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훔치는 연기자-123화 (123/250)

< 44장 - 배우 심요셉 (2) >

<꼬마신부>를 보며 심요셉이 가장 감탄한 부분은, 배우들의 연기가 아니었다.

물론 명진아와 남태형의 열연은 강렬한 경험이었다. 그가 이찬에게 무수한 잔소리를 들어가며 간신히 하나하나 따라하고 있는 표현들을, 두 주연은 터무니없이 자연스럽게 연기하며 관객들을 웃기고 울렸다.

이찬 본인의 연기는 두말 하면 입 아픈 수준. 그저 까메오일 뿐인데도 극을 한순간 집어삼키며 관객들의 탄성을 불러일으켰다.

그렇지만 가수인 그에게 있어서 가장 놀라웠던 건, 이찬과 명진아의 합주실 가창 시퀀스였다.

“아······ 너 뭐냐? 노래도 저렇게 잘했어?”

“잘하는 건가? 그냥 모창 비슷하게 한 건데.”

“누구 따라했는데?”

“원곡 가수랑 보컬리스트 역으로 부른 조연이요. 둘을 섞어서 불러보니까 감독님이 좋아하시더라고요.”

“그게······ 와. 그렇게 들으니까 좀 원곡 느낌이 나는 것 같기도 하고. 근데 참 대단하다. 당장 가수 해도 되겠어.”

“영광이네요. 잘나가는 아이돌이 그렇게 말씀해주시니.”

랩 담당인 심요셉은 가창에 있어서 뛰어난 가수는 아니다.

그렇지만 아이돌로서 무수한 히트곡들에 참여한 경력이 무려 7년차. 이찬의 가창력이 팀의 메인보컬인 오세민에게도 크게 밀리지 않음을 알아차릴 안목은 있었다.

“가수 할 생각은 없어? 스타 배우들 앨범 잘된 거 많잖아?”

“별로요. 전 연기만 할 거예요.”

“와······ 저 재능으로? 너무 아까운데. OST 나오면 엄청 흥행할 텐데, 팬서비스 차원에서 활동 좀 하지 그래? 명진아 이찬이 듀엣으로 음악방송 나오면 완전 대박일 텐데.”

“OST는 남 선배 버전으로 나올 거예요. 그렇게 미리 말해놨어요.”

“어? 그래? 왜? 아니······ 뭐야? 그러니까 작중에서 남태 형이 듀엣을 하게 된다는 거야? 야, 그걸 말하면 어떡해?”

주연배우의 입으로 인해 스포일러의 내상을 입은 심요셉은, 합주 씬 이후 진행되는 시퀀스를 보며 생각했다.

‘연기만으로도 20대 배우들 기를 죽이는 이 꼬맹이가, 노래까지 스타의 재능이라니. 어떻게 그럴 수 있는지 모르겠어. 신은 공평하다는 말, 다 개뻥인 것 같아.’

그렇게 불퉁하게 바라보던 것도 잠시.

이내 그의 상념은 자기 자신에게로 향했다.

‘나는 어떨까? 래퍼로서는 아이돌 중에서나 잘하는 정도라는 평가를 듣고 있고, 리더로서도 멤버들한테 크게 도움을 주진 못하고 있어. 그래서 활로를 찾으려고 연기판에 뛰어든 건데······. 그런데 의외로 이쪽에 재능이 있는 것 같단 말이야. 이번 드라마로 신인상도 타고 그러면, 앞으로 오히려 연기 쪽으로 풀리게 될 지도 몰라. 그래도 나는 여전히 T.O.P겠지만······ 팬들이 연기에 집중하길 원한다면······?’

그 편향된 고민과 달리, 심요셉이라는 아이돌에 대한 호평은 다방면에 걸쳐 있었다.

친근함으로 무장한 사랑스러운 리더, 화려한 스킬로 그룹의 음악색을 만드는 메인래퍼, 큰 키와 훌륭한 비율로 무대를 장악하는 리드댄서, 특유의 장난기로 종종 빅 재미를 만드는 의외의 예능 캐릭터 등등.

오히려 연기력 쪽에 물음표가 따라붙었다.

뮤직비디오에서는 깜짝 놀랄 정도로 절절한 감성을 보여주곤 했지만, 드라마나 영화에서는 크게 돋보이지 못했던 탓.

그룹의 존속을 염려하는 리더로서 심요셉은 그 한계에 늘 답답해했다. 음악방송과 예능만으로는 장수 아이돌이 되기 어렵다고 생각했던 것이다.

그렇기에 굳은 결의로 참여하게 된 <연애의 조건>.

이찬의 지도 속에서 그 드라마를 촬영하며, 그는 이제 오만이라고 해도 될 정도로 큰 자신감을 갖게 됐다.

