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42장 - 배우 남태형 (1) >
2004년 5월 5일 개봉한 <이발사>의 흥행은, 당초에 기대했던 것보다는 부진했다.
임호준이라는 스타 캐스팅이 주목을 끌었지만 그뿐. 작가주의적으로 담담하게 격변기를 그려낸 스토리에는 큰 임팩트가 없었고, 그게 낮은 화제성으로 이어졌다.
다만 제작비가 적었던 만큼 손익분기점은 2주 만에 돌파했다. 임호준과 하늘기획은 소소하지만 러닝개런티까지 챙길 수 있게 되었다.
하늘기획 소속 배우가 촬영한 첫 번째 작품의 성적은 그렇게 어중간했다. 그러나 규모에 비해 이름난 배우가 많은 기획사인 만큼, 이후로도 크랭크업 일정이 줄줄이 잡혀 있었다.
9월에는 소해진이 비중 있는 조연을 차지한 조폭영화가, 8월에는 구진철이 첫 주연을 맡은 코믹 판타지가, 7월말에는 최정하가 주연으로 출연한 밀리터리 스릴러가, 7월초에는 임희재가 주연을 맡은 로맨틱코미디가 완성될 예정.
거기에 더해 명진아와 남태형의 <꼬마신부> 역시 크랭크업을 목전에 뒀다.
총 3개월 70회차의 촬영의 끝물이었다.
장편 상업영화 치고 아주 긴 기간은 아니지만, 로맨틱코미디로서는 충분하고도 넘치는 분량.
그렇기에 7월말 개봉을 목표로 홍보에 박차를 가하는 중이었다.
사실 그건 꽤 이례적인 일이었다.
일반적으로 7,8월은 여름방학과 휴가철을 겨냥한 극장가의 가장 큰 대목 중 하나.
그때에는 제작비가 100억에 육박하고 촬영기간이 반년 이상인 블록버스터들이나 출격하는 것이 일반적이었다.
그리고 그것조차 상황이 희망적인 경우의 얘기.
헐리우드 블록버스터들이 줄줄이 배급되는 상황이라면, 대작들도 추석을 기약하며 개봉을 미루는 게 일반적이었다.
그게 <꼬마신부>의 제작자와 투자자 사이에서 오랫동안 줄다리기 회의가 벌어졌던 까닭이었다.
6월 30일 <스파이더맨 2>, 7월 16일 <해리포터 3>, 8월 20일 <본 슈프리머시>, 9월 3일 <에일리언 vs 프레데터>.
그렇게 화제작의 속편들이 줄줄이 개봉을 앞둔 가운데, 7월 23일 <킹 아더>, 7월 29일 <아이, 로봇>, 7월 30일 <반 헬싱> 등 한국에선 상상할 수도 없는 제작비가 들어간 기대작도 여럿이었다.
이미 연초에 두 편의 천만영화가 탄생하며 블록버스터에 대한 기대감이 커진 상황. 이중 적어도 둘 정도는 오백만 이상의 흥행을 거두리라는 것이 전문가들의 분석이었다.
그러니, 순제작비 15억의 얌전한 영화로 그 해 여름을 노린다는 건 상식 밖의 선택이었다.
여주인공의 이름이 명진아가 아니었다면.
“미스 명 네임밸류는 지금 최상 중에서도 최상이지. 기존의 귀여운 여동생 이미지에 더해서, 시청률 40%짜리 <어사>를 통해 액션과 멜로 연기도 소화 가능하다는 걸 입증했으니까. 그 드라마에서 상대역이었던 이찬이 천만배우가 된 상황에선 명진아의 차기작에도 관심이 쏠릴 수밖에 없어. 오프닝 성적이 잘 나오지 못할 수가 없다는 거야. 그걸 토대로 설득을 한 덕분에 대목 개봉으로 가닥을 잡을 수 있었어.”
“아······ 그러셨군요.”
듣는 남태형의 표정이 썩 밝지 않았지만, 작품의 전망에 몰두한 김세진 감독은 그걸 알아채지 못했다.
“하지만 그것만으론 워런티가 안 되지. 8월 개봉할 <파이터>처럼 100억 때려박아 볼거리가 확실한 영화도 아니고, 작년 <배씨> 흥행을 이어가려는 스릴러들처럼 타겟층이 명확한 것도 아니라서. 영화 관람 뒤에 관객들의 입소문이 중요해. 우리가 보여줄 수 있는 건 흐뭇하고 감동적인 이야기 딱 하나니까. 거기서 익스펙테이션이 충족되지 않으면 외화들에 팍 밀려버릴 거야.”
“네. 열심히 하겠습니다.”
