‘마이 찬’으로 충분해요.”
이후의 전개는 찬재의 말대로였다. 따로 후보도 없이 이찬과 명진아의 이름이 불리고, 한 해 최대의 이슈메이커였던 소년소녀가 나란히 무대에 올랐다.
그 상황은 이찬에게 있어선 아쉬운 일이었다.
일말의 희망을 갖고 있던 최우수상에서도 물을 먹이는, 이거 먹고 떨어지라며 안겨주는 상처럼 여겨졌기에.
하지만 명진아에게는 전혀 다른 의미였다.
두 사람이 처음으로 국민에게 사랑받았던 2000년, KBC 연기대상에는 커플상이 존재하지 않았다.
자연히 둘은 아역상에 만족해야 했고, 심지어 이찬은 그 해에 시상식에 불참하며 소녀 혼자 두 개의 트로피를 받게 만들었다.
그랬던 두 사람이 MSB 연기대상의 첫 번째 베스트커플상 수상자로 호명됐다.
그 사실이 마치 전 국민 앞에서 진짜 커플로 공인된 것처럼 느껴져서, 명진아는 자꾸만 입가를 부르르 떨었다. 광대까지 솟아오르려는 입꼬리를 막기가 힘들었던 탓에.
그런 소녀의 마음을 모른 채, 소년은 능글맞게 유관을 연기했다.
“양이들은 레이디 퍼스트- 이렇게 말한다지? 채화야, 네가 먼저 소감을 읊도록 해라.”
“아······ 으······ 황공하옵니다, 시청자 마마.”
“시청자가 마마라면 이 땅에 너무 많은 마마가 있는 셈이로구나. 마마의 왕국이냐?”
“아······ 야, 나리 먼저 하십시오. 생각이 하나도 안 나······.”
“흠. 이렇게 좋은 상 주셔서 감사합니다. 이게 다 우리 십만 ‘어사오시오’ 회원님들 덕분이라고 생각합니다. 의미 있는 상 함께 타게 해주셔서 정말 고마워요. 여봐라! 베스트커플상 출두야! ······자, 이제 누나 차례.”
“아, 응! 정말 감사합니다. 저희 정말 열심히 촬영했고, 선배님들 스탭 분들 정말 고생 많으셨고······ 이렇게 최고의 상을 주셔서 너무 행복해요. 저기, 소녀한테는, 이 상이 대상보다도 더 최고이옵니다! 유관 채화 커플, 최고최고이옵니다!”
이찬의 신인상 수상소감을 밀어내고 화제성을 독식하게 될, 이른바 ‘명진아 최고최고 소감’의 탄생이었다.
*
전통적으로 12월 30일에 개최되는 MSB의 연기대상을 시청하며 이찬의 수상을 지켜봤던 강정후와 조혁수도, 이튿날에는 그 소년처럼 턱시도를 차려입었다.
KBC와 SBC의 연기대상이 타종행사를 포함하여 12월 31일에 개최되는 까닭.
각자 <여름들판>과 <승부>로 양사 미니시리즈의 흥행을 책임졌던 청춘스타로서, 두 사람은 서로 다른 시상식에 참가해야 했다.
그 일정을 앞두고 강정후는 조혁수와 면담을 진행했다.
배우로서는 후배지만 회사의 총책임자로서, 소속 간판배우의 시상식 준비과정을 체크한 것.
“대상 수상은 확실한 거죠?”
“대뜸 물어보긴. 내가 어떻게 알아? 윗사람들 마음인 거지.”
“그거야 당연하지만, PD랑 한 말이 있을 거 아닙니까? 내부에서 눈치 보면 답 나오는 건데.”
“수상소감 준비해두라고 하시긴 했는데, 대상은 몰라. 차영기 선배도 평이 좋았으니 최우수상으로 밀릴 수도 있겠지. 너야말로 이번에도 미끄러지는 거 아니냐? 14부작으로 40% 달성해버린 <어사>에서 최우수상 한 명이 안 나왔는데, 거기에 밀린 <여름들판>이라면 우수상도 어렵지 않겠어?”
