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훔치는 연기자-106화 (106/250)

< 38장 - 배우 천세영 (3.) >

“······우리 집 주소도 외우고 있어?”

천세영의 질문에, 이찬은 생각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전에 수진 누나한테 얘기했잖아. 집으로 돌아갈 때.”

“그걸, 기억해? 딱 한 번 말한 건데?”

“내가 기억력이 좀 좋아서.”

거짓 없는 진실이었다. 소년의 기억력은 무척 탁월해, 천세영 외에도 다수의 주소와 전화번호를 외우고 있었다.

하지만 듣는 입장에서는 그렇게 받아들이기 힘든 문제였다.

‘얘가 얘가, 정말로 나한테 반한 걸까? 그렇지 않고서야 딱 한 번 들은 주소를 기억할 리가······. 아, 그럼 혹시 냉면 안 먹고 빠져나온 것도 나 때문일까? 내가 남자들이 많은 게 무섭다고 한 걸 듣고, 그래서······. 아, 그러면, 아까 리딩 할 때 3분 쉬고 싶다고 한 것도, 사실은 내가 민망해질까봐······?’

천세영의 머릿속에서 이찬은 늘 다른 세계의 사람이었다.

어떤 상황에서도 누구보다도 뛰어난 연기를 펼치며, 어른들의 무시무시한 계략조차도 한눈에 꿰뚫어보는, 신의 아이.

그런 존재가 자신에게 매력을 느낄 거라는 상상은 단 한 번도 해본 적이 없었다.

그렇지만 그날은 무언가가 달랐다.

종종 바라보는 눈빛에 담긴 연민이 더없이 따스했다. 행동 하나하나에 담겨 있던 배려는, 하나를 깨닫자 뒤이어 또 몇 개가 떠올라, 감동을 주체하기 어렵게 만들었다.

‘정말 그런 거면, 난 어떻게 해야 되지? 다섯 살 어린데 이미 톱스타인 선배 배우······ 그런 찬이가 나한테 고백하면, 나는 참, 좋을지도. 하지만 누군가 알게 되면 엄청 욕할 거야! 찬이 팬들이 나를 두고 도둑년이라고 욕할 거야. 그 이전에, 이번 영화가 잘못될 수도 있어. 하지만······ 들키지 않으면? 몰래연애······ 같은 회사니까, 잘 숨기면 되지 않을까?’

생각만 하는 건 죄가 아니라고 스스로 변명한 천세영의 상념은, 잠시 후에는 이찬과의 결혼생활에까지 이르렀다.

그 무렵에 택시기사가 탄성을 냈다.

“어이고! 자네 그 배우 아닌가? 육삼······ 뭐 나온?”

“맞아요. <684>지만요.”

“야, 신기하네! 택시 7년 하면서 유명인은 처음 태워보네. 옆에는, 자네 애인인가?”

“아닙니다.”

“아니야? 에이, 그런 것 같은데? 아, 이런 거 말하면 안 되겠구나. 알았어요, 알았어. 모른 척해야지, 허허.”

그 대화 끝에 이찬과 천세영의 시선이 엉켰다.

소년의 표정은 뚱했지만, 천세영 쪽은 볼이 몹시 붉어져 있었다. 마음속 상상들을 들킨 것만 같았기에.

“우, 우리가, 연인처럼 보이나? 참, 별일이야.”

“그러게. 나이 차이가 몇 갠데.”

“어? 야, 넌 뭐 말을 그렇게 하냐? 몇 살 차이 아닌데.”

“한 살만 더 많았어도 아줌마라고 불렀을 텐데.”

“뭐? 아줌마? 야, 너 진짜 그럴 거야? 키는 자기가 훨씬 크면서.”

“누나가 작은 거지. 요즘 170 안 되는 여자가 어디 있어?”

“뭐야? 야, 진아 선배는! 내가 진아 선배보다 크거든?”

“그 누나는 아직 크는 중이고.”

“아니거든? 여자 나이 열여덟이면 다 큰 거야.”

“그 누나는 원래 귀염상이라 더 안 커도 괜찮아.”

“어? 그럼 나는? 나는 귀염상이 아니라서 키라도 커야 된다는 거야? 얼굴도 못생겼는데 키까지 작은 아줌마라 이거야?”

“······꼭 그런 뜻은 아니고.”

드물게도 이찬이 먼저 기세를 누그러뜨렸다.

택시기사가 듣고 있다는 인식 때문이기도 했지만, 내용이 사리에 맞지 않다는 판단이 좀 더 크게 작용했다.

