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훔치는 연기자-113화 (113/250)

< 41장 - 여신 신수영 (1) >

1990년대 초반. 강남경찰서에 한 명의 경찰이 임용된다.

이름은 홍광억. 88년 올림픽 태권도 금메달리스트로서 전격 특채되어 강력반 형사가 된 남자였다.

그는 아주 훌륭한 인격자는 아니었다.

때로는 자기 편의에 따라 절차에 맞지 않는 방식으로 일을 처리하기도 하고, 용의자가 하는 말은 일단 거짓말로 간주해 주먹부터 휘두르는 편협한 성격이었다.

그렇지만 바로 그렇기 때문에 그의 공로는 혁혁했다.

나쁜 놈들 쥐어박는 것만이 삶의 낙이 된 국가대표는, 목표한 타겟을 놓치는 법이 없었고, 비번일 때조차 용의자들을 찾아 서성거리며 관할 밖에서도 활약하곤 했다.

특히 폭력배 집단과의 난투전은 그의 특기. 한 주먹 한다는 조폭들도 강남서 홍광억이라고 하면 일단 피하고 봤다.

그렇지만 시대가 바뀌어 뉴 밀레니엄에 당도하자, 경찰 내부에서 그의 평판은 드라마틱하게 변화했다.

두드려 패서 범행을 자백하게 만드는 건 분명 인권유린.

그 구시대적 관습에서 빠져나오지 못한 중년 형사는 백안시되기 시작했고, 멋대로 일을 처리하지 못하게 되자 홍광억 역시 나태해지기 시작했다.

그렇게 몇 년이 지났을 무렵.

30대 후반에도 청년들 못지않은 왕성한 활력을 자랑하던 형사는 전혀 다른 모습으로 변모했다.

담배에 찌든 폐는 예전처럼 맹렬하게 달려주지 않았으며, 명철하던 정신 역시 알코올 기운 속에 몽롱해져 추리도 시원찮게 됐다.

“와! 이렇게 되면 임호준 선배 살 빼시겠네? 젊은 시절 찍으려면, 운동 많이 하셔야 되겠는데?”

각본을 읽던 신수영의 질문에, 이찬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죠. 초반 시퀀스 촬영한 다음에 살 빼면서 운동 들어가시고, 회상 씬들은 여름 지난 뒤에 촬영할 예정이에요. 그나저나 그거 언제까지 읽으실 거예요? 드라마에 집중하시죠?”

“아, 잠깐만. 한창 재밌는데, 조금만 더 보고.”

그러던 어느 날이었다.

여느 때처럼 관할 순찰이란 명분으로 강남서를 나서 술집에서 시간을 축내고 있던 홍광억은, 우연히 대규모 폭력사건을 목격하게 된다.

무려 30여 명이 서로 어우러진 싸움. 예전처럼 날렵하지 않은 중년 형사는 지원만 요청한 채로 지켜볼 따름이었다.

그리고 그 싸움의 끝에 10여 명이 살해된다. 그 뒤에 한 남자의 명령에 의해 봉고차에 차곡차곡 시체가 실렸다.

그중 한 명- 아직 성인도 못 된 것 같은 어린 남자가, 가쁜 숨을 몰아쉬며 살려달라고 빈다. 그렇지만 무스탕 점퍼를 입은 남자는 웃으며 그 목에 송곳을 찔러 넣었다.

형사는 그 남자가 자신의 마지막 사냥감임을 직감한다.

50대 강력팀장 밑에서 어정쩡한 2인자로 머물던 홍광억.

이제는 몸도 마음도 예전 같지 않지만, 대규모 조폭 소탕에 그보다 더 능숙한 사람은 없다. 자연히 전권이 주어졌다.

그로써 중년의 형사가 마지막 사냥을 준비하게 된 것이다.

타겟의 이름은 임상진- 일명 망치.

강남 일대를 지배한 망치파의 보스인 그를 오랫동안 추격한 끝에, 마침내 형사들이 그 수뇌부를 포위하기에 이른다.

그렇지만 90년대와 달리 2000년대 중반의 형사들은 노화되고 둔해져 있었다. 경찰까지 살인멸구하려는 폭력배들에 의해 오히려 위기에 처한다.

그런 와중에 임상진이 웃으며 그곳을 빠져나간다.

홍광억은 오래 고민하지 않았다.

등 뒤에서 동료 형사들이 힘겹게 싸우고 있지만, 그런 건 알 바 아니었다. 그에게는 오직 사냥감만이 보일 뿐이었다.