남태형이 건네준 한마디 말 덕분에.

“······잘 배웠네. 네가 나보다 훨씬 나은 것 같다. 이번 작품 방영되고 나면, 러브콜 많이 들어오겠어.”

특별출연으로 촬영장에 왔을 때 건네준 찬사였다.

스탭들이야 립서비스라고 생각했지만, 남태형의 성격을 아는 심요셉은 그로써 모든 불안감을 내려놨다. 작품의 흥행과 무관하게 자신의 연기는 호평만을 받으리라 확신하게 됐다.

막상 연기 스승인 이찬은 타박을 쉬는 날이 없었으나, 그쪽은 별로 신경 쓰지 않았다. 원래 성격이 까칠한 아이라고 생각했기에.

첫 방영일의 인터뷰에서도 그런 자신감을 마음껏 표출했다.

“이찬 군! 그리고 신수영 씨! 아주 충무로에서 쟁쟁한 스타들이 참여한 이 <연애의 조건>에, 가요계의 빛나는 별! 요셉 씨까지 함께하게 된 건데요. 혹시 대단한 배우들과 함께 연기하는 게 부담이 되진 않으셨어요?”

“전혀 그렇지 않았습니다. 숨 쉬듯이 자연스럽게 연기를 해냈죠. 아마 이 셋 중에서 제가 제일 연기를 잘하지 않았나.”

“으하핫! 하여튼 엉뚱하다니까. 그러면 우리 수영 씨가 보시기엔 어떠셨어요? 요셉 씨 연기, 괜찮았습니까?”

“처음엔 좀 걱정했는데, 생각보다 훨씬 더 잘하시더라고요.”

“이찬 군은? 요셉이 형 어땠어요?”

“완전 별로였어요. 연기 되게 못해요.”

“뭐 인마? 야, 넌 말이라도 좀.”

재미를 위해서 미리 말을 맞춘 투닥거림까지 자연스럽게 연기해내고, 심요셉은 자신의 실력이 일취월장했다고 확신했다.

그렇기에 인터뷰 일정이 끝난 뒤에 당당하게 이찬에게 제안할 수 있었다.

“야, 찬아. 드라마 같이 보지 않을래? 나 멤버들이 다 영화 보러 가버려서, 숙소 들어가면 외로울 것 같은데.”

“싫어요. 어른스럽게 외로움과 마주하세요.”

“아, 쫌. 첫방인데 배우들끼리 다정하게 같이 보면 얼마나 좋아? 사진 찍어서 팬카페에도 올려줄게, 응?”

“딴 목적이 있는 것 같은데. 수영 누나랑 친해지고 싶어서 그러죠?”

“아니, 그런 거 아니야. 순수하게 우리 스승님하고 같이 첫방을 기념하고 싶다는 거지.”

“참나. 처음엔 낯 엄청 가리더니, 이젠 말이 아주 청산유수시네요.”

끝까지 툴툴거리긴 했지만, 의외로 착한 구석이 있는 소년은 이내 신수영까지 설득해 사무실로 이동했다.

정확하게는 설득이랄 것까지도 없었다. 이찬의 부르심에 신수영은 열성 교도처럼 고개를 끄덕이며 뒤를 따랐다.

그렇게 해서, 볼품없는 하늘기획 사무실 내에서 유일하게 고급스러운 TV 앞에 세 배우가 옹기종기 앉게 되었다.

“와, 누추한 곳에 이런 귀한 TV가?”

“안정록 이사님이 선물하신 거예요. 전 낭비니까 사지 마시라고 했는데, 러닝개런티를 너무 많이 받았다고 하시면서.”

“낭비라니, 배우들 사무실인데, 좋은 TV로 모니터를 하는 게 맞지. 근데 개런티를 얼마나 받으셨대?”

“10억 좀 넘게요.”

“······시, 십억? <684> 하나로? 정말이야? 와, 맙소사. 야, 나 드라마가 아니라 영화에 도전해야 되겠다. 그래서 천만영화 찍어서 떼돈 받고, 그걸로 초호화 앨범을 제작하는 거야.”

“뜻은 좋은데, 선배한텐 택도 없거든요?”

“이 자식이? 나도 많이 늘었거든? 그렇죠, 수영 씨?”

“하하, 오빠도 참. 많이 늘긴 하셨는데, 찬이처럼 천만영화 주연 되시려면 아마 20년은 더 연습하셔야 될걸요?”

“20년이라니. 2년 안에 해낼 거예요. 지켜보시라고요.”

좋아하는 여자 앞에서 당찬 포부를 밝힌 심요셉은, 9시 55분에 시작된 드라마가 10분 정도 방영됐을 무렵에 깨달았다.

