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46장 - 작가 박무열 (1) >
5월 23일 심사위원대상으로 칸의 인정을 받은 감독 박무열은, 이후 오랫동안 해외를 떠돌았다.
자연스러운 일이었다. 예상치 못했던 신성의 등장에 세계의 감독들이 앞 다퉈서 초청장을 건넸고, 영화광인 박무열이 영화인들의 부름을 사양할 리 만무했으니.
그로써 유럽 각국의 영화제를 순방한 명감독은, 부천국제영화제 폐막식 직전에야 귀국길에 올랐다.
그렇게 긴 여행 끝에 한국에 도착한 7월 22일.
두 달 전에 돌풍 수준이었던 한 소년배우는, 이제 태풍이 되어 있었다.
“하, 참. 장난이 아닙니다. ‘살인미소’ 이찬 하면 지금은 동네 개들도 알 정도가 됐어요. 말이 안 되는 거지. 미니시리즈로 시청률 50%에 육박하고 있으니까 말이에요.”
낄낄거리며 평론한 제준원 감독의 말대로였다.
인터넷과 케이블 TV의 보급 속에서 지상파 드라마의 시청률은 급락을 거듭하고 있다.
그나마 호흡이 긴 사극이나 주말극은 중장년층의 사랑으로 고공 시청률을 선보이곤 하지만, 20부작 미만의 미니시리즈들은 충성스런 시청자층을 확보할 여건이 못 됐다.
그렇기에 미니시리즈는 30%만 넘겨도 대박이라고 불리는 2004년.
그런 상황에, 이찬 주연의 <연애의 조건>은 7화 만에 45%의 벽을 뚫어버렸다.
“신드롬이야, 신드롬. 강정후 드라마가 동시간대에 들어갔는데도 상대가 안 되더라고. 이찬 걔가 한국 여자들을 몽땅 사로잡았다는 거지. 소재부터 말이 안 되잖아요? 사회적 통념을 위배하는 연애니까. 그런데도 교총 사람들이 성명 하나 못 냈다니까요? 그랬다간 욕 들입다 얻어먹을 게 뻔해서 그런 거지. 박 형, 걔 잡은 건 정말 잘하신 거예요.”
이용빈 감독의 말에 어색하게 웃어 보이고, 박무열은 ‘한미모’ 임시회의에 안건을 하나 추가했다.
“그러면······ 이렇게 말 나온 김에, 딱 우리 관심사는 아니긴 하지만, 그 드라마 얘기를 해보지. 본 사람 있으면 설명 좀 해줘봐.”
“하기야 형님은 오늘 밤에 8화 보기도 좀 애매하겠네요? 그러면 신작 망하고 불러주는 사람이 없어서 집에서 드라마나 보며 살던 내가, 살짝 설명을 해드려볼까?”
자조적인 소릴 유쾌하게 한 신유벽 감독이 몸을 일으켰다.
“일단 이찬은 고3 학생 역할인데, 캐릭터가 매력적이에요. 원래 수영부였는데 집안이 어려워져서 그만두고 알바 뛰는 애야. 그게 자아와 현실 사이의 갈등을 부르죠. 하고 싶은 건 수영인데, 해야 하는 건 나이 속이고 클럽에서 삐끼로 뛰는 거거든. 그렇게 힘든 와중에도 친구들이랑 가족들을 위해서 항상 노력하고, 애가 또 항상 웃어. 그게 보기가 참 좋죠.”
“그렇군. 그렇지만 현실 때문에 열등복합(inferiority complex)이 있을 법도 한데.”
“그렇죠. 그게 포인트지. 그래서 좀 비뚤어지기도 한단 말이에요. 예를 들면 학교 일진 애들이랑 싸움을 벌인다거나.”
영화라면 전형적인 전개라고 할 수 있겠지만, 드라마라고 생각하니 좀 어색한 느낌이었다.
“폭력서클하고 싸운다······ 합당한 이유가 있었겠지? 그렇지 않았다면 시청자들이 불편해졌을 테니까.”
“그야 반 친구가 괴롭힘 당하는 걸 목격해서 도와주는 역할이죠. 그런데 신수영이 배역이 선생이거든요. 딱 이찬 담임이야. 그쪽 관점에서 보면 문제아인 거지. 알바하고 늦잠자서 지각하기 일쑤인데, 거기다 싸움질까지 하고 다니니까, 답답해서 화도 내고 그러는 거죠. 그런데 이 둘의 관계가, 이 초임교사가 부임하기 전부터 시작되거든요?”
이후 신유벽은 손짓 발짓까지 동원해가며 <연애의 조건> 1화의 스토리를 설명했다. 마지막 시퀀스의 밤바다 씬이 얼마나 강렬했는지를 중심으로.
