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40장 - 리더 심요셉 (1) >
[그렇게 46씬이 OK 나긴 했는데, 뭔가 미진한 느낌이었어. 내 생각도 그렇고 감독님 표정이 좀 복잡했고. 뭔가 마음에 들지 않는 눈치였던 것 같아. 왜였을까?]
남태형은 초조한 듯 끊어지는 말투로 물었다.
전화로 설명만 들은 46씬에 대해서 잠깐 고찰해본 이찬은, 곧 대수롭지 않다는 듯 답했다.
“유지아란 친구 때문에 그랬을 것 같은데요? 아마 아직 어려서 호흡 맞추는 게 자연스럽지 않을 거예요. 그러니까 리허설 때랑 갭이 생긴 게 아닌가 싶은데.”
[아, 그런가? 어쩐지, 그 애랑 붙는 씬에서 자꾸 NG가 나더라고.]
“저보다도 어리니까 어쩔 수 없죠. 선배가 종종 지도를······ 해주기 불편하시면, 진아 누나한테 시키세요. 호흡이 안 맞는 것 같다고 하시면 무슨 얘긴지 알아들을 거예요.”
[어, 그래도 될까? 진아한테 폐가 되진 않을까?]
“그 누나는 그런 수준 이미 지났어요. 친구 배역으로 출연하는 배우니까 당연히 케어해줘야 되는 거기도 하고요.”
그런 의미에서 말하자면, 씬의 상대역인 남태형이야말로 케어의 주체가 되어야 옳다.
그렇지만 그는 반쪽짜리 연기자. 타인의 연기를 교정해주기엔 관찰력도 표현력도 미비하기만 했다.
[그렇구나······ 알겠어. 고맙다, 찬아.]
“네. 그럼 이만 끊을게요. 연기 잘하세요.”
[최선을 다할게. 네 추천에 누가 되지 않게.]
“제가 추천한 거 아니라니까 그러시네요.”
[아, 그랬나. 어쨌든 열심히 할게.]
전화를 끊을 때까지도, 남태형은 시종일관 깍듯했다.
열한 살 차이 나는 후배가 아니라 정말 연기 스승을 대하는 것처럼.
‘하여튼 웃기는 아저씨라니까······. 이렇게 겸손한 사람이니까, 길지도 않은 기간 동안에 그 많은 씬들을 숙달할 수 있었던 거겠지만. 그것도 나름의 무기라고 할 수 있어. 나처럼 재능이 뛰어나지 않은 바에야 끈기라도 갖춰야지.’
그렇게 생각하던 소년은, 이내 명진아 쪽으로 생각을 틀었다.
‘얘기 들어보면 진아 누나는 참 잘하고 있는 것 같은데······ 흥행이 어떻게 될지 모르겠네. 소재가 파격적인 건 <연애의 조건>하고 비슷한데, 몇 화에 걸쳐 사랑에 빠지는 계기를 보여줄 드라마하곤 다르게 이건 영화란 말이야. 그것도 로맨스 코메디. 한정된 시간 내에 인물들의 감정 변화를 설명하면서 재미까지 담아야 한다는 건데. 그게 가능할지 모르겠어.’
<꼬마신부>의 중심소재는 상당히 획기적이었다.
여고생과 성인의 러브스토리는 때때로 드라마에도 조명되는 소재. 그러나 성인이 되지 않은 여고생이 결혼식을 치른다는 건 독립영화에도 잘 쓰이지 않는 파격이었다.
그런 만큼 대중의 이목을 끌 수는 있겠지만, 그게 흥행의 성공으로 이어질지는 확신할 수 없는 일이었다.
그나마 가능성을 점칠 수 있는 유일한 이유는 명진아.
작중의 여주인공과 같은 나이라서 그 또래의 매력을 분명히 보여줄 수 있는 동시에, 복잡한 감정 씬까지 누구보다 훌륭하게 소화할 수 있는 배우다.
그녀가 여자주인공을 맡지 않았다면 무조건 망했을 영화라고, 이찬은 생각했다.
‘거기에 남태형 선배가 그 꽃미남 외모로 받쳐주는 역을 충실히 수행한다면, 젊은 층의 절대적인 지지를 받을 수 있을지도. 그런데······ 작중 나이가 어리긴 하지만 어쨌든 결혼생활을 중심으로 전개가 될 텐데, 그러면 러브 씬도 있으려나? 베드씬이야 관람가 때문에 빼겠지만, 키스 씬 정도는 들어가지 않을까? 남태형 선배랑 진아 누나의 키스라······ 그림은 정말 무진장 예쁘게 뽑힐 것 같은데.’
