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훔치는 연기자-104화 (104/250)

< 38장 - 배우 천세영 (1) >

“일체유심조라······. 크게 잘못된 용례는 아니다만, 해석 면에서 조금 차이가 있을 것 같구나.”

안정록의 대답에 이찬은 고개를 갸웃거렸다.

“아니에요? 모든 게 마음에 달렸다는 게 결국 그런 얘기잖아요? 지식이 쌓여 상황을 메타인지적으로 받아들일 수 있게 됐을 때, 좀 더 대승적인 관점에서 해석이 가능하다는.”

“하하하, 심리학적인 관점에서 보면 그렇게 말할 수 있지. 하지만 심리라는 것은 사실 심리학의 전유물이 아니니, 거기에만 천착해서는 접근이 잘못될 수도 있단다.”

“아저씨야말로 사람들한테 ‘심리학자’라고 불리면서. 유호진 단장님이랑 희재 누나가 아주 노래를 불렀다고요.”

“그 또한 그들의 마음이지. 그들에게는 꿰뚫어보듯이 말하는 내 행동을 받아들일 수 있는 설명이 필요했던 거야. 그게 심리학이 된 것뿐, 사실 나는 그 방면에 아는 게 적단다.”

심리학을 부정하는 ‘심리학자’의 말. 소년은 또 고개를 모로 기울였다.

“우선은 흔한 예부터 들어볼까. 원효대사의 고사를 아니?”

“예. 신문 사설에서 본 것 같은데요.”

“그래. 한번 물어보자. 밤이 깊어 찾은 동굴에서 바가지 속의 물을 꿀처럼 마시며, 스님의 마음은 어떠했겠니?”

“행복했을 거예요. 지식이 없는 상태니까요. 바보들이 헤헤 웃고 다니는 것과 비슷한 상태였던 거죠.”

“음, 그것도 맞는 말이다만······. 어쨌든 날이 밝자 진실이 드러난다. 스님은 사실 동굴이 아닌 파헤쳐진 무덤 속에서 잠을 잤고, 맛 좋았던 물 역시 해골에 고인 이슬이었어. 그때의 마음은 또 어땠겠니?”

“끔찍했겠죠? 진실을 알고 나니까 몸서리가 쳐졌을 거예요.”

“그렇지. 그렇지만 그가 진실을 알았다고 해서 본질이 바뀌었을까? 원래 바가지였던 것이, 인지 때문에 해골이 됐을까?”

곰곰이 생각하다가, 소년은 고개를 흔들었다.

“아, 선문답 싫어. 모르겠어요.”

“모르긴. 너도 실은 알고 있을 거다. 다만 그 논리적이지 않은 이야기를 입에 담기 힘든 거겠지. 보자······ 부처 눈에는 부처만 보인다는 말을 들어봤지?”

“그건 대본에서 몇 번 봤죠.”

“그래. 밤중의 스님은 부처였다. 무덤 속이면 어떻고 해골이면 어떻겠니? 포근한 잠자리와 맑은 물을 제공했으니, 그 밤이야말로 행복한 순간이었던 거야. 그렇지만 오히려 사실에 대한 이해가 스님에게 본질과 무관한 공포를 안겨줬다. 무덤은 무섭고 해골은 끔찍하다는, 부처님은 갖지 않을 상념을.”

거기까지 설명을 듣고 나자 절로 고개가 끄덕여졌다.

“그건 그러네요. 본질적으로 보자면 밤중에 느낀 안락함이 가짜가 아니었던 셈인데, 마음 때문에 그게 가짜가 되고 말았어요.”

“그렇지. 아주 일상적인 대목에서 또 생각해볼까? 내 잘못을 지적해주는 친구가 한 명 있다 치자. 그건 아주 고마운 일이니, 고개를 숙이며 배우면 그만일 거야. 그러나 사람의 아집이 고마운 일조차 기분 나쁜 행동으로 바꾸고 만다. 저 녀석이 날 쉽게 보고 저런 소릴 하나, 그런 식으로 생각하게 되지. 본질은 그대로되 이후의 현상은 크게 달라지는 거야.”

“흠. 그게 바로 돼지 눈엔 돼지만 보인다는 거군요. 그러니까 일체유심조는, 마음이 만든 허상이 아니라 본질을 봐야 한다는 말이겠네요. 하여튼 부처님은 대자대비하단 말이야. 저랑은 안 맞아요.”

“안 맞긴. 난 찬이 널 보면 항상 부처님이 떠오르는데.”

안정록의 얼굴에는 작은 장난기조차 담겨있지 않았다.

그렇기에, 소년은 질색하며 턱을 괴었다.

“됐거든요? 아무튼 저도 이번 영화에선 부처님이 돼보고 싶었어요. 형이 나한테 바란 게 그런 좋은 사람이니까. 그래서 작품에서도 무서운 살인 대신 괴상한 복수극을 주문한 건데, 박무열 아저씨가 열광했죠.”