20년은커녕 200년으로도 부족할지 모르겠다고.

‘격이······ 다르구나. 이찬이 잡힐 때랑 내가 잡힐 때, 몰입감이 판이하게 달라. 촬영장에선 나도 저 수준에 근접했다고 생각했는데······ 화면으로 비교하면서 보니까, 내 얼굴은 아예 안 보일 정도야. 이게 열여섯 살 이찬의 실력······.’

과한 자기비하였다. 배운 것들을 충실히 수행한 그의 연기도 작중에 잘 녹아들고 있었으니, 대다수의 시청자들은 격이 다르다는 생각까진 하지 않을 터였다.

하지만 자신감이 자괴감으로 곤두박질친 10분. 심요셉은 평생 느껴보지 못한 충격에 몸서리쳤다.

그리고 그 경험이 마음의 색깔을 조금쯤 변화시켰다.

‘나도, 저렇게 연기하고 싶다. 적당히 따라하는 걸 넘어서, 이찬처럼 보는 사람의 시선을 빨아들이고 싶다······. 그렇게 될 수 있을까? 음악과 연기를 병행하면서, 내가 그걸 해낼 수 있을까······?’

*

“늦었어요! 매니저님, 빨리 가주세요.”

차에 타자마자 재촉하는 명진아의 말에, 조진영 실장은 너털웃음을 터뜨렸다.

“하하하. 진아야, 태형이도 데려가야지.”

“으, 아이, 왜 이렇게 안 오시는 거야?”

남태형은 뒤따라 나온 김세진 감독과 인사를 나누는 중. 말이 길어지는 게, 벌써부터 차기작 얘기가 오가는 듯했다.

“아이······ 나중에 통화를 하시지는.”

“너도 참. 첫 주연작이 개봉한 날인데, 드라마 모니터링 한다고 급히 갈 건 없지 않겠어? 찬이가 나온 드라마가 그렇게 보고 싶은 거야?”

“아, 아뇨? 그게 아니라, 전 어차피 술도 못 마시고······ 찬이 드라마엔 태형 오빠도 특별출연 하셨잖아요?”

“그야 그렇지. 그래서 같은 날에 영화랑 드라마를 동시에 공개했다는 진기록을 갖게 됐지.”

“그러니까요. 그러니까 가서 같이 봐야 되는 거죠. 수영 언니도 사무실에 와 계시다고 하니까, 얼른 가서 축하를 해드려야 되겠어요.”

“그래, 네 말이 다 맞다. 아, 태형이 오네. 자, 벨트 매십쇼, 공주님.”

이후 서둘러서 하늘기획 사무실로 돌아온 시각은, 10시 40분. 드라마가 거의 끝나갈 무렵이었다.

계단을 두 개씩 박차며 뛰어간 명진아는 그렇게 뒤늦게 모니터링에 합류했다.

“아, 안녕하세요! 저 왔어요, 언니. 안녕하세요, 선배님. 안녕하세요, 대표님. 찬아! <연애의 조건> 잘 나오고 있어?”

“응. 쾌조의 스타트.”

“아! 응······ 다행이다. 진짜 다행이야.”

“무대인사 잘하고 왔어?”

“응! 빈자리가 좀 있었지만······.”

“걱정 마. 점점 늘 거야. 오전에 요셉 선배랑 영화 보고 나왔는데, 관객들 표정이 좋더라고. 내가 볼 땐 최소 500만이야. 내기해도 돼.”

“저, 정말? 우와, 정말이야?”

그 뒤로 남태형도 사무실로 올라와 인사를 나누는 등 주변이 소란해졌지만, 심요셉은 설렁설렁 인사하면서 오직 TV 화면에 집중했다.

명진아와 친해져 달라는 강지혁의 당부도, 오랜만에 만난 남태 형의 인사도 그의 마음을 움직이지 못했다.

그는 ‘김서준’과 ‘성지현’이 만들어나가는 이야기에 푹 빠져 있었다.

‘어려운 환경 때문에 수영부를 그만둔 김서준은, 슬픈 티 안 내는 표정으로 코끝이 찡해지게 만들어. 화려한 미스코리아 경력에도 불구하고 일상에선 어설프기만 한 성지현은, 배우의 아름다움을 잊게 만들 만큼 설득력이 넘치고. 그리고 두 사람이 바다에서 재회하는 이 시퀀스······ 벌써부터 두 사람이 잘되길 응원하게 돼버려. 고등학생과 선생님이라는 현실적인 문제가 도저히 떠오르질 않아. 이게 진짜 연기라는 거야. 이게 진짜 배우들인 거야.’

드라마를 잘 보지 않던 래퍼가 푹 빠져들 정도로 완성도 높은 50분을 지나, 드라마는 이내 클라이막스를 맞이했다. 첫 씬의 바닷가가 수미상관으로 등장한 밤바다를 배경으로.

