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훔치는 연기자-119화 (119/250)

< 43장 - 배우 홍주석 (1) >

<고등형사>는 분류하기 까다로운 작품이었다.

본질적으로는 형사가 폭력조직을 소탕한다는 흔한 형사물의 방향성을 띠고 있으나, 그 형사가 학생의 몸으로 들어가는 것은 소위 착각계 코미디물의 양상이며, 바뀐 몸으로 경험한 일들로 성숙해지는 과정은 휴머니즘 성장물의 전형.

그런 까닭에, 홍주석은 시놉시스를 본 직후부터 작품의 완성도를 염려했다.

“재밌게 보긴 했는데, 이거 이래서 되겠냐? 세 마리 토끼를 잡으려다 몽땅 놓치는 꼴이 되지 않을까 싶다.”

[응? 아, 전혀 아니야. 궁금하면 오디션 보라니까? 일단 와보면 알게 돼. 이 영화가 왜 망할 수가 없는 영화인지.]

그렇게 호기심을 자극한 친구 임호준에 의해 오디션을 본 이후로 반년이 지난 지금.

홍주석은 이제 그 단언의 이유를 확실히 알고 있었다.

‘이찬······ 저 괴물이 모든 난관을 무너뜨리고 있다. 액션은 액션대로 무술감독마저 찬탄하게 만들고, 주제의식을 드러낼 때는 서른은 한참 넘은 일류 배우처럼 무겁게 감정을 표현해내. 거기에 호준이를 고스란히 빼다 박은 연기는 감탄스럽다 못해 오히려 자연스러워서, 씬이 다 끝난 뒤에야 놀라게 만들 지경이야.’

오직 이찬만을 생각하고 쓴 각본이라는 오덕환 감독의 말이 이해됐다.

20대 초반까지 범주를 넓혀 생각하더라도, ‘백이한’이라는 캐릭터를 그만큼 완벽하게 구현할 배우는 단 한 명도 없을 테니.

‘저 꼬마가 데려왔다는 신인들도 오버스럽지 않게 잘해주고 있고, 오디션으로 뽑은 조연들도 신기하게 실력 좋은 녀석들이 많고. 재료가 아주 풍성해. 물론 그렇다고 해도 연출자가 잘 버무리지 못하면 어설퍼지기 마련인데, 이쪽은 이쪽대로 믿음직한 인물이란 말이지.’

기존의 히트작이 가족영화뿐인 감독이지만, 400만과 500만을 울린 이야기꾼의 재능은 장르가 바뀌었다고 해서 무뎌지지 않았다.

영상에 대한 세련된 감각이 스토리보드만으로도 완성된 영화를 기대하게 만들었을 정도.

액션 씬에서만 무술감독과 베테랑 촬영감독의 도움을 받을 뿐, 그는 철저하게 준비한 플랜 속에서 새로운 장르를 개척하고 있었다.

‘일반적으로는 외부 입김으로 인해 작품이 흐트러질 가능성도 생각해봐야 하겠지만, 이건 하늘기획과 덕 필름이 반씩 부담한 작품이란 말이지. 여러모로 최적의 조건이다. 호준이가 굳이 형사 역을 까메오로 맡은 이유가 이해가 돼.’

초반 시퀀스에서 아홉 씬, 클라이막스 이후에 네 씬 출연하게 될 까메오, 임호준.

그렇지만 그는 작품 전반에 걸쳐서 살아 움직일 예정이다. 그의 아들이라도 되는 것마냥 완벽하게 형사 ‘홍광억’을 훔쳐낸 이찬 덕분에.

관객들 중 누군가는 정말 이찬이 임호준의 영혼에 빙의된 게 아닌가 의심할 것 같다고, 홍주석은 생각했다.

‘덕분에 까메오임에도 강렬한 존재감을 뽐낼 수 있겠지. 부러운 일이야. 그에 비해 내가 맡은 역할은······ 일종의 절대악인데. 초반부에는 무시무시한 흑막으로 기능하지만, 결국 영화의 교훈을 위해서 망가지고 무너지는 캐릭터. 딱 욕먹기 좋은 배역이구만. 주인공이 저렇게 연기를 해버리는 상황에서야······.’

속으로 혀를 차며 바라본 곳에는, 형사의 정신을 가진 ‘백이한’이 피투성이가 된 학생을 끌어안은 채 울부짖고 있다.

“이, 개자식아! 이 꼬맹이들이 뭘 안다고, 뭘 잘못했다고, 이 꼴을 만들어! 그러고도 어른이냐, 이 개새끼야!”

평이한 대사. 흔해빠진 대결구도.

그렇지만 소년의 몸으로 뿜어내는 형사의 목소리가 눈을 떼지 못하게 만든다.

