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39장 - 작가 남애리 (1) >
영화는 감독의 예술, 드라마의 주인은 작가.
절대적인 명제는 아니다. 영화에서도 따로 각본가를 두는 경우가 많고, 드라마 역시 촬영현장에서는 PD라는 직종의 연출가들이 감독 소리를 듣는다.
그렇지만 매체의 차이는 분명히 존재했다. 스크린과 TV가 감독과 작가의 비중에 영향을 미쳤기에.
영화의 경우, 일단 주된 관람층이 청년들이다. 대체로 인물들 사이의 얽히고설킨 감정 묘사보다는 다이내믹한 전개를 더 선호하는 연령대.
또한 상영시간 역시 길어야 세 시간에 이르지 못한다. 자연히 인간관계를 심도 깊게 파고들기보다는 사건의 기승전결에 심혈을 기울인 작품이 주목을 끌었다.
그렇기에 연출과 편집의 권한을 가진 감독들이 흥행의 최고공로자로 인정받았다.
그에 비해 드라마의 취사선택권을 가진 건 주로 중장년층. 화려한 영상이나 박진감보다는, 익숙한 설정 속에서 벌어지는 사람들 사이의 이야기에 흥미를 갖는 사람들이다.
거기에 한 번의 상영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짧아도 10부 이상의 장기 편성이 되니, 분할된 하나하나의 에피소드에서 시청자들을 몰입시키고 기대를 품게 만들어야 했다.
작가의 노련함이야말로 흥행의 키인 셈.
그 흥행에 대해 말하자면, TV 시리즈는 CF를 통해서 수익을 올린다. CF의 단가를 결정하는 건 시청률이고, 드라마의 시청률은 작가에 달려 있다-
즉, 실력 없는 작가는 방송국의 실적을 악화시킨다.
그 논리를 통해 스타작가들이 대두되었다.
고위층이 히트작을 가진 작가들에게 우선적으로 편성을 주니, 신인 작가들의 입봉은 점점 어려워지고, 몇몇 유명 작가를 필두로 한 도제식 작가 시스템이 형성되기에 이르렀다.
그런 스타작가 중 가장 유명한 건 단연 손연숙.
70년대까지 시대극과 사극으로 업계를 지배하던 남자 작가들을 밀어내며 ‘여성 작가의 현대극’을 메인프레임에 올린 그녀는, 그야말로 한국 현대극의 어머니였다.
그런 손연숙의 활약을 통해서 MSB는 20세기 드라마 판을 쥐락펴락할 수 있었다.
그러나 손연숙은 97년에 공영방송으로 적을 옮겨, 지금은 SBC와 KBC를 오가며 ‘손연숙 사단’의 외연을 넓히고 있는 중이다.
기회를 줬던 MSB에 이후 코빼기도 보이지 않는 데에는 복잡한 알력이 작용했다.
당시 담당 CP였고 지금 MSB 드라마국의 수장이 된 이윤호와 사적인 문제가 있었다고 알려졌는데, 정확하게는 그를 위시해 드라마국 전체가 손연숙을 배척한 시기가 있었다.
그로 인해 스타작가와 그 제자들을 잃은 MSB는, 이후 사극과 시대극에 치중하게 됐다. <서장금>으로 시청률 60%의 대박을 낸 게 그런 흐름 속의 결과물이었다.
그렇지만 시청자들의 관심사가 다변화한 2000년대에 언제까지 온고지신만 추구하고 있을 수는 없는 노릇.
그렇기에 유망한 현대극 작가들을 키워내는 데에도 큰 정성을 기울여, 이 시기 MSB 방송아카데미는 작가 지망생들의 꿈이라 할 수 있었다.
그곳 출신 작가 가운데에서 크게 주목받은 이들이 바로 김수애와 남애리였는데, 김수애는 <옥탑방 로맨스>의 히트 이후 KBC 쪽의 러브콜을 수락한 상태.
그렇기에 서른둘의 남애리가 MSB의 마지막 희망이었다.
단막극 플랫폼인 <베스트극장>에 2000년 한 해만 세 편의 작품을 올리고. 2001년 입봉작 <청혼할까요>가 30% 시청률을 달성하며 작가상 후보에까지 오른 남애리.
그녀는 신인작가로서 가장 성공적인 엘리트코스를 걷고 있었다.
그렇지만 2002년에 <연애의 조건> 주인공으로 남태형을 고집하다가 어그러진 뒤, 면피용으로 급히 써낸 2003년작 <패닉의 장미>는 큰 반향을 끌지 못했다.
<청혼할까요>로 만든 드라마국 내의 신뢰가 흔들리기 시작한 상황. 세 번째 작품에서는 반드시 진가를 발휘해야 했다.
주연배우들과의 첫 미팅은 그렇기에 그녀에게 무척 중요했다.
