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44장 - 배우 심요셉 (1) >
<연애의 조건>이 첫 방영을 앞둔 운명의 날.
심요셉이 알람도 울리기 전에 눈을 뜬 건, 소음 때문이었다.
‘아······ 시끄러워. 오늘 스케줄 많다고 내가 그렇게 말했는데, 왜 이러는 거야? 뭔 큰일이 났다고······.’
속으로 구시렁거리며 거실로 나오자, 모니터 앞에 모여 소리를 질러대는 다섯 비글이 보였다.
“와! 졸라 예뻐!”
“우리 진아, 오빠가 많이 아낀다!”
“야, 몇 시에 볼 거야? 예매해야 된다니까?”
“형 형, 다시 돌려봐. 다시 볼래.”
“우리 진아, 오빠가 많이 아낀다!”
“이 자식들아, 예매 나 혼자 한다?”
“나도 나도! 나도 볼 거야. 태형이 형 영화는 봐줘야지.”
“태형이 형도 형이지만, 진아는 계속 봐도 졸라 예쁘다.”
“당연하지! 우리 진아, 오빠가 많이- 으악!”
반복해서 소리를 지르는 강지혁의 뒤통수를 한 대 때린 뒤, 심요셉은 멤버들이 살펴보던 영상의 내용을 확인했다.
“······<꼬마신부> 트레일러? 이거 오늘 보게?”
“봐야지, 그럼. 우리 진아 아끼니까.”
“지혁이 넌 닥치고. 몇 시에 볼 건데?”
“10시부터 나랑 세민이 예능 찍어야 돼.”
“저녁엔 나 라디오 있고.”
“그럼 뭐, 밤에 봐야 되겠는데?”
“그럼 이걸로 해야겠다. 다섯 장 예매······ 오케이!”
“뭐야? 몇 신데?”
“아홉 시 반. 평일 밤이라 사람 안 많을 거야.”
“······이 개새끼들아! 내 드라마는! 오늘 첫방인데!”
“야, 도망쳐! 심요 빡쳤다!”
멤버들과 한참 드잡이질을 벌인 뒤에, 심요셉은 강지혁으로부터 조심스런 질문을 받았다.
“심요 형. 혹시 우리 진아랑은 안 친해? 왜, 이찬이랑 같은 회사잖아.”
“전에 남태 형 보러 가서 인사는 했는데, 친하진 않아. 근데 넌 명진아 왜 그렇게 좋아하냐?”
“왜냐고? 그게 질문이야? 딱 보면 모르겠어? 봐봐. 이 천진난만한 웃음! 완전 귀여워 진짜. 형 형, 이찬한테 부탁 좀 해봐. 같이 밥이나 한 끼 하자고.”
“이 변태야. 얘 미성년자거든?”
“아이, 알지. 누가 여자로 좋대? 동생처럼 귀엽다는 거지. 응? 부탁 좀 해봐라, 응?”
친동생에겐 전화 한 통 안 하는 강지혁의 명진아 예찬을 무시하고, 심요셉은 핸드폰을 충전기에서 분리했다.
첫 방송일을 맞은 <연애의 조건> 주연들은 각종 인터뷰를 앞두고 있다. 흥행파워 있는 조연으로서 심요셉도 그에 동참해야 하는 입장.
그 멘트를 점검하기 위해서 이찬과 미리 만날 예정이었다.
[여보세요.]
“어, 찬아. 나 일어났다. 이따 어디로 갈까?”
[열두 시까지 회사로 오세요. 얘기 좀 하다가 신수영 누나랑 같이 점심 먹죠.]
“아, 좋지. 근데 나 일찍 일어나서 할 일 없는데. 넌 그때까지 뭐 할 거야?”
[저야 뭐, 회사 동료들 영화 보려고 했죠.]
“그래? <꼬마신부> 보는 거야? 야, 나도 같이 봐. 우리 애들이 의리 없이 지들끼리 예매를 해버렸어.”
[그래요? 그럼 지금 나라엔터 사무실로 나오세요.]
“응? 나라엔터? 거긴 왜 가 있어?”
[그냥 좀 볼일이 있어서요. 아, 왔다. 이따 봐요, 선배.]
*
대표실 문 앞에 서서 빙글빙글 웃는 소년을 보고, 나라엔터 대표 강정후는 눈살을 찌푸렸다.
“또 왜 왔냐? 심심해 죽겠어? 텔레토비 틀어주랴?”
비아냥대는 말에 이찬이 킥 웃는다.
키나 분위기나 이미 어른들 이상으로 어른스럽지만, 편하게 웃을 때는 평범한 소년의 모습이었다.