핏발이 잔뜩 선 눈 때문에 피눈물이 아닌가 의심되는 체액이 볼 위로 흐르고, 씹어 뱉는 대사 한마디 한마디에서 분노가 뿜어져 보는 이를 압도했다.

결코 열여섯 소년이 보일 수 있는 기백이 아니었다.

‘처음 봤을 땐 과도한 몰입 때문에 정신적으로 문제가 생기지 않을까 걱정까지 됐지. 하지만 저놈은 그럴 일이 없어. 대체 어떻게 그럴 수 있는 건지는 모르겠지만······.’

막 바스트샷까지 촬영을 마친 이찬이 몸을 일으킨다.

감정의 여운을 보여주는 방증이라고는 마르지 않은 눈물과 붉어진 눈가뿐. 소년은 웃음까지 띠면서 학생 역의 조연을 일으켰다.

“후배님, 방금 좋았어요. 집중하니까 퀄리티가 달라지네요.”

“어, 다행이네. 프레임에 옆얼굴만 잡히니까 더 편했어.”

“그렇게 자신감이 쌓이면 더 복잡한 표현도 쉬워질 거예요.”

자기들끼리 하는 대화지만, 프레임에 걸리지 않는 상대역으로 마주 서 있던 홍주석에게는 잘 들렸다. 굳이 그에게까지 숨길 생각은 없는 것처럼 보였다.

박준호라는 이름의 신인배우가 흐릿하게 웃는 게 인상적이었다.

꼬마에게 배우고 있다는 자괴감보다는, 그를 통해서 조금씩 성장하고 있다는 사실에 기뻐하는 것으로 보였다.

‘리더십이라고 해야 할까. 자기 연기를 완벽하게 해내는 걸 넘어서 나이 많은 후배들까지도 손아귀에 쥐고 흔들고 있다. 열여섯이라곤 믿기지가 않아. 하지만 드러난 현실을 무시할 수도 없는 일이고. 나이만 먹었지 필모 하나 없는 내가 할 수 있는 건······ 그저 작중에서 밀리지 않도록 철저하게 배역을 체화하는 일 정도일까.’

임호준과 홍주석은 비슷한 점이 많은 연기자였다.

외모야 소시민과 강력범 같은 상반된 이미지지만, 어려서부터 극단에서 부대끼며 서로 영향을 주고받았던 것.

특히 배역이 배우를 입었다고 평가될 정도로 자신을 각인시키는 연기는 홍주석이 친구보다도 낫다고 평가되던 부분이다. 그런 장기 분야에서 꼬마에게 밀리고 싶지는 않았다.

그 열의가 다음 쇼트를 움직이기 시작했다.

“아, 귀청 떨어지겠네. 꼬마야. 아저씨 말 잘 들어라. 세상이라는 건 말이다, 결국 약육강식이야. 사회에 나가봐라. 머리라는 걸 무기로 삼은 비루먹은 개새끼들이 남들을 짓밟고 돈을 긁어모아요. 거기서 밀리면 그냥 나락으로 떨어지는 거야. 한강 다리에서 자살하는 인간들이 왜 그렇게 많을까? 세상이 그렇게 프로그램이 돼 있는 거야. 위에 올라서지 못한 놈들은 살 가치가 없다고 생각하게 만드는 거지.”

입지전적인 조폭 보스의 개똥철학. 그 마음은 울분과 비뚤어진 야욕으로 물들어 있다.

작중에서 직접적으로 조명되진 않지만, 그는 한때 조직에서 손을 떼고 정상적인 삶을 살려고 노력했었다. 그러나 작전주에 발을 들인 탓에 모든 걸 잃고 살인자가 되고 만다.

그것이야말로 ‘임상진’을 움직이는 근본적인 기작.

“그런 세상이야. 머리 나쁜 놈들이 세상에서 성공하는 방법은 자기 주먹으로 일어서는 길뿐이다. 니 앞에 있는 쟤들이 진짜 무식해서 날 찾아온 것 같냐? 그게 아니야, 새끼야. 쟤들이야말로 진리를 일찌감치 깨닫고 강자 아래로 들어온 녀석들이야. 똑똑한 거지. 법보다 주먹이 가까운 법이고, 그 주먹을 건달로 키워내는 게 인간 본연의 지배욕이다. 그건 어른이건 꼬마건 다를 게 없어.”

그렇기에 어린 학생들을 이용해 살인을 자행한 행적을 들켜도, 반성은 생겨나지 않는다.

그렇기에 그는 절대악이 된 악바리.

친구를 찾으러 아지트로 돌입한 학생에게 떠벌리는 한마디 한마디에 그 인격이 묵직하게 실렸다.

