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훔치는 연기자-99화 (99/250)

< 35장 - 대표 강정후 (3.) >

<고등형사>의 오디션은 배우들 사이에서 대단한 이슈였다.

그 주연이 <684>로 유례없는 흥행돌풍을 일으키고 <어사>로는 MSB 연기대상에서 최연소 연기대상 후보에 오른 신성이며, 그 감독은 단 두 편의 영화로 천만에 가까운 관객을 끌어 모은 명장 오덕환인 까닭.

<미스 스캔들>로 최고의 호흡을 보여줬던 두 사람의 재결합에 시선이 쏠리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런 데다 무려 조연 21인의 총괄 오디션이다. 배역이 다양한 만큼 각양각색의 프로필이 쏟아져, 수효가 2천을 넘었다.

그 면면은 주로 화제작을 통해 자신의 얼굴을 알리길 갈구하는 무명배우들.

그들 중 배역에 맞는 이미지를 가진 200여 명이 선별되어, 2월 5일에 ‘덕 필름’으로 초대되었다.

그건 사실 꽤 이례적인 일이었다.

일반적으로 20대 이상의 조연 배역에는 정형화된 풀이 존재해, 쌓여 있는 프로필이 무수히 많다. 그걸 분류하고 추천하기 위해 캐스팅디렉터라는 직종까지 생겨났을 정도.

꼭 뉴페이스가 필요한 배역이 아닌 바에야, 그 조연들 중에서 출연진을 결정해 오퍼를 넣는 게 일반적이었다.

특히 <미스 스캔들>로 스타 감독이 되었으며 그 이전부터 충무로에서 활약해온 오덕환의 경우, 그의 러브콜을 기다리는 조연들의 수가 백을 헤아렸다

그런 상황에서 구태여 모든 조연을 공개오디션으로 선발할 이유가 없었다.

그러니 그 모든 건 어디까지나 이찬의 의도였다.

자신의 기획사에 조연 풀과 자금이 모두 부족하니, 영화 오디션을 통해 쓸 만한 뉴페이스들을 선별하려 한 것.

그렇게 열정과 기본기를 겸비한 무명배우들을 뽑고 직접 가르쳐, 이후 이찬 사단으로 끌어들일 요량이었다.

물론 마음처럼 쉬운 일은 아니었다.

점심나절까지 진행한 30명의 평가에서, 이찬은 가능성 있는 배우를 단 한 명도 발견하지 못했다.

“하······ 신통치 않네요. 전부 다 마음에 안 들어요.”

“그렇지. 나이 먹도록 무명인 데에는 이유가 있는 거지.”

이찬의 푸념에 대꾸한 오덕환의 말이 정론이었다.

담임교사와 부모, 형사 시절의 동료나 조폭 등 주로 중장년층을 대상으로 진행된 오디션.

그 나이까지 대표작이 없어 오디션을 찾아다니는 배우라면 실력이든 다른 무엇이든 하자가 있는 경우가 많다. 서류를 통해 선별한 이들 중에도 다수가 약점을 갖고 있었다.

지나치게 소심하거나 지나치게 적극적인 양극단의 참가자들은 그 흔한 예시.

긴장한 탓에 실력을 판단할 만한 표본을 보여주지 못하거나, 어떻게든 단역 생활을 벗어나겠다는 염원이 큰 나머지 희극처럼 부담스러운 연기를 선보이곤 했다.

혹은 튀어야만 산다는 생각 속에서 해괴망측한 소리들을 지껄이는 경우도 종종 있었다.

그들 중 진짜배기가 한 명도 없었겠느냐만, 한둘의 원석을 위해서 일일이 체크하기엔 시간이 부족했다.

“그래도 점심 이후부터는 꽤 이름 있는 친구들이 있어. 그때는 꽤나 볼 만할 거야.”

“누구누구 온다는데요?”

“임성식, 진재선, 박혜영, 김종수······ 또 몇 명 있었는데. 꽤 많아.”

“되게 유명하신 분들이네요? 그런 분들이 웬일로 오디션까지 보신대?”

“주연의 흥행파워가 입증된 작품이니까. 당장 흥행도 기대가 되고, 너랑 인맥 만들어두면 좋겠다는 심산도 있을 거고. 그래서 오디션 공고 낸 뒤로 투자자들이 먼저 전화를 걸어왔다고 하더라. 그게 총액이 20억 가까이 됐다던데. 커트하기 힘들었대, 상덕이가.”

소년은 고개를 돌려 조상덕을 바라봤다.

덕 필름의 공동대표로서 <고등형사>의 공동투자자가 될 그는, 씩 웃으면서 턱수염을 쓰다듬었다.

“작품 투자는 부담 없이 제작하는 데 도움이 되니까 말이지. 우리가 자체투자는 처음이라서 좀 고민이 되기도 했다.”