“하하하. 그 친구, 참 재미있는 감독이야.”

“재밌긴요. 약간 정신이 이상하신 분 같아요.”

“그렇기야 하겠니? 훌륭한 작품을 만들어낼 거라고 믿는다. 그리고 그 덕분에 네 2004년이 아주 바빠지겠어. 가짜 고등학생 역으로 영화를 찍는 한편으로, 진짜 고등학생 역으로 미니시리즈까지 찍어야 하니.”

입술을 삐죽이는 이찬을 잠시 바라보다가, 안정록은 화제를 돌렸다.

“드라마는 나중 문제고, 오늘이 <고등형사> 리딩이지?”

“예. 대본은 다 외웠는데, 캐릭터 해석은 리딩 진행하면서 차근차근 정리할 생각이에요.”

“호준이 연기를 보면서 분석하겠다는 말이구나. 그것도 좋겠지. 그 녀석, 요즘 경찰서에 계속 들락거린다고 하더라. 그저 까메오지만 누구보다 정교하게 형사를 구현하고 싶은 모양이야. 아마도 지기 싫은 거겠지.”

“누구한테요? 저한테요?”

“하하. 그런 마음도 있겠지만, 우선은 주석이 아니겠니.”

“주석이면, 홍주석 아저씨요?”

안정록은 고개를 끄덕이고 두 사람에 대해 설명했다.

“호준이와 주석이는, 참 사이가 좋은 콤비였단다. 하지만 동시에 라이벌 관계이기도 했어. 젊은 나이에 대학로의 쌍룡이라 불리면서 아무래도 호승심이 생기지 않았겠니?”

“그랬겠죠. 인간은 부처님이 아니니까요.”

“하하하. 어쨌든 그렇게 서로가 서로에게 지향점을 제시해주는 관계였는데, 그게 몇 년 전에 무너졌지. 호준이는 믿고 보는 국민배우가 되었고, 주석이는 꿈을 잃고 소일거리나 하는 아저씨가 되었고.”

“그랬죠. 그런데 그렇게 보면, 임호준 아저씨가 홍주석 아저씨한테 경쟁의식을 가질 이유가 없잖아요? 이미 한참 우위에 있는데.”

“실상은 그렇지. 하지만 그렇기에 더 두렵지 않겠니? 경력을 쌓고 인지도를 높였다곤 하지만 그게 꼭 자부심과 직결되는 건 아니거든. 주석이를 서울로 불러들인 건 친구로서 정말 따뜻한 호의를 베푼 거지만, 동시에 불안감 또한 안겨줬을 거다. 혹시 바쁘게 영화 찍는 사이에 내가 퇴보하진 않았을까? 밑바닥 경험을 충실히 쌓은 주석이에게 실력으로 밀려버리는 게 아닐까?”

듣고 보니 그럴싸한 이야기여서, 소년은 기분 좋게 웃었다.

“좋은 일이네요? 마찬가지로 홍주석 아저씨도 친구한테 괄시당하기 싫어서 열심히 준비했을 거고. 그러면 제 입장에선 두 날개를 단 셈이죠.”

“그래. 그러니까, 조심해야 할 거다. 그 두 사람의 연기력에 짓눌리지 않으려면 말이다.”

“누가요? 제가요? 그럴 리가요.”

당차게 답하는 이찬을 보며, 안정록은 푸근하게 웃었다.

누구보다 뛰어난 재능을 더없이 빠르게 개화한 소년이다. 그러니 임호준에게든 홍주석에게든 쉽게 밀리진 않을 터였다.

그렇지만, 경지를 이뤄 날아오른 연기자들의 경쟁이란 언제나 예측불허.

최고의 실력을 선보이고도 배역과의 조화나 시나리오 등의 요인으로 인해 평가가 엇갈리는 경우가 많았다.

그러니 알 수 없는 일이었다. 작품의 수준을 끌어올려줄 두 용이 바람을 제대로 탄다면, <고등형사>는 오히려 조연인 임호준과 홍주석만 기억에 남는 영화로 바뀔지도 모른다.

‘호준이도 주석이도 이번 작품에 정성이 대단해. 과연 찬이가 두 사람의 내공을 이겨낼 수 있을까? 실패한다면, 원톱이 제로톱으로 바뀌는 셈······ 축구 좋아하는 계진행 감독은 그렇게 표현하겠지. 어쩌면 이번에 이 아이는 작품 안에서 패배하게 될지도 몰라.’

그건 염려되는 동시에 기대되는 일이었다. 인간은 언제나 패배를 통해서 성장하는 법이기에.

