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훔치는 연기자-105화 (105/250)

< 38장 - 배우 천세영 (2) >

“장난해? 고작 그거 보고 쫄아서 대사도 못 내뱉어? 내가 그러라고 황금 같은 시간 들여서 레슨 해준 줄 알아?”

맹렬한 비난. 오히려 더욱 쫄게 만들 것 같은 목소리.

생전 처음 참여해본 리딩회에서 좀 긴장했다고 해서 들어야 할 말은 아니었다. 영화사 직원들의 눈을 피해 음침한 복도까지 끌려와 겁박당할 만한 일도 아니었고.

다만 천세영은, 나지막이 으르렁대는 소년의 얼굴에서 이상한 기색을 느꼈다.

“찬아, 괜찮아?”

“뭐? 미안하단 말이 나와야 되는 거 아닌가?”

“너, 눈이 빨간데······.”

“너무 화가 나서 실핏줄이 터졌나 보지.”

“그게 아니라 울 것 같은데······.”

“열불이 뻗쳐서 눈물까지 나려고 하나 보지. 헛소리는 관두고, 정신 좀 차리자, 응? 상황파악 안 돼? 누나 하늘 역에 꽂은 것도 29고에서 비중 잔뜩 늘린 것도 다 나라는 거, 저기 앉은 배우들 대부분이 알고 있어. 그런데 리딩 때부터 어수룩한 모습을 보여? 내 얼굴에 먹칠을 해도 유분수지.”

“정말, 정말 미안. 정말······ 이젠 잘할 수 있어.”

워낙 속사포처럼 쏘아붙였기에, 거기까지 으름장 놓는 데에는 1분이 채 걸리지 않았다.

손목시계를 확인한 이찬의 목소리가 조금쯤 누그러졌다.

“······흠. 누구 때문이야? 누구 때문에 쫄았어?”

“임호준 선배님이랑 홍주석 선배님······ 처음부터 분위기가 압도적이라서, 확 빨려들었던 것 같아. 어, 근데 찬아? 내가 혹시 한참 동안 대사 못 뱉고 있었어?”

“그러기 전에 내가 개입한 거잖아. 감 없어?”

“아니······ 그게 아니라, 그럼 찬이 너는 어떻게 알았어? 내가 당황해서 대본도 눈에 안 들어왔다는 거······.”

그거야 급격히 창백해진 얼굴과 바들바들 떨리는 입술을 통해서 곧바로 알 수 있었지- 라고 답하긴 어려웠다. 평범한 사람이라면 한순간에 알아챌 수 없는 미세표현이었으니.

그렇기에 소년은 코웃음을 치며 말을 돌렸다.

“됐고, 연습했던 대로만 하라고. 누나 잘하잖아?”

“응. 긴장 다 풀려서, 이제 잘할 수 있어.”

“뭘 했다고 벌써 긴장이 풀려? 심호흡이라도 좀 하지?”

“네가 이렇게 화내니까, 이상하게 안심이 돼.”

“뭐? 누나한테 화내고 있는 건데?”

“하하하. 왜, 그때도 그랬잖아. 엄청 화내면서, 이번만 용서해줄게, 나만 따라와, 나만 믿어······.”

“음.”

“앞으로는 지킬 테니까 믿어, 암행어사 유관 몰라?”

“으음. 쓸데없는 소린 그만하지? 그러다 대본 까먹겠네.”

이죽거리듯 말했지만, 이찬의 관찰력은 천세영이 마침내 평온한 마음을 되찾았음을 알아볼 수 있었다.

‘내가 화를 내서 마음이 안정됐다니, 웃기는 소리긴 한데······ 이것도 마음이 만드는 허상이라는 걸까. 끔찍한 위기에서 구해줄 때 잔뜩 화를 내고 있었으니, 내가 화를 낼 때면 안정감이 생겨난다는 거야.’

그렇게 생각하며 소년은 손목시계를 확인했다.

약속한 3분까지는 아직도 1분이나 남아 있었다.

“뭐, 안심이 됐다면 다행인데. 아무튼 좀 기분 나쁘네. 누나가 볼 땐 나보다도 그 아저씨들 연기 쪽이 더 압도적이었다는 거잖아? 내가 입 맞춰줄 땐 그렇게 당황한 적 없으면서.”

“에이, 그런 거 아니야. 찬이 너는 나 도와주려고 대사 쳐준다는 걸 알고 있었으니까 힘이 됐던 거고, 저기 선배님들이 더 압도적이라고 생각한 적은 없는데?”

“확실해? 그럼······ 내가 더 잘한다고 생각해?”