“그래. 오늘 촬영이 정말 중요해. 급하게 수정한 분량이지만, 이게 키 이벤트가 될 테니까. 관객들의 마음을 사로잡는 연기를 보여줘야 해. 그걸 위해서 그 꼬마까지 불러낸 거야. 미스터 남, 주인공이 까메오한테 밀리면 안 돼. 알지?”
“네······ 물론이죠.”
감독은 그제야 자기 주연배우가 다른 생각에 빠져 있음을 깨달을 수 있었다.
“뭐야? 평소답지 않은데? 무슨 생각을 하는 거야?”
“아, 아닙니다.”
“왜 이래, 우리 사이에? 편하게 털어놔. 뭐가 문제야?”
“아무 문제 없습니다. 집중하겠습니다.”
“그래? 정말 그래야 해. 아주 중요한 시퀀스거든.”
그렇게 당부한 김세진이 촬영장 통솔을 위해 이동한 뒤, 남태형은 한숨을 쉬며 머리를 헝클었다.
바로 그 무렵에 까메오 이찬이 등장했다.
“안녕하세요, 하늘기획 이찬입니다. 안녕하세요. 안녕하세요. 예, 분장은 좀 이따 받을게요. 우선 인사부터 드리고요.”
늘 그랬듯, 소년은 나이답지 않게 능숙했다. 앞 다퉈 이런저런 인사를 건네는 스탭들 사이를 헤엄치듯이 스쳐서, 순식간에 남태형에게로 다가왔다.
“선배, 저 왔어요.”
“어, 왔어? 고생했어. 많이 바쁠 텐데.”
“바빠도 별 수 있나요. 스왑딜인데.”
스왑딜이란 주로 스포츠 업계에서 쓰이는 용어로, 두 선수를 교환하는 이적 계약을 뜻한다.
그 비유적 표현이 이찬이 <꼬마신부>에 까메오로 불려오게 된 까닭이었다.
당초 소년이 바랐던 건 남태형의 <연애의 조건> 특별출연.
신수영의 스크린 데뷔작에서 함께 인상적인 연기를 선보였던 그를 투입함으로써, 드라마의 외적인 화제성을 제고하고, 초반부의 시청률 경쟁을 용이하게 하려는 목적이었다.
그렇지만 그와 관련해 김세진 감독에게 양해를 구했을 때 돌아온 건 조건부 승낙이었다.
“미안하다. 괜히 나 때문에 무리한 요청까지 듣고.”
“선배가 미안할 건 뭐예요? 곧 개봉할 영화의 감독이, 남 선배 일정 빼주는 대신 나도 이 영화 하루만 나와 달라고 사정을 한 건데, 그걸 개무시할 수야 있나요. 근데 일주일도 안 돼서 수정한 쪽대본이 좋은 효과가 있을지는 모르겠네요.”
“······내 생각엔 꽤 흥미로울 것 같긴 해.”
“그래요? 어떤 점에서요?”
“일단 배역이······ 너랑 진아가 서로의 첫사랑이었다, 이런 설정만으로도 관객들이 흥미진진하게 느낄 거야. 거기다가 나랑 대면해서 잘해달라고 부탁하는 씬에서는······ 네 연기력이라면, 1분 내내 훌쩍거리는 소리가 그치지 않을 것 같다.”
“정말요? 희한하네요.”
이찬이 맡은 배역은, 명진아가 맡은 ‘이윤애’ 역을 남몰래 좋아하고 있다가 이민 때문에 멀어졌던 남학생 ‘정민준’.
그런 정민준이 이윤애의 학교 축제에 초청되어 벌어지는 일들이 68회차 촬영의 주 내용이었다.
그게 흥미진진할 거라는 남태형의 예측은, 소년에게는 황당하게만 들렸다.
“삼각관계란 거, 너무 흔하지 않아요? 절 까메오로 데려와서 찍는 게 그런 어설픈 클리셰라는 게 이해가 안 돼요. 차라리 불량학생 역할을 맡겼다면 세상에서 제일 실감나게 찍어드렸을 텐데. 촬영장에 진짜 양아치를 데려오면 어쩌냐 하는 말까지 나오게요.”
“하하······ 네 얼굴 모르는 사람이면, 그럴 수도 있겠네.”
“혹시 편집이 잘못돼서 남자주인공에 대한 관객들의 공감대가 흐트러지면 어떡해요? 여주인공이 차라리 까메오랑 연결됐으면 좋았겠다는 식으로 얘기 나오면, 흥행에 악재가 될 텐데.”
“어······ 그렇게 안 되게 나도 열심히 해야지.”
“열심히 준비하신 거야 알죠. 제가 체크했으니까. 그렇지만 영화라는 게 참······ 흠. 감독님은 어디 계세요?”