“그렇게 두 사람 볼의 물기 위로 달빛이 쫙 비치는데······! 그거 보고 딱 느꼈죠. 주동한이라는 감독이 진짜 실력이 있구나. <어사>도 그렇고 참 영상이 스타일리시해. 나도 차기작 로케 바닷가로 해볼까 싶더라고요.”
“흠. 이찬 신수영 비주얼에 바다 배경이면, 미장센이 좋기도 했겠네. 그러니까 공감대 큰 캐릭터에 영상미가 더해진 게 성공의 비결이다?”
“그런 것도 있는데, 배우들 연기도 참 좋아요. 이찬 신수영이야 뭐 보증수표지. 근데 여기에 중요한 친구 역할로 요셉이라는 애가 나오거든? T.O.P라고, 알아요?”
“알아. 아들내미가 축제 때 춤춘다고 연습한 적이 있어.”
“응, 그렇지. 인기 많은 그룹이거든요. 거기 리더가 뜬금없이 비중 큰 역할을 잡은 건데······ 얘가 아주 어마어마하더라고? 감정이 깊어요. 팬들이 가수 접고 연기만 하라고 할 정도로. 아, 그래서 용빈 형님이 러브콜 보냈지 아마?”
갑작스런 거론에, 이용빈이 쑥스러운 듯 뒤통수를 긁었다.
“특별출연으로······ 킬러 한번 맡겨보려고 해요.”
“이용빈이 아이돌을 영화에 쓴다라. 그것도 킬러로.”
“아니 뭐, 아이돌이라서가 아니라 탈이 좋아서 그래. 박 형, 이상하게 의심하지 말라고요.”
팬덤 티켓파워를 이용하려는 수작이라 의심받기 싫은지 필사적으로 손을 내젓는다. 박무열은 그저 씩 웃어줬다.
“아무튼 그렇다 치고. 그러니까 공감대와 영상미에 더해서, 배우들의 열연이 화제를 만들었다는 거구나.”
그 정도로 정리하려는데, 이용빈이 말을 보탰다.
“내가 볼 땐 스토리가 일등공신 아니었나 싶은데. 작가가 참 구성을 잘했어요. 수영부였다는 설정이······ 이찬 캐릭터를 멋진 스포츠맨으로 세팅하는 한편으로, 학교에서 벌어지는 사건들을 타이트하게 조여준단 말이지. 사내아이들 사이의 우정과 불화, 이런 게 다이내믹하게 그려져요. 거기에 폭력서클과 체육서클 사이의 전쟁까지 더해지면 딱인데.”
“하하, TV쇼에서 그게 될 일이야? 이제 대충 알겠다. 성공적인 학생드라마의 요소에 스포츠맨십, 그리고 연상연하의 불안한 로맨스까지 엮여 있단 말이지. 타겟층이 넓어질 법도 해. 연출의 밸런스만 잘 잡는다면 말이야.”
그 평에 제준원 감독이 고개를 끄덕이며 답했다.
“주동한 감독이 그걸 잘하고 있더라고요. 이야기의 분배가 감각적으로 잘 됐어요. 요셉 파트가 좀 많다 싶긴 한데, 그거야 워낙 인기가 좋아서 어쩔 수 없는 부분이겠고.”
“심요셉 파트 재밌지 않아? 처음엔 전형적인 조력자 캐릭터라고 생각했는데, 애가 츤데레잖아. 조정자라고나 할까, 불안불안한 이찬 신수영 사이를 지가 희생해서 도와주고, 그러면서도 자기 고민은 끝까지 숨기고. 내가 그거 보고 요셉이한테 오퍼 넣은 거야.”
“딱 형님이 좋아하실 캐릭터지. 그래서 여자들한테 인기가 많은 거기도 하고요. 주인공이 이찬만 아니었어도 극을 다 잡아먹었을 거야.”
낯설게도 드라마 얘기에 열을 올리는 동료 감독들을 돌아보며, 박무열은 4개월 전의 대화를 떠올리고 있었다.
‘마침 제안 들어온 학생 배역이 있다- 그런 식으로 말했었지. 영 하기 싫은 것처럼 보였어. 내가 시킨 일이라 하는 수 없이 한다는 투였단 말이야.’
그게 시작점이었다.
박무열이 자신의 작품에 참여하려면 학생 배역 하나 잡으라고 강요하지 않았다면, 이찬은 <연애의 조건> 주연을 결코 맡지 않았을 터였다.
그렇지만 그 결과는 <어사> 이상의 흥행. 외적인 의도로 한 말이 행운을 건네준 셈이었다.