“그러니까, 꼬마야. 어른 타령하지 말고 얌전히 집에 가라. 지금 가면 봐줄 테니까. 안 그러면 니 친구랑 똑같은 꼴 되는 거야. 뭔 말인지 알아먹겠냐?”

“······임상진. 너, 내가 말했지? 언젠가 꼭 잡아넣을 거라고.”

“뭐? 허허, 이 꼬마가 뭔 소릴 지껄이는 거야.”

“조무래기들은 비켜라. 특히 너네, 꼬맹이들. 다치기 싫으면 빠져 있어. 어른들 문제에 끼지 말고.”

“이 자식이 대가리에 물이 찼나······ 야, 꿇려라.”

그 대사를 끝으로, 양쪽에서 동시에 촬영된 2분짜리 바스트샷이 단번에 OK를 따냈다.

홍주석이 고향에서 쌓은 내공으로 만들어낸 쾌거.

소심한 오덕환 감독도 너털웃음을 터뜨리고 말았다.

“하하하! 아주 좋아. 홍 배우, 훌륭해. 두 사람 다 아주 잘해줬어. 다시 찍어볼까 하는 생각이 안 들어. 이래서야 내가 감독인지 스크립터(영상의 소품, 분장 등을 기록해 연결을 관할하는 연출부원)인지 모르겠는데.”

“그러게요. 감독님, 연출료 좀 깎아야 되겠어요.”

“뭐? 아니, 그러면 안 되는데. 하하하.”

쉽게도 배역에서 빠져나온 어린 투자자의 농담에, 촬영장에 웃음기가 돌기 시작했다.

그렇지만 이찬 본인의 마음은 꽤 무거워져 있었다.

‘홍주석······ 이 아저씨 진짜 물건인데? 이런 실력으로 대체 왜 고향에 가 있었던 거야? 잘된 일이긴 한데, 자칫하면 밀리겠어. 그래선 안 되지. 다음 씬은 내가 확실하게 먹어야 돼.’

이찬에게 <고등형사>란 오직 자신만이 돋보여야 할 원톱 영화. 단 하나의 시퀀스에서도 조연에게 잡아먹혀선 안 될 일이었다.

그렇기에 일대다수의 롱테이크 액션에 심혈을 기울였다.

‘충무로의 트로이카’ 조연식이 <오이디푸스>에서 선보인 액션 씬을 다분히 의식한 그 시퀀스는, 대역 없이 고난이도 액션을 수행할 수 있는 이찬의 존재에 기댄 기획이었다.

이미 <어사>와 <684>에서 인정받은 실력을 오덕환이 철저히 신뢰한 결과.

물론, 이쪽은 무슨 수를 쓴들 한 번에 OK를 받을 수 있는 씬이 아니었다.

“컷! 카메라, 임상진 포커스 놓쳤잖아. 그러면 안 돼.”

“죄송합니다! 제대로 하겠습니다!”

늘 그랬듯 이찬은 완벽했다.

그러나 그 씬에서 활약해야 하는 건 주인공 한 명만이 아니었다.

형사의 노련미에 최상의 육체가 결합된 스타일리시 액션의 백이한. 그에 합을 맞춰 날고 굴러대는 20인의 액션배우. 스테디캠을 들고 뛰어다니며 줌 인아웃과 포커스 인아웃을 반복하는 촬영기사.

그들의 움직임 하나하나가 모두 맞아떨어져야, 백이한이 칼받이 학생들과 싸우다 임상진을 코앞에서 놓치는 첫 번째 결전 시퀀스가 완성되는 것이다.

그야말로 유례가 없는 고난이도 액션.

조연출 오유진이 ‘이건 일주일 밤낮으로 찍어도 건질 수 없는 씬’이라며 질색한 게 그런 까닭이었다.

그렇지만 세상에는 언제나 예외라는 것이 존재한다.

액션배우들과 카메라맨이 반복해서 NG컷을 양산하는 상황에서도, 초인적인 관찰력과 신체통제력을 가진 이찬은 단 한 번의 실수조차 보이지 않았다.

뿐만 아니라 합이 안 맞거나 카메라가 따라붙지 못한 경우에 애드립 액션으로 상황을 이어가는 여유까지 보였다.

그야말로 신이 내린 재능.

무시무시한 롱테이크 액션 속에서, 소년은 비로소 지금껏 그 어떤 배우도 넘보지 못한 완성의 경지를 선보였다.

그렇기에 단 여섯 번의 테이크로 NG 행렬이 막을 내렸다.

“컷! 이거 보류하고, 하나 더.”

“······감독님? 이걸요? 백 번을 다시 찍어도 이렇게는 안 나올 텐데요? 요행수에 감사하셔야죠?”