“그럴 리가요. 오늘 첫방 들어가는 드라마 주연인데요?”
“그럼 예능이든 인터뷰든 바쁘게 뛸 것이지, 왜 남의 회사에서 빈둥거리고 있어?”
“예능은 안 해요. 들어가죠. 할 얘기 있어서 왔어요.”
그렇게 대표실에 들어서며, 소년은 복잡한 감회를 느꼈다.
‘여기 처음 왔던 게 벌써 4년 전이네······. 시간 참 빨라.’
이군영과 허성윤이 건재하고, 강정후는 그저 소속 배우에 불과하던 시절이었다. 그러나 지금은 두 사람이 사라지고 스물일곱의 청년 배우가 회사의 수장이 되어 있다.
“강정후 대표······ 명패 보니까 격세지감이 느껴지네요.”
“꼬맹이가 별 소릴 다 하네. 할 말 하고 꺼져.”
“흠. 이소연 아줌마는 좀 어때요? <가을하늘> 때는 이래저래 고민도 많으셨던 것 같은데, 지금은 실력 많이 느셨나?”
“할 땐 하는 녀석이야. 충분히 자기 몫 하고 있어. 아마 이번 드라마가 이소연의 재발견이 될 거다.”
“하긴, 그 누나는 방정맞은 역할에 더 어울리죠.”
“거기다 현장 풍경이 워낙 좋아서 영상미로도 상당히 어필이 될 것 같고, 인물들 관계가 깔끔해서 대중 입맛에 딱이야. 망할 수가 없는 드라마다.”
“아이고 무서워. 그럼 내기는 취소해야 되겠네요.”
별 엄살을 다 떤다고 생각하며 코웃음을 치다가, 강정후가 문득 고개를 갸웃거렸다.
“······뭐야? 진심이냐?”
“예. 취소해요. 어차피 천세영 누나한테 관심도 없잖아요?”
“아니라니까? 관심 있대도?”
“예, 예. 죄송한데 제 상황이 바뀌었어요. 내기 같은 걸 할 입장이 아니게 됐거든요.”
“······그래? 그럼 나 걔랑 만나도 되는 거냐?”
“그건 안 돼요. 콱 죽여버릴 거예요.”
주먹을 쥐며 협박하는 소리가 우습긴 했지만, 확실히 예전과는 뭔가가 달라진 것처럼 보였다. 이찬은 천세영에게 느끼는 뭔지 모를 불편함을 구태여 숨기지 않고 있었다.
“흠. 뭐······ 그렇게까지 말한다면야, 할 수 없지. 어차피 내가 이길 내기지만, 양보해주마.”
“제가 양보하는 거거든요? 오늘 첫방 보면 아실 거예요.”
“웃기고 자빠졌네. 내가 그걸 왜 봐?”
“<칠월칠석> 파트너였던 신수영 누나 작품이잖아요? 궁금하지 않아요? 잘 맞는다는 느낌은 못 받아본 배우라 관심이 없으신가?”
“그래. 관심 없어.”
“우리 아이돌 배우 심요셉의 연기는요? 꽤 잘하는데.”
“그것도 관심 없어. 내 드라마 찍느라 바쁘다.”
7월 14일 첫 방송임에도 대부분의 시퀀스가 완성되어 있다고 들었지만, 소년은 굳이 반박하지 않았다.
그 대신 다른 쪽으로 화제를 돌렸다.
“<형제>도 이번에 일본 개봉했죠?”
“그래. 320개 스크린이라, 아마 200만 관객은 동원할 수 있을 것 같다. 너희 <684>보다 훨씬 잘될 거야.”
“에이, 안 될 걸요? 우리도 250개 스크린 잡았는데, 이제 겨우 30만밖에 안 봤대요. 그쪽이 한계가 있더라고요. 이웃나라인데도 분단현실 같은 걸 이해하는 사람이 별로 없어서, 근현대사를 다룬 영화로는 어필하기 힘든 것 같아요.”
“이쪽은 나랑 조혁수가 가족 코드로 극을 끌어갔으니까, 훨씬 더 공감대가 있을 거다. 분명히 200만 동원할 거야.”
“아, 예. 그렇게 믿으시든가요. 그 조혁수 선배는 이번에 느와르 찍는다면서요?”
“그래. 제목이 <달콤한 꿈>이었나.”
<달콤한 꿈>은 감독모임 ‘한미모’의 일원인 이용빈 감독의 신작으로, 총기 액션 위주의 느와르 영화. 그게 8월부터 촬영에 들어갈 예정이었다.