“어, 현장 세팅하고 계셨는데. 한 대 피우러 가신 걸까?”
“유학파라고 하더니, 매너는 있으시네요. 감독은 촬영장 안에서 줄담배 피워도 무방한 게 한국 영화판인데.”
농담처럼 말하고 남태형의 옆자리에 앉은 소년은, 이내 목소리를 낮춰 본론으로 돌입했다.
“고민이 뭐예요?”
“어, 고민······?”
“빼지 마시고요. 지금 대화에 전혀 집중을 못하시는 눈친데. 그러다 연기 망쳐서 연장 들어가게 만드시면 곤란해요. 오늘 하루 시간 내는 것도 엄청 힘들었는데.”
“아······ 그러면 안 되지. 집중할게.”
“그냥 터놓고 말씀하세요. 그게 제일 빠를 거예요.”
남태형은 그의 말에 동의했다. 혼자 끙끙대고 앓느라 머릿속을 좀먹고 있는 일일 뿐, 한 사람에게라도 털어놓을 수 있다면 마음이 훨씬 편해질 터였다.
그렇지만 이찬에게만은 결코 말할 수 없는 고민이었다.
“미안. 이건 말하면 안 될 것 같다. 중요한 문제라······.”
“말하면 안 될 것 같다라. 일단 그렇게까지 감추시는 걸 보면 영화와 무관한 사적인 일이겠고. 그렇다고 선배 본인 문제로 고민하는 것 같은 느낌은 아닌데. 아마 다른 사람 사적인 비밀이랑 얽혀 있는 모양이네요. 그게 누굴까?”
단 한순간에 정답에 근접한 추리를 해내는 소년을 보며, 남태형은 경악하며 표정을 감추려 애썼다.
그렇지만 무용지물이었다. 이찬의 관찰력은 남태형이 채 숨기지 못한 미세표현으로부터 무수한 정보를 제공받고 있었다.
“아마 나도 같이 아는 사람이겠죠? 그럼 진아 누나? 음, 이쪽은 아니네. 그럼 요셉 선배? 오, 이쪽은 반쯤 맞춘 느낌인데요. 거기에 한 명 더······ 어? 혹시 신수영 누나? 맞죠? 이거 뭐야? 설마 삼각관계? 와, 맙소사. 상상도 못했는데.”
남태형은 결국 긴 한숨을 토해냈다.
“후······ 넌 대체······ 뭐가 그렇게 쉬운 거야.”
“선배는 얼굴에 다 티가 나요.”
“그게 티가 난다고 알 수 있는 거냐?”
“눈치 100단한테는 가능해요. 어쩌다 그렇게 된 거예요? 요셉 선배가 수영 누나한테 호감 있는 건 알았는데, 거기에 왜 남 선배까지 꼬이게 된 거죠?”
“······그저께 요셉이가 찾아왔어. 수영이한테 호감이 생겼다고, 날더러 도와달라고 하더라. 그때는 다른 데 마음 쓸 시간 없다고 돌려보냈는데······ 어제는 수영이가 날 찾아왔어.”
“오. 설마.”
“그래. 걔가, 내가 좋다고 하더라.”
“되게 뜬금없네요?”
“······그러게. 뜬금없지.”
신수영 입장에서는 그리 뜬금없는 일이 아니었다.
서구적인 미모와 오만불손한 배역들로 인해 부정적인 이미지가 생길까 걱정해온 톱스타. 그녀가 강정후의 인터뷰로 인해 전전긍긍할 때, 희대의 꽃미남이 진심을 담아 위로해줬다.
없던 마음도 생길 법한 상황이었던 것이다.
하지만 그런 문제는 소년에겐 관심 밖이었다.
그보다는, 회사의 간판이라 할 수 있는 미녀와 최고의 주가를 올릴지도 모르는 미남의 미래가 관심사.
그렇기에 은근히 두 사람의 열애를 훼방하고자 나섰다.
“흠. 그래서 고민이시구나? 그럴 만도 하네요. 남태 형 남태 형 하면서 따르는 동생이니까. 요셉 선배한테 미안하겠네요.”
“응? 아, 아니. 수영이한테 미안한 건데?”
“······예? 거절할 생각이에요?”
“그래야지. 연애는 아직 생각 없어서.”
“진짜요? 신수영인데?”
“어, 뭐, 누가 됐든. 연기 하나 제대로 못하는 입장에서 무슨 연애인가 싶고······ 그래서. 그런데 혹시라도 그 거절이, 나랑 친한 요셉이 이미지까지 나빠지게 할까봐 걱정이야.”
“아하. 깔끔하게 관계를 정리할 방법이 고민이시구나?”
소년은 이제 알겠다는 듯 씩 웃었다.