그렇게 생각하다가, 소년은 문득 기분이 나빠짐을 느꼈다.
하지만 그 감정을 관조할 시간은 주어지지 않았다. 통화를 마친 즉시 <연애의 조건> 최종 미팅에 참여해야 했기에.
“캐스팅은 성공적으로 잘된 것 같다. 김서준 친구 배역으로는, ‘티오피’의 요셉이라고······ 혹시 아니?”
멋쩍은 듯 웃으며 묻는 주동한에게, 이찬은 고개를 끄덕여 보였다.
T.O.P라고 하면 98년도에 데뷔한 1세대 아이돌그룹.
그 전부터 활약해온 선배들에게 밀려 초기에는 크게 주목받지 못했지만, 이후 나날이 성장하며 정상에 올라섰다.
데뷔 7년차가 된 2004년에도 그 행보는 멈추지 않아, 현재는 앨범활동을 마치고 개인활동을 추진하는 중.
“알죠. 워낙 유명해서. 작년에 드라마 나온 것도 봤고요. 감탄할 정도는 아니었지만, 나름대로 노력하신 티가 나던데요? 그런 분이면 친구 역할로 나쁘지 않죠.”
“아, 정말? 다행이다. 아무래도 아이돌 출신 연기자니까, 정통파 배우인 네 성에 안 찰까봐 걱정했는데.”
“제가 상대역 따지는 애라고 생각하셨어요?”
“하하. 지금까지 워낙 정통파들하고만 연기를 했잖아?”
“그렇긴 한데, 전 상관없어요. 어차피 평생 만나지 않고 살 사이는 아니잖아요. 아이돌 팬덤은 드라마에도 영화에도 좋은 지원군이 돼주니까요.”
소년이 말한 이유에 의해, 방송가는 꾸준히 아이돌을 연기판에 끌어들이고 있었다.
연기력으로는 분명 전문 연기자들에 비해 한참 뒤떨어진다. 그러나 청소년층과 청년층의 인지도는 어지간한 주연들을 압도하며, 팬들의 충성도 또한 비교가 안 되는 수준.
젊은 세대에게 주목받아야 할 <연애의 조건>에 톱클래스 아이돌을 출연시키는 건 아주 합리적인 방책이었다.
“네 말대로, 이 친구가 아주 노력파야. 지난 번 작품은 가수 활동을 하는 와중에 출연한 거라서 연습을 많이 못했다고 하고, 연기 가르쳤던 선생 말 들어보니까 잠재력은 훨씬 더 있는 편이래. 이번에 네가 잘 이끌어주면 그게 개화가 돼서, 대단한 화제를 끌 수 있을지도 몰라.”
“그래요? 나이가 어떻게 되시는데요?”
“79년생이니까······ 지금 스물여섯이지? 너랑 딱 열 살 차이 나는구나. 미팅 때 얘기해보니까 네가 출연한 작품들 전부 다 재밌게 봤대. 앞으로 잘 좀 리드해주렴. 알겠지?”
“예, 그럴게요.”
이어지는 다른 배역 연기자들의 인물평을 건성으로 들으며, 이찬은 남태형에 대해 생각했다.
‘그 선배가 원래 T.O.P에 들어갈 예정이었댔지. 그랬는데 춤에 자신이 없어서 프로액터스로 간 거였다고. 노래를 들어보진 못했지만, 아무리 그래도 그 한심한 연기력보다는 가창력 쪽이 나았을 거야. 잘생긴 얼굴로 그 팀 안에서 주축이 될 수 있었을지도 몰라. 그렇지만 지금은······ 연기자 남태형은 영화 주연이 됐고, T.O.P에서 제일 잘나가는 리더는 내 조연이 됐다는 거지. 묘한 인연이야 참.’
*
2000년의 <미스 스캔들> 이후 남태형의 4년은, 간추려 말하자면, 복무기간과도 같았다.
물론 그 표현에는 많은 비약이 수반된다.
적어도 그는 군대에서처럼 신체의 자유를 구속당하지 않았고, 아침에 눈 뜬 뒤부터 잠들기 전까지-때로는 잠든 뒤까지- 선임들의 구박과 구타에 시달리는 일도 없었으며, 오히려 화려한 조명과 카메라 가득한 스튜디오를 누비고 다녔다.
신체적으로는 누구보다도 풍요로운 생활을 구가했던 것.
그렇지만 남태형의 정신은 휴가를 갈망하고 있었다.
<미스 스캔들>의 촬영은 그에게 있어서 첫키스와도 같은 달콤한 추억.
그 작품을 본 지인과 가족들이 눈물까지 흘리며 축하해준 뒤, 연기에 대한 갈망은 커져만 갔다.