“시놉시스 봤는데, 잘 먹힐지 모르겠어요. 너무 무겁던데.”
“끔찍하게 무거운 영화로 천만 관객 동원한 놈이 뭐래?”
“그거야 실화니까 자연스레 양해가 됐던 거죠. 이쪽은 현대 배경에 조폭들이 총 무지하게 갈기고 고문까지 하고······. 연기를 아무리 잘해도 관객들이 몰입하기가 힘들 거예요.”
“······그러냐. 그래, 조혁수도 재밌다고 하더라.”
“예? 맥락이 이상한데?”
“그 인간이 재밌다고 한 영화는 대부분 망했더라고.”
“아, 혁수의 저주로군요?”
어감이 우스워서 피식 웃은 강정후였지만, 이찬의 다음 질문은 그를 향하고 있었다.
“그럼 선배가 준비하는 영화도 재밌다고 하셨겠네요? 마라톤 영화라면서요? <주룩주룩> 맞나?”
“이 새끼가······. 그건 아직 안 물어봤어.”
“물어보지 그러셨어요? 눈물까지 흘리면서 감동하실 것 같은데?”
“시끄러. 헛소리 할 거면 꺼져.”
실험적인 가족영화 <주룩주룩>은, 자폐증을 앓고 있음에도 마라톤 서브-3와 철인3종경기 완주에 성공한 실존인물을 모티브로 기획되었다.
시놉시스에 따르면 장애 소년의 일상과 모친과의 관계 등을 담담하게 담아낼 예정이라고.
그런 영화에 강정후가 참여한다는 소식이 이찬에게는 기이하게 들렸던 것이다.
“대체 왜 그러셨어요? 이해가 안 돼요. 미남 연예인 1위에서 내려올 줄 모르는 톱스타가, 갑자기 자폐증 연기라니.”
“네 회사 배우들이나 신경 써라.”
“그거야 잘하고 있는데, 황당하잖아요? 예술적인 가치야 있겠지만, 상업적으로 흥행도 안 될 것 같고, 배우 이미지에도 안 좋을 거고. 대체 왜 수락한 거예요?”
“내가 먼저 연락했어. 하고 싶은 작품이라서.”
“하고 싶은 작품? 그게 왜 하고 싶으셨대요?”
“그런 것까지 너한테 설명해야 되냐?”
“못 할 건 뭐예요? 더럽게 비싸게 구네.”
“······야! 이찬 배우 그만 가신댄다!”
소년은 매니저들이 들이닥치기 전에 제 발로 대표실을 나섰다. 꾸밈없는 얼굴로 낄낄 웃으면서.
그 옆모습을 노려보며, 강정후는 주먹을 움켜쥐었다.
‘빌어먹을 천재놈······. 아무 배역이나 가리지 않고 연기하면서도, 정신은 순진무구 그 자체라 이거지? 부러워 뒈지겠네. 이쪽은 다섯 살 정신연령 가진 배역이라도 맡아서 대가리를 정화해야 하는 판인데. 그렇지만······ 잘해내야지. 걱정하시는 선생님을 위해서라도.’
순수하고 따뜻한 배역을 더 많이 맡으면 어떻겠냐던 안정록의 조언을 되새기며, 그는 각본으로 눈을 돌렸다.
*
<미스 스캔들>의 남태형과 <어사>의 명진아가 뭉친 영화에 대한 팬들의 기대는 대단했다.
한쪽은 최고의 미남 계보에 이름을 올린 인물이고, 다른 쪽은 세상에서 가장 사랑스러운 하이틴스타. 그러면서도 외모보다 연기력으로 찬사를 듣는 배우들이었다.
그런 두 사람이 로맨틱코미디를 찍었다는 소식에, 예매율이 이례적으로 치솟았다고 했다.
하지만 어디까지나 저녁 시간대나 주말에 국한된 이야기.
평일 오전에 극장을 찾은 이찬과 심요셉은 소란 없이 숨어들어 객석에 자리할 수 있었다.
“역시 아침엔 한산하네요.”
“다행이지, 들켰으면 난리 났을 텐데. 밤에 본다는 우리 멤버들은 무사히 보고 올지 모르겠네.”
“그분들 들키면 웃기겠는데요? 그룹 리더가 출연하는 드라마 방영할 시간에 남의 영화를 보러 왔다고 하면, 익살스런 이슈가 될 것 같아요.”
“윽. 싫어······ 리더십 너무 없어 보이잖아.”
“실제로 없지 않아요? 바다에서 보니까 통제가 안 되던데?”
“아, 그때야 워낙 오랜만에 바다 나온 거라서······.”