그렇다면 일은 훨씬 간단해진다. 굳이 심요셉을 엮을 것도 없이 두 사람의 관계에 선을 그을 수 있을 테니.
“그런 건 제가 전문이죠. 걱정 말고 조금만 기다려요. 확실하게 떼어낼 방법을 마련해드릴 테니까.”
“어, 정말? 그런 방법이 있어?”
“딱 생각나는 게 하나 있어요. 몇 가지 확인한 다음에 알려드릴게요. 그러니까 딴 생각 그만하고 연기에 집중해요.”
“아······ 다행이다. 그래, 너만 믿고 있을게.”
남태형이 마침내 안심하고, 이찬은 유리창 밖을 바라봤다. 막 학교에 진입하는 밴 한 대가 눈에 들어왔다.
그 차량에서 여주인공 명진아가 모습을 드러냈다.
“진아 누나 왔······ 옆엔 누구지? 처음 보는 얼굴인데.”
“아, 쟤가 유지아야. 소속사가 없이 어머니가 매니저 역할 하신다는데, 씬 겹치는 날은 진아가 데려오곤 하더라.”
“그래요? 하여튼 오지랖도 참.”
연하의 신인배우를 나서서 챙긴다는 명진아를 바라보다가, 이찬은 문득 상황이 기묘함을 느꼈다.
‘남태형 선배 고민은 깔끔하게 끊어줄 수 있는데······ 생각해보면 나도 비슷한 상황 아닌가? 진아 누나 마음을 밀어내야 되는 입장인데, 괜히 차일피일 미루고 있는 것 같아. 기껏해야 키스 씬으로 간접적인 실망감 주는 방법이나 생각하고 있고 말이야.’
상황이 조금 다르긴 했다.
소년이 명진아의 마음을 알아챈 건 오직 그 특유의 관찰력 덕분. 고백도 받지 않은 상황에서 호감을 잘라내는 건 쉬운 일이 아니다.
하지만 깊이 고민하면 방법이 아주 없진 않을 터.
해결책을 찾으려는 노력도 하지 않는 자신이, 마치 그 문제로부터 억지로 눈을 떼고 있는 것처럼 느껴졌다.
‘······이건 꽤 흥미로운데. 영화 작법의 논리로 분석해보면, 사실 나도 진아 누나를 좋아하고 있어서 머뭇거리고 있다는 암시가 될 거야. 하지만 그럴 리는 없는데. 좋은 사람이라고 생각할 뿐이지, 천세영 누나 볼 때처럼 묘한 감흥을 받은 적은 없단 말이야.’
남의 고민 하나를 제거해주고 새로운 고민을 떠안은 소년은, 남태형을 돌아보며 넌지시 물었다.
“저 이번 드라마에서 찍는 키스 씬이 아마 최연소 기록이 될 것 같다는데요. 진아 누나는 어때요? 키스 씬 있어요?”
“아, 아니. 그런 건 없지. 결혼을 한다곤 해도 작중에서 계속 미성년자라, 좋게 보이진 않을 테니까.”
“그래요? 하긴. 이쪽이야 고3 배역에 성인처럼 보인다는 설정이니까 가능했던 게 있죠. 여기서 한국영화 최연소 키스 씬이 나오진 않겠구나······.”
제대로 알아본 적 없는 기록에 대해 둘러대는 건 그저 연기. 마음은 전혀 다른 곳에 가 있었다.
‘대체 왜 안도감이 드는 건지 이해가 안 되네. 혹시 소유욕 같은 건가? 내 마음 줄 생각은 없으면서 계속 나만 바라보길 바라는 심리? 그런 거면 좀 별로인데. 그렇게 이기적이어서야 좋은 사람이라고 할 수가 없잖아.’
소년이 미간을 좁히고 있을 때, 마침내 감독 김세진이 교실로 돌아왔다. 한가득 미소를 머금은 채로.
“이찬 배우! 우리 이찬 배우, 이렇게 만나게 돼서 영광이야. 오는 길에 별일은 없었지? 오늘 시퀀스가 극중에서 정말 중요한 이벤트가 될 거야. 마침내 두 주인공이 서로에 대한 마음을 깨닫게 되는 계기인 거지. 하루에 일곱 씬 몰아서 찍느라 서로 정신이 없을 건데, 잘해줘. 당연히 잘하겠지만, 이렇게 부탁할게. 최고의 연기를 보여줘.”
이찬은 가볍게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머릿속은 명진아에 대한 고민으로 복잡했지만, 그런 고민 때문에 연기를 망칠 일은 없는 것이 소년의 재능이었다.
< 42장 - 배우 남태형 (1) > 끝
ⓒ 비벗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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