“반가워요, 수영 씨.”
“반갑습니다, 작가님. 어쩜 이렇게 예쁘세요?”
“아, 하하, 고마워요. 그리고 이찬 군······ 안녕?”
“처음 뵙겠습니다. 열심히 하겠습니다.”
신수영에게 MSB는 출세작 <청춘 클래식>을 안겨준 친정이다. 다만 그 작품 이후로 SBC 드라마에 주로 출연하다가, 2000년 이후로는 영화와 CF에 전념해왔다.
그렇게 바깥으로 돌던 기간 동안 충무로의 여신이라는 이름을 얻으며 스타 중의 스타가 된 MSB의 딸.
하향세의 작가에겐 천군만마와도 같은 지원군이었다.
거기에 이찬이라고 하면 한국 최초의 천만배우. 그 전에는 <어사>에서 40% 시청률을 견인한 MSB의 아들이다.
더군다나 남태형을 제외하자면 작품의 주인공 역에 들어맞는 유일한 배우라고 생각하고 있었기에, 남애리는 그 소년을 위해 간도 쓸개도 빼줄 요량이었다.
다만, 그렇게 중요한 자리라고 해서 꼭 일 얘기만 해야 한다는 법은 없다.
그리고 주동한은 굉장히 장난기가 많은 PD였다.
“찬아. 이번에 남태형이는 영화 맡았다면서? 진아랑 로코를 찍는다던데? 원래 영화만 파는 성격인가?”
“예? 아, 예. 그······ 꼭 영화에 집착한다기보단, 맡을 수 있는 배역에 대해서 확고한 주관이 있으신 듯······.”
“그렇다면 아직 ‘남애리의 남자’가 될 가능성도 있는 건가?”
“아, 저기, PD님.”
작가가 당황한 듯 손을 휘저었지만, 주동한은 키득거리며 말을 보탰다.
“우리 남 작가가 정말로 남 배우를 좋게 봤거든. 천상의 미모라고, 꼭 작품 같이 하고 싶다고 계속 말했대. 이 작품이 원래 2002년에 편성될 예정이었는데, 남 작가가 남태형이가 아니면 안 된다고 고집을 부려서 결국 파토가 났지.”
“뭘 또, 그런 얘기까지 하세요?”
“내 생각엔 같이 하나쯤 하면 좋을 것 같은데. 남 작가와 남 배우니까 ‘남라인’이라고 얘깃거리도 될 거고.”
“그만 좀 하세요. 우리 작품 얘길 해야죠······.”
“어때, 찬아? 나중에라도 남태형이 드라마 할 일이 있을까?”
“어, 예. 뭐······ 마음에 드는 작품이 있다면 하실 거예요. 남 작가님 극본이 워낙 좋으니까, 또 기회가 있겠죠.”
대충 둘러대며 이찬은 남애리의 신색을 살폈다.
‘정말 엄청 좋아하나 보네. 작품 할 기회가 있을 거라는 말만 듣고도 턱이 당겨지고 눈동자가 떨리고 볼이 붉어지고······. 뭐 그럴 만도 해. 작품 활동 하나도 안 하는 동안에도 남자 배우 외모 투표에서 강정후를 위협하곤 했으니까.’
그렇게 생각하자, 문득 마음이 복잡해졌다.
‘그 투표에서 난 10위 안에도 없었지······. 나이가 어린 데다 현대극을 거의 안 찍어서 그런 것도 있긴 하지만, 실제로도 두 사람에 비하면 한참 못난 외모인 게 맞아. 남태형 선배한테서 훔친 섬세한 분위기로 어찌어찌 커버하고 있을 뿐······.’
철저하게 객관적인 판단이었다.
연기력이야 단순화해서 판단하기 어려운 것이고, 또 스펙트럼이라는 측면에서 다른 어떤 배우보다도 낫다고 자부하지만, 소년은 자신의 외모에는 자부심을 가질 수 없었다.
‘나야 뭐······ 일종의 개성파 배우지. 키가 크고 코가 오똑하고 비율이 좋아서 멋있다는 말은 자주 듣지만, 얼굴만 놓고 보면 전통적인 미남형은 아니야. 그러니까 작품을 맡기엔 보다 유리한 편이지만, 여자들이 볼 때는 어떨까? 만약에 강정후랑 나를 놓고 저울질을 한다면······?’
머릿속으로 떠올린 건 천세영의 얼굴이었다.
이찬에게는 다섯 살 연상, 강정후에게는 여섯 살 연하. 보통 여자들은 연하보다 연상을 선호하는 경향이 크고, 강정후는 외모나 인지도 면에서도 이찬보다 윗줄이었다.