그렇지만 안정록은, 제자 아닌 제자가 연기의 고수들을 물리치고 원톱을 완성하길 바랐다. 쌍룡을 품에 안고 진정한 이찬의 시대를 시작하길 기원했다.

물론, 진짜 제자에 대해서도 비슷한 심정이었다.

“오늘 리딩에는, 정후도 참석하지?”

“물론이죠. 특별출연이라고 빠지기엔 비중이 커서요. 내기도 이긴 주제에 왜 굳이 하겠다고 한 건지는 모르겠지만요. 아저씨가 부탁하신 건 아니죠?”

“하하, 그럴 리가. 나는 그 아이에게 선택을 강요할 수 있는 사람이 못 된단다. 어쨌든 좋은 일 아니겠니? 덕분에 정말 대단한 출연진이 완성됐어. 임호준과 강정후가 함께 까메오를 맡는 그림은, 연출한 무열이나 시도해볼 만한 일이었는데.”

“박무열 아저씨랑 할 차기작에도 까메오로 불러볼까요?”

“설마 거기까진 안 받아줄 거다. 자, 시간 됐구나. 슬슬 이동해야지?”

이찬은 고개를 꾸벅이고 자리에서 일어섰다.

*

“안녕하십니까, 연출 맡은 오덕환입니다.”

두 편의 영화로 300억에 가까운 매출을 올리고도, 오덕환은 오덕환이었다. 여전히 붙임성 없는 태도로 인사를 건넨다.

신수영이라면 아마 ‘진짜 변태 같아’ 하고 웃었겠지만, 좌중의 분위기는 무거웠다. 타오르는 듯한 눈빛의 두 중년배우가 그 흐름을 주도하고 있었다.

“하하, 반갑습니다 여러분. 덕 필름의 조상덕입니다. 안 되면 덕환 탓, 잘되면 조상 덕. 이게 저희 프로덕션의 모토죠.”

환하게 웃으며 인사한 조상덕 대표 덕분에 분위기가 조금 풀렸다. 임호준과 홍주석은 여전히 타오르고 있되, 어린 배우들이 조심스레 웃음소리를 냈다.

그 뒤가 단독 주연인 이찬의 차례였다.

“안녕하세요. ‘백이한’ 역 맡은 이찬입니다. 선배 후배 배우님들께 누가 되지 않도록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단 두 편의 주연작으로 1500만에 가까운 관객을 동원했으며, <어사>를 통해 신드롬을 일으킨 연기자의 인사.

나이가 어리다고 그를 무시할 배우는 이제 충무로에서 찾기 힘들어졌다. 무거운 분위기 속에서도 박수소리가 거셌다.

그중에서도 특히 이찬에게 큰 흥미를 갖고 있는 임호준이 다음 인사의 주인공이었다.

“아, 반갑습니다. 정신 잃고 백이한이 되는 형사 ‘홍광억’ 역의 임호준입니다. 잠깐 나오는 까메오라 오늘 안 와도 괜찮았는데, 제 친한 친구가 중요한 역에 캐스팅이 돼서, 얼굴도 볼 겸 참석하게 됐습니다. 좋은 영화 만들어주십쇼.”

눈빛과는 달리 유하게 마무리된 인사. 그렇지만 그의 오랜 친구는 전혀 다른 모습을 보여줬다.

“안녕하십니까. 홍주석입니다. ‘임상진’ 역 맡았습니다.”

딱 거기까지였다. 무시무시한 눈빛으로 좌중을 바라보며, 그는 악마 같은 목소리로 이름과 배역만을 소개했다.

그 뒤에 일어선 강정후가 대비되어 천사처럼 보였다.

“안녕하세요, 강정후라고 합니다. 아시다시피 주인공 찬이랑 내기로 얽혀 있었죠. 결과적으로 이기긴 했지만, 이 작품에는 아무래도 미련이 남더군요. 그래서 ‘주경호’ 역에 특별출연 하게 됐습니다. 앞으로 잘 부탁드립니다.”

우레와 같은 박수 속에서 톱스타가 자리에 앉고, 이후 황상태, 현우정을 비롯한 조연들이 차례로 인사했다.

조연으로서도 대표작 하나 없는 무명배우들.

흥행카드로 무장한 이 영화에 사활을 걸고 있기에, 그들의 표정 역시 홍주석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그건 박준호, 김성대, 천세영도 마찬가지였다.

오직 이찬의 후광으로 오디션도 없이 캐스팅된 신인배우들. 그들에게 이 영화는 대국민 오디션이나 다름없었다.

특히 이찬 덕분에 분량이 크게 늘어난 천세영에겐, 그날의 대본리딩이 마치 시험대처럼 여겨졌다.

“아, 안녕하세요. 하늘기획의 천세영입니다. 신인인데 감사하게도 ‘박하늘’ 역을 맡게 됐어요. 열심히 하겠습니다.”