“아니, 요행수가 아니야. 백 번까진 필요 없을 것 같아. 한 열 번만 더 찍으면 더 괜찮은 게 나올 거야.”

“감독님? 제 정신이세요? 그러다 누구 하나 쓰러져요.”

오유진의 걱정처럼 배우 중 누군가가 쓰러지는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젊은 액션배우들이 긴장을 풀고 나자 NG컷은 급격히 줄어들었고, 무거운 스테디캠 때문에 카메라맨이 한 차례 휴식을 취한 뒤에는, 또 하나의 OK컷이 완성되었다.

“컷! OK! 다들 고생했어.”

“······수고하셨습니다!”

충격과 안도가 섞인 액션배우의 외침. 그 목소리가 현장 전체의 분위기를 대변했다.

다만 홍주석만은 홀로 복잡한 감정을 느끼고 있었다.

‘저놈은 도대체······ 이건 뭐······ 무협 영화를 찍어도 되겠는데. 이소룡이 다시 태어났다고 해도 믿겠네. 그냥 액션만 잘한 게 아니라, 정면이 찍힐 때는 표정 하나하나에 임팩트를 줬어. 내가 잘못 생각했다. 좋은 배우와 좋은 감독이 만난 영화라고 생각했는데, 그게 아냐. 저런 배우를 부리는 건 오덕환 감독이 평생 운을 다 갖다 쓴 것······.’

비운의 잠룡으로 연기를 등졌던, 그러나 프라이드 하나만큼은 그 어떤 배우보다도 강했던 잠룡, 홍주석.

그 중년 배우가 마침내 인정했다.

이찬이라는 배우는, 자신이 감히 우열을 논할 수 있는 재능이 아니라는 것을.

그런 심경적인 변화를 가장 먼저 느낀 것 역시 이찬이었다.

“고생했다. 잘하더라.”

짧은 치하의 말과 함께 다가온 배우의 얼굴에서, 소년은 익숙하면서도 낯선 감정을 느꼈다.

‘경외감이라······ 이 아저씨한테서 이렇게 빨리 존경을 받게 될 줄은 몰랐는데. 잘된 일이야. 작품 마무리할 때쯤엔 무난하게 영입할 수 있겠어. 임호준에 홍주석이면, 중년 남자 앞세운 영화는 모조리 우리 회사부터 찾게 되겠지. 슬슬 관계를 구축해볼까?’

잘 형성된 경외감을 깨뜨릴지도 모를 내심을 숨긴 채, 이찬은 조심스레 운을 띄웠다.

“감사합니다, 선배님. 혹시 내일 일정 있으세요?”

“일정? 무명배우가, 대종상 같은 날에 뭔 일정.”

“그래요? 다행이다. 같이 점심 드실래요? 황상태 선배랑 현우정 아저씨 부를 생각인데요.”

“······젊은 애들 노는 데 방해되는 거 아닌가. 난 반주 없이 외식 안 한다.”

“반주도 있죠. 저희 집에서 먹을 거거든요. 매니저 누나가 집밥을 아주 기똥차게 하세요.”

“그래? 그건 좀 끌리는데. 흠······ 보는 걸로 하자.”

그렇게 소년의 요청을 승인하고 촬영장을 벗어나는 길에, 홍주석은 임호준에게 전화를 걸었다.

“야, 호준아.”

[어, 그래. 촬영이 힘들지? 오늘 스토리보드 아주 난리던데? 밤새 연장이지? 뭐, 내가 커피라도 사갈까?]

“아니. 촬영은 끝났고.”

[······뭐라고? 뭐가 끝났다고? 그거, 46씬 안 찍었어?]

“그게 끝났다고. 연장이 아니라 조기퇴근이다.”

[허허, 뭐라는 거야. 야 인마, 사람 놀리냐? 그걸 어떻게 하루 안에 찍냐? 액션 스타들만 모아놓고 찍어도 며칠 걸리겠더만. 장난치지 말고 집중해라, 이 화상아.]

“시끄럽고, 나와라. 술이나 한 잔 하자. 할 얘기가 많다.”

까메오 씬을 일찌감치 마치고 친구의 고생길을 응원하던 임호준은, 끝내 반신반의하면서 집을 나섰다.

그리고 안주가 나오기 전에 소주 한 병을 해치우고 외쳤다.

“말이 되냐! 야, 안 되겠다. 보러 가봐야 되겠어.”

“닥치고 술이나 마셔. 그보다······ 너희 회사 입지는 어떠냐?”

홍주석이 던지지도 않은 미끼를 덥석 물었다.

< 43장 - 배우 홍주석 (1) > 끝

ⓒ 비벗

=======================================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