그 시작은 주연배우 신수영의 목소리였다.

“아, 나온다! 태형 오빠 시퀀스야. 여기서 진짜 멋있었는데.”

“멋있긴······.”

“진짜 멋있었다니까요? 봐봐, 저 우수에 찬 눈빛!”

발령을 하루 앞두고 학교 인근의 바다를 다시 찾은 성지현. 그녀는 그곳에서 과거에 차버렸던 옛 연인과 재회한다.

그게 바로 꽃미남 ‘남태형’ 역의 남태형.

바닷가에서 바람을 맞는 까메오의 놀라운 미모에, 하늘기획 대표 정창영이 박수갈채를 선사했다.

“아이고, 우리 태형이 등장 씬이 아주 강렬했다고 하더니, 저렇게 예쁜 장면을 찍어주셨네. 최고야. 이걸로 방송국에서 또 난리가 나겠어. 저 배우를 주연으로 잡으라고 특명이 떨어지지 않으려나?”

“······과찬이십니다, 대표님.”

옛 연인을 바라보며 성지현은 향수 같은 설렘을 느낀다. 그러나 그의 곁에는 연예인처럼 아름다운 새 여자친구가 있다.

어색한 인사. 그리고 다시 이별.

성지현은 괴로운 마음에 맥주를 들이켜고서 바다로 향한다.

그날, 김서준은 수영부를 그만둔 참이다.

불경기로 인해 문을 닫은 가업은 3대독자인 그에게도 꿈 대신 짐을 지웠다. 방과후에 부활동 대신 아르바이트를 뛸 수밖에 없게 되었다.

모친에게 슬프지 않다며 거짓말하고 바다를 찾은 그는, 그곳에서 일주일 전에 만났던 성지현을 발견한다.

[그 여자다. 갑자기 나타났다가 갑자기 사라진, 내 이상형. 몇 번 전화해도 받질 않더니, 오늘은 밤중에 바다에 들어가 있다. 수온이 찰 텐데. 수영복 차림도 아닌데. 그리고······ 어째선지, 울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와, 목소리로 귀를 녹여버리는데? 찬아, 딱 좋다 야.”

정창영 대표가 한 말이 정답이었다. 이찬의 나레이션은 파도소리 위에서 아름다운 악기처럼 귓가를 간질거렸다.

그리고 그 목소리가 그친 순간, 성지현이 사라졌다.

옷을 벗어던지고 정신없이 바다로 뛰어드는 김서준. 그 뒤로 이찬의 근육질과 신수영의 늘씬한 몸매가 파란 물속을 수놓았다.

“야, 영상미가 참 좋네! 아름다운 물속의 커플······ 캬! 나도 수영 좀 하는데. 옆에서 보면 저만큼 멋있으려나?”

“대표님은 조심하셔야죠. 보름달 떠요.”

“헉······ 아니, 찬아, 사람들도 많은데 왜 그 얘길······.”

왁스를 잔뜩 써서 원형탈모를 가리곤 하는 대표이사의 슬픔을 뒤로하고, 드라마는 그때부터 더욱 강렬한 영상미를 내뿜기 시작했다.

마침내 성지현을 구해낸 김서준이 그녀를 너럭바위에 끌어올린 것.

달빛 속에서, 아름다운 인어 같은 신수영과 동화 속 왕자님처럼 빛나는 이찬이 서로 눈을 마주하고, 그 장면 위로 T.O.P의 보컬리스트 오세민이 부른 OST가 울려 퍼졌다.

“······와! 야! 이거 좋다! 마지막 시퀀스가 아주 대박이야!”

“대표님, 어떨 것 같아요? 몇 퍼센트나 나올까요?”

“이거면 50% 나오지!”

“그래요? 흠······.”

배우들과 매니저들의 표정을 살핀 이찬은, 곧 수긍했다.

‘50%까진 모르겠지만, 확실히 반응이 좋아. 주동한 아저씨 특유의 영상미에 신수영이라는 미인이 잘 어우러졌어. 비주얼 측면에서는 이소연도 압도하는 사람이니까. 됐어. 이 정도면 <스위트 프리즌> 방영 전에 기선을 제압하기에 충분해.’

소년의 생각은 곧 사실로 드러났다.

2004년 6월 24일 아침. 피플미터로부터 24시간의 시청률을 전달받은 MSB측의 발표에 따르면, <연애의 조건> 1부는 서울 평균시청률 32.1%를 기록했다.

동시간대 1위이자 연내 최고의 초회시청률이었다.

< 44장 - 배우 심요셉 (2) > 끝

ⓒ 비벗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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