“외모가 아주 아름다우신데요? 연기도 기대할게요.”

강정후가 너스레 같은 칭찬을 건네자, 이찬의 얼굴이 뚱해졌다.

그렇게 복잡한 분위기 속에 첫 씬의 리딩이 시작됐을 때.

조연출이 딱딱한 어투로 초반부의 지문을 읊고 나서, 임호준과 홍주석이 서로를 노려보며 불길을 뿜어냈다.

“너······ 내가 말했지? 언젠가 꼭 잡아넣을 거라고.”

“허허허허, 미친 새끼. 그래서 이랬냐? 니 부하들 사지에 밀어넣고, 나 하나 잡겠다고 쫓아온 거야?”

“닥쳐, 이 새끼야. 너 같은 새끼한텐 말이 필요 없어. 매가 약이야, 매가. 이리 와. 형이 오늘 마사지 좀 해줄게.”

“그거 참 솔깃한 이야긴데. 그런데 어쩌나. 미안한데 나중으로 미뤄야 되겠어. 다음 생에 다시 만나자고.”

“뭔 개소리야? 이 미친 새끼, 너 이리 안 와?”

대사는 거기까지. 이후 두 사람은 추격전을 벌이지만, 술과 담배로 찌든 형사 광억은 조폭 보스 상진을 잡지 못한다.

그 지문을 읽는 건 조연출 오유진의 역할.

그렇지만 그녀는 멍한 얼굴로 입만 벌리고 있다. 두 배우의 강렬한 연기에 압도되어버린 탓이었다.

위압감에 전율한 건 오유진 한 명만이 아니었다.

덕 필름 연출부의 넘버2로서 무수한 영화를 지휘해온 그녀는 그나마 차분한 축. 장내에 드리워진 보이지 않는 무언가가 배우들을 무겁게 짓눌러, 입도 벙긋하지 못하게 만들었다.

대학로의 쌍룡이 뽑아낸 시너지는 그 정도로 강렬했다.

신색이 평온한 건 역으로 승부욕을 끌어올린 이찬과 강정후, 그리고 좌중의 분위기를 살피던 오덕환 정도였다.

“조감독? 유진아?”

“아, 예! 죄송합니다.”

“시간 없어. 다음 씬 넘어가.”

“예, 예. 저······ 씬 2, 밤거리. 상진을 놓친 광억, 울분에 차서 벽을 두들긴다. 터덜터덜 걸어가는 광억을 멀찍이서 따르는 차 한 대. 클로즈업된 운전석에는 무표정한 경호.”

이미 작성된 스토리보드에는 추격씬 연출이 상세하게 기재되어 있지만, 연기자들을 위해 편집된 각본은 단출했다.

그렇게 강정후가 처음으로 살인자 역할을 선보이고, 마침내 ‘오 형사’ 역의 황상태가 울부짖는 병실 씬을 통해서 광억 역의 임호준이 자신의 피리어드를 마감한 뒤.

본편의 첫 등장인물은 하늘 역의 천세영이었다.

“씬 9, 양호실. 천세영의 목소리에 눈을 뜨는 이한.”

그렇지만 천세영은 목소리를 내지 못했다.

대본리딩 자체가 첫 경험인 신인이다. 그런데 그녀의 앞 순번에 임호준, 홍주석, 강정후, 황상태가 연기 내공을 폭발시키며 숨 가쁜 2분으로 장내를 장악해버렸다.

얼이 빠져서 입술을 덜덜 떨게 된 건 자연스러운 일이었다.

바로 그 순간, 이찬의 신색이 빠르게 변했다.

“와! 잠시만요. 죄송합니다. 예상했던 것보다도 선배님들 연기가 너무 짱짱해서, 갑자기 대사가 생각이 안 나네요.”

“······찬이 네가?”

오덕환이 황당하다는 듯 되물었지만, 소년은 당당했다.

“예. 정말 죄송한데, 잠깐만 시간 좀 주실 수 있을까요? 대본 보면서 읽는 건 실례인 것처럼 느껴져서······ 조금만 마음을 가다듬고 하고 싶습니다. 세영 누나, 나 좀 도와줄래?”

“어, 어? 어······.”

“딱 3분이면 됩니다. 잠깐만 나갔다 올게요. 죄송합니다.”

신인인 천세영이 말했다면 씨알도 안 먹혔겠지만, 흥행의 키를 쥔 단독주연이 겸손하게 하는 말이다. 연배와 인지도에서 윗줄인 선배들도 거기에는 불평하지 못했다.

이찬 역시 그 상황에 불쾌함을 느끼진 않았다.

그러나 그는, 방을 나서자마자 천세영을 거칠게 잡아끌었다.

< 38장 - 배우 천세영 (1) > 끝

ⓒ 비벗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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