“이해해요. 믿어주셔서 감사합니다.”

“감사는 뭘. 투자자들이 먼저 연락하는 케이스가 흔한 줄 알아? 돈벌레들이 냄새 맡고 달려드는 작품의 지분을 남한테 내줄 수는 없지. 돈이 없는 것도 아니고.”

그 투자가 충분한 보상을 받게 될지, 정작 이찬 본인은 확신하지 못하고 있었다.

자신의 작품 보는 눈에는 썩 자신이 없었기에.

‘그야 회사 사람들한테 각본 보여줬을 땐 다들 진심으로 감탄했었고, 그 좋은 시나리오를 오덕환이라는 명감독이 제작하는 거니까, 질 낮은 작품이 나오지는 않을 거야. 하지만 막상 영화가 완성됐을 때는 또 모를 일이지. 천만배우의 차기작이라는 기대가 워낙 커서 실망감이 더 지배적일지도.’

전작인 <684>는 고작 상영 40일 만에 900만을 넘겼다.

‘최초의 천만영화’라는 타이틀이 코앞인 상황에서 배급사가 갑자기 발을 뺄 리도 없고, 이미 한 차례 본 관객들조차 애국심 마케팅 때문에 극장을 찾게 될 테니, 천만 달성은 이미 기정사실이 된 상황.

그렇지만 그런 성과는 과거사 진상규명 등의 사회적 이슈에 영향을 받은 면이 크다. 관람객의 주요 연령층 역시 <고등형사>의 타겟 연령층보다 몹시 높았다.

그 관객들이 영혼이 바뀐 고등학생 역할을 수행하는 이찬에게 호평을 해줄지는, 쉽게 속단할 수 없는 문제였다.

‘······하지만 <형제>를 누르는 건 중요해. 짧은 텀을 두고 또 천만이 달성돼버린다면, 최초의 천만영화라고 해도 희소성이 낮아진단 말이야. 대중들이 극장이 많아져서 천만도 별 거 아니게 된 거라고 생각해버릴 테니까. 그러면 안 돼. 어디까지나 내가 잘나서 달성한 대기록이라고 사람들이 믿어야 해.’

점심식사를 위해 영화사 근처 중국집으로 이동한 뒤, 오덕환 역시 <형제>를 거론했다.

“강정후 영화도 아주 잘되고 있지? 첫날 33만이랬나?”

“맞아요. 평도 나쁘지 않더라고요.”

“흠······ 이미 900만 달성한 영화랑 경쟁구도가 형성됐으니, 호기심에라도 다들 한 번씩은 볼 텐데. 그 뒤에 두 번째 천만영화 만들자고 달려들면, 일이 복잡해지겠는데. 주경호 배역 따로 뽑아놓는 게 좋지 않을까?”

‘주경호’는 <고등형사>의 주인공을 암살하려 한 행동대장의 이름으로, 소년이 강정후를 위해 오디션에서 빼놓은 배역.

선배의 콧대를 눌러 이찬의 상승세를 입증하기에 그만 한 캐릭터가 또 없었다.

“그건 그냥 두세요. 내기 져도 투입할 사람 있어요.”

“생각해놓은 사람이 있어?”

“예. 남태형 선배요. 다른 주연작 하나 준비하고 있긴 한데, 그쪽은 촬영기간이 길지 않아서 얼추 시간이 맞을 거예요.”

“아, 태형이. 걔라면 오케이지.”

남태형이 이찬의 지도 속에서 어디까지 변할 수 있는지 잘 아는 오덕환은, 망설이지 않고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게 플랜B를 점검한 뒤에 돌아온 사무실.

그곳에서, 소년은 굉장히 독특한 참가자와 조우했다.

“안녕하십니까. 홍주석이라고 합니다.”

“······어······ 소개가 그걸로 끝이에요?”

“예. 괜찮으시면 소개 말고 연기나 보여드리겠습니다. 지정연기 하기 전에 긴장이나 풀 겸······.”

이어진 홍주석의 자유연기를 보다가, 이찬은 황급히 프로필을 들춰봤다. 도저히 무명으로 있을 실력이 아니었기에.

그 결과, 그가 극단 ‘개천’에 오래 몸담고 있었음을 확인할 수 있었다.

“저기, 선배님? 개천 출신이신데, 혹시······?”

“······임호준이랑 극단 동깁니다. 몇 년 고향 내려가 있었는데, 걔가 좋은 작품 하나 있다고, 꼭 오디션을 봤으면 좋겠다고 해서 왔습니다.”

“그러면, 임호준 선배님이 추천을 해주셨어도 됐을 텐데.”

“말하지 말라고 했습니다. 제가 뚜렷한 경력이 있는 것도 아닌데, 당연히 오디션을 봐야죠.”