“하하하. 그걸 내가 어떻게 말하니? 나야 초짜일 뿐인데. 어쨌든 그분들보다 못한다고 생각하는 건 아니야. 이젠 친하니까, 막 당황스럽게 되진 않는 거고.”

“참나. 말은 청산유수네. 그래서 나는 뭐, 화를 내든 압도적인 연기를 보여주든, 전혀 당황스럽지가 않다?”

“정말 입을 맞추면, 당황하지 않을까?”

입을 맞춘다는 건 대본의 상대역을 연기한다는 은어.

그걸 ‘입맞춤’이란 말의 본래 뜻에 빗댄 건, 어디까지나 농담이었다. 무서운 회의실에서 구원자의 손에 이끌려 나와 평온을 되찾은 여인이 장난스레 건넨 말이었다.

초인적인 관찰력을 가진 이찬은 그걸 모를 수 없었다.

그렇지만, 소년은 심장이 거칠게 뛰기 시작함을 느꼈다.

“그딴······ 이상한 장난은 치지 말지?”

“어? 왜? 히히, 혹시 설레었어?”

“누나. 내 나이가 열여섯이 됐거든? 남자가 평생 가장 위험한 짐승이 될 시기라는 생각이 안 들어?”

“정말? 너는, 안 그럴 것 같은데.”

“사내놈들 다 똑같거든? 혈기왕성한 청소년 자극하지 말지?”

“어······ 진짜야? 내가 장난쳐서, 그런, 자극이 됐어? 나 때문에?”

“누나 때문이 아니라, 열여섯은 정말 아주 예민해서 누가 됐든 여자기만 하면 가슴이 울렁거리는 특별한 시기라는 거야.”

거짓말이었다. 이찬은 아직 천세영 외의 여자에게서 그런 감정을 느껴본 적이 없었다.

하지만 소년과 달리 대단한 관찰력을 갖고 있지 않은 신인배우는, 그 말에 쉽게 납득했다.

“아, 그런 거구나. 미안해. 난 그냥, 넌 항상 차분하고······ 그런 생각은 없는 아이 같아서 그랬지. 괴롭히려고 한 건 아니었는데.”

“이제라도 알았으면 됐어.”

“어······ 그런데 있잖아, 정말로 누가 됐든 상관없는 거야?”

“그 얘긴 그만. 대본이나 다시 체크해. 들어가서 선배 배우들이랑 감독님까지 놀라게 만들지 않으면, 다시 28고로 복구시킬 수도 있으니까. 기억하지? 누나 비중 형편없이 낮았던 그때 대본.”

“아, 되게 무서운 협박. 알았어, 알았어.”

그렇게 끊긴 대화는, 그렇지만 이미 천세영으로 하여금 이찬을 소년이 아닌 남자로서 인식하게 만들었다.

사실 그건 꽤 위험한 일이었다.

룸싸롱에서 성폭행의 위협을 겪은 바 있는 천세영이다. 이후 그녀는 혼자 있을 때면 폐소공포증에 시달리기도 했으며, 자신에게 관심을 보이는 남자들에게 적개심을 느끼기도 했다.

그러니 자신의 남성성을 경고하는 대화란 관계를 서먹하게 만들 가능성이 높았다.

그 말을 입에 담은 게 이찬이 아니었다면.

‘찬이가 날 그렇게 생각한다면······ 싫진 않은데. 아무나 여자로 보인다는 말은 좀 별로지만, 정말 그런 걸까? 속을 모르겠단 말이야. 그런 게 아니라 진심이라면, 좋을 것 같은데. 얘는 날 구해준 사람이고, 또 아주 대단한 배우고, 또······ 가까이 다가섰을 때 나는 향기가, 참 좋아.’

천세영은 룸에서 코트를 여며주던 소년을 떠올렸다. 키 큰 소년의 목덜미가 다가왔을 때 은은히 풍겨오던 체취를 상기했다.

그러는 동안, 미약하게 남아있던 긴장마저 날아갔다.

그게 이유였을 것이다.

회의실로 돌아왔을 때, 천세영은 이찬에게 세뇌처럼 배운 9씬의 하늘 역을 완벽 이상으로 수행했다.

“이한아! 나 보여? 야, 진짜, 아······ 걱정했잖아! 진짜, 바보같이, 왜 멍하니 있다가 공을 맞고 그래? 바보같이······.”

소년이 명진아와 정신혜와 견학 당시 만났던 여학생들로부터 훔친 현대 여고생의 생활양식에, 이찬을 향해 품은 신뢰와 호감이 뒤섞인 연기.

예고도 없이 눈물 두 방울이 떨어졌다.

긴 속눈썹에 싱그러운 이슬 같은 물기가 묻고, 배우들의 시선에 감탄이 어렸다.

“오. 제법인데?”