‘그건······ 이찬의 행운은 아닐 거야. MSB의 행운인 거지. 왠지 그런 느낌이 들어. 이찬이 아니었다면, 어떤 방법으로도 이런 열풍을 만들어내지 못했을 거라는.’
곧바로 이성이 생각을 부정했다. 소년 한 명이 드라마의 신드롬을 주도했다는 판단은 터무니없는 비약이기에.
그렇지만 박무열은 객관의 판단에 귀를 기울이지 않았다.
영감에 죽고 사는 ‘한미모’의 의장에겐, 순간적으로 떠오른 강렬한 이미지 쪽이 더 중요했다.
‘그저 학생 배역에 맞는 이미지를 갖추게끔 시킨 제안이야. 그렇게 억지춘향으로 참여한 작품이, 드라마에 관심 없는 이 감독들까지 나서서 수다를 떨게 만들었어. 대부분의 계층에 불편함을 안겨줄 만한 소재로 한국 사회 전반에 열풍을 일으키면서. 그걸 어떤 PD와 어떤 작가가 할 수 있을까? 제작진은 준비하는 자들일 뿐, 대중이 바라보는 건 결국 배우야. 이찬은 그 대중의 마음을 사로잡는 가장 완벽한 키······.’
그 생각 끝에, 박무열은 희열을 느꼈다.
감독 박무열은 결코 대중적인 사람이 아니다. 임호준을 주연으로 쓰고도 34만 관중에 만족해야 했던 비운의 작품이야말로, 그가 가장 자기답다고 생각하는 영화였다.
그렇게 작가주의의 극단에 서 있는 그가, 곧 대중성의 화신 같은 이찬을 찍게 된다.
‘<연애의 조건>에서는 선량한 학생으로, 그리고 <고등형사>에서는 형사의 영혼이 깃든 학생으로······ 그 뒤에, 이찬은 신화가 된다. 내가 그렇게 만드는 거야.’
아직 <고등형사>는 크랭크업도 하기 전. 이쪽도 크랭크인을 위해 해결해야 할 난관이 적지 않다.
그렇지만 박무열은 웃었다. 머릿속에 떠오른 하나의 장면을 바라보면서.
‘네 원수가 배고파 하거든 식물을 먹이고, 목말라 하거든 물을 마시우라. 악한 자를 대적치 말라, 누구든지 네 오른편 뺨을 치거든 왼편도 돌려 대어라. 아무에게도 악을 악으로 갚지 말고 모든 사람 앞에서 선한 일을 도모하라. 너희 원수를 사랑하며 너희를 미워하는 자를 선대하며 너희를 저주하는 자를 위하여 축복하며 너희를 모욕하는 자를 위하여 기도하라······. 그러니, 성결한 복수자. 마왕이자, 신의 아들. 이게 배우 이찬의 첫 바이블이 될 거야.’
생각 끝에 몸을 떤 박무열은, 여전히 드라마 얘기에 빠져 있는 감독들 앞에 원고지 뭉치를 건넸다.
“자. 한미모 하는 우리 감독님들께 희소식이 있다. 유럽을 돌면서 떠오른 아이디어로 초고를 완성했어. 이게 내가 배우 이찬을 통해서 보여주고 싶은 새 이야기야. 한번 보겠어?”
박무열의 각본 읽기를 즐기는 제준원이 득달같이 그 원고지를 손에 들었다.
그리고 격양된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와우. 위에 이게 제목이에요? 햐, 특이하네. 모순적인데 확 땡겨요. 흠······ 오호······ 흥미로운데? 자, 그러면 목소리 좋은 내가 낭독을 해볼게요. 귀를 기울이시라.”
그렇게 <친절한 살인자>의 초고가 모습을 드러냈다.
*
[찬아. 내일 안 바쁘면 피판 폐막식에 같이 가자.]
박무열의 목소리는 몹시 고양되어 있었다. 하지만 듣는 이찬은 무심하게 눈살을 찌푸렸다.
부천국제판타스틱영화제- 약칭 PiFan.
판타스틱이라는 수식어가 때로 오해를 사기도 하지만, 주로 호러나 고어 장르의 영화들을 위주로 개최되는 영화제다. 그렇기에 부산과 전주 둥에 비해 대중성은 한참 떨어졌다.
그러나 바로 그런 까닭에 마니아들의 발길이 끊이지 않는 행사. 영화인으로서 멀리할 건 없는 일정이었다.
다만 7월의 이찬에겐 먼 나라 이야기였다.
<연애의 조건> 후반부 시퀀스와 <고등형사> 로케이션 촬영으로 정신없는 나날을 보내던 소년은, 귀국하자마자 자신을 부천으로 불러내는 박무열에게 황당함만 느꼈다.
“감독님, 죄송한데 제가 내일 촬영이 있어서요.”