‘이 누나는 뭐, 키가 180이건 150이건 다 잘 어울리겠지. 워낙 예쁜 얼굴이니까. 진아 누나는 딱 지금 키가 잘 맞지만.’

그렇게 생각하다가, 소년은 문득 깨달았다.

자신이 명진아보다도 천세영을 더 비호하고 있다는 사실을.

*

“걔네 둘, 사귀냐?”

홍주석의 질문에 당황한 강정후는, 거의 면을 뱉을 뻔했다.

“읍, 음. 예? 누가 사귄다고요?”

“이찬이랑 천세영. 둘이 심상치가 않던데.”

“어······ 하하하. 오해하신 것 같습니다. 아닐 거예요.”

“그래? 왜 그렇게 생각해?”

“그야, 이찬 걔는, 평범한 연애를 할 만한 애가 아니라서요.”

“그래? 너랑 비슷하게?”

“예? 아, 거기에 왜 절 끼우십니까?”

“왜긴. 널 처음 만났을 때가 딱 걔 나이였으니까.”

그 말에 강정후의 머릿속에서도 과거가 재생되었다.

16세의 강정후를 극단에 데려왔을 때, 안정록이 주로 당부한 대상은 물론 ‘별빛’ 단장 유호진이었다.

그렇지만 대학로에서 대단한 인기를 끌고 있던 믿음직한 후배 홍주석에게도 그는 부탁을 아끼지 않았다.

그때부터 시작된 인연이었다.

아직 강정후가 단수였던 시절. 까마득한 선배인 홍주석의 손을 잡고 이런저런 연극을 관람하며, 어린 날의 그는 쓸데없는 이야기들을 떠벌리곤 했다.

또래들과 달리 자신은 연애가 어렵다는 말까지도.

“저하고는······ 다른데, 비슷할 수는 있겠죠. 어쨌든 그 녀석은 연애 못 합니다. 일단은 열애설이 신경 쓰일 테니까.”

“안쓰러운 일이네. 한 번쯤은 해보는 게 좋을 텐데.”

“안 해봐도 잘하는 녀석인데요.”

“그렇긴 하겠다만, 그래도 진정성이 달라. 나중에 정통 멜로 찍으려고 한다면, 진심을 담은 연기를 할 수 있어야 해. 너도 마찬가지야. 할 수 있을 때 해둬.”

강정후는 가면 위로만 웃으며 냉면을 짓씹었다. 그리고 임호준이 흥미롭다는 듯 끼어들었다.

“그래서 둘이 안 사귀는 거라고? 햐, 신기하네. 내가 볼 적에는 완전히, 내 여자는 내가 지키겠다, 딱 이렇게 보였는데.”

“마음이야 그럴 수 있겠지. 사귀는 건 아직인 모양이야.”

“그래? 정후 얘가 말했다고 바로 믿는 거냐?”

“그럼. 아, 넌 모르나? 극단에 미주라고 있었잖아.”

“어, 매표소에 잠깐 있다가 그만뒀던 애? 기억하지. 애가 예쁘장했어.”

“나랑 잠깐 사귀었어.”

“뭐?! 이 자식이, 그런 얘길 왜 나한테 안 했어? 어디까지 갔냐? 세대차이 안 났어? 뭐 뭐, 결혼 얘기도 하고 그랬어?”

“······그게 중요한 게 아니라, 그때 정후 이놈이 혼자 그걸 알아차렸단 얘기야. 그렇게 눈치가 비상하다는 거지.”

“아, 그래? 그래서 얘가 말하면 믿는 거구나. 허허, 신기하네. 야 정후야, 너 그러면 내가 바람을 피우고 있는지 아닌지도 딱 보면 느낌이 오냐?”

“제가 무슨 무당입니까? 상대방이랑 같이 있는 걸 봐야 촉이 오는 거지······.”

강정후는 티슈로 입을 닦으며 속으로 코웃음을 쳤다.

‘이찬과 천세영? 애틋한 눈빛 오가는데 바로 촉이 왔지. 당연해. 성폭행 당할 뻔한 걸 막아준 사이니까. 하지만 둘은 잘돼선 안 돼. 순진한 이찬은 자기 때문에 위기에 처했던 여자한테 죄책감을 느낄 거고, 천세영은 그 일에 대해서······ 고마움이야 있겠지만, 만날 때마다 그 순간을 떠올리고 말 테니.’

그가 공부한 무수한 희곡과 대본 중, 과거의 불행을 공유한 두 사람이 행복해지는 엔딩은 단 하나도 존재하지 않았다.

그 모두가 사상누각이 되어 새드엔딩으로 치닫곤 했다.