임호준이 그렇게 중얼거렸다. 말은 하지 않았지만 홍주석과 강정후 역시 또렷한 눈으로 천세영에게 주목했고, 현우정은 작게 휘파람까지 불었다.

그 충격을 이찬이 고스란히 이어갔다.

“이런 개새······! 음. 넌, 누구냐?”

“어? 하하, 백이한, 또 장난쳐?”

“백이한? 잠깐만. 내 목소리가······ 야, 학생. 거울 좀.”

“학생? 거울? 이제부터 외모에 신경 쓰기로 한 거야?”

천세영이 주섬주섬 손거울을 꺼내는 척하고, 그걸 받아드는 시늉을 한 이찬의 몸이, 곧 석상처럼 굳어졌다.

“······이 씨벌? 뭐야 이게? 내가 왜······? 씨벌. 꿈인가?”

“왜 안 하던 욕을 하고 그래? 너 혹시 머리 아픈 거야?”

“아니, 꿈이 아닌가? 차에 치이고, 그 뒤에 어떻게 됐지? 그대로 방치됐나? 내세? 죽은 건가? 이런 씨벌······?”

그 누구도 고등학생을 떠올릴 수 없는 표정과 목소리와 제스처로, 이찬은 혼돈과 분노로 얼룩진 마음을 내비쳤다.

그 한 씬이 잠룡을 놀라게 만들었다.

“······너네.”

홍주석이 떨리는 목소리로 건넨 말에, 임호준은 망설임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내가 말했잖아.”

“네가 봐도 알겠냐, 딱 너라는 걸? 저게 어떻게 가능하지?”

“몰라, 묻지 마라. 나도 이해가 안 돼서 한참 고민했는데, 다른 말로 설명이 안 돼. 그냥 천재야. 괴물인 거지.”

“씁······ 돌겠구만.”

고스란히 임호준이 되어버린 소년을 바라보며, 홍주석은 마음을 고쳐먹었다.

‘호준이 이놈 말고는 잔챙이일 거라고 생각했는데······ 괴상한 신인 여자애에, 천재 말고는 표현할 방법이 없는 꼬맹이에······. 이거야 원. 오디션이 끝나도 계속 시험대구만.’

그와 비슷한 생각을 황상태가 떠올렸다. 현우정은 장난감을 발견한 아이처럼 눈을 희번덕거렸다.

그리고 이찬과 천세영의 연기에 박수로 화답한 강정후는, 속으로 이를 박박 갈고 있었다.

‘분명히 전혀 주목할 가치가 없다고 했어. 신인개발팀 모든 직원들이 동의하는 바였다고. 저 천생 연예인 같은 얼굴을 두고도 그렇게 평가했다는 건, 정말로 연기로는 가망이 없는 쓰레기였다는 말. 그렇지만 이번에도 변신을 해버렸어. <미스 스캔들>에서 남태형이라는 놈이 그랬던 것처럼, 말도 안 되는 연기를 들고 나타났단 말이야. 이젠 우연으로 치부할 수 없어. 이찬, 저놈이 한 거야······. 정말이지 끔찍한 경쟁자로군.’

그런 생각을 했기에, 대본리딩이 끝나고 붙임성 없는 오덕환 감독이 훌쩍 자리를 떠나버린 뒤, 그는 임호준의 팔 위에 손을 얹었다.

“형님. 평냉 한 사발 어떠세요?”

“평냉? 평양냉면? 좋은데, 주석이랑 밥 먹기로 했는데?”

“같이 가시죠. 거기에 이찬이랑······ 천세영도 데려가죠.”

“아, 좋지. 배우 뒤풀이가 되겠는걸? 그래, 리딩회 끝나고 뒤풀이도 하면서 친해지고 그러면 좋지. 그런데 내가 끼어도 괜찮을까? 너는 비중이 좀 있지만, 난 진짜 특별출연이잖아.”

“그러니까 선배님이 쏘셔야죠. 이찬, 천세영, 이리 와봐. 호준 형님이 평양냉면 쏘기로 했으니까.”

“야, 야! 아이······ 나쁜 새끼야, 니 지갑은 뭐 쇠지갑이니?”

“하하하. 자, 다들 가시죠. 홍 선배님, 가시죠.”

냉면집으로 이동하는 길은 평온하지 않았다.

무려 이찬과 강정후라는 두 천만배우에, 그들에 버금가는 인지도를 가진 국민배우 임호준의 동행이다. 얼굴을 얼추 감췄다곤 해도 인파가 몰릴 수밖에 없었다. 평일 오후가 아니었다면 발걸음을 떼기도 힘들었을 터였다.

그렇게 어렵사리 거리를 걸어가며, 천세영은 이찬의 곁에서 조금도 떨어지려 하지 않았다.