가벼운 대화 뒤에 영화가 시작됐다.
시사회에 참석한 바 있는 이찬에게는 그저 시간 때울 겸 찾은 극장이지만, 당시 예능 촬영으로 불참했던 심요셉에겐 첫 관람. 자연히 입가에 미소가 떠올랐다.
“아, 귀엽······. 흠. 아니, 우리 멤버 중에 지혁이가 진아 쟤를 엄청 좋아하더라고. 나잇살 먹고 왜 그러나 했는데, 지금 보니까 좀 이해가 될 것 같기도 하고.”
“예. 진아 누나가 좀 귀엽죠.”
“그리고 남태 형은, 진짜 장난 아니다. 어떻게 저렇게 한순간 한순간 멋있을 수가 있냐? 완전 반칙이라니까.”
“반칙이긴 하죠. 흠. 선배는 만약에, 남태형 선배랑 둘이서 같은 여자를 좋아하게 되면, 어떨 것 같아요?”
“어? 어떻긴 뭘 어때? 내가 양보해야지.”
“질 것 같으니까 발 뺀다는 거예요?”
“헤헤, 그런 것도 있고.”
히죽히죽 답하는 심요셉을 보며, 이찬은 신수영을 생각했다.
‘톱스타 심요셉과 꽃미남 남태형 사이에 낀 미녀 배우라. 이거야 원, 드라마 같은 설정이야. 무릎까지 꿇을 기세로 동생 연기 봐달라고 부탁했던 그 선배가 동생이 좋아하는 여자를 낚아채지는 않을 것 같은데······ 그렇지만 신수영 누나도 집요하기로는 스토커 못지않은 성격이란 말이지. 과연 이 세 사람은 어떻게 되려나?’
그쪽은 남의 일이니 흥미본위로 생각할 수 있었다.
하지만 관객들의 입가에 끊임없이 미소를 만들어내는 ‘이윤애’를 보면서는, 마음속이 복잡해지지 않을 수 없었다.
‘음. 또 두근거리네. 이게 이성에 대한 사랑이라는 거지? 생각했던 것보다도 더 이상한 느낌이야. 사실은 종족번식을 위해서 그럴싸한 상대에게 마음을 빼앗기는 메커니즘일 뿐인데, 이게 이렇게 감미롭고 행복할 일인가?’
그건 예상 이상으로 주체하기 힘든 충동이었다.
자꾸만 명진아를 불러내서 손을 잡고 싶었다. 그녀를 끌어안고 가까이에서 얼굴을 바라보고 싶었다. 매일 함께 밥을 먹고 함께 여가를 보내고 싶었다.
바로 그렇기에, 소년은 고민하고 있었다.
‘너무 강하고, 너무 충동적이야. 마약에 취하는 게 이런 느낌일까? 이런 건 상상도 못했어. 무서워. 이 마음이 배신당한다면······ 대체 어떻게 살아갈 수 있을까? 드라마 속에서 실연당한 수많은 캐릭터들이 누구 하나 자살하지 않았다는 게 신기할 지경이야.’
천세영을 생각할 때는 그와 달랐다. 그저 포근하고 안온한 느낌 정도였다.
그렇기에 가벼운 마음으로 사랑을 정의할 수 있었다. 그 정도 감정이라면 배신당해도 괜찮겠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자신의 진짜 감정을 깨달은 소년은, 명진아를 보며 예전처럼 편안하게 웃을 수 없게 되었다.
‘두려워해선 안 되는데······ 좋은 사람이 되기 위해서 먼저 다가가야 하는데. 하지만 정말 가망이 없단 말이야. 세상에 위기를 겪지 않는 커플은 단 하나도 없다고 했어. 연애란 건 그렇게 위험천만한 일이야. 그렇게 우리 사이가 흔들릴 때, 난 버틸 수 있을까? 순수하고 따뜻했던 진아 누나가 내게 화를 내는 상황을 견뎌낼 수 있을까······?’
소년이 공포에 신음하고 있는 것도 모르고, 심요셉은 쉬지 않고 입을 놀리며 옆구리를 찔러댔다.
“야, 찬아. 이거 너무 재밌는데? 어떡해? 우리 드라마 화제성 다 뺏겨버리는 거 아냐?”
“······걱정 마요. 저 꽃미남, 우리 쪽에도 출연하잖아요.”
“아, 그렇지. 영화 때문에 드라마까지 봐줄 수도 있겠구나?”
그는 그제야 마음을 놓은 듯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 44장 - 배우 심요셉 (1) > 끝
ⓒ 비벗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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