천세영을 위기에서 구해낸 실적도 큰 메리트는 아니었다. 실질적으로 그녀를 찾아내고 주변을 정리한 게 강정후였으니.
‘그러니, 정말 끔찍한 경쟁자야. 이번 내기에서 반드시 이겨서 확실하게 떼어내야만 해.’
그렇게 생각한 이찬은, 천세영을 자신의 소유물처럼 생각하게 된 게 강정후의 내기 제안 이후부터였다는 걸 자각하지 못하고 있었다.
관찰력과 기억력이 비범하다곤 하나 아직은 소년.
연애에 관심 없는 마음은 여전하지만, 승부라는 환경 속에서 마음의 방향이 바뀌어, 지기 싫다는 오기와 천세영에 대한 호감이 복잡하게 얽혀들었다.
그리고 드라마 작감 미팅은 자신의 마음을 관조할 타이밍은 아니었다.
“······그런 식으로 ‘김서준’이 ‘성지현’에게 빠져드는 거예요. 어때요? 이찬 군, 캐릭터가 괜찮은 것 같아요?”
“아, 예. 개연성이 있는 것 같습니다. 그리고 말씀 편하게 하세요.”
“어, 그럴까요? 참······ 이게 참 어렵네요. 나이는 어리지만, 지금 충무로에서 가장 각광받는 배우님이고.”
“편하게 대해주셔야 저도 의견 말씀드리기가 편해서요.”
“그, 그렇지? 혹시 별로인 부분이 있었어? 대본 보면서······.”
남애리의 조심스러운 태도는 이상할 게 없었다.
드라마 작가는 언제나 대중성을 시험받는 프리랜서. 주연 미팅에서 당당하게 자기 의견을 개진할 수 있는 작가는 결코 많지 않다.
기획사 대표에게도 ‘선생님’ 호칭을 듣는 극소수만이 그렇게 작가다운 작가 노릇을 할 수 있는 게 실상이었다.
더군다나 이찬은 몇 차례 거절한 끝에 캐스팅을 수락한 톱스타. 더할 나위 없는 흥행카드인 데다, 그가 빠진다면 같은 기획사의 신수영 역시 출연이 애매해진다.
그렇기에 남애리는 입술을 핥으며 불안해했다.
그 감정을 알아봤기에, 소년은 편안하게 입을 열 수 있었다.
“참 좋은 작품 같아요. 수정 많이 하셨어요?”
“어, 그래? 수정······ 참 많이 했지. 남태형 배우 섭외 불발되고 나서도, 혹시나 하면서 틈틈이 살펴봤으니까······.”
“그렇게 숙성이 돼서 그런지 글로만 읽어도 재밌네요. 다만 딱 하나 걸리는 게 있는데요.”
“걸리는 거? 어, 어떤 거?”
“1부 키스 씬이요. 한국 드라마에서 키스라는 게 엔딩 같은 무게를 갖고 있는데, 그걸 1부부터 보여준다는 건 좀 충격적이지 않을까 하고 생각을 했어요. 미성년자 나이기도 하고.”
“어? 야, 왜? 난 그래서 더 신선하고 좋았는데.”
신수영의 개입에 남애리가 빠르게 고개를 끄덕였다.
“어, 그래. 내가 좀 이걸, 새로운 트렌드를 이끄는 젊은 드라마를 만들려고 생각한 부분인데.”
“그런 효과가 있긴 할 것 같은데요, 그래도 키스는 좀.”
“아이 참. 마이 찬? 그러지 말고 좀 다시 생각해봐. 난 그 장면 되게 예쁘게 나올 것 같았단 말이야.”
원래 총책임자인 PD가 나서서 정리해야 할 상황이지만, 주동한은 별 말을 보태지 않고 지켜보기만 했다.
이미 <어사>에서 이찬의 간섭을 통해 재미를 봤던 입장이다. 심정적으로 작가의 원안에 끌리긴 해도 굳이 미리 재단하고 싶지는 않았다.
과연, 소년은 곧 그의 기대에 부응했다.
“여기서 여교사랑 고등학생이 사랑에 빠지는, 사회적으로 용인되기 어려운 상황의 아이러니를 강조하는 게 바로 1부 키스 씬인 걸 알아요. 그걸 빼면 초반부 무게감이 확 빠질 거라고 생각하고 계신 거죠? 하지만 조금 방향만 바꿔도 굉장히 예쁜 장면을 만들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해요. 이런 건 어때요? 성지현이 복잡한 생각을 지우려고 밤에 바다에 들어갔다가, 그만 다리에 쥐가 나는 거예요. 그때 마침 혼자 해변을 걷고 있던 김서준이 그녀를 구해줘요. 해변에선 너무 멀어서 일단 곶 근처의 바위에 눕혀주는 거죠. 그렇게 달빛 아래에서 성지현이 천천히 눈을 뜨고, 물속의 김서준은 마치 <타이타닉>의 한 장면처럼 그녀를 올려다보고 있고.”