그렇게 시작된 두 사람의 추격전.

1:1 추격에서 범죄자를 놓쳐본 적이 없는 홍광억이지만, 늙고 찌들어버린 몸은 마음처럼 움직여주지 않는다.

그럼에도 집요하게 달리고 또 달리는 형사. 침을 질질 흘리면서도, 간신히 임상진의 모습을 눈에 담을 수 있었다.

“허허. 참 끈질기시네. 그런데 어쩌나? 이렇게 다리가 후들거리는 몸으로 나한테 수갑이나 채울 수 있겠어? 봐봐. 자. 내가 로우킥을 넣을 건데, 한번 피해봐. 자!”

“누나가 지금 남의 대사 따라할 때예요? 연습 안 해요?”

“아 좀. 그러지 말고 좀 받아쳐봐.”

“······끄악! 으······ 이 개새끼가!”

“흐허허! 그래, 그래야지. 그렇게 무릎을 꿇어야지. 어이, 늙다리 형사양반. 다음 생에 태어나면 운동을 열심히 하라고. 체력 관리도 못 하는 양반이 무슨 전설의 형사라고······. 그럼 난 이만 가요. 건강하고, 다신 보지 말게.”

그렇게 임상진을 놓친 홍광억은, 그날 밤 망치파의 행동대장 주경호의 차에 치인다.

무감정한 얼굴로 형사의 숨통을 끊으려 드는 주경호.

그러나 임상진은 확인사살을 허락지 않았다.

“이빨 다 빠진 호랑이를 죽이면 뭐하겠냐. 적당히 상했으면 앰뷸런스 불러줘라. 살아서 돌아가야 비웃음만 사게 되는 거야. 정말 죽여버리면, 그때는 짭새 놈들 전체가 우리 잡겠다고 달려들 거다.”

그렇게 홍광억과 형사들은 목숨을 부지하게 된다.

하지만 단순히 부상으로 그친 것은 아니었다.

홍광억의 부사수였던 오 형사는 다리가 박살나 평생 현장에 복귀할 수 없게 되었고, 교통사고로 머리를 심하게 다친 홍광억은, 종내 식물인간 진단을 받게 된다.

그리고 바로 그 시점에 공을 맞아 정신을 잃었던 백이한이 눈을 뜬다.

성격은 유순하지만, 아버지의 강권으로 복싱을 오래 한 덕분에 몸 하나는 끝내주는 고2 청소년이.

“와아······! 이게 초반 3분 시퀀스라는 거지? 이거 좋다, 야. 벌써부터 기대가 확 돼. 몸 관리를 못해서 범인을 코앞에서 놓친 늙은 형사가, 파릇파릇한 청소년 몸으로 들어와서, 이제부터 제대로 액션활극을 벌이는 거잖아?”

“누나한테 액션활극 시험해보기 전에 그거 내려놔요. 우리 촬영에 집중하자고요.”

“아이 참. 그런데 이거 정말이야? 요즘 젊은 형사가 많이 없어?”

“대체로 그렇대요. 업무는 많고 보수는 적고, 목숨 걸고 굵직한 사건 해결하지 않는 이상 승진도 어렵고. 그러다보니까 정말 사명감을 가진 경찰들이 아니면 형사 발령은 일단 피하고 본대요. 20대 형사는 찾기가 힘들 지경이라네요.”

“그래서 예전부터 활약했던 형사들만 주로 남아 있는 거구나. 안타까워서 어떡해. 청년들도 하기 힘든 일인데.”

안타까운 마음인 건 이찬도 마찬가지였다.

기동력 있고 열정 넘치는 형사들이 좀 더 많았다면, 40대의 윤대흥이 일선에서 범죄자의 칼을 맞는 일은 없었을 테니까.

그렇지만 동시에 드라마 여주인공인 신수영의 딴짓 역시 안타까웠다.

“클라이막스에서 반전도 나오는데, 스포일러 당하기 싫으면 <연애의 조건> 대본 들어요. 5씬부터 해봅시다.”

“히히. 마이 찬, <고등형사> 기대할게. 멋있는 모습 보여줘야 해?”

“그거야 당연한 거고요.”

담담하게 대답하며, 이찬은 생각했다.

‘형사 배역은······ 언젠가 내가 반드시 완성해야 할 역할이야. 하지만 적어도 30대는 돼야 시도할 수 있겠지. 우선은 정신이 바뀌어 형사가 된 고등학생으로 시작해보는 거야. 그 전에 상영될 이 <연애의 조건>에서 진짜 고등학생 역할을 선보이면, 그 갭이 더 선명한 캐릭터를 만들어줄 수 있어. 박무열 아저씨 덕분에 좋은 기회가 생긴 셈이야.’