일견 논리적인 이야기였지만, 강정후는 빠득 이를 갈았다.
“······시상식이 언제부터 시청률 따지는 통계업체였습니까?”
“공영방송이 시청자들 입맛을 무시하면 안 될 텐데.”
“그야 사극이 워낙 강세니 대상은 무리지만, 최우수상은 탈 수 있습니다. 이쪽은 100%라고요. 거기에 선배까지 대상 수상해서 나라엔터 이름값을 높여줘야 합니다. 김은희 대상으로 기세가 등등해진 프로액터스를 눌러야 돼요.”
“거참, 진짜 대표이사처럼 말하네. 너 가라잖아? 대충 하지 그래?”
‘가라’란 겉보기만 그럴 듯한 맹탕을 의미하는 은어.
이미지 쇄신을 위해 대표직에 앉혀진 강정후의 처지는 그 단어에 부합한다고 할 수 있었다.
그러나 장본인이 듣기에 기분 좋은 이야기는 아니었다. 이미 위상을 제고하기 위한 계획까지 세워둔 입장이었으니.
“시끄럽고, 대상 꼭 따오십쇼. 로비를 하든 뭘 하든.”
“대놓고 불법을 지시하네. 이군영이 롤모델이냐?”
“아닙니다! 농담도 못 알아듣습니까?”
“아, 농담이었어? 유머감각은 이찬한테 좀 배워라. 안정록 선배님의 유일한 단점까지 배운 건 좀 너무했잖아?”
“······나가보십쇼. 짜증나서 대화를 못 하겠네요.”
“하하하, 너무 놀렸나? 미안하고, 간단하게 설명이나 해줘라. 앞으로 정말 어떻게 할 건데? 배우로 살 거야, 경영자가 될 거야?”
마침내 빈정거리는 소리를 뺀 조혁수를 보며, 강정후는 차분한 목소리로 자신의 비전을 소개했다.
“배우로서도 경영자로서도 최고가 될 겁니다. 전 이군영 같은 인간하곤 그릇이 다릅니다. 올해는 실패했지만 조만간 연기대상도 탈 거고, 대종도 청룡도 백상도 싹쓸이할 겁니다. 그리고, 나라엔터는 언제까지고 최고의 기획사일 겁니다. 하늘기획이니 뭐니 하는 회사에 지지 않을 거라고요.”
“아, 그래? 네가 사랑하는 ‘안 선생님’이 계신 회사를 이겨먹고 싶다?”
“이상하게 몰지 마십쇼. 그분은 그저 이름만 빌려주신 거고, 어디까지나 그 회사는 이찬 작품이니까. 저는 그놈한테 져선 안 됩니다. 그래서 이번 영화가 정말 중요한······ 아, 생각해보니! 미니홈피 만들라고 한 지가 언젠데 아직도 안 만들고 있습니까? 미리미리 대중하고 소통하면서 <형제> 홍보해야 된다니까요?”
다시 뾰족해진 강정후의 목소리에도 조혁수는 당황하지 않았다. 그는 입으로만 웃으며 대꾸했다.
“그 내기 지면 아주 꼴이 볼 만하겠다 싶어서. 이찬 주연작의 꼬붕이 된 강정후라. 아주 가관이겠는데?”
“이 인간이 진짜!”
“진짜 아쉽게도, 그렇게 되진 않을 것 같다. 이번엔 네가 이기겠어. 그러니까 쓸데없이 히스테리 부리지 마라.”
뜻밖의 장담에 강정후의 눈이 커졌다.
“······뭡니까? 뭘로 그렇게 확신하는 건데요?”
“감이야.”