[그래? 씬이 많아?]
“그렇죠 뭐. 드라마도 그렇고 영화도 그렇고, 제가 걸리는 씬이 70% 이상이니까요.”
[흠······ 그렇구나. 드라마가 대단히 인기라고 하던데, 실감할 틈도 없었겠는걸?]
“그렇죠 뭐. 주변에서야 난리가 났다고 하는데, 촬영 진행하는 동안에는 체감할 일이 없을 것 같네요. 이거 끝난다고 해도 감독님하고 차기작 찍어야 되고······ 아, 혹시 그것 때문에 부르시는 거예요?”
[그래. 유럽 돌면서 초고 완성했거든. 그거 보여주고 직접 감상을 들어보려고 했는데, 많이 바쁘면 메일로 하고.]
예상했던 것보다 훨씬 빠른 진척이었다.
영화 각본이란 것이 길어야 200씬이니, 쓰고자 마음만 먹는다면 일주일쯤 들여서 완성할 수 있는 분량이긴 하다.
그렇지만 그 안에 제대로 이야기를 담기 위해서는 무수한 구상과 고증이 필수. 완벽주의자로 알려진 박무열이 설마 네 달 만에 초고를 집필했을 거라곤 기대치 못한 상황이었다.
“그런 거면······ 가야죠. 일정 비워볼게요.”
[그래? 그거 고맙다. 폐막식은 7시부터 시작될 텐데, 그 전에 식사도 하고 인사도 나눠야 되니까, 6시까지 오겠어?]
하루하루가 바쁜 이찬이지만, 그게 불가피한 일정은 아니다. 연기대상과 영화시상식 주연상을 따내겠다는 욕심으로 NG컷을 반복한 씬이 많은 탓이었으니.
그러면서 시도한 다양한 연기가 감독들에게 행복한 고민을 안겨주곤 했던 것이다.
그러나 빨리 끝내겠다고 마음먹고 OK컷만 노리자, 다섯 시에는 두 곳의 세트 촬영을 마무리할 수 있었다.
그렇게 소년은 염수진과 부천으로 향했다.
‘박무열 아저씨 신작이라······ 기대가 되네. 복수하지 않는 복수자라는 소재를 과연 어떻게 구체화시켰을까? 그 아저씨 작품이니 예술성은 확실하겠지만, 기왕이면 대중성도 있었으면 좋겠는데. 아니, 아니지. 이번엔 그런 것보다 순수하게 칸을 노리는 게 더 합리적일지도?’
이찬에게 있어서 예술성이란 이해하기 어려운 요소.
사랑조차 계획 속에서 이뤄져야 한다고 생각하는 그에게, 지표로 드러나지 않는 작품성은 부수적인 성과에 불과했다.
그렇기에 작품을 고를 때면 언제나 상업성을 우선해서 평가해왔다.
그렇지만 이번엔 칸에서 심사위원대상을 받은 박무열과의 작업이다. 당장 돈을 버는 것보단, 그 작품으로 세계의 인정을 받고 배우로서 명성을 높이는 게 이득일지도 몰랐다.
‘그것도 매력적인 일이긴 해. 칸에서 남우주연상을 따내고 나면, 이제는 강정후 조혁수하고 경쟁할 필요가 없게 될 테니까. 조연식, 임호준, 조동환 같은 아저씨들하고 어깨를 나란히 할 수 있어. 그렇다면······ 이번엔 그 아저씨 의견에 고분고분 따르는 게 나을지도.’
그런 생각 속에서 찾아간 중식집에는, 박무열뿐만 아니라 ‘한미모’ 의원인 신유벽 감독 역시 자리해 있었다.
“안녕하세요, 감독님. 같이 계실 줄은 몰랐어요.”
“몰랐다고? 이 나쁜 녀석. 나 오늘 상 탈 거거든? <장풍>이 흥행에는 참패했지만 마니아들한텐 호평이란 말이야.”
“아, 그래요? 축하드려요.”
“넌 그런 쪽엔 관심 없니? 전에 보니까 액션 좋던데. 같이 현대무협활극 하나 만들지 않을래?”
“다른 훌륭한 선배님들과 함께하시길 기원할게요.”
“······면전에서 까다니. 나 상처받았다.”
신유벽은 전혀 상처받지 않은 얼굴로 키득거렸다. 그리고 박무열이 조심스런 손길로 원고지를 건넸다.
그걸 3분 정도 살펴본 뒤, 이찬은 외쳤다.
“이걸 이렇게 간다고요? 이게 돼요? 아니, 이건 아닌데?”
해괴한 것을 목격한 소년의 비명이었다.
< 46장 - 작가 박무열 (1) > 끝
ⓒ 비벗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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