“어, 말씀 편하게 해주세요. 나이도 어리고, 한참 후밴데.”

“······알았다.”

원하니 반말은 해주겠지만, 더 할 말은 없다는 듯한 태도.

그 순간 소년은 조폭 보스 역에 그 인물을 낙점했다.

제작자인 조상덕의 말도 들어봐야 할 일이지만, 그가 아니고서는 다른 적임자를 도저히 떠올릴 수가 없게 되었다. 그렇기에 오덕환과 입을 맞춰 그를 캐스팅하기로 결심했다.

그런 홍주석에 이어서 다른 배역에도 만족스런 지원자들이 하나둘 나타나며, 소년은 마침내 <고등형사>의 흥행을 확신하게 되었다.

‘홍주석 아저씨는 무시무시한 씬스틸러가 될 거야. 얼굴 생김새도 배역에 딱 들어맞는 데다, 표현 하나하나가 깔끔하고 자연스러워. 임호준 아저씨한테도 뒤진다고 말하기 어려울 정도로. 거기다 황상태, 현우정 선배도 대체 왜 무명이었는지 이해가 안 되는 사람들. 이런 출연진에 강정후까지 합류한다면, 2004년 최고의 흥행작이 될 수 있어. <684>와 <고등형사>의 연타석 흥행으로 이찬 제국이 시작되는 거지. 최고의 한 해가 될 거야. <684>가 <형제>를 누르기만 한다면······.’

*

“아무래도 <684>가 이기겠는데. 그렇지 않냐?”

놀리는 듯한 조혁수의 말에, 강정후가 눈살을 찌푸렸다.

“그럴 일 없습니다. 그쪽이야 연말 대목의 덕을 본 거고.”

“반대로 우리 쪽엔 <왕의 귀환> 같은 막강한 경쟁작이 없지. 600만 근처까지 간 그 외화 생각해보면, <684>는 말 그대로 신드롬이었어. 그에 비해 <형제>는, 글쎄.”

“댁도 출연한 작품 아닙니까? 미니홈피나 만들라고요.”

막 2주차를 맞이한 시점에서, <형제>는 모든 면에서 <684>의 괴물 같은 기록에 밀리고 있었다.

오프닝스코어 1만 차이에서 시작된 격차는, 주말에 이르러서도 좁혀지지 않았다. 근소한 차이지만 <684>의 초기 관객동원 속도를 따라잡지 못하고 있는 것.

그 상황에 안타까움을 느끼는 건 두 사람 모두 마찬가지였지만, 조혁수는 안달을 내는 것보다 안달 난 강정후를 놀리면서 낄낄거리는 쪽을 택했다.

“어떡하냐? 너 이러다 <고등형사> 출연해야 되겠는데?”

“그럴 일 없습니다!”

“왜 그래? 좋게좋게 생각해. 출연진도 꽤 괜찮던데? 네가 알지는 모르겠지만, 홍주석이라는 선배가 있는데-”

“홍주석? 그 아저씨가 <고등형사>에 들어갔어요?”

조혁수는 둘의 활동시기를 생각하며 고개를 갸웃거렸다.

“아저씨라고? 아는 사이야?”

“제가 극단에 있을 때, 대학로 쌍룡 중 한 명이었으니까요.”

“아, 너도 극단 출신이지. 워낙 짧아서 까먹고 있었네.”

‘개천’은 ‘별빛’이 간판스타 안정록의 방송 진출로 주춤하는 사이 무섭게 치고 올라갔던 극단이다.

그중에서도 개천에서 나온 용들이라며 ‘쌍룡’이라 불렸던 배우가 바로 임호준과 홍주석.

그들의 연기력은 관계자들 사이에선 유명했다. 미남들이 중용되던 90년대에 드라마나 영화에 쓰이지 못했을 뿐.

그리고 잠시나마 별빛에서 연기를 배웠던 강정후는, 안정록이 방문했다는 소식에 인사차 찾아왔던 홍주석과 친해져, 이후 한동안 교류한 바 있었다.

“흠······ 임호준 선배가 까메오 맡았다고 하더니, 그렇게 연결이 된 모양이군요. 홍 선배가 추천 받아서 출연하는 거 좋아할 분은 아니지만, 고향 생활에 실증이 나셨나 봅니다.”

“그게 아니라 오디션을 봤다고 하던데? 오덕환 감독이랑 이찬이 보는 앞에서, 신인처럼 지정연기를 했다더라.”

“······말도 안 되는 꼴이군요. 그 배우가 오디션이라니.”

“그게 업계 생리 아니냐. 쌍룡이니 뭐니 해도, 영상 쪽에서는 단역 몇 개밖에 맡지 못했던 사람이니. 어쨌든 그렇게 해서 보스 역에 붙었어. 네가 모셔야 될 사람이 된 거지.”