그렇기에 그는 CF와 잡지 표지모델로 활약하면서 작은 행복도 느끼지 못했다. 그저 다시 연기자로서 활약할 날만 손꼽아 기다리며, 이찬에게 받은 영상들을 연습하고 또 연습했다.
그러나 연습한 캐릭터에 딱 들어맞는 배역이 없어 모델 경력만 쌓이고 있을 무렵.
마침내 소년이 새로운 작품을 추천해줬다.
그게 바로 <꼬마신부>. 이찬과 호흡을 맞추며 최고의 10대 여배우로 자리매김한 명진아가 낙점된 영화였다.
그녀의 무게감에 비해 김세진 감독은 좀 처지는 편이었다.
30대 중반의 나이로 아직은 출세작이 없고, 해외파라는 걸 강조하고 싶은지 자꾸 영어를 섞어 쓰는 괴상한 인물.
하지만 직접 겪어본 그는 실력파라는 말에 부합했다.
“자, 다들 굿모닝. 오늘 학교 씬을 세븐, 럭키 세븐 씬 찍을 거예요. 우리 미스터 남이 미스 명 학교에 교생으로 나와서 겪는 일들을 코믹하고 스윗하게 그릴 거고, 컷 30개 넘게 써서 좀 TV쇼 같은 느낌을 줄 거고······ 느낌 알겠지?”
“예, 감독님.”
결연하게 답한 남태형과 달리, 명진아는 소극적으로 고개만 끄덕였다.
“진아, 괜찮아? 오늘 잘할 수 있겠어?”
“네······ 잘할 수 있어요.”
“오케이. 그럼 배우들끼리 토킹어바웃 좀 하고 있어.”
감독이 프레임을 확인하고자 복도로 나서고, 촬영부가 카메라와 마이크 세팅을 위해 바쁘게 움직이기 시작한다.
남태형은 차분하게 대본을 펼쳐 52씬을 확인했다.
혹시라도 잊을까 빼곡하게 새겨 넣은 글씨가 눈에 들어오자, 밤늦게까지 연습했던 동작과 목소리가 손에 잡힐 듯 떠올랐다.
그렇지만 그 순간 명진아가 말을 걸어왔다.
“저기, 태형 오빠.”
“음. 왜?”
“저기······ 찬이 있잖아요? 이번에 드라마 하는 거요. 그거 혹시 어떻게 돼가는지 아세요?”
“잘 모르는데.”
“키스 씬 있는지 없는지 혹시 모르세요? 최종고에 키스 씬 들어갔다는 말도 있고, 아니라는 말도 있더라고요.”
“그런 건 모르지. 회사 사람들도 모르는 걸 내가 알겠어?”
“그래도, 찬이랑 친하시니까······. 맨날 통화하시잖아요?”
“자주 연락하는 건 맞는데, 사적인 얘기는 안 해.”
하루에도 서너 차례씩 통화를 하면서도, 연기 얘기 외에는 꺼내지 않는다는 말.
명진아는 그런 남태형이 이해되지 않았다.
<미스 스캔들> 때나 지금이나 도무지 흠잡을 데 없는 연기를 펼치고 있는데, 태도는 신인들보다도 더 필사적이다. 도대체 쉴 때는 있는지 의아할 정도였다.
“다른 할 말 없으면, 난 대본 더 볼게.”
“아······ 네. 저는 지아랑 연습하고 있을게요.”
무뚝뚝하게 고개를 끄덕인 남태형이 교탁 쪽으로 걸어가고, 친구 역의 유지아가 혀를 내둘렀다.
“저 선배는 진짜 이상한 것 같아. 언니, 남자 배우들은 다 저래요?”
“아, 아니야. 저 오빠가 특이하신 것 같아. 어, 조혁수 선배님도 약간 그런 느낌이긴 한데.”
“아하, 별종이신 거구나? 근데 그건 왜요? 이찬 선배 드라마에 키스 씬 들어가면 왜요?”
“어? 아, 그냥, 궁금해서. 찬이 아직 어리니까······ 진한 러브 씬이 있으면 좀 곤란할 것 같기도 하고······.”
“아, 그래서 물어보신 거구나? 후후.”
90년생 신인배우의 표정은 온통 음흉했다. 둘러대는 말에 조금도 신뢰를 느끼지 못한다는 투였다.
“이찬 선배가 어려서 걱정이라고 하는 배우는, 세상에 언니밖에 없을 거예요. 몸은 저기 남태형 선배님보다도 크다면서요? 거기다 연기대상 후보까지 올라간 분인데.”