고작 시나리오일 뿐이되 어쨌든 인간이 쓴 이야기. 큰 틀에서는 보편적인 진리를 내포하고 있을 터였다.

그렇기에 강정후는 확신했다.

선을 넘어 가까워진다면, 두 사람의 따뜻한 마음은 무너지고 이내 슬픔이 그 자리를 채울 거라고.

‘그저 서로 호감만 품은 지금 상태가 적절한 거지. 그 이상이 되면, 멍청한 꼬마 둘이 공멸하는 결말뿐. 내 입장에서야 좋은 일인가? 손도 안 쓰고 경쟁자를 보내버릴 수 있으니.’

그렇게 생각하다가 문득 눈살을 찌푸렸다.

‘하지만 별로 재밌을 것 같진 않은데. 지 혼자 무너지는 이찬이라니, 꼴도 보기 싫어······.’

복잡한 기분 속에서 냉면을 한 젓가락 더 집었을 때, 임호준이 알겠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니까 연기를 가르치면서 애정이 쌓이기는 했는데, 아직 연애는 아닐 거라는 얘기지? 다행이네. 이게 스캔들이 되면 타격이 클 거야.”

“허허. 배우라는 것들이 그런 걸 신경 쓰면 되나.”

“이 자식은, 또 그런 소리. 야, 걔들이 극단 배우냐? 텔레비전에도 나갈 일 많을 텐데, 기왕이면 사생활은 조용한 게 좋지. 배우들은 그저 결혼할 때나 기사 나오면 되는 거야.”

“그러면서 잘도 연기가 나오겠다. 정후야, 넌 얘 말 신경 쓰지 마라. 마음껏 연애하고, 어렸을 때 들켜서 공개 데이트도 하고 그래. 그래야 편협하지 않은 연애관을 가질 수 있어.”

“어허, 말하는 거 보게? 야, 정후야. 편협한 게 차라리 나아. 네가 연애를 하면 팬들의 기분이 어떨지를 생각을 해야 돼.”

정작 본인은 관심 없는 연애 얘기에 언성을 높이는 두 배우는, 객관적으로 봤을 때 꼴불견이었다.

그렇지만 그들을 바라보며 강정후는 안온함을 느꼈다.

마치 10년 전으로 돌아가, 극단 선배들의 시시덕거림 속에서 먼 미래의 꿈을 꾸던 어린 강정후가 된 것만 같았다.

‘······그래. 뭐가 됐든, 편안한 게 좋은 거야. 이찬 그놈이 괜한 아픔을 맞이하게 놔둘 필요는 없어. 미운 놈이긴 하지만, 그래도 꽤 도움이 되기도 했으니까. 한번쯤 선배로서 아량을 베풀어주기로 할까.’

그는 두 사람이 더 가까워지지 않게끔 도와줄 방법을 모색하기 시작했다. 편협하지만 순수한 호의로.

그게 도움이 될지 방해가 될지는 알 수 없는 일이었지만.

*

「 암흑가 ‘무서운 아이들’ 10대 조폭이 날뛴다

조직폭력배 평균 연령 점점 낮아져······

‘젊은 피’ 수혈 위해 고등학교에 손 뻗쳐 」

2000년 11월 9일자 기획기사의 헤드라인이었다.

조폭 집중소탕 기간에 검거된 폭력배 518명 중 100에 가까운 인원이 10대로 밝혀지고, 일부 조직에서 고교생 폭력서클을 합숙시키며 똘마니로 키워낸 정황이 확인됐다는 내용.

특히 지방에선 중학생 시절부터 ‘작업’에 차출되어 ‘별’을 달며 본격적으로 폭력배로 자라난 사례도 있었다.

그 소년이 밝힌 진상은 무척이나 충격적이었다.

소년법의 적용으로 절대 긴 형기를 받을 일이 없으며 향후 조직의 결원을 채워줄 수 있는 청소년들을, 세력을 확장하려는 건달들이 돈을 줘서라도 모집한다고.

아이들 입장에서도 수감생활이라는 별을 달면 건달 생활에 꽃이 필 것을 알기에, 작업에 자원하는 건달 꿈나무들이 전국에 셀 수 없이 많다고.

사회의 경각심을 환기하기 위해 작성된 그 기사는, 오덕환에게 영감과 함께 사명감을 안겨줬다.

청소년들이 조폭에 열광하는 이유는 물론 가지각색.

그러나 <네 친구>를 위시해 ‘멋진 조폭’을 보여준 많은 영화들의 작용이 결코 작지는 않았을 것이다.

대부분의 조폭 영화가 청불 관람가를 받는다고는 하나, 나이를 속이고 극장에 들거나 불법적으로 다운로드하는 아이들이 없으리란 판단은 지나치게 나이브한 안심이기에.