“아닙니다! 일하는데 방해 말고 꺼지십쇼.”

히스테릭하게 외치고 조혁수를 쫓아낸 강정후는, 그러나 진지하게 그가 말한 가능성을 고려하기 시작했다.

‘홍주석 선배는 장면에 무게감을 실을 줄 아는 배우야. 연출 경력까지 있어서 주변까지 자기 분위기에 동화시켜버리는······ 그런 면에서 안정록 선생님에 가장 가깝다고 평가됐던 사람. 그런 인물이 합류했다면, 작품이 유치하게 흘러갈 일은 없다고 봐도 좋아. 그렇다면 뭐······ 우정출연 격으로 한번 출연해줘도 나쁘진 않겠지. 워딩이 중요해. 내기에 져서 나가는 게 아니라 후배를 위해 도움의 손길을 줬다는 쪽으로······.’

그렇지만 그로부터 며칠이 지났을 때, 상황이 급변했다.

<684>가 51일 만에 천만 관객을 동원한 2월 12일.

한국 최초의 천만영화를 만들자며 그 영화의 관람을 독려해왔던 네티즌들이, 빠르게도 키를 선회했다.

다수의 영화팬들이 <형제>의 압도적인 영상미를 어필하기 시작했다. 강정후와 조혁수로부터 받은 감동을 고백하면서.

개개인의 차이는 있되 그들의 마음은 비슷했다.

이미 <684>는 천만을 돌파했다. 이름처럼 안정적인 안정록의 연기에 이찬의 나이답지 않은 강렬함이 어우러진 그 작품은, 그 관객에 합당한 명작이었다.

그러나 <형제>는 과연 그에 미치지 못하는 작품일까?

전개상에 아쉬움이 없지는 않지만, 강정후와 조혁수의 명품 연기가 빛을 발한 수작 중의 수작이다. 그 작품마저 연달아 천만 관객을 동원한다면, 2003년 이후 한국영화는 그야말로 르네상스를 맞이하게 되지 않겠는가?

그야말로 영화팬들다운 발상이 태세전환을 부른 것이다.

그리고 그 변화의 흐름에, 한 인물이 기름을 끼얹었다.

「 안녕하십니까, 안정록입니다.

인터넷에 직접 글을 쓰는 건 처음이군요. 독수리 타법으로 타자기를 두드리는 기분이 자못 설렙니다. 또래 동무들 중에는 젊은이들 못잖게 컴퓨터를 잘 다루는 이들도 있습니다만, 전 원체 신문물에 어두워서 이것도 쉽지가 않습니다.

이렇게 어려운 글을 쓰는 건, 다름이 아니라 네티즌 여러분께 사의를 표하기 위해서입니다. 여러분의 성원 덕분에 <684>가 마침내 일천만 관객을 달성했습니다. 영광스럽고 황공한 일입니다. 저는 감히 그런 영광을 누릴 배우가 못 되는 까닭입니다.

그러나 찬이를 생각하면, 영화팬 여러분의 혜안에 기뻐지고 맙니다. 그렇습니다. 이미 보고 아신 분들이 많겠으나, 그 아이야말로 다음 세대의 영화계를 이끌어나갈 주역입니다. 좋은 연기에 좋은 관심으로 답해주셔서 정말 감사합니다.

사족을 보태 한 말씀을 더 드리자면, 저는 요즘도 자주 극장을 찾고 있습니다. ‘형제’를 보기 위해서입니다. 제 소중한 제자 정후가 출연한 그 영화는, 몇 번을 봐도 좋은 작품입니다. 그래서 요즘 얼굴을 숨기는 변장술이 늘었습니다.

이런 글을 덧붙인 것을 알면 찬이가 서운해 할 수도 있겠습니다만······ 이후 ‘형제’에도 많은 관심 부탁드립니다. 하하. 」

이찬은, 안정록의 예상과는 달리 서운해 하지 않았다. 그보다는 한 차례 웃어버리고 말았다.

강정후 역시 눈물을 펑펑 쏟으며 울거나 하지는 않았다. 그는 그저 멍하니 모니터를 바라봤다. 아주 오랫동안.

그 주 주말에, 연이틀 50만의 관객이 몰렸다. <형제>가 마침내 <684>의 초반 기세를 따라잡은 터닝포인트였다.

그 작품이 천만 관객을 동원하는 데는 40일이 걸렸다. 그리고 이후로도 한동안 일간 10만 이상의 시민이 그 작품을 찾아, 마침내 1175만이라는 성적표를 안겨줬다.

열병 같았던 <684>의 흥행이 1156만에서 마감된 한참 뒤의 일이었다.

< 35장 - 대표 강정후 (3.) > 끝

ⓒ 비벗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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