긍정적인 생각으로 머릿속을 채운 뒤에, 그는 ‘성지현’을 처음 만난 ‘김서준’을 연기하기 시작했다.

*

“저기, 혹시요. 등 괜찮으세요?”

김서준이 된 이찬의 대사.

파라솔 아래에서 바다를 바라보던 성지현이, 그 말에 천천히 고개를 돌렸다.

“네······? 등이요?”

“네. 등 많이 아프실 것 같은데.”

“제 등이 왜요?”

“인간이 되려고 날개 떼신 거 아니에요? 원래 천사였던 것 같은데?”

능글맞게 웃으며 내뱉는 작업멘트는 끔찍했다.

그러나 그 찬사의 대상이 신수영인 까닭에, 두 사람이 연기한 두 주인공의 첫 만남은 지극히 사실적이었다.

시트콤 <청춘 클래식>에서 학교의 공식 퀸카 역할로 스타덤에 오른 이후, <미스 스캔들>의 톱스타 ‘심유리’, <칠월칠석>의 엉뚱 미녀 ‘진지수’까지.

남자들의 동경을 받는 역할에 항상 1순위로 캐스팅된 데에는 그럴 만한 이유가 있었다.

그 어떤 남자도 거부할 수 없는 마성의 매력이, 얼굴과 몸매 전반에 담겨 있는 까닭.

그렇기에 신수영은 대한민국 여배우 외모 투표 순위에서 언제나 최상위권을 유지했다.

한국적인 미인상인 김은희와 이소연에게 종종 밀리긴 했지만, 서구형 미녀로서는 그녀를 따라잡을 배우가 없었던 것.

그렇기에 ‘충무로의 여신’이라는 칭호가 결코 어색하지 않았다.

그런 신수영을 드라마에 캐스팅하며, 주동한 PD와 남애리 작가는 몇 차례나 회의를 벌였다.

어딜 어떻게 봐도 연예인이 아니면 안 될 것 같은 인물을 고등학교 여교사로 내세우면, 작중의 핍진성이 무너져버리는 까닭.

드라마니까 그럴 수도 있지 하며 넘어가주기에는 지나치게 강렬한 이미지였던 것이다.

그렇기에 미스코리아 출신에 모델로도 활동했었다는 설정이 추가되었다. 자연히 첫 등장 씬도 각종 필터로 보정될 예정.

물론, 보정되기 전의 실사만으로도 감정을 이입하기엔 충분했다.

성지현이 된 신수영은 정말 천사 같은 모습으로 코웃음을 쳤다.

“죄송한데, 저 남친 있거든요?”

“아, 그래요? 남친도 천사?”

“그만하시죠? 작업은 저기 어린 친구들한테 거세요.”

“본인이 저 친구들보다 매력이 없다고 생각하세요?”

“나 나이 많아요. 서른이에요. 그러니까 저리 가요.”

“거짓말. 그러지 말고 같이 놀아요. 혼자 심심하잖아요?”

“혼자 아니거든요? 제 친구가 저기······ 봐요. 제 남친이랑 둘이 같이 놀고 있잖아요.”

그러면서 가리켜 보인 방향에는, 김서준의 친구 역할인 ‘이주형’ 심요셉이 귀염상의 여자를 꼬시고 있다.

“흠······ 남친 분이 키가 크시네요. 저랑 비슷하겠는데.”

“그쵸? 완전 잘생겼고요.”

“어깨도 떡 벌어진 게, 수영을 하셨던 분 같아요.”

“어, 그럼요. 거기다 유도 선수거든요? 걸려서 혼쭐나기 전에 얼른 도망치시죠?”

“거기다 참 낯이 익은데. 제 친구랑 많이 닮았네요.”

“······그, 그래요?”

“네. 아무튼 반가웠어요, 천사 씨. 이따 친구 분 통해서 연락드릴게요.”

장난삼아 미녀를 꼬시는 이찬의 연기는 자연스러웠다. 소싯적에 여자 좀 만나봤다는 김성대의 무용담을 훔친 것이기에.

여운을 남기는 눈빛을 잠시간 유지한 뒤에, 소년은 멋들어진 태도로 등을 돌렸다.

그 뒤에 이어진 신수영의 표정연기 역시 물 흐르는 듯했다.