그렇기에 그는 생각했다.

아이들이 볼 수 있는 영상물 등급으로 조폭의 부정적인 면을 집중적으로 보여줄 필요가 있지 않을까.

그러면서 스토리에 감동과 교훈까지 담아 작품성을 제고한다면, 형사 집안의 아이로 알려진 이찬에게 최고의 대표작을 안겨줄 수 있지 않을까.

“······그렇게 기획된 게 바로 <고등형사>죠. 저라면 형사의 정신을 가진 고등학생을 완벽하게 표현할 수 있으리라고 믿었기 때문에 과감하게 추진하신 거예요.”

“흠. 그래. 그래서 내 캐릭터가 그렇게 추잡했던 거군.”

건성으로 고개 끄덕이는 강정후를 보며, 이찬은 오랜만에 열불이 뻗치는 기분을 느꼈다.

“아, 뭔데요?”

“뭐가?”

“뜬금없이 집까지 찾아와서 그런 대수롭지 않은 걸 물어보는 저의가 뭐냐고요.”

“뭐 어때서? 수진 씨, 제가 와서 불편하세요?”

“아뇨! 완전 좋죠! 정후 오빠, 파이팅!”

뜬금없는 강정후의 방문에 염수진은 작은 불편조차 느끼지 않았다. ‘얼짱 중의 얼짱’으로 일컬어지는 톱스타를 멍하니 보며 과일을 깎고 또 깎고 있을 뿐.

“······어휴. 됐고, 할 말 있으면 빨리 해요. 나 자야 돼.”

“벌써? 너무 일찍 자지 마. 키 더 클라.”

“그건 내가 알아서 할 일이고요. 대체 왜 왔냐니까요?”

그렇게 다그친 뒤에야 강정후가 몸을 일으켰다. 그리고 염수진의 애절한 시선을 외면한 채 이찬을 방으로 이끌었다.

“흠······. 야. 진지하게 하나 말할 게 있다.”

“뭔데요? 뭔 비밀스런 일이라고 이렇게-”

“천세영 있잖아. 내가 걔를 좋아하게 된 것 같다.”

“······씨발.”

“뭐?”

“아, 아녜요. 음······ 하하하. 거참.”

이찬은, 안정록의 평에 따르면, 세상에 어느 누구도 따를 자가 없는 연기의 천재.

그러나 강정후 역시 몇몇 분야에서는 그에 못지않았다.

특히 그가 의도적으로 가면을 뒤집어쓰고 감정을 꾸며낼 때에는, 이찬조차 감쪽같이 속아 넘어가곤 했다.

이번 경우 역시 그랬다.

두터운 가면을 흐트러뜨리지 않고 말하는 강정후의 연기는 견고한 성벽과 같았고, 소년은 그 태도에서 어떤 기만의 징후도 발견하지 못했다.

그리고 천세영의 미모는, 모든 비약을 합리화하는 절대명제.

“······후. 재밌는 얘길 들었네요. 고마워요. 이만 가보세요.”

“들은 걸로 끝내면 안 되지. 도와줘.”

“뭘 도와줘요? 미쳤어요? 영화 말아먹을 일 있나. 안 돼요.”

“그래? 그러면 내가 직접 고백을 해야겠네.”

“뭐······? 하지 마요. 말했어요, 하지 말라고.”

“그래? 그렇게 싫어? 그럼 내기를 해야지. 너 이번에 드라마도 들어간다면서? 나도 마침 KBC에서 하나 더 하게 됐는데. 이번엔 평균시청률로 내기하자. 그 전까진 손 안 댈게.”

작위적인 세 번째 내기를 제안하며, 강정후는 웃었다.

그가 이긴다면, 이찬은 천세영과 로맨틱한 관계가 될 수 없다. 어째선지 약속에 매우 연연하는 성격인 까닭에.

반대로 그가 진다 해도, 결과가 나올 때까지는 시간이 생긴다. 두 사람이 자신의 감정을 객관적으로 바라볼 수 있는.

그건 강정후의 일생에서 보기 드문 이타적 노력이었다.

한동안 하지 않으려 했던 드라마까지 잡아가면서 그 구도를 만들어낸 건 분명한 선의. 그렇기에, 그 편협한 판단에도 불구하고, 그의 미소는 개운하리만치 밝았다.

“······좋아요. 이번엔 반드시 이깁니다. 반드시······.”

그렇게 대결이 성사되었다. 천세영의 마음과는 무관하게.

< 38장 - 배우 천세영 (3.) > 끝

ⓒ 비벗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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