“그렇긴 한데······ 그래도 아직 어리단 말이야. 너보다 겨우 한 살 더 많은 애라구.”
“하지만 이미 성인역으로 천만 관객 동원한 분이잖아요? 총격전 씬도 찍었는데, 겨우 키스 씬이 이미지에 해가 되겠어요?”
유지아의 말은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었다.
이미 대중에게 나이와 무관한 특급 연기자로 인정받은 이찬은, CF를 스무 개 넘게 찍었음에도 이미지 소비가 염려되지 않는다는 말을 듣는 팔색조.
나이에 맞지 않는 키스 씬 하나 찍는다고 해서 곤란해질 리가 없었다.
그 팩트 앞에서 뭐라 대답을 못하고 웅얼거리는 명진아를 보며, 유지아는 다 이해한다는 듯 맑게 웃었다.
“언니, 저 입 무거워요. 그냥 얘기해도 돼요.”
“아니······ 그런 거 아니라니깐.”
“그래요? 그래요 그럼. 아무튼 저는 이찬 선배가 너무 부러워요. 저는 노안이라서 제 나이 역도 못 하고, 연기가 어색해서 성인 역도 못 하고 그러고 있는데, 그 선배는 성인 역으로 대성공을 거두고 다시 또 학생 역으로 돌아온 거잖아요? 진짜 대단해. 언니, 저도 열심히 하면 그렇게 될 수 있을까요?”
장난스런 대화 속에서 나온 말이지만, 유지아는 진지했다.
타의 추종을 불허하는 노안으로 고생하는 그녀에게 이찬은 경이였다. 도대체 어떻게 연기를 배워서 그렇게 잘할 수 있는 건지, 생각만 해도 감탄스러웠다.
그리고 그런 점에서는 명진아 역시 감탄밖에 더할 것이 없었다.
“찬이는······ 정말 대단한 애야. 대본 보면 태형 오빠나 조혁수 선배님보다 더 빼곡해. 그런데도 촬영장 살피는 것도 게을리 하지 않고, 상대역 배우들한테도 조언을 해주곤 해. 그렇게 할 수 있는 건······ 아마 연극부터 시작해서 연기 공부를 쉬지 않았던 까닭이 아닐까?”
착각이었다. 사실은 초인적인 재능의 소산일 뿐.
그렇지만 그 말을 들으며 유지아는 꿈꾸는 사람처럼 멍해졌다.
“정말 대단해요. 나도 더 열심히 해야 되겠어. 언니, 저 오늘도 조언 많이 해주세요. 하나라도 더 배우고 싶어요.”
“후후······ 알았어. 의욕 있는 거 보기 좋아.”
“히히. 노력만큼은 지지 않을래요. 이찬 선배만큼 빨리는 못하겠지만, 저도 언젠가는 신인상도 타고, 연기대상 후보로도 올라갈 거예요.”
명진아보다도 나이 들어 보이지만 아직 꿈 많은 소녀인 유지아가 그렇게 다짐하고 있을 무렵.
남태형은 뜻밖의 전화를 수신하고 있었다.
[남태 형. 오랜만이야. 나 기억해?]
“어······ 혹시 요셉이니?”
[아, 기억하고 있었네? 다행이다.]
“기억이 아니라, 방송에서 자주 들었으니까 알지.”
[그런 거야? 하긴, 나도 그런 것 같다. 나도 형 단역으로 나올 때는 못 알아봤어. <미스 스캔들> 때 진짜 엄청 놀랐다니까? 아이돌 못하겠다고 작별인사 건네던 게 엊그제 같은데, 그새 그렇게 대단한 연기자가 돼버렸을 줄은.]
기억 속의 목소리가 추억을 불러일으켰다.
가요계 최고 기획사의 러브콜을 받은 덕분에 마주했던 소년들은, 하나같이 실력파였다. 얼굴도 잘생긴 녀석들이 랩이면 랩 춤이면 춤 못하는 게 없었다.
그러니, 자괴감이 생기지 않을 수 없는 노릇이었다.
그날 남태형은 아이돌은 해낼 수 없을 것 같다고 확신했다. 그랬기에 미안하다는 말을 남기고 그들을 떠났다.
그 뒤로 오랜 방황 속에서 연기판을 맴돌았다.
그리고 이제는, 한국 최고의 아이돌이 된 심요셉과 통화하면서도, 어떤 자괴감도 느끼지 않게 되었다.
그 사실이 못내 기뻐 절로 웃음이 나왔다.
심요셉 역시 뭐가 그리 좋은지 자꾸 낄낄 웃어댔고.
< 40장 - 리더 심요셉 (1) > 끝
ⓒ 비벗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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