열여섯 하이틴스타가 스캔들을 걱정할 충분한 이유였다.

“좀 떨어지지? 누가 보면 딸인 줄 알겠네.”

“딸? 내가? 히히. 손잡고 가고 싶은데.”

“왜, 스캔들로 뜨고 싶어? 이찬의 여자 이런 식으로?”

“너는 참 말을 해도······. 그런 게 아니라, 남자들만 많아서.”

“남자들만 많은 게 뭐?”

“좀······ 무서워서. 너랑 같이 가는 거 아니었으면, 이렇게 따라오지도 못했을 거야. 아무래도 좀······ 그때 생각이 나서.”

이찬은 그때에야 천세영의 심적 트라우마를 깨달았다.

“아······ 씨. 왜 진작 말 안 했어?”

“어? 아니, 너랑 같이 있으면 괜찮으니까.”

그게 소년이 여태껏 진실을 알지 못한 까닭이었다.

얼굴이나 손발의 움직임, 심지어는 갈비뼈의 작은 들뜸만으로도 심리를 추론하는 게 가능한 이찬이지만, 그것도 같이 있을 때 가능한 일.

자신이 없는 곳에서 천세영이 어떤 어려움을 겪고 있는지까지 알 수 있는 천리안은 아니었던 것이다.

‘젠장······ 이걸 이제 알다니, 한심한걸. 허성윤 그 인간은 이제 나쁜 짓을 할 수 없게 됐지만, 그 죄악이 씻은 듯이 다 사라진 건 아니었던 거야. 마음의 허상······ 이 누나한테는 앞으로 어떤 남자든 일단은 무섭게만 보이겠지······.’

그리고 그건 이찬 자신의 죄악이기도 했다.

그저 자신에게 잘해주는 사람이기에 철저히 신뢰했던 과오. 그로 인해 허성윤은 자의적으로 악행을 시도했고, 그로써 천세영은 끔찍한 범죄의 희생양이 되었다.

물리적인 성행위를 막아냈다고 해서 모두 해결된 게 아니었던 것이다.

‘내 옆에 있을 때는 정말로 아무렇지 않았어. 그건 분명해. 하지만 그게 곁에 있는 내 존재 때문이라는 것까진 알지 못했던 거야. 이것도 일체유심조······. 내가 보고 있던 천세영 누나는, 쉽게도 장난치고 도발하던 이 누나는, 사실은 허상. 본질은 이렇게나 연약한 사람이었던 거야.’

그 깨달음은 소년에게 무거운 죄책감을 안겨줬다. 그렇기에 그는 대뜸 속도를 높여 임호준에게 다가갔다.

“선배님. 죄송한데, 천세영 누나가 몸이 좀 안 좋답니다.”

“어, 그래? 그럼 안 되지. 그러면, 택시를 잡아줄까?”

“제 매니저 부를게요. 바래다줘야 안심이 될 것 같아서요.”

“어, 그래? 그럼 할 수 없지. 냉면은 다음에 사줄게. 나야 돈 굳어서 좋지.”

“이해해주셔서 감사합니다. 세영 누나, 인사해.”

“어, 어······ 저기, 죄송합니다! 촬영장에서 뵙겠습니다!”

광억과 하늘이 만나는 씬은 극의 후반부에나 나온다. 몰입을 위해 촬영의 대부분이 시퀀스에 따라 배치됐기에, 천세영이 임호준을 다시 만나는 건 늦여름이 될 터.

그렇기에 그녀는 모퉁이를 하나 돌자마자 이찬에게 몹시 따졌다.

“야, 너 진짜! 왜 그랬어? 임호준 선배님이랑 처음으로 느긋하게 밥 먹을 기회였는데! 저번엔 다 먹기도 전에 보내더니!”

“······어, 미안. 기대했어?”

“당연하지! 임 선배님도 그렇고, 강정후 선배님도 그렇고.”

“아, 그 인간은 왜? 그 인간이랑 친해지지 마.”

“응? 어, 왜? 너도, 강 선배님하고 친하지 않아?”

“안 친해. 아주 싫어하는 놈이야. 그러니까 거리 둬. 아주 무섭고 나쁜 사람이니까.”

“뭐야? 왜 그러는 거야? 맥락을 모르겠어······.”

“모르면, 이해력이 딸리는 거지.”

“뭐? 아 진짜, 뭔데? 왜 그러는지 설명을 해줘야지!”

이찬은 아무것도 설명하지 않았다. 매니저 염수진을 부르지도 않고 택시를 잡아, 천세영의 집 주소를 불렀다.

< 38장 - 배우 천세영 (2) > 끝

ⓒ 비벗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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