“감이요? 그딴 애매모호한 말로-”
“따지지 말고 들어, 이 새끼야. 선배로서 해주는 말이니까. 내가 <네 친구> 찍을 때 느꼈던 게 있어. 뭔 줄 아냐?”
“······뭔데요?”
“이거 졸라 재미없겠다, 그런 생각을 했다. 그리고 대차게 800만을 찍었지.”
“더럽게 감 나쁜 거 아닙니까?”
“그래. 내가 감이 안 좋아. 그래서 하는 말이다. <형제> 때도 그랬어. 더럽게 재미없을 것 같았지. 그래서 이찬하고 같이 찍어볼까 생각했던 거다. 대중하고 대척점에 있는 내 감에 안 맞는 이 각본이, 분명히 대형사고를 치겠구나 싶어서. <684> 대본도 꽤 기분 나쁘긴 했지만 이것만큼은 아니었어. 확신해도 된다. 이게 그것보다 더 잘돼.”
감이 좋아서가 아니라 나쁘기 때문에 역으로 단정하는 말. 말하자면 ‘펠레의 저주’ 같은 예언이었다.
물론 강정후의 마음에 와 닿는 논리는 아니었다.
“뭔 말인지는 알겠는데, 그게 대단한 보장은 안 되는데요.”
“더 들어봐. 네가 간신히 200만 모은 <라이터>는 내가 꼭 하고 싶어서 감독 찾아갈까 했던 작품이야. 그런 반면에 500만 넘긴 <칠월칠석>은 학을 떼면서 고사했어. 내 거꾸로 된 감은 지금까지 틀린 적이- 아니, 맞은 적이 없다.”
“지금까지 맞은 적이 없었다면, 확률상 이제는 맞을 때가 됐다고 보는 편이 더 합리적입니다.”
“이 멍청한 놈이······. 너나 이찬이나, 그놈의 논리에 갇혀 있는 게 문제다. 가끔은 한 발 떨어져서 봐야 되는 거야. 그래야 안정록 선배님처럼 칸에도 가고 하는 거지.”
이번에도 이해할 수 없는 논리였지만, 그 판단을 근거로 한 반박까지 막아버리는 논지였다. 답은 정해져 있으니 수긍만 하라는 듯한 태도.
강정후는 고개를 흔들며 생각했다.
아무래도 조혁수는 정신 나간 인간 같다고.
*
KBC에서 강정후가 최우수상을, SBC에서 조혁수가 대상을 꿰차며, 나라엔터는 다시 한 번 대중에게 주목받았다.
압도적인 두 톱스타가 쌍끌이로 이끌어나갈 나라엔터의 미래에 관심이 점점 커져가는 상황.
한편으로, 높은 시청률과 화제성에도 불구하고 최우수상 한 명을 배출하지 못한 <어사> 팀에는 동정여론이 몰렸다.
드라마 팬카페 ‘어사오시오’에서는 이에 대해 입장문을 내어 MSB에 불신을 표시하기도 했다.
그렇게 희비가 엇갈리는 상황에서 맞이한 2004년에도 <684>의 흥행돌풍은 무뎌지지 않았다.
고작 9일 만에 300만 관객을 돌파한 그 작품은, 이후 설 대목을 지나며 800만에 도달했고, <네 친구>의 기록을 깨고 최초의 천만영화가 될지 모른다는 관심 속에서 다시금 기세를 올린 2월 초에는, 마침내 900만이라는 초유의 기록을 달성했다.
그 대기록의 익일에, 조혁수 강정후 주연의 <형제>가 개봉했다. 대기업 계열 배급사의 전폭적인 지원 속에 무려 430여 개의 스크린을 확보하면서.
그 영화가 개봉일 관객수 33만을 달성했다.
<684>의 오프닝에 미세하게 못 미치는 기록. 그러나 시기의 특수성을 고려할 때, 그보다도 더 충격적인 기록이었다.
< 35장 - 대표 강정후 (2) > 끝
ⓒ 비벗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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