이야기꾼처럼 늘어놓는 이찬의 말을 들으며, 주동한은 머릿속으로 장면을 그리고 있었다.
트렌디한 신세대 미소년 이찬이 당대 최고의 몸매를 자랑하는 신수영을 바다에서 끌어올린다-
그리고 두 사람의 눈빛이 파란 달빛 아래에서 마주칠 때, 감미로운 OST와 함께 엔딩 시퀀스-
“야! 그림 진짜 잘 빠지겠는데?”
“그래요? 작가님 생각은 어떠세요?”
“그렇게 전개되면······ 금지된 사랑에 빠지는 개연성도 강화되고······ 좀 더 드라마틱할 것 같아. 음, 괜찮을지도.”
대답을 하면서 머릿속으로는 이미 대사 구상에 여념이 없는 눈치였다. 그 모습에 마침내 이찬도 안심했다.
“다행이네요. 버릇없이 제 의견 밀어붙인 점 죄송해요. 아, 사실은 제 의견은 아니지만요.”
“응? 뭐야, 그럼 누구 의견인데?”
“저기 계신 제 매니저 누나요. 인터넷소설 쓰시거든요.”
염수진은 몹시 당황해서 볼을 붉혔다. 갑자기 그 얘길 왜 꺼내냐며, 소리는 내지 않고 입모양으로만 따지고 든다.
하지만 그녀를 돌아본 건 이찬이 아닌 주동한. 그는 픽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우리 수진 씨가 그런 특기가 있었어? 신기하네.”
“그렇다니까요. 운전 하시는 동안에도 대본 내용 가지고 이러쿵저러쿵 수다를 떠셔서, 안전운전이 걱정될 지경이죠.”
“어쨌든 덕분에 꽤 좋은 아이디어가 나온 것 같은데? 남 작가, 그거 써도 괜찮겠지? 사실 나도 불꽃놀이 보면서 키스한다는 게 좀 어디서 본 것 같고 그래서, 살짝 변형을 해보면 어떨까 싶었거든.”
“아, 네! 앞뒤 문맥을 맞춰봐야 되긴 하는데, 지금 생각엔 잘 버무려질 것 같아요. 수진 씨? 아이디어, 고마워요.”
“아, 아닙니다! 써주신다면 영광이죠······.”
너 이따 들어가서 봐- 입모양으로 그렇게 말하며, 로드매니저는 이를 딱딱 부딪쳤다.
그렇지만 이찬은 여전히 정면만 보는 중이었다.
정확하게는, 멍한 눈으로 정신혜를 생각하고 있었다.
‘간신히 키스 씬 피하는 데는 성공한 것 같은데······ 좀 웃긴 일인 건 사실이야. 키스가 로맨스의 엔딩이라고 한다면, 난 열두 살 때 이미 엔딩을 맞은 셈인데. 음······ 그 누나는 뭐 하고 있으려나? 아직까지도 나랑 사귈 생각으로 가득하려나? 설마 그렇진 않겠지?’
곤란한 일이라고 소년은 생각했다.
정신혜와의 키스는 어디까지나 우발적인 사고. 그 일에 사로잡혀서 강제로 연인이 되고 싶지는 않았다.
‘그리고 진아 누나도······ 참 좋은 사람이니까, 내가 아니라도 더 좋은 사람 만날 수 있을 거야. 그렇지만 천세영 누나한테는 딱 내가 필요해. 나 때문에 괴로운 일을 겪은 그 누나를 강정후 같은 이상한 놈한테 내줄 수는 없단 말이야.’
그렇게 연민까지 섞여들어, 마침내 천세영을 향한 감정이 구체화됐다. 이찬은 그 여인에게 무거운 책임감을 느꼈다.
바로 그런 타이밍에, 남애리가 입을 열었다.
“편성은 6월부터예요. SBC에는 <섬마을>이란 작품이 내정됐다고 하고, KBC에선 만화 원작의 <스위트 프리즌>이 투입될 예정이에요. 원작이 흥미진진하고, <옥탑방 로맨스> 쓰신 수애 언니가 맡으셔서 원작 팬들도 기대하고 있는 작품인데, 남주에 진유성 씨가 캐스팅을 고사해서 난항이 됐대요.”
“어. 그거 아마 픽스될 거예요. 강정후 선배로.”
“가, 강정후?! 그 사람이 드라마를? 아······ 그럼 안 되는데.”
작가는 무척 당황했지만, 이찬은 결연히 의지를 다졌다.
강정후의 스위트 프리즌에서 천세영을 구해내기 위해.
< 39장 - 작가 남애리 (1) > 끝
ⓒ 비벗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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