입술을 삐죽거리면서도 이찬의 등을 연신 힐끔거리는 모습이, 적극적인 관심에 호기심이 동한 20대 중반 여성을 정확하게 묘사하고 있었다.

“컷! 오케이! 방금 아주 좋았어. 클로즈업까지 잘 나왔으니까······ 수영이는 이리 와서 모니터 한번 확인하고, 찬이는 바로 요셉이한테 가봐. 다음 씬 좀 맞춰보고.”

신수영이 천막 아래의 모니터로 다가온 뒤, 주동한은 미소를 머금은 채 고개를 내저었다.

“정말이지, 쪼가 없어.”

“그렇죠? 마이 찬 정말 잘하죠?”

“찬이야 두말하면 잔소리고, 너 말이야. 수영이 너 정말 많이 늘었어. 시트콤 하고 나서 드라마 들어갔을 때는, 영 보기가 어색했는데.”

“엑. 그 정도였어요? 나름 열심히 했던 건데.”

“부지불식간에 경험이 쌓인 거겠지. 지금 연기 보면, 어딜 어떻게 봐도 과거의 영예를 그리워하는 교사야. 그러니까 선생으로서 아이들을 향한 사명감을 구체화하는 과정이 더 드라마틱하겠지. 네가 멈추지 않고 정진하는 배우라서 참 다행이다. 스타마케팅에 더해서 작품성까지 뽑아낼 수 있을 것 같아.”

찬사 가득한 감독의 말을 들으며, 신수영은 어색하게 웃었다. 그게 전부 자신의 공은 아닐 것이기에.

‘내가 그렇게 많이 늘었다고 한다면, 전부 다 찬이 덕분일 거야. <미스 스캔들> 때 합숙하면서 정말 많이 시달렸으니까. 나한테는 상식이고 일상인 말투 하나하나까지 교정하면서, 캐릭터 해석 면에서 많은 것들을 생각하게 만들었어. 각본에 구체화된 내면은 보이지 않는 것. 그렇지만 그 모든 경험과 마음들은 행동과 표정에 고스란히 드러나는 것. 그때 내가 저 아이의 제안을 받아들이지 않았다면······ 시트콤 캐릭터에 갇힌 채로 별 볼일 없는 연기자가 됐을지도 몰라.’

*

“야, 잘하고 왔어? 나 어땠어? 그림 잘 뽑혔어?”

OK 떨어진 뒤에도 물가에 머물러 있던 심요셉은, 이찬이 다가서자마자 그렇게 물었다.

긍정적인 대답을 해줄 필요는 없는 사안이었다.

“왜 자연스럽게 못해요? 바다에서 여자 꼬셔본 적 없어요?”

“어······ 나름 연구했는데······ 자연스럽지 않았어?”

“찬아, 왜 그래? 완전 멋있었는데? 요셉 오빠, 평소에도 운동 많이 하시나 봐요. 짱 멋져요.”

성지현의 친구 ‘조수희’ 역의 임아영이 역성을 든다. 낯가림 때문에 제스쳐가 어색했던 심요셉이 거기에 힘을 얻었다.

“아, 헤헤. 고마워요. 찬아. 들었냐?”

“운동 더 해요. 수영부면 어깨가 더 벌어져야 된다고요.”

“어, 음. 그러면 연결이 좀 이상해지지 않을까? 작중에서 이미지가 바뀌면······.”

“고등학생이니까 성장기인 걸로 해명이 된다고요. 나야 일찍 다 커버렸지만, 보통 골격은 스무 살 전까지 자라니까.”

“아 그래······.”

풀이 죽어 어깨를 좁히는 아이돌의 몸은 이미 충분히 좋다.

그렇지만 몸 좋은 다른 수영부원들과 붙는 씬에서 집중도를 높이려면, 너비를 좀 더 키울 필요가 있어 보였다.

“근데, 수영 씨는 정말 장난 아니시다. 진짜 천사 같아.”

“그래요? 혹시 반했어요?”

“하하. 그런 게 아니라, 배우는 과연 다르구나 싶달까. 아이돌 중에도 예쁜 친구들 많지만, 저렇게 아름답진 않아서.”

“그럼, 저도 아름다워요? 요셉 오빠, 저는 어때요?”

“어, 그게······ 물론, 아름다우시죠······.”

임아영에게 시달리는 꼴을 보니 살짝 염려가 되기도 했지만, 이찬은 그쯤에서 잔소리를 거뒀다.

슬슬 다음 씬을 촬영할 시간이었다.

< 41장 - 여신 신수영 (1) > 끝